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선배의 결혼이야기
어느 춥고 바람 불던 날 작은어머니가 하성 큰고모님과 몇 번 만나고 꾸물꾸물 대더니 하성 고모네 동네 사는 처녀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진도가 있으니 선배에게 선배 작은어머니가 선배에게 설명한다. “지금 우리 집안을 살리려면 네가 장가를 가야 한다. 그래야 집안이 바로 서고, 동생들도 돌볼 수 있다. 그러니 집안 살림 꾸릴 사람을 빨리 맞아야 한다” 하였다. 선배 생각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겨울철 어느 날 집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잠깐 쉬고 있는데, 낯모르는 아주머니 3~4명이 찾아왔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 집 안팎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더니 선배에게 몇 마디 말도 물어본다. 학교 나온 것과 동창들에 대해 물었다. 선배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여자 측에서 선배 집을 보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선배 작은어머님과 하 성으로 선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다. 선배는 신사복이 없었다.
그래서 춘재 양복을 빌려 입고 하성을 갔다.
어느 집에 도착하여 그 집 아주머니와 셋이서 아주 작고 초라한 초가집으로 갔다.
방안의 대들보가 선배가 일어서면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오막살이 같은 작은 집이었다.
여자는 앉아서 볼 때는 그저 그랬는데, 점심을 먹고 하성면 소재지로 사진을 찍으 러 간다고 나 올 때 보니 키가 정말 작았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사람도 있나 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을 찾아야 겠구나 하고, 사진도 안 찍으려고 자꾸 핑계를 대는 데도 주의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내몰아서 그 찍기 싫은 사진을 결국은 찍고야 말았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선배 모습이, 선배 모양이 아주 고약해 보인다.
그것은 마음이 잔뜩 꼬여서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이 그렇게 나온 것 같다.
사진을 찍고 온 후 선배가 너무 섭섭하게 행동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동생과 한 반인 처남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더니 곧 답장이 왔다.
그렇게 한 두 달 편지로 왕래하여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고, 양곡에서 만나 짜장면을 같이 먹을 정도가 됐다. 얼마나 날짜가 지났을까, 약혼 이야기가 오갔다.
못 이기는 척하고 수긍을 했다. 서울 선배 고모부 동생에게 부탁해서 청계천 최고급 양복지로 양복 두 벌과 코트까지 맞춰 입었다. 약혼식을 간략하게 했다. 1969년 4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양곡에 하나밖에 없는 시발택시를 대절해서 함진아비는 해련 형님이, 들러리는 재식, 형식, 춘재가 대표는 선배 당숙이 갔다.
결혼식을 구식으로 치렀다. 처가 옆집은 큰집이다. 그 작은 사랑방에 신방을 차렸다.
그곳에서 양복 위에 혼례복을 입고 사모관대를 하고, 밖을 내다보니 수십 명이 모여서 재 꾸러미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놈은 삼태기로 재를 가득 담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놈들도 있었다. 사랑방 문에서 처가 마당 병풍까지는 약 30미터, 그 앞에 커다란 짚가리가 있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해련 형님이 이쪽으로 가자 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막 뛰어갔다. 그러자 집 가리 위에 있던 놈이 삼태기에 재를 한 가득 담아 선배 머리 위로 쏟는 바람에 선배는 재를 흠뻑 뒤집어썼다. 머리, 눈, 코, 입, 목덜미, 뱃속까지 재투성이가 됐다. 선배는 약이 올라 근처 애 어떤 놈이든 얼씬거리면 휙 뿌리치곤 했더니 해련이 형님이 “야 신랑은 그러면 한 되는 거야, 가만히 있어 그러나 선배는 ”이놈의 새끼하면서 욕을 했다.
천막 아래 평풍 앞에 상견례와 절차에 의한 결혼식을 올리고 대청마루로 올라갔다. 마루는 약간 컴컴했다. 절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관복 두르마리가 자락을 발로 밟는 놈이 있어 절을 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선배가 개지랄하니 해련 형님이 “야 신랑 이 그러면 안되는 거야 가만히 있어한다. 선배는 약이 올라 씩씩거리며 행사가 진행되는 데 갑자기 어떤 놈이 선배 얼굴과 와이셔츠에 새까만 검댕을 발랐다. 이 검댕은 가마솥 밑의 검댕이다 발동기 폐유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고약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재꾸러미를 맞아 약이 올라있는데 또 검댕 이를 발랐으니, 선배는 더욱 약이 올라 있는데 해련 형님은 자꾸만 ”신랑은 그러는 것아냐 가만히 있어 만 되풀이 하였다.
하도 약이 올라 씩씩대고 있으니 재식과 형식이가 끼어들어 그놈들을 자제 시켰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이 마침 휴일이라 하성면 소재기에 있던 영외 거주 해병 대 중. 상사들이 잠깐 밖에 나와다가 결혼식에 참석하여 짓궂은 장난을 심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얼굴을 얼마나 어렵게 닦았던지 잊히지 안는다고 한다.
대례청에서 나와 구두를 신으려고 했더니 이번엔 구두 앞 축에다 밤송이 가시를 꽉꽉 채워서 그곳에 발도 찔리고 가시 꺼내느라 고생 좀 했다고 한다. 대례청에서 결혼식 장면을 처남 카메라 로 사진 몇 장 찍고 결혼식을 끝낸 후 색시를 데리고 대곳면 거물대리로 왔다.
희수네 집 뒤에서 차를 내려 보리밭으로 해서 왔다. 집에 오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울 친구들과 학교 친구들, 매수리 친구들 동네 친구들 모두 모여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결혼하고 얼마 후 들은 이야기지만, 결혼 비용이 없어서 선배 고모님들이 쌀 한 가마니씩을 지원하고, 선배 작은아버지와 큰 당숙이 얼마를 보태서 결혼 예물과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고 했다.
결혼식 다음 날 선배 밭에 감자를 심었다. 앞 밭에 보리를 심었는데 아래쪽으로 는 개풀이 너무 많아, 보리는 얼마 없고 온통 풀밭이었다. 그렇게 결혼하고 봄 농사 준비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