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앤드류 워맥 목사님 저서 One year with Jesus in the Gospels, yearly devotional의 일부입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복사할 순 없으나 스크랩 할 수 있고 이 페이지의 주소를 복사하여 공유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번역해 올린 순서는 출판되어 나온 도서와 순서가 같고 앤드류 워맥 미니스트리 홈페이지의 큐티 페이지(여기 클릭)에서는 무료로 보실 수 있으나 날짜가 조금씩 다릅니다.]
(눅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보통 "복음전하는 자"라고 하면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려는 열정을 가진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라면 모두가 영혼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합니다. 복음을 제시할 때도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있는 실제적인 기록을 전해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했다는 궁극적인 증거를 함께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한 간증은 그리스도를 교리가 아닌 실제로 나태 내 줍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친밀하게 경험하였고 그로인해 그들의 삶은 송두리째 변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후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누리는 현대 기술이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비결입니다(엡3:19). 그러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증인이 됩니다(요13:35).
오늘날 교회는 전도의 방법과 영적전쟁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권할 때 죄책감을 건드리거나 전도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전도는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자기가 믿는 것을 강요하는 이단보다도 열매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했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세상에 훨씬 더 위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한 부흥은 성도들 개개인이 누리는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부흥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주님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각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남에게 전하기 전에 내가 먼저 경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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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새롭게 하기 - 반재경
건강해지는 방법을 모르면 건강을 해치는 것들을 하나 둘씩 버리는 것이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적 지식에 가까이 가려면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것들을 멀리하면 된다고 며칠 전 여기서 나눴는데 기억나시지요? 제가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나의 부르심이 아닌 것을 제거해 나가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내가 꼭 해야 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 때문에 내가 꼭 해야 될 일에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내 사명이 아닌데 그 일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내 사명에서는 멀어져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부르심을 온전히 성취한다면 조금의 과장도 없이 정말로, 진짜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세력은 온 힘을 다해 우리로 하여금 부르심을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워맥 목사님도 사역을 시작하고 31년이 지나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그 일에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부르심을 발견하여 성취하려면 정말로 그것을 원하고 계속적으로 추구해야만 합니다. 귀한 것은 쉽게 발견하지 못하니까요.
저는 저자 직강으로 배웠기 때문에 부르심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에 도착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잘 했다,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는 것 외에 뭐가 더 의미 있을까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대통령이 된 들 지옥에 떨어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 땅에서 제일 큰 교회를 지었다한들 그것이 자기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주님 앞에서는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비본질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보니, 본질을 얘기하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집니다. “사람들 다 그런데 왜 너만 다르냐?” 이것의 뿌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인데 황당한 것은 그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이 엄청난 능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비 성경적이고 잘못된 이 사고방식은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아서 실제로 자신이 성경 말씀의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지요.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워맥 목사님이 언급하셨듯이, 오늘날 교회의 전도전략은 어떻습니까? 일 년에 한번 전도 대회가 있을 때 마다 그 전에 웜업(warm up) 기간을 가집니다. 성도들을 전도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여러 강사들도 부르고 간증도 시키고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이고 한편 죄책감도 느낍니다. 나중에 데리고 온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데리고 옵니다. 그 누군가는 다른 교회 성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은 지어낸 얘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도대회 다음 주에는 교회 참석자 수가 평소 때 보다 더 줄어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제 마음 깊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성령님을 모신 성도라면 모두 한번쯤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 믿습니다. 그 음성에 얼마나 민감했는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제 마음은 심히 불편했습니다. 물론 전도대회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득이 있고 다른 교회도 다 하니까 무조건 해야 하는 걸까요? ‘이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기준은 온전히 성경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일 년에 한번 씩 오는 그 전도대회가 기다려지십니까? 만약 대답이 '네!'라면 왜 일 년에 한번만 합니까? 매일 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이러한 비본질적인 행사가 왜 이리도 많은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답은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아갈 원동력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동력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니 자꾸 외부로부터 뭔가 압력을 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나마 이것도 코로나 때문에 정지가 됐는데 삶이 아니라 행사였기 때문에 정부가 막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식당이 음식은 맛도 없으면서 손님들에게 홍보 좀 해 달라고 온갖 방법을 써서 부탁한다 해도 홍보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안 갈건데, 누굴 보고 가라고 하겠습니까? 부탁하는 주인이나 그 얘길 듣는 손님이나 서로 지치겠지요. 하지만 맛있는 식당은 홍보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는 손님을 귀찮아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오니까요. 이런 뻔한 이치가 왜 신앙생활에서는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개개인의 성도가 경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위에서 부르심을 이행하는 것이 본질이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듯이, 본질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타락했고 인간은 죄성, 성도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본질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쉽고 본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연어가 물살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야 하는, 육신을 거슬러 영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본질을 찾기 위해 비본질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고 있습니다. 나의 부르심이 아닌 것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본질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계속 먹으면서 동시에 내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 보다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가다 보면 결국 몸에 좋은 음식만 먹고 있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전도사라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해야지, 당신은 뭐가 특별해서 다른 사람들 다 하는 걸 안 합니까?" 하지만 ‘전도사는 이래야 한다, 목사는 저래야 한다’는 그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했단 말입니까? 제가 알기론 주님이 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결국 다 '사람들'이 정한 건데 도대체 그 '사람들'은 또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인지 알 수 없단 말이지요. 사역자인 저 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들 각자도 이와 같이 적용해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본질에 도달하려는 노력인데 성도에게 그 본질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이며 그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셔서 내가 움직이는 그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나도 그 안에서 죽었는데 그 죽은 나의 옛 자아, 즉 육신이 펄펄 살아서 세상의 생각, 그 ‘사람들’의 생각에 좌지우지 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랑을 깨닫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본질적이시고 본질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겠지요.
비본질을 따라 살면 당장 뭔가 되는 듯 보입니다. 본질을 따르기로 선택하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가 땅속에 심긴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싹을 내듯이 본질을 따르다 보면 어느 정도의 암흑기(육신이 죽는 기간)를 거쳐 밝은 세상이 반드시 옵니다.
이제 6개월이 남은 2021년, 우리 삶의 본질적 터닝 포인트가 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비본질을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가다 보면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그 상태, 주님의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그 상태에 우리 모두 도달합시다. 본질을 향한 이러한 부흥이 여러분과 저로 인해 이 땅에, 한국 교회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