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背信者의 末路
-1
통천마군 흑고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나 흑고가 장담하건대 만약 노부에게 이곳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고르라면 노부는 서슴지 않고 무대협을 꼽겠
소!"
그 말에 군웅들은 경악했다. 일대의 마군인 흑고까지 동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흑고는 두 눈에 흉광을 뿜어내며 쌍장을 거칠게
부볐다.
"만약 누구든지 저 해약을 들지 않는 놈이 있다면 이 쌍장으로 대
갈통을 부숴 놓겠다!"
그 말에 악진원이 노성을 발했다.
"흑고! 말이 너무 지나치다."
이어 그는 두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누가 뭐라해도 노부는 저런 해약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뭐라고?"
흑고의 얼굴에 흉칙한 살기가 덮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섬마검 악
진원을 덮쳐갈 기세를 보였고 악진원도 허리에 두른 연검의 손잡
이를 잡았다.
사도군웅들의 군사 역할을 해왔던 지무성 석검영이 탄식하며 나섰
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사람을 너무 믿는 것 같습니다. 소생이
비록 무림말학이오나 이번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그의 말은 반응이 컸다. 그는 지난 구 일 동안 사도군웅들의 행동
을 좌지우지해 왔으므로 사도 쪽에서는 자연히 그를 신뢰하는 마
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한 마디 말로 인해 무영종에게 기울
던 사도군웅의 마음은 다시 의심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장내의 군웅들은 또 한 번 아연실색했다.
"흐흐흐... 석검영, 네 놈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이
냐?"
음산무비한 말이 대전을 울렸다. 순간 석검영을 위시하여 정사군
웅들은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놀라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나타난 십여 명, 그들은 바로 이제껏 죽었다고 알려
진 위인들이 아닌가?
백독마군 음무위로부터 자전신도 팽수위, 그리고 무적권(無敵拳)
왕상 등.......
한결같이 군웅들이 친히 그 시체를 목격했던 자들로써 그들 중에
는 천황십독도 끼어 있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섬마검 악진원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지무성 석검영도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철탑유신 구유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는 팽수위가 음침하게 외쳤다.
"악진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노부를 보니 가슴이 떨리기라도 하
느냐?"
"으으으......."
악진원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는 연검으
로 팽수위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고 반격해오는 팽수위의 목을 날
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백독마군 음무위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석검영, 애송이 놈! 네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네 놈이 죽인 음무위는
내가 아니다. 노부는 이미 모든 것을 예측했었다."
"이, 이럴 수가! 거, 거짓이다. 이건......."
석검영은 뒤로 물러나며 이마에서 식은 땀을 흘렸고 무적권 왕상
은 노성을 질렀다.
"구환비객 환도! 네 놈의 아홉 개 비환(飛環)은 노부를 죽인 것이
아니다. 네가 죽인 자는 가짜였다!"
"으으......."
구환비객 환도도 공포에 질려 비틀거렸다. 다시 또 이번에는 음침
한 인상의 흑의노인이 철탑유신 구유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흐흐흐... 구유명! 너의 철탑파황공(鐵塔破荒功)에 죽은 자도 역
시 내가 아니었다."
구유명은 거구를 떨었다.
"그... 그럴 리가......."
군웅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 대경하여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으며 호불범도 따라 일어섰다.
호불범은 무섭도록 차분한 안색으로 침착하고 낭랑하게 말했다.
"악 노선배. 당신은 크나큰 실수를 했소이다. 어떻게 당신의 음모
가 드러났는지 아시오?"
섬마검 악진원은 충혈된 눈으로 의혹에 빠진 채 그를 노려보았고
호불범은 냉정하게 말했다.
"악 노선배, 살인을 하면서 이 푼 오 리의 작은 상처밖에 내지 않
는 검법은 오직 천하에서 악가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拾貳流)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악진원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으며 호불범은 여전히 싸늘하
게 말을 이었다.
"이미 소생은 모든 배신자들을 파악했소이다. 그동안 그들을 밝히
지 않은 것은 더 큰 분열을 초래할까 두려워서였으나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소이다."
호불범은 악진원, 환도, 석검영, 구유명 등을 둘러보다가 다시 냉
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소생의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에 걸려든 것이
오."
호불범은 이번에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생은 필히 수라궁주가 군웅들을 음모로 죽일 것을 예상했기 때
문에 몇몇 중요인물들을 가짜로 대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
위에 고수를 배치시켜 감시케 했습니다."
"으으......."
악진원의 안색은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 버렸고 석검영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석검영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천하에서 나 지무성의 머리를 따라올 자는 없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오늘에야 그것이 틀렸음을 알았다. 완전히 당하고
말았다. 하하핫......."
군웅들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석검영의 말은 곧 스스로의
음모를 시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창보의 보주 자면신창 소중산이 그를 향해 노호성을 터뜨렸다.
"석검영, 이 놈! 지하에 있는 석대선생(石大先生)이 너의 모습을
보면 통탄하실 것이다. 조부는 수라궁에 의해 죽었는데 그 손자가
수라궁의 주구가 되다니, 네 놈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그 말에 군웅들까지도 한결같이 분노를 일으켰으나 정작 석검영은
냉소를 치고 있었다.
"흥! 사람에겐 각자 뜻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누구도 상관할 바 아니다."
"비, 비열한 놈!"
섬마검 악진원이 문득 외쳤다.
"동도들, 모두 탈출하라!"
그의 허리로부터 연검이 번개를 그렸다.
"으아악!"
그의 가까운 곳에 있던 이인(二人)의 허리가 창졸지간에 두 동강
이 났다.
"앗! 저런!"
군웅들은 대경했으며 삽시간에 장내는 수라장이 되었다.
그 사이로 악진원이 허공을 몸을 솟구치고 있었고, 그것을 본 팽
가 가주 팽천후가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악진원! 네 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팽천후의 신형이 비쾌하게 날며 무서운 도광이 뻗었다.
츠츠츳!
도광이 악진원을 세로로 양단시킬 듯 덮쳤으나 그는 눈 하나 깜박
이지 않았다.
"팽천후, 비켜라!"
번쩍!
도광과 검광이 우박처럼 쏟아지며 부딪쳤고 두 사람은 즉각 떨어
졌다. 그러나 팽천후도 악진원도 모두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팽천후가 다시 이를 갈았다.
"악가야! 너같은 잡배를 친우로 여긴 내가 부끄럽다!"
위--- 잉!
파츠츠츳.......
가공할 팽가의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 전개되었고 악진원은 삽
시에 그의 도세에 휩쓸렸다.
장내는 완전히 혈전의 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구환비객 환도,
석검영, 구유명 등과 또다른 배신자 등 십여 명이 대전을 탈출하
기 위해 군웅들과 불꽃 튀는 혈전을 벌인 것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모두 놀라왔으며 군웅들에게로 칼을 돌린 자들의
신분은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호불범이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여러분, 모두 물러나십시오."
그의 말은 이제 정사군웅들에게 완전한 믿음을 주었다. 군웅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되자 자연
히 배신자들 십여 명 만이 중앙에 남게 되었다.
호불범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추측이 맞았군. 섬마검 악진원, 구환비객 환도,
지무성 석검영, 철탑유신 구유명, 그리고 마장(魔掌) 유진광, 동
해쾌수(東海快手) 전성, 초혼신(招魂神) 두문강, 흑패왕(黑覇王)
거문, 엽살귀(葉殺鬼) 노반구, 신탄마도(神彈魔刀) 구운
환......."
그가 차례로 부르는 이름은 대전의 중앙에 몰려있는 열 명의 명호
였다.
모두가 쟁쟁한 정사의 호걸들로써 그들을 둘러싼 정사군웅들은 실
로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저럴 수가...... 저 자들이 배신자라니......."
군웅들은 배신자들에 대한 분노로 온통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
다. 그러나 호불범은 군웅들을 둘러보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한 명이 더 있소."
군웅들은 흠칫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호불범의 음성이
갑자기 한층 더 싸늘하게 변했다.
"철검수사 초일비(草一飛)! 사매를 강간하고도 양심에 거리끼는
바가 없단 말이냐?"
②
군웅들은 대경하여 한 곳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철검수사 초일
비가 누구인가?
그는 당금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수라궁 대전에 사매인 비운선자와
함께 나란히 화산파 대표로 참가했다. 그런데 그가 사매를 간살
(姦殺)하고 사문을 배신했다니! 그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
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초일비에게 집중되자 그는 안색이 백지장
처럼 창백해지며 뒤로 연달아 물러났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내가 사매를 간살하다니!"
호불범은 냉랭하게 일갈했다.
"이것을 보고도 시치미를 떼는가?"
그는 품속에서 찢어진 옷자락을 꺼냈다.
"비운선자의 손에는 이 천조각이 꽉 쥐어져 있었다. 너의 그 청삼
의 좌측 귀퉁이를 봐라!"
"헉!"
철검수사 초일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급히 옷자락을 살
펴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져 부르르 떨었다.
"천하의 죽일 놈! 너같은 놈을 가장 증오하는 게 나다!"
구주진천도 조천명의 오백 근짜리 도(刀)가 번쩍 빛을 발하며 그
를 향해 날아갔다. 초일비는 혼비백산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철
검을 뽑아 막았다.
카캉!
불꽃이 튀었다. 조천명의 도는 그의 검에 가로 막혔다. 그러나 어
찌 알았으랴? 오백 근짜리 도의 위력은 실로 가공한 것이었다.
"크아악!"
그의 철검은 도에 부딪치는 순간 두 동강이 나버렸다. 동시에 그
의 몸이 머리에서부터 가랑이까지 그대로 갈라졌다. 실로 처참무
비하게 죽은 것이었다.
단칼에 화산파의 장문인을 해치운 조천명의 도법은 장내의 군웅들
로 하여금 간담이 써늘하게 만들었다. 과연 누가 구파일방의 일문
지존을 단칼에 양분시킬 수 있단 말인가?
'과, 과연 천군맹의 맹주답다!'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한편 이
광경에 중앙에 몰려 있는 열 명의 배신자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처단해라!"
드디어 혈의마검 공손패가 음침하게 외쳤다.
슈슈---- 슉!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전 사방에서 궁을 겨누고 있던 혈의삼
십육궁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고 우박같은 혈영전이 십 인을 향해
쏘아졌다.
"앗!"
그들 십 인은 대경하며 검장권을 휘둘러 우박같이 쏟아지는 연환
마궁을 막았다. 실상 그들 모두가 공히 절정고수들이었으므로 화
살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앙천광소가 터졌다.
"크핫핫핫...! 이 비열한 무리들, 나 구양경의 철마궁이 어떤 것
인지 보여주마!"
위--- 잉!
허공을 찢는 파공성이 울렸다.
"으악!"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한
대의 거대한 화살이 한꺼번에 두 명의 가슴을 통째로 꿰어 버린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화살에 산적처럼 꿰인 채 그대로 날아
가 벽에 부딪쳤는데 놀랍게도 그 벽마저 뚫고 날아가고 말았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 대의 화살에 어떻게 그토록 엄
청난 힘이 들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화살에 꿰어 날아간 자는 마장 유진광과 초혼신 두문강이었고 거
대한 철궁을 들고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황하칠십이채의 총표파
자인 사해신군 구양경이었다.
그는 철궁을 흔들며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악진원! 한 번 쏘면 황하마저도 흐름을 멈춘다는 이 천마궁의 맛
을 네 놈에게도 보여주마!"
악진원은 이미 팽천후와 떨어져 있었다.
펑!
다시 철마궁이 떨쳐지자 허공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시커먼 빛이
그를 향해 뻗었다.
악진원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악가의 가주로
초절정고수였다. 그가 몸을 빙글 돌린 순간, 연검은 찰나지간 십
팔검을 번뜩였다.
쩡!
금속음을 울리며 그의 검은 철마전을 차단했다. 그러나 악진원은
손아귀가 찢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주춤했다.
"으윽!"
게다가 그의 어깨로부터 살덩이가 뭉텅 날아갔다. 철마전은 검에
부딪히고도 튕겨나지 않고 비스듬히 날아 그의 어깨를 뜯어낸 것
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크악!"
비껴나간 철마전은 옆에 서 있던 엽살귀 노반구의 머리통을 꿰어
날려 버렸으니 실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군웅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으며 악진
원도 가슴이 떨리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팽천후가 다
시 두 눈에 흉광을 발산하며 덤벼들었다.
"악진원, 죽어랏!"
츳츳--- 츠츠츳!
가공할 도기가 휩쓸어 오자 악진원은 피가 철철 쏟아지는 어깨
미처 지혈시키지도 못한 채 연검을 휘둘러 대응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다른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구환비객 환도가 어느
틈엔가 조천명의 거대한 진천마도에 의해 허리가 두동강이 나버린
것이었다.
이 광경에 철탑유신 구유명은 퉁방울같은 눈이 훽 뒤집히며 무쇠
같은 양 손을 무섭게 사방으로 떨쳤다.
펑! 퍼엉!
"으윽!"
그의 장력은 무림에서 가장 패도적 외문기공인 철탑파황공(鐵塔破
荒功)으로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삽시에 오륙 인의 고수가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는가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의 공세는 오래
가지 않았다.
파파팍!
혈의삼십육궁의 연마환궁이 일제히 우박처럼 퍼부어졌고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것은 모조리 구유명의 몸에 박혀 버렸다.
"크윽!"
철탑유신 구유명은 고슴도치가 된 채 비명을 발했다. 그러나 놀랍
게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
여주었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그가 두 팔을 벌리자 몸에 박혔던 화살이 모두 빠
져버린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괴력이었다.
"이 피라미같은 놈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
구유명이 두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혈의삼십육궁을 향해 달려가려
할 때였다.
쐐액---!
귀청을 찢는 파공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사태가 채 파악되기도 전
에 이미 구유명의 미간(眉間)과 목, 심장에는 세 개의 핏빛 방울
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크악!"
구유명은 뒤늦게서야 비명을 질렀고 천수겁천 당환성의 침성이 들
렸다.
"철탑유신! 네 놈이 아무리 무쇠로 몸을 만들었다고 해도 노부가
있는 한 소용이 없다."
"끄으으윽!"
철탑유신 구유명의 눈이 툭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당환성은 슬쩍
손을 저었다.
딸랑딸랑!
심금을 흔드는 묘한 방울소리와 함께 구유명의 미간과 목, 그리고
가슴에 박혔던 세 개의 혈령(血鈴)이 뽑혀 그의 손으로 되돌아갔
다.
"사... 사혈삼령(死血三鈴)...... 크윽!"
구유명은 최후의 한 마디를 남기고는 고목처럼 넘어졌다.
쿵!
그의 거구가 쓰러지는 소리가 대전을 울렸고 그의 몸에서는 세 줄
기 피화살이 뻗치고 있었다.
사혈삼령. 그것은 당가의 너무도 무서운 암기로 각종 내가강기는
물론 철갑이라도 꿰뚫는 위력이 있는 불가사의한 죽음의 핏빛 방
울이었다.
한편 지무성 석검영은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러나 절망적
이게도 이미 그의 동도들은 모두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
직 자신과 악진원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렸다.
'트... 틀렸다. 도망가자!'
그는 기회를 보아 몸을 휙 솟구쳤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통천교의 교주인 통천마군 흑고였다.
흑고는 으시시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이 감히 나 흑고를 속여?"
석검영은 눈을 부릅떴다.
"비켜라!"
위잉!
그의 쌍장이 푸른 장영을 그리며 뻗었으나 흑고는 움직이지 않았
다. 그 대신 석검영의 장력이 격중되는 찰나 흑고의 배와 가슴은
마치 공처럼 불룩해지고 있었다.
펑!
폭음이 들렸으나 석검영은 대경실색했다.
"억!"
그는 놀라운 반탄력에 양 손이 꺾어질 듯 아픔을 느끼며 뒤로 물러
났다.
"흐흐흐... 그까짓 장력으로는 노부의 하마공(蝦 功)을 깨지 못
한다."
"으으......."
석검영은 공포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으나 흑고의 신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를 덮쳤다. 흑고의 오른손은 전광
석화처럼 석검영의 복부를 쑤시고 있었다.
"으악!"
석검영은 자신의 모든 것이 일시에 창자와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으며 스스로의 눈으로 피와 창자가 흑고의 손에 의해 분분이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크하하하! 나 흑고를 속인 놈의 말로다!"
펑!
무참하게도 흑고의 왼손은 석검영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깨고 말았
다. 그 바람에 허연 뇌수(腦髓)와 피가 사방으로 튕겼다.
팽천후가 참인도를 치켜들며 외치고 있었다.
"악진원, 이 배신자! 이제 네 놈 혼자만 남았다. 너의 목숨도 그
만 종지부를 찍어 줘야겠다!"
위--- 잉---!
하북팽가의 독문(獨門)인 자전십팔풍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팽
천후가 참인도를 휘두르자마자 주위의 공기 자체가 무섭고도 엄청
난 회오리로 돌변했다.
그러나 악진원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拾貳流)도 그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연검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흔두 번이나 번개를 그려
내어 팽가도법의 위력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파앗--- 팟!
수세에 몰리던 그의 검법이 다시금 무서운 위력을 떨쳐내자 순식
간에 팽천후의 옷자락과 수염이 산산조각으로 잘려져 날아갔다.
"헛!"
팽천후는 다급성을 발하며 참인도를 더욱 무섭게 휘둘렀다.
우--- 웅!
가공할 도기가 악진원을 휘감았다. 그러나 악진원은 갑자기 바닥
에 몸을 굴리더니 삼 장(三丈) 가량 뒤로 굴러나갔다. 그는 다시
벌떡 일어섰으나 그의 주위에는 이미 삼백여 군웅들이 첩첩이 포
위하고 있었다.
악진원은 광기어린 눈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더니 앙천광소를 터뜨
렸다.
"크하하하...! 그래도 강호에서 사백 년 간 내려온 이 악가(岳家)
의 가주가 너희들같은 놈들에게 죽을 수는 없다!"
군웅들은 그의 처절한 기세에 잠시 움찔했다.
산동악가(山東岳家). 그 무림명가는 허명을 쌓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중상은 입었을망정 악진원이 죽기를 각오한다면 지금이라도
최소한 군웅들 이십여 명은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악진원은 연검을 거꾸로 쥔 채 자신에게 겨
누고 있었다.
"두고 봐라! 내 비록 먼저 죽으나 너희 역시 살아남지는 못할 것
이다, 크윽!"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푹 찔렀고, 연검은 그의 등 뒤로 뚫고
나왔다. 검자루는 물론 그것을 쥔 그의 손까지도 심장 속으로 들
어가 있었다.
"저, 저런!"
악진원은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군웅들은 이 의외의 사태에
대경한 나머지 모두 넋을 잃었다. 설마 그가 자결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후 사태가 가라앉자 군웅들은 한결같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
다.
열 명의 배신자들이 모두 처단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최후 발악
으로 인해 이십삼 명의 무고한 군웅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잠깐 동안에 벌어진 혈전의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장내는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었다.
구주진천도 조천명이 제일 먼저 침묵을 깼다.
"음곡주께서 살아 있을 줄을 정말 꿈에도 몰랐소."
그는 백독마군 음무위를 바라보며 은은한 격동을 보였다. 군웅들
의 시선 또한 음무위를 비롯하여 그의 수하인 천황십독에게로 향
했다.
군웅들 역시 격동과 함께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음무위는 고소를 짓더니 어이없게도 자신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합장 불호를 외우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죄송하지만 소승은 음노시주가 아닙니다."
그 말에 조천명은 물론 모든 군웅들이 대경했다. 음무위는 손을
들어 얼굴에 쓴 면구를 벗었다.
③
"아! 저럴 수가......."
군웅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나타난 얼굴은 한 명의 젊고 영준한 중으로, 그는 바로 소림의 십
팔나한 중 우두머리인 정혜(丁慧)였다.
"오오!"
뿐만 아니라 천황십독은 다름아닌 십팔나한들이었다. 군웅들이 모
두 이 상상도 못할 변화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자 호불범이
탄식을 하며 나섰다.
"여러분, 실상 그 분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소생은 단지 허를 이
용해 첩자를 색출하였을 뿐입니다."
군웅들은 모두 얼이 빠지며 낙심하는 한편 차츰 감탄의 기색을 떠
올리며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호불범이라는 신비하고도 신출
귀몰한 청년을 향하여.......
만사귀재 호불귀의 손자 호불범은 마침내 엄청난 몫을 해내면서
군웅들의 눈에 만사귀재의 부활과도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호불범은 낭랑한 음성으로 중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의 계략도 따지고 보면 한 분의 도움 때문이었습니
다. 만일 그 분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군웅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호불범은 무영종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무대협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제서야 군웅들은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호불범보다 몇 배나 더
신비한 인물, 그에 대한 크나큰 의혹이 군웅들의 눈에 떠올랐다.
그러나 무영종의 태도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가볍게 군웅들을
향해 포권하며 입을 열고 있었다.
"별 말씀 다하시오. 본인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그러나 무대협의 조력이 없었다면 정녕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호소협의 지나친 겸손이시오."
그들의 겸양에 군웅들은 모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들 두 사람은 분명 모든 군웅들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군웅들은 개파대전도 끝나기 전에 미리
음모와 책략에 의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채 전멸을 당했을 게 뻔
한 일이었다.
이때 개방의 젊은 방주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 말했다.
"여러분, 이제 거의 삼 경이 되었소이다. 앞으로 세 시진 후면 날
이 새고 그렇게 되면 개파대전을 치러야 하오."
모용랑은 혜지가 감도는 눈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수라궁의 마두들이 어떤 흉계를 쓸지 걱정이오."
군웅들의 안색은 삽시에 모두 어두워졌으나 조천명이 분노한 음성
으로 말했다.
"이미 수라궁의 흉계는 드러났소. 놈들은 이제 개파대전을 이용하
여 우리 모두를 제거한 뒤 강호제패를 이루려 하는 것이오."
그의 두 눈은 무섭게 부릅떠졌고 으스스한 살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흐흐흐... 이 조천명이 누구인데 놈들의 뜻을 이루게 하
겠는가? 모친의 원한을 갚기 전에는 천군맹에 돌아가지 않겠노라
고 맹세한 나요!"
조천명은 진천마도를 불끈 쥐었다.
"두고 보시오! 내 반드시 구주진천도법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줄 테니까!"
그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는 오히려 더욱 가라앉았다.
아무도 그처럼 큰 자신은 없을 뿐 아니라 어쩌면 조천명 역시도
내부적으로는 자신이 안 서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든 것이
었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길게 깔렸다. 이어 무서운 침
묵, 그 침묵이 지속적으로 그들을 내리 눌렀다.
그런데 누군가 또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동정어부(洞庭漁夫)
산초경(山焦京)이란 고수로써 머리가 희끗희끗한 칠 순 노인이었
으나 동정호 일대의 일류고수였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노부는 지금 수라궁을 떠나겠소."
군웅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솔직히 노부는 이 수라궁 개파대전이 이토록 처참한 것인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그는 한 차례 진저리를 친 뒤 말을 이었다.
"노부는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소. 그러나 노부의 집에는 오직 노
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눈 먼 손녀가 있소."
동정어부 산초경은 만면에 부끄러움과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
인들에게 포권을 했다.
"여러분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노부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겠소."
아무도 그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모두 똑같은 심정이기
에 그를 이해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시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탄식하며 힘없이 말하고 있었
다.
"노부도 돌아가겠소."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소. 중주의 팔봉장(八鳳莊)은 노부가 없으
면 쓰러지기 때문이오."
말을 마치자 팔봉장의 장주인 항마신장(降魔神掌) 전백기(田白期)
는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그의 이 행동
은 군웅들을 동요시켜 버렸다.
"나도 가겠소!"
"소생도...... 이곳을 떠나겠소."
여기저기서 속속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왔다.
그것을 본 군웅들의 얼굴에는 침통한 표정이 어렸다. 그들은 떠나
고자 하는 자들을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였다. 무영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나려는 자들을 향해 입
을 열었다.
"여러분, 소생이 한 마디 하겠소이다."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무영종은 탄식하며 반문했
다.
"수라궁에서 여러분들이 돌아가는 것을 순순히 허락할 것같소이
까?"
항마신강 전백기가 대답했다.
"무대협, 어쨌든 노부는 가겠소. 그들이 보내주지 않는다면 뚫고
서라도 갈 것이오."
무영종도 더이상은 말을 잇지 않았으나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십여 명의 인물들은 마침내 무리를 지어 대전 밖으로 걸어나갔
고 군웅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현광대사가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군웅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은 군웅들도 조
속히 수라궁을 떠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지 명예(名
譽)라는 끈이 발을 묶어 놓았기에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할
뿐이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도 소리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일출(日出)과
함께 무서운 혈풍이 몰아칠 것이 틀림 없었다. 강호무림 수천 년
사상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죽음의 피보라가 온통 하늘과 땅을
뒤덮을 것이다. 수라궁 개파대전과 함께.......
④
여명(黎明).
군웅전 안으로 여러 줄기의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마침내 해가
뜬 것이었다.
장내의 삼백여 명의 군웅들은 모두 한결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
었으며 그들의 눈은 시간이 흐를 수록 긴장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군웅전 안으로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군웅들은 일제히 그 인영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나타난 인영은
다름아닌 금악비였다.
금악비는 대전에 내려서자마자 오만한 눈초리로 주위를 훑어보았
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후...! 하룻밤 사이에 꽤 많은 분들이 사라지셨구려?"
군웅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수백 쌍의 눈은 무서운 분노를 담고
금악비를 노려보았다.
금악비는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은 그 눈길에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험! 소생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분께 개파대전을 알리기 위해
서요."
군웅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개파대전은 오늘 오시(午時), 본궁의 중앙에 있는 수라지청에서
열리오. 여러분들은 그때까지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라오."
구주진천도 조천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금악비!"
조천명은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결정이라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개파대전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금악비는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번에는 팽가의 가주 팽천후가 차갑게 말했다.
"수라혈신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해라. 이곳에서 너희 수라궁 놈들
과 담판을 짓겠다."
금악비의 안색이 변하더니 군웅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건 모든 분들의 의견이오?"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 말했다.
"이미 모두 의견이 통일되었소."
금악비의 얼굴이 음침해졌다.
"흐흐흐... 후회하실 텐데......."
그 말에 천수겁천 당환성이 분성을 발했다.
"후회? 애송이 놈,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더이상 입을 놀린다면
당장 목구멍에 바람구멍을 내주겠다!"
그러나 금악비는 음흉하게 마주 응수했다.
"흐흐흐... 당(唐) 나으리. 당신은 이곳이 사천당가인 줄 착각하
는 모양이나 이곳은 엄연히 수라궁이오."
"뭣이?"
당환성의 눈에 무서운 살기가 뻗쳤으나 금악비는 음침하게 말하며
손뼉을 쳤다.
"수라궁의 뜻을 어기면 어찌되는 지 보여주겠소, 여봐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밖으로부터 이십인의 흑의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기이하게도 어깨에 하나씩의 붉게 칠한 관을 메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라!"
금악비의 말에 흑의인들은 관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일제히 뚜껑을
열었다.
"오! 저럴 수가......."
군웅들은 모두 눈을 부릅뜬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관 속에는 각기 이십 구의 해골이 들어 있었는데 끔찍하게도 해골
에는 피로 얼룩진 살점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보아 하니 산 채로 어떤 짐승들에게 뜯겨 먹힌 듯했다. 그나마 살
점에 붙은 피가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불과 몇 시진 전에
참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경악하는 군웅들에게 금악비가 음산한 괴소를 지었다.
"흐흐흐... 이들이 누군지 아시오?"
군웅들이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짓자 금악비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
를 띠며 말했다.
"바로 어젯밤 수라궁을 탈출하려 했던 사람들이오."
군웅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고 무영종 또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비로소 죽은 시체들이 왜 그 모양인지
깨달았다.
'아아! 그들은 호수에 빠져 바로 그 금린식인괴어에게 당하고 말
았구나.'
한동안 넋이 빠져 있던 중인들 가운데 자면신창 소중산이 벼락같
이 몸을 날렸다.
"이 잔인무도한 놈들!"
그의 손에서 무수한 창영(槍影)이 뻗어 나갔다.
"으악!"
관을 메고 들어왔던 흑의인 중 한꺼번에 다섯 명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소중산의 절기인 추명신창십이식(追命神槍十二式)이 찰나
지간에 그들을 황천으로 보낸 것이었다.
실로 눈부신 창술로 무림의 일절다운 솜씨였다.
"으악!"
그러나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머지 십오인의 흑의인들이
모두 피화살을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똑같이 뚫려 있었다.
천수겁천 당환성이 당가의 유명한 암기인 염라정(閻羅釘) 십육 개
를 던져 단번에 그들을 염라전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이 갑작스런 사태에 금악비의 안색은 크게 변했으며 당환성은 몸
을 솟구치며 외쳤다.
"애송이 놈! 네 놈도 죽여버리겠다!"
금악비는 흠칫하더니 소매를 뻗었다.
번쩍!
그의 소매 속에서 한 자루의 금마비가 빛살을 그으며 날았으나 당
환성은 냉소했다.
"흥! 그까짓 비수 따위가 노부에게 통할성 싶으냐?"
쨍!
그의 손에서 은빛이 뻗는가 싶더니 금마비가 튕겨 나갔고, 두 사
람이 무섭게 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낭랑한 불호와 함께 당환성과 금악비는 한 줄기 부드러운 경기가
자신들을 밀어내는 것을 느꼈다.
그들 사이로 한 젊고 영준한 중이 내려섰다. 그는 바로 정혜였고
내려서자마자 당환성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당 노시주, 잠시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당환성은 분노가 이미 극에 이르러 있었다.
"소화상! 길을 비켜주게. 저 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분통이 터
져 죽을 것 같네."
정혜는 물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 노시주, 이미 싸움은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 금시주를
죽여 보았자 조금의 이득도 없습니다."
당환성은 그의 설득력 있는 차분한 말에 겨우 노기가 수그러졌다.
정혜는 이번에는 금악비를 향했다.
"금시주, 이미 군웅들은 수라궁의 음모를 모두 파악했소이다. 이
제 싸움은 불가피해졌으니 가서 수라궁주에게 전해 주시오."
정혜의 두 눈에 혜지가 흘렀다.
"앞으로 반 시진 이후에 우리는 이곳을 나가겠소. 물론 그대들이
순순히 우리를 보내줄 리는 없겠으나 우리는 이곳을 반드시 탈출
할 것이오. 이 싸움에는 머리가 뛰어나고 무공이 강한 쪽이 이길
것이오."
금악비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대의 말을 한 자도 빠짐없이 전하리다."
그는 주위를 훑어보며 광소를 터뜨린 후 빈정거리듯 말했다.
"과연 오늘 해가 지기 전 이곳에서 몇 명이나 살아 나갈 지 모르
겠군. 크하하하......!"
그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 군웅들은 모두 노기를 일으켰고 몇 명
의 인물들은 참지 못한 듯 탁자를 치면서 일어났다.
"으하하하......"
금악비는 대소를 터뜨리며 유유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군웅들은 모두 흥분이 극도에 달해 웅성거렸다. 사방에서 욕설이
터졌으며 심지어는 몇 명이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여러분, 잠시 진정하십시오."
웅혼한 목소리가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것은 마치 태산같
이 장엄한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무영종이
몸을 일으켰다.
"여러분, 이곳은 수라궁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살수가 뻗쳐올
지 모르는 곳이니 여러분들이 쉽게 흥분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
다.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모든 군웅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는 길뿐입니다."
군웅들은 모두 숙연해진 채 그를 주시했고 무영종은 그들을 둘러
보며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 반 시진 후 우리는 이곳을 나갈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여러분은 모두 운기조식하여 진력을 최대한 보충시켜야 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무영종의 말은 충분히 일
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웅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
데 태을성수 종리자허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노부에게 한 가지 의견이 있소이다."
종리자허는 잠시 무영종을 의미 깊은 눈으로 힐끗 응시했다. 그
또한 이미 무영종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종리자허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의 군웅들은 삼백 명이나 되오. 그러나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오합지졸과 다를 바가 무에 있겠소? 따라서 우리는 한 명의 대표
자를 뽑아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오."
군웅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점창(點蒼)의 고수 사일신검(射
日神劍) 사극평(査克平)이 일어나 말했다.
"예로부터 소림은 중원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소이다. 노부는 소
림의 현광대사를 추천하고 싶소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광대사에게로 향했으나 현광은 고개를
저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사시주의 뜻은 고마우나 빈승은 자격이 없소이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필요한 사람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군웅들을 영도할 능
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오."
그 말에 소중산이 물었다.
"천산비검옹 노선배는 어떻습니까?"
중인들의 시선은 방향을 바꾸어 평범하게 보이는 검의 고수 천산
비검옹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 역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소보주는 너무 노부를 과찬하는 것같소. 그러나 노부
는 오랫동안 천산에만 파묻혀 있었기에 강호 경험이 별로 없소이
다. 이번 일을 주지할 자격이 되지 못하오."
이번에는 남궁진강이 신중하게 물었다.
"음, 그렇다면 호소협이 어떻겠습니까?"
호불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생 역시 자격이 없습니다. 소생은 머리만은 자신하나 무공은
문외한입니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남을 영도하겠습
니까?"
그러더니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대신 소생이 한 분을 추천하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반드시 이
번 일에 최적임자일 것입니다."
군웅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일자 호불범은 고개를 한 곳으로 돌렸
고 그곳에는 무영종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대협께 부탁드립니다."
무영종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찌 이 중대한 일을 소생이 맡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될
말이오."
호불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대협, 겸손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천하에서 소제가 심
지와 지력으로 감복한 인물이라면 오직 무대협 한 분밖에 없습니
다."
군웅들은 아연하여 웅성거렸다. 그들로서는 무영종이란 사나이가
아무리 신비막측한 인물이라 한들 설마하니 호불범의 두뇌마저 능
가하리라고까지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군웅들은 새삼 감탄이 깃든 시선으로 무영종을 바라 보았다. 이때
현광대사가 나서서 덧붙여 말했다.
"아미타불.... 소사제의 무공은 노납보다도 훨씬 높으니 무공에서
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그의 말에 군웅들은 마침내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빛을
띄었다.
'삼성승의 제자이니 과연 적임자다.'
그들이 이같이 일치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통천마군 흑고가 갑자
기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대찬성이오. 무대협의 말이라면 노부 역시 그대로 따르리
다."
청수자도 일어서서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빈도도 찬성하겠습니다."
몇 명의 군웅들도 또한 일어나 찬동을 표하자 분위기는 이제 완전
히 화합의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대에 찬 시선으
로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선기묘인 사도유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무형, 받아들이시오. 소제가 대막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기인이사를 만나 보았으나 무형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의 차이였
소. 이번 일을 타개할 인물은 오직 무형뿐이오."
무영종은 과연 자신이 중책을 맡을 수 있는가에 대해 잠시 생각했
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좋습니다. 미거한 소생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곧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퍼졌다.
"와! 와아---!"
선풍마서생 위전풍.
그는 이 며칠 사이에 무척이나 수척한 모습으로 변했다. 지금 그
는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수라궁 내의 한 별원에서 멍하니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창 밖으로 여명이 밝아오자 위전풍의 눈썹이 미미하게, 극히 미미
하게 떨렸다.
'오늘이 개파대전이다.'
위전풍의 초점 없는 눈이 조금씩 움직였다.
'군웅들은 수라궁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수라궁
의 겉으로 드러난 일면 만을 알 뿐이다.'
위전풍의 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몰렸다.
'한 명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무서운 수라궁의 마수(魔
手)를 그들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위전풍의 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그는 탁자 위의 화병에 꽂힌 꽃
을 응시했다.
꽃은 여인앵련화(女人櫻蓮花)라는 극히 희귀한 꽃으로, 여인앵련
화를 주시하는 위전풍의 눈에 문득 이채가 번쩍였다.
'그렇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었다.
'꽃은 꽃,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잘려진 채 아무
리 아름답게 장식된다 해도 그것은 이미 본래의 미가 아니다. 생
명이 거세된 꽃, 그것이 무슨 가치를 갖겠는가?'
위전풍의 두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뻗쳤다.
'풍우에 지는 꽃이 될지언정 장식된 조화는 되지 않으련다!'
스스스.......
문득 그의 눈 앞에 한 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일신에 곤룡포를
입은 청년이었다.
천하마성을 한 몸에 지닌 마력의 소유자 독고황(獨孤皇), 바로 그
가 나타난 것이었다. 독고황은 담담히 묻고 있었다.
"위형, 생각해 보셨소?"
위전풍은 담담히 대답했다.
"생각해 보았소."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위전풍의 두 눈에는 신념(信念)이 뭉
쳐 있었고 독고황은 그것을 보고는 탄식했다.
"말하지 않아도 위형의 생각을 알겠소."
독고황은 고소를 짓더니 시선을 돌려 탁자 위의 화병에 꽂힌 꽃을
바라보았다.
여인앵련화(女人櫻蓮花). 독고황의 고요하고 무심한 눈에 꽃이 떠
올랐다.
"어쩌면 위형의 그런 성격 때문에 내가 더욱 위형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투명할 정도로 희고 고운 그 손은 어찌 보면 여인의 손과도 같았
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대지를 한꺼번에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기이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손이었다.
위전풍도 손을 내밀었다. 사나이답게 울퉁불퉁한 손이었다. 그러
나 그의 손도 역시 거친 황야를 질타해갈 수 있는 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쥐었고 손과 손 사이로 뜨거운 사나이
의 정이 흘렀다.
독고황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손을 놓는 순간 우리는 등을 지게 되오."
위전풍이 아무 말이 없자 독고황이 다시 말했다.
"나는 이후로 위형을 이 세상에서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담담한 말이었으나 그 속에는 무서운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위
전풍은 눈썹 끝을 가늘게 떨며 독고황을 주시했다.
"천하에서 오직 당신 만이 이 위모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
소."
독고황의 눈썹도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전광(電光)."
"넷!"
밖에서 짧고 힘찬 음성이 들렸다.
"가서 위부인을 모셔 와라."
"넷!"
위전풍은 흠칫했으나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리할 정도로 긴 침묵 만이 흘렀다. 잠시 후
밖에서 다시 전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부인을 모셔 왔습니다."
"알겠다."
독고황은 짧게 말한 후 손에 힘을 주었다.
"위형은 이제 어디로 가겠소?"
"군웅전(群雄殿)."
위전풍도 손에 힘을 주었고 독고황은 담담히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소,"
그는 고요하던 눈에서 갑자기 기광을 발산하며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나 아까 내가 한 말은 명심하시오. 나는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오."
위전풍의 음성도 갑자기 차가와졌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당신의 음모를 분쇄할 것이오."
독고황은 손을 놓았으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위형, 잘 가시오."
그는 그 한 마디를 하고 몸을 돌렸고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위전
풍은 가슴이 막막해짐을 느꼈다.
벽(壁). 독고황의 등이 마치 거대한 하나의 벽과 같이 보였기 때
문이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벽.......
독고황의 존재는 벽,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위전풍이 멍한 표정으로 있는 사이에 독고황은 이내 연기
처럼 사라졌다. 그의 놀라운 신법은 유령을 방불케 했다.
이때 밖으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가가(哥哥)......!"
위전풍은 몸을 떨었다.
"설한(雪恨)!"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