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오정 일원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인 문효공 최치덕(文孝公 崔致德, 1699~1770)의 유적지로 종오정, 귀산서사(龜山書社), 일성재(日省齋), 연당(蓮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오정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위에서 보면 지붕 평면이 工자가 되는 것이 특이하다. 연당에는 종오정을 중심으로 앞쪽 양 옆에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통정원으로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최치덕은 평생을 후배 양성에 힘썼으며, 7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학문 연구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역대시도통인』, 『심경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문효공이 1745년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려고 일성재를 짓고 머무를 때, 그에게 학문을 배우려고 따라온 제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귀산서사(1746)와 종오정(1747)이 함께 지어졌다. 죽은지 3년 후에 이러한 업적이 조정에 알려져 호조참판 벼슬에 봉해졌다. 양동의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과 중리의 송국재(松菊齋) 이순상(李舜相,1659~1729)의 문하에서 사상과 학문을 전수받았고 양동출신의 문인 이범중·손승구·이헌유·이정중 그리고 최제한·남용만·경주부윤 홍양호 등과 두터운 교분이 있었다. 특히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1760년(영조36) 7월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고 어느 해에 종오정을 찾아 「종오정기」와 편액을 써 주고 함께 시를 짓고 차를 마시며 교유하였고 「화이계홍명부양호반구대운(和耳溪洪明府良浩盤龜臺韻)」,「화홍명부성문수리운(和洪明府城門修理韻)」등 시가 남아 있다.
정자 이름은 논어의 '종오소호(從吾所好)'에서 나왔다.
논어 술이편 11장
論語 述而篇 十一章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如不可求, 從吾所好.”
공자 말씀하시길, "부자되는 길이 도모할만한 것이라면, 비록 채찍으로 임금님 길터주는 일이라도 마다않겠지만, 도모할 바가 못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최치덕은 정자이름을 '종오정'으로 한 연유를 밝히기를, '오직 좋아하는 것을 따름일세. 물에 닿으면 낚시질하고 산에 오르면 고사리 캐며 버들에 물어보고 꽃찾아 음풍농월한다네.'라고 하였다. 정자에는 3개의 현판이 있다. 정면 처마 아래에는 종오정, 안쪽의 동쪽 방에는 무송와(撫松窩), 서쪽방에는 지간헌(持竿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무송와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무송와명'에서 '칠순 몇인가. 남은 날이 많지 않네. 말하려니 할 말이 없어 모두 찬양하고 감탄하노라'라고 적고 있다. '지간헌'은 '낚시대 들고 다니는 집'이란 뜻인데, 그는 '지간헌명'에서 '낚시대 드리운다고 반드시 고기 낚는 것은 아니니, 부지런히 때마다 먼 조상 추모함이라! 아! 아이들아 내 오묘한 뜻 체험했으니 황천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무 부끄러울 것 없으리라'라고 그 뜻을 밝히고 있다.
최치덕은 '지정(池亭)'에서 연당과 종오정의 풍경을 읊었다.
못 위에 우뚝 선 종오정, 손님을 맞아 함께 오르네.
有亭池上起 邀客共登臨
난간에 기대어 보니 일렁이는 물결, 창문을 여니 찬 기운이 스며드네.
憑檻波紋細 開牕冷氣侵
소나무, 매화가 좌우에 울창하고, 물고기, 새들은 희롱하듯 오르락 내리락하네.
松梅森左右 魚鳥戱飛沈
즐겨 글 논하며 밤을 새다가 맑게 갠 달 은근히 찾게 된다네.
最愛論文夜 慇懃霽月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