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8)-진압군의 반격 : 순천, 구례, 곡성탈환작전(제 1국면)
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
책이름 : 해방전후사의 인식
펴낸곳 : ㈜도서출판 한길사
펴낸날 : 개정 제7판 발행 - 1990년3월5일
글쓴이 : 황남준(고려대 석사 마침, 정치학)
글순서
1부 : 국방경비대 창설과 군인과 경찰의 관계
2부 : 두 개의 분단국가 형성에 따른 남로당 조직의 한계
3부 : 물가상승,실업난,식량문제 등 민생고에 직면한 남한경제
4부 : 1946년 '가을항쟁' 과 전남 동부지방 상황
5부 : 전남 동부지방의 '2.7구국투쟁' 낮은 참여
6부 : 여순사건 발발 직전의 전남동부지방 정치적 상황
7부 : 여순사건의 발생과 확산 과정
8부 : 진압군의 반격 : 순천, 구례, 곡성 탈환작전(제 1국면)
9부 : 미군의 지원으로 8일만에 진압된 여순사건
10부 : 폭동군의 선전, 선동과 색출 그리고 즉결처분
11부 : 폭동군 치하의 날자별 여수 상황
12부 : 구호와 주장 측면에서 본 여순사건의 특성
13부 : 탈환후 국가통제 강화 및 우익단체 강화
14부 : '여순사건'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반공국가' 체제 확립
8부 : 진압군의 반격 : 순천, 구례, 곡성 탈환작전(제 1국면)
(2) 사건의 진압
① 순천탈환작전(제 1국면)
▷ 20일 이른 아침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여순사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 국방장관 이범석,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수명의 미군사고문관 및 한국인 장교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 작전지도부를 광주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20일 군수뇌부는 참모총장 채병덕 준장, 육본작전참모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이 비행기로 광주에 도착하여 현지시찰 및 임시조치를 취하고,
백선엽 중령을 제외하고는 전반적 군사상황 및 진압작전 준비를 위해
같은 날 다시 귀경했다.
- 육군총사령부는 다음날 10월 21일 '반군토벌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동사령부를 21일 오후 광주에 파견했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원래의 진압작전 개념은 광주, 남원, 하동을 포위하여 사건의 확산을 방지하고
폭동군을 여수반도로 압축함으로써 산악지대인 동북방으로의 도피, 침입을 차단하고
해안으로 압박하여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20일 저녁과 21일 오전의 상황은 극히 불안했다.
즉 남원 방면에서만 20일 19시 45분경 제 3연대 1개대대가 약 1천여 명의 폭동군과
남원 남쪽에서 조우하여
21일 05시 30분경 순천 방면으로 후퇴시키기는 했으나 그나마 진압작전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 보성 방면에서는 20일 광주에서 파견된 제 4연대 2개 중대 병력이
보성 4킬로미터 지점에서 폭동군의 매복기습을 받아 서쪽 포위망이 무너졌으며,
광양 방면에서도 20일 밤 하동에 도착한 제 15연대 1개 대대가 21일 아침
광양 동쪽 8킬로미터 지점 옥곡면에서 폭동군의 매복기습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제 1중대장 조시형 소위가 반군에게 포로가 됨으로써
동쪽의 포위망도 무너지고 있었다.
- 즉 21일 오후 '반군토벌사령부'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진압군 내부에서는 작전지휘체계 및 통신의 불비, 지휘능력과 전투능력의 미숙,
인접부대와의 협동이 부조(不調)한 상황과 더불어
일종의 병력붕괴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진압작전 개념과 더불어 순천과 여수에 대한 '종대형돌입 작전 개념'을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 작전 개념을 수립 수행하는 데 있어서 미군사고문관의 조언은 결정적이었다.
표8 : 여순사건 발발시 병력현황 및 출동상황표
표8 : 여순사건 발발시 병력현황 및 출동상황표 |
여단 | 연 대 | 상황(대대수는 출동가능 병력) | 출 동 병 력 |
제1여단 (수색) | 제1연대(석촌) | 서울 경비(대북경계) | |
제2연대(수원) | 48.5.1편성, ∼ 7.24제주도 공비토벌 (대북경계) | |
제13연대(온양) | 48.5.4 편성완료(대북경계) | |
제2여단 (대전) | 제2연대(대전) | (2개대대) | 1개대대 |
제12연대(군산) | 48.10.1 편성완료(2개대대) | 2개대대 |
제3여단 (부산) | 제5연대(부산) | 1개대대를 제주도에 파견중(1개대대) | 1개대대(24일 이후) |
제6연대(대구) | 1개대대를 제주도에 파견중(1개대대) | 1개대대 |
제15연대(마산) | 48.5.4 편성완료(1개대대) | 1개대대 |
제4여단 (청주) | 제7연대(청주) | (대북경계) | |
제8연대(춘천) | (대북경계) | |
제10연대(강릉) | 48.6.1 편성완료(대북경계) | |
제5여단 (광주) | 제3연대(전주) | (3개대대) | |
제4연대(광주) | (3개대대) | |
제9연대(제주도) | 제주도에서 토벌작전중 | |
제14연대(여수) | 반란 | |
기갑연대 (김포) | M-8형장갑차27량 | | 주력 |
항공대 (김포) | L-4형연락기 16기 | | 10기 |
** 자료 : 사사키, '한국전비사' 제 1권(병학사, 1977), pp. 330∼31. |
- 이에 따라 표 8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총 10개 대대 병력, 장갑차부대, 항공대를
광주, 남원, 하동에 집결시켜 동일 18시경 반군을 포위 완료하는 한편,
한국인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고문관들에 의해 재편된
제4연대 1개 대대 병력이 순천점령을 위한 요충지인 학구에서
21일 자정 무렵 폭동군과 조우함으로써 진압작전은 일단 실마리를 잡는데 성공하였다.
- 그러나 쌍방간의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왜냐하면 진압군과 폭동군 양쪽에는 몇 개월 전까지 같은 전우였던 병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2일 오전까 초기진압작전은 큰 성과가 없었으며 오히려 병력붕괴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2일 여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순천탈환공격은 군산에서 출동한 제 12연대 2개 대대(백인엽 소령 지휘)가
학구에서 폭동군과 대치하고 있던 제 4연대를 지원하여
폭동군을 순천읍내로 격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순천은 약 2개 대대의 폭동군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진압군과 약 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순천을 지키고 있었다.
- 날이 어두워지자 진압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순천 북방입구를 점령한 채
폭동군과 200내지 300 미터 사이를 두고 대치했다.
이러한 대치상태에서도 폭동군은 진압군에 선전 혹은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진압군 내부의 붕괴를 유도하고 있었으나 진압군은 동요가 없었다.
- 이튿날 새벽까지 제 2연대 1개 대대, 제 4연대 1개 대대, 장갑차부대, 경찰부대로 증강된
진압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이른바 '인민군사령부'로 되어 있던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오전 7시 미군으로부터 새로 지급된 81mm 박격포 사격, L-4정찰기의 공중지원하에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 진압군의 총공격으로 폭동군 주력(김지희 등의 반군지휘관, 순천의 주요 좌익간부)은
광양방면 혹은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했으며,
읍내에는 총으로 무장한 '치안대' '민애청원'(민주애국청년동맹원), 학생들이
치열한 시가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오전 11시 진압군은 순천시가를 탈환하고 오후에 시가소탕전을 완료했다.
- 한편 구례와 곡성도 제 3연대 1개 대대가 순천탈환전에 합류하는 과정에서
22일 오전 11시경과 15시경 각각 탈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