그해엔 물이 비천한 자를 저주했다. 여름 장마에 홍수가 났고, 거친 기세로 높은 지대의 마장 울타리를 무너뜨렸다. 말똥과 오물이 강에 섞여 흘러내렸고 민가의 식수를 오염시켰다. 그러나 초원 위의 마장은 소료 총사령관 번측륜이 군마를 기르는 땅이었으므로 아무도 책임을 묻지 못했다. 마장에서 잘 길러 나온 수컷 전마 한 마리가 임신 적령기의 여자 노예 한 명보다 비쌌다.
우물물에서 말 비린내가 났고 맛이 끔찍했다. 우물 주변에 모여든 얼굴들에 당혹한 낯색이 떠올랐다. 하루는 그냥 마셔봤지만 이틀째부터 배앓이하는 애들이 속속 늘어났다. 진신은 한 벌밖에 없는 무명옷의 다리 부분을 길게 찢어서 거름망을 만들었다. 떨어져 나간 치마 밑에 불쏘시개 같은 다리가, 믿을 수 없이 곧게 서 있었다. 갈증이 차오르는 것보다 물 걸러지는 속도는 한참 느렸지만 참을 만했다. 참는 것밖에 못 배운 인생들이 깨끗한 물을 기다렸다. 흙바닥에 비벼진 무릎은 금방 새빨개졌다.
저고리 고름을 풀어서 너덜거리는 치마 끝을 동였다. 훤히 드러난 맨다리를 본 장원 노예들이 조금씩 잘라낸 이불 귀퉁이로 속바지를 만들어주었다.
유미가 배탈이 났다. 밤새도록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가 혼절했다. 같은 방 쓰는 애들은 유미를 본척만척했다. 진신은 축축한 유미의 어깨를 몇 번 흔들어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신은 유미가 동트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 하고, 맞다가 죽는 자는 매일 늘어났다.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맞기 전에 죽어 편해지는 게 낫잖아.
산발한 머리카락이 입을 꾹 다문 진신의 표정까지 가려주었다. 병 걸려 드러누운 머리맡에 꼿꼿이 선 귀신 형상. 너무 튼튼하고 건강해서 기침 한 번 하지 않는 최고급 노예. 그런데도 항상 헐값인 건 깡말랐고 볼품없으며 웬만한 사내보다 키도 큰 데다 색기까지 없어서라고…… 두 달 전 장원으로 올 때 중개했던 놈은 포주놀음으로 돈맛 좀 봤는지 진신의 생김새에 대고 온갖 욕을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진신은 수라도에서 가장 인기 없는 상품임에 틀림없었다.
진신은 유미를 들쳐 업었다. 밖에서 문이 덜컥 열렸다. 때깔 고운 옷 차려입은 희도가 진신과 이마를 부딪힐 뻔했다. 잘 씻기까지 했는지 피부에서 꽃향기가 나고 얼굴도 반짝거렸다. 물오른 낯색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옆으로 지나가려는 진신을 희도가 잡았다.
어디 가? 통금 지났어.
…….
진신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유미는 희도가 배고프다고 울어 제낄 때 자기 몫의 밥을 양보해준 적도 있는 애였고, 희도는 생명의 은인도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는 애였다. 진신은 희도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 참 잘났다. 누가 누굴 동정해.
희도는 유미를 업은 진신을 밖으로 내몰고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관리인들이 술 마시러 간 틈에 반대편 남자 숙소로 건너갔다. 의술 아는 청년이 꽤 오랫동안 장원에서 일했다. 찬다라로는 드문 일이었다. 만날 수 있는 의원의 존재는 귀중한 것이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를 따르고 숨겨줬다. 방에 침통까지 놔주고 순서를 정해 진료를 받고는 했다. 낡은 이부자리에 반쯤 누워 있던 채 의원이 유미를 업은 진신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유미를 눕힌 진신은 숨을 몰아쉬었다.
물이 더러워서 그래.
채 의원이 진신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깨끗한 물 구해 마시면……,
어디서 구하는데.
진신은 채 의원의 말을 잘라버렸다.
의원이란 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해.
기도해, 기도.
채 의원이 유미의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생 닳는 것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못하는 진신과 다르게 채 의원은 죽음이라면 이골이 난 것 같았다.
아프면 죽어야지.
…….
너 믿는 신 있어? 아무한테나 빌어. 빨리 가게 해달라고.
사람 아닌 상품으로 거듭날 때, 이 몸에 포승줄 채워지고 굽은 허리가 펴지지 않을 때 진신은 믿었던 신이 어디에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진신은 가장 불우한 시절에 국경을 지킨 군관이었다. 양 나라가 화해하기 바로 직전 해, 누구의 것도 아닌 길목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결전에서 진신은 살아남았다. 양쪽 군은 거의 전멸했고, 더는 싸울 수 없으니 수장을 지킨 쪽이 승리했다. 화친 후에도 대국은 전쟁 포로를 돌려주지 않았다. 진신을 낳고 기른 국가도 돌려받길 원하지 않았다. 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죄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신은 기도할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진하여 사람의 언어를 잊었다. 죽거나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집에 가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건 너무 비참한 생각이었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영원한 작별로는 많이 가벼웠던 인사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 그 작은 손을 잡아볼 수만 있다면…….
유미는 동트기 전에 눈을 감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장원에 역병이 돌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장은 울타리를 수리했지만 물과 상관없는 재앙이 사람을 더욱 죽여댔다. 아픈 사람은 처리하기 힘든 쓰레기가 되었다. 개중에 두 다리를 쓸 수 있는 애들만 밖으로 내쫓고 안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진신은 채 의원과 단둘이 살아남았다. 또다시. 타 죽은 여자들이 만든 속바지를 입고서.
헤어지기 전 채 의원은 진신의 손에 작은 환 한 개를 쥐여주었다. 나중에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너 줄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채 의원이 환에 진언을 불어넣었다. 그는 별말 안 했지만, 진신은 그게 뭔지 아주 잘 알았다.
시장으로 돌아온 진신을 장부쟁이가 알아보았다. 아비규환 뚫고 걸어 나온 게 대단하다며 얼마간 허드렛일을 도울 수 있도록 봐주었다. 두꺼운 치마와 저고리도 새로 주었지만 입지 않았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소료의 겨울은 어떤 생명에게나 혹독해서, 계절을 넘기지 못하는 노예가 많았다. 얼어붙은 채 그대로 굳은 척추를 부러뜨려 펴는 게 가장 힘들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갈 때 어린 애들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열 살 언저리의 애들은 어른과 한 묶음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았다. 한 우리에 남여가 섞여 열세 명씩 지내곤 했다. 진신은 한동안 애들 데려다 물 긷는 일을 시키다가, 군관이었다는 이유로 건설에 동원되었다. 인간 떼 들끓는데 삽질 아는 년은 하나도 없다고. 깨끗하고 두꺼운 치마는 더욱 무용해졌다. 찢어진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채로 진흙을 굳혔다. 봄 분기에 온 애들 중에 “걔”가 섞였다는 걸 진신은 한참 나중에 들었다.
저녁에 나가면 정오 다 돼서 온대. 경계 밖으로 다닌다던데…….
권가權家가 청소시킨 곁방 말야. 거기서 혼자 지낸대. 다른 일 하나도 안 하고.
왜?
진신이 물었다. 계속 듣기만 하던 진신에게 시선이 쏠렸다. 퍽퍽한 주먹밥을 한입에 털어 넣은 비자婢子가 진신 옆에 바짝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겠어.
…….
높으신 분들, 미동이니까.
비자는 비밀을 마지못해 일러바치듯 속삭였다. 나 걔 한 번 봤다. 예쁜 얼굴에 발간 홍조가 떠 귀신이 인간 가죽을 걷어 쓴 것 같더라. 나도 좀만 고왔으면 이 고생 안 할 텐데. 비자가 양뺨을 감싸쥐고 몸을 웅크렸다. 따뜻한 바람이 치마 사이로 드나들었다.
노예의 마음은 한철 사랑받는 첩의 마음과 과연 다르지 않아서, 젊고 잘생겼으며 성품 좋은 주인을 곁에서 모시는 것이 꿈이었다. 어딜 가나 봄을 파는 줄은 길게 길게 이어졌다. 사는 자의 지체가 높을수록 새 몸에서 옛 냄새가 달아났다. 따뜻한 밥 먹이고 좋은 옷 입힌다면, 열두 살짜리에게 몸을 열라고 하는 요구조차 사랑일 수 있다는 말인가? 진신의 눈에 사랑과 폭력은 그저 해가 뜨고 달이 저물듯 붙어 보였다.
새벽에 권가는 진신을 깨워 더운 물을 들이게 했다. 걔가 산다는 곁방이었다. 가마솥 두 개에 모두 불을 올려서 물을 끓였다. 욕간에 통을 들여놓고 대청에 기대어 잠깐 졸았다. 권가가 보낸 새 옷을 넣으려고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깊게 잠든 정수리와 세게 잡혔는지 멍이 든 손목이 달빛에 비쳤다. 애석하게 마른 양볼과 볏짚처럼 생이 느껴지지 않는 숨도.
얘는 왜 몸을 파는데도 이 모양이지.
진신은 생각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한 계절이 더 지나는 동안 진신은 다시 곁방에 갈 일이 없었다. 비자들은 밥을 먹을 때마다 여전히 걔에 대해 떠들었다. 어디를 가고 무얼 했는지, 뭘 먹었는지 무슨 냄새가 났는지……. 그런 거라도 있어야 삶은 좀 살 만했다. 걔가 빛나 보일수록 금침을 향한 열망도 강해졌다. 베갯맡에서 형태 없는 질투가 웅성거리고 진신은 걔 얘기를 훔쳐 듣는 걸 멈추지 못했다. 유미가 동트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것처럼 진신은 걔도 어디든지 가버렸으면, 다신 만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에 열린 큰 장에서 걔는 팔려버렸다. 근처 어딘가에 진신이 명패를 걸고 놓여 있었지만 눈매가 더럽다는 욕만 먹었다. 진신은 문득 걔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자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준 얼굴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으로 거기 있었다.
“야.”
진신이 다소 급하게 걔를 불렀다. 셈이 끝나면 그대로 주인과 함께 떠날 테니까. 목에 걸린 명패가 가슴 근처에서 흔들렸다. 걔가 진신을 돌아보았다. 열두 살의 작고 마른 몸은 땅을 딛고 바로 서기에 한참 부족해 보였다. 아무도 이쪽을 보지 않는 틈에 걔 소매 밑에 채 의원의 환을 밀어 넣었다.
“……너 다신 오지 마.”
누가 누굴 동정해. 희도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사실은 배진신의 인생이 한참 더 비참하고, 잊혀졌고, 더는 이 삶을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지도. 걔가 열두 살만 아니었어도 진신은 언젠간 마음을 바꿔 먹었을 것이다. 남 대신 나를 동정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귀 기울이지 않는 일. 독하게 넝마를 걸치는 일. 몸은 지옥이어도 마음만은 극락으로 간다. 자의로 죽을 권리는 진신보단 걔가 갖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따가운 바람이 심하게 불어 찢어진 치마가 허벅지에 휘감겼다.
“아무한테나 빌든지 해. 믿는 신 있어?”
진신은 걔 손목을 놔버렸다. 깨끗한 비단에 시장 흙이 묻었다.
내년에는 이 치마를 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