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사밀왕부(邪密王府)
대사막(大沙漠).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모래의 바다이다.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녹원(錄園)을 발견하지 못한 나머지, 목이
타서 죽게 될 정도로 광활한 사막.
일컬어 아극소(阿克蘇).
용권풍(龍捲風)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 한 마리 낙타가 미친 듯 치달려
든다.
낙타는 보통 낙타보다 두 배 거대했다.
이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치달린 듯, 낙타의 입에서는 가쁜 숨결이 토해
져 나왔다.
갈기의 빛깔이 눈처럼 흰 낙타인지라, 멀리서 낙타를 보면 한 덩어리 흰
구름이 사막과 평행선을 그리며 낮게 날아가는 것 같다.
낙타 등에는 비단 수건으로 얼굴 아래쪽을 가린 미부인이 앉아 있었으며,
안장 뒤에는 거대한 철궤가 놓여 있었다.
두두두두두-!
낙타는 쉬지 않고 사막을 가로질렀다.
미부인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박차를 가하였기에, 낙타의 옆구리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기군."
미부인은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먼 구릉 위, 푸른 물체가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한 마리 거대한 늑대였다.
낙타는 쉬지 않고 수백 리를 치달렸기에, 늑대 앞에 이르자 푹 쓰러지고
말았다.
푸른 늑대는 누런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낙타 곁으로 다가섰다. 늑대는
눈에서 푸른 불줄기를 토하며 아가리를 쩌억 벌렸으며, 낙타의 한 조각
붉은 심장은 늑대의 입 속으로 뜯어 먹히었다.
미부인은 철궤를 내려놓은 채 늑대가 미식(美食)을 즐기기를 기다렸다.
푸른 늑대는 낙타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포식하게 되자 기력이 나는 듯,
울부짖는 소리를 낸 다음에 미부인 쪽으로 다가섰다.
늑대는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기 힘든 동물인 바, 그 늑대는 사람에게 철
저히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늑대는 미부인 앞에 넙죽 꿇었으며, 미부인은 늑대의 등에 철궤를 올려놓
고 나서 자신도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수호천랑(守護天狼), 시간이 없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
우우우……!
수호천랑이라 불리우는 늑대는 하늘을 우러르며 울부짖다가는 힘차게 치
달리기 시작했다.
한 줄기 푸른 선이 그어진다.
늑대는 찰나적으로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백무영은 하루 종일 철궤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그는 들려 오는 소리
로 정세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게 된 것은, 미부인의 직위와 이
름이었다.
금면낭낭(金面娘娘) 모특나(牟特娜).
그녀는 사밀왕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끼이는 인물로서, 그녀의 지위는
집법태원부(執法太元府)의 숙위통령(叔衛統領)이었다.
사밀왕부는 사밀여후(邪密女后)라는 추녀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
그녀는 무림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 바, 변황지역에서 그녀가 차지
하고 있는 성가는 묵탑왕(墨塔王)에 버금간다.
묵탑왕은 몽고의 왕. 그는 사밀여후와 더불어 새북을 양분하고 있는 패웅
이다.
'결혼식… 누구의 결혼식일까?'
백무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자신의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처지.
한데, 뜻밖의 인연으로 인하여 사밀왕부의 비밀스러운 일에 끼여들게 된
것이다.
'누가 의원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백무영은 강한 열기를 느꼈다.
상자는 태양 광선에 오랫동안 쪼인 나머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철궤 안에 빙정(氷精)이라는 보석이 담기어 있어 한기를 흘리고 있기는
하나, 더위를 참기 힘들 지경이다.
우우우……!
간혹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늑대는 모특나와 백무영을 태운 채 쉬지 않고 질주해 가는 것이다.
'사밀왕부… 변황의 금지이고, 천하제일의 부국이라고 들었지. 나와는 상
관이 없는 곳이라 여겨 왔는데, 내가 거기에 가게 되다니…….'
그는 애써 초조감을 잊고자 했다.
내가고수에게 있어 마음 속의 번뇌는 마약과 같다.
번뇌는 상승무공을 연성하는 데 있어 엄청난 장애가 된다.
하지만 지금 마음 속으로 온갖 번뇌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부정하지 못
할 일이었다.
사밀왕부에 당도하였을 때, 하늘에는 변황인들이 신봉하는 초생달(新月)
이 걸리어 있었다.
초생달의 유현하고 신비로운 빛깔은 인간에게 숭고한 마음과 자연에 대
한 기묘한 공포심을 일으킨다.
사밀왕부의 상징은 신월. 그러하기에, 왕부 도처에 신월번(新月幡)이 내걸
려 있는 것이다.
철궤가 내려진 장소는 지하의 작은 방이었다.
모특나는 땀에 찌든 옷을 재빨리 벗어 버리고 차가운 물에 목욕을 마친
후, 황금색 궁장을 걸친 채 철궤를 열었다.
"호호… 그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모특나의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백무영은 멍한 표정 가운데, 눈을 여러 차례 껌벅거렸다.
"무례한 분이군요. 나를 납치하다니."
그가 언짢아하자…….
"대가는 만족스럽게 받을 것입니다. 일만 무사히 마친다면, 인생을 바꿀
만한 보물을 받아 갈 수 있을 겁니다."
모특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침향목으로 만든 팔선탁이 놓여 있는 바, 그 위에 금은보배가 그득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눈을 휘둥그래하게 만들 기진이보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게 경이로운
일이었다.
"다 가져도 좋아요. 바란다면 더 줄 수 있어요."
"흐음, 내 비록 가난한 의생(醫生)이라 하되 신외지물에 눈이 먼 인물은
아니오."
"호호… 그러한 마음씨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영무선생을 초빙하기
이전, 영무선생에 대한 일을 세밀히 조사해 보았지요."
모특나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상큼한 체취를 느끼게 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산호부인이 기억된다. 산호부인은 백무영이 가장 미안하
게 여기는 여인이다.
신체의 아름다움을 따진다면, 모특나는 산호부인에 비교되지 못한다. 하
지만 모특나는 왕부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이미 세 자식을 낳을 나이이지만 왕부의 율법에 의해 결혼을 금지당하였
기에 이제까지 독신으로 지내는 여인이며, 그 덕에 수많은 정부를 갖고
있는 색녀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자를 속속들이 아는 여인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백면서생처럼 차갑고 고독한 매력을 풍기는 남
자를 본 바 없다.
'입가가 일그러진 게 단점일 뿐, 빼어난 미남이다. 그리고 저 고독한 눈
빛은…….'
모특나는 백무영의 품안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마음에 휘어 감겼다.
백무영은 매력이 짙은 남자이다.
남자를 아는 여자라면, 백무영을 앞에 두고 사타구니 사이가 화끈 달아오
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이 마무리지어진 후에, 즐겨 볼 수 있겠지.'
모특나는 마음 속으로 자극적인 상상을 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환자가 있어요."
"아……!"
"중환자예요. 독(毒)을 먹었어요."
"어느 정도의 상태입니까?"
"왕부에 수많은 의원이 있고 무수한 영약이 있으되, 구하지 못하고 있습
니다. 일단 피독주(避毒珠)로 독기를 방지하고 있지만, 워낙 강한 독을 먹
었는지라……."
"어떠한 독입니까?"
"모릅니다. 그래서 영무선생을 초빙한 겁니다."
백무영은 이제야 사밀왕부 사람이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왕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겠군.'
백무영이 내심 중얼거릴 때, 모특나는 품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이것으로 눈을 가리셔야 합니다."
"안대군."
"그렇습니다. 안대입니다."
"안대로 눈을 가려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묻지 마십시오. 이 곳은 비밀이 많은 곳입니다. 비밀을 구태여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특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비밀… 후후, 세상은 비밀에 휘감겨 있지. 비밀은 슬픈 것일 수도, 추악
한 것일 수도…….'
백무영은 내심 역겨운 마음을 느꼈으되, 사정이 사정인지라 모특나의 지
시에 따라 안대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그는 통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간혹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무사들의 발걸음 소리, 호령 소리…….
'점점 더 지하로 들어가는군.'
백무영은 자신이 깊은 지하 통로 바닥으로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는 보수(步數)를 정확히 헤아리는 재주가 있기에, 자신이 일 리 정도
걸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밀왕부는 외부의 침략을 무수히 받은 곳인지라, 지상의 축조물보다 지
하의 축조물을 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레치는 듯한 기관 소리가 들린 후, 백무영은 푹신한 융단을 디디게 되
었다.
"이제 안대를 떼어도 좋아요."
모특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백무영은 손을 쳐들어 안대를 제거했다.
"엄청나군."
그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그를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바닥은 황금색 융단에 뒤덮여 있고, 삼면의 벽은 자수정(紫水晶)이다. 그
리고 높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금은 광채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대전 가운데에는 전라여인상(全裸女人像)이 세워져 있었다.
지극히 빼어난 몸매, 풍만한 가슴의 돌기이며 잘록한 허리의 육질, 그리
고 팽팽한 허벅지의 미끄러움이 눈을 화끈하게 한다.
다만 얼굴이 너무 추악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마차 바퀴에 깔려 버린 만두가 그러할까?
짓뭉개지고 빠개어진 썩은 수박이 이러할까?
오관 가운데 두드러져 보이는 건 빠끔히 뚫린 눈구멍에 불과했으며, 코와
입과 귀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저런 추녀의 얼굴을 아름다운 여체와 조화시키다니…….'
백무영은 묘한 괴기감에 사로잡혔다.
모특나는 그가 여인상의 얼굴을 바라보는 걸 보며 나직이 말했다.
"여신상이에요."
"여신상?"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불의 여신이지요."
"흠, 너무 추악하오."
"추악하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
"묻지 말아요."
모특나는 애써 눈길을 피했다.
이윽고 모특나는 자수정 벽의 통로로 백무영을 안내했다.
그 곳은 사밀왕부에서 금지로 불리우는 곳이며, 모든 즙기에 기관 암기장
치가 매설되어 있다.
내부구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십 보(步)도 걷지 못하고 기관장치
에 걸려들게 된다.
수정비취전(水晶翡翠殿).
호화의 극을 달리는 지하 궁전은 그렇게 불리우고 있었다.
백무영은 수정 비취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황금의 문이 보인다. 문 위에는 두 마리 봉황(鳳凰)이 조각되어 있는 바,
지극히 정교한 조각으로 인해 두 마리 봉황이 문 밖의 허공으로 날아오
를 것 같았다.
모특나는 문고리를 쥔 채 신신당부하는 투로 말했다.
"이제부터 보고 듣는 모든 건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합니다.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면, 생명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알겠소."
"환자는 안에 있습니다."
"흠……."
"치료에 쓰이는 도구, 약재가 있다면 뭐든 말씀하세요. 거의 모든 약재가
비치되어 있으니, 필요한 모든 걸 조속히 입수할 수 있을 겁니다."
모특나는 그렇게 말하며 백무영을 힐끗 봤다. 겁을 집어먹은 눈빛이다.
모특나는 누군가를 지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환자에 대해 호기심을 품어선 안 돼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모특나는 새삼 당부를 한 다음에 문을 열었다.
환상처럼 아름다운 수정부(水晶府)이다.
모든 즙기가 수정이며, 천장에 박힌 용뇌야광배(龍腦夜光杯)의 빛이 수정
에 부딪치며 일곱 빛깔 무지개를 허공에 띄워 올렸다.
오십 평 정도 되어 보이는 내실 안은 은은한 향기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모특나는 감히 방 안으로 접어들지 못하고 문 밖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백무영 혼자 방 안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방에 대기하고 있던 은의소녀가 백무영을 침상 쪽으로 안내했다.
"어떠한 광경을 보든, 놀라지 마십시오."
은색 옷을 걸친 시녀는 짤막한 말로 주의를 주었다.
백무영은 침상 쪽으로 다가서며 짙은 약향(藥香)을 맡았다.
침상 둘레에는 다섯 개의 향로가 놓여 있는 바, 자욱하고 짙은 향연을 쉬
지 않고 흘리고 있었다.
침상 위, 한 여인이 머물러 있었다.
백무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창자가 게워지는 듯한 구역질을
느꼈다.
'사람의 얼굴이 저럴 수가?'
백무영의 얼굴빛이 희어졌다.
어지간한 경우에는 놀라워하지 않는 백무영이었으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여인이 반듯이 누워 있다. 그녀의 전신은 붕대에 동여매어져 있는 바,
본래 흰 빛깔의 붕대는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구역질을 느끼게 하는 부위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에 본 추녀상의 얼굴이 차라리 아름다워 보인다.
도끼로 무수히 난자한 고깃덩어리.
푸른빛과 검붉은 빛이 뒤섞여 본래의 살색을 알아볼 수 없다.
빠끔히 뚫린 눈구멍으로 보이는 건 흰자위뿐인 눈이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소리가 들려 온다. 그리고 콧구멍에서 누런 고름이 꾸역꾸역 게워
져 나왔다.
"이분이십니다."
시녀는 백무영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강 씹었다.
백무영은 여인의 얼굴에 눈길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나이 어린 시녀는 백무영의 의술을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백무영 이전에 이미 여러 명의 신의가 환자를 진찰한 바 있다. 그들
가운데 환자를 회생시키는 방법을 말한 사람은 없다. 치료하다가 실패한
의원은 하나같이 제압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다.
'젊은 돌팔이 의원의 신세도 그러하겠지.'
나이 어린 시녀는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무영의 눈에서
흘러 나오는 혜광(慧光)을 보고는 감탄사를 발하게 되었다.
가을 첫서리의 빛깔이 이처럼 차가울까?
'차디차며 아름답다. 저 눈빛을 보면 내 마음 속까지 시원해지는 듯하다.'
백무영은 지극히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환자의 용태를 보고 구역질을 해 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
나기 마련인 바, 백무영은 잠깐 사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흐으… 흐으… 나, 나를 죽여 줘요!"
떨리는 목소리, 신체가 썩어 문드러진 여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
이다.
갈라진 입술과 목젖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가 귀기스럽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낯익지 않는가?
"제발… 나를……."
여인은 몽롱한 의식 가운데 헛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백무영은 손을 내밀어 여인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맥은 불규칙하게 뛰었
으며, 이대로 놔 둘 경우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맥이 끊어질 정도로 미미
하게 뛰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육체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이다.
백무영은 일각 넘게 진맥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극독을 삼켰군. 여러 가지 독(毒)을 한꺼번에 복용했음에 틀림없어."
그는 눈길을 시녀 쪽으로 돌렸다.
시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시녀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백무영이 뭔가 따져 묻고자 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다. 그 아이는 열두 가지 극독을 한꺼번에 복용했다."
자색 광휘에 휘어 감긴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 순간, 시녀는 썩은 짚단 허물어지듯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돌입했다.
오체투지란 전신을 쫘악 펴고 이마마저 땅에 대는 배례법이다.
오체투지의 절을 받는 사람은 제왕(帝王)이나 활불(活佛)에 지나지 않는
다.
"왕… 야(王爺)!"
시녀는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백무영은 자색 궁장을 걸친 추녀가 다가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얼굴은 여신상의 얼굴이 아닌가?'
자색 궁장을 걸치고 허리에 비봉도(飛鳳刀)를 찬 채 다가서는 여인은 당
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는 바, 그녀의 얼굴은 백무영에게 혐오감을 준 바
있는 여신상의 얼굴과 판에 박은 듯 같았다.
그녀는 백무영 바로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내가 사밀여후(邪密女后)이다."
사밀여후.
변황의 이대 실력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는 외부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
은 신비인이다.
기인이보의 산(山) 속에 머물러 산다는 천녀(天女)로 소문나고 있던 사밀
여후가 일세의 추물일 줄이야?
사밀여후의 눈에서는 벽록색(碧綠色)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강한 마공을 익히고 있다.'
백무영은 사밀여후가 중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절정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밀여후가 자신을 쏘아보자, 포권지례를 취했다.
"여후를 처음 뵙겠습니다."
"호호호… 내 이름을 듣고도 무릎을 굽히지 않다니… 호호! 배짱이 두둑
한 자군."
사밀여후는 둥둥 떠서 다가섰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사십칠 세. 일개 여인이기는 하되, 백무영보다도 당
당한 체격을 지니고 있다.
백무영은 그녀의 신체에서 뿜어 내는 엄청난 기세를 느꼈다.
그는 숨이 막히는 듯한 질식감 속에서도 의연한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사밀여후는 건방지다는 눈빛으로 백무영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모특나가 천여 리 밖에서 신의를 초빙해 왔다 하였지만 별로 탐탁치 않
게 여겼는데, 뜻밖의 인중룡(人中龍)이로군."
"과찬이올시다."
"호호호… 네가 누구든 난 상관하지 않아. 중요한 건 저 아이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경우 신선이 될 것이며,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찢겨져 죽는다는
것이지."
"으음……."
"이미 여러 명의 의생 나부랭이가 찢겨져 죽었다. 그 자들은 모두 사기꾼
이다. 나는 네가 사기꾼이 아니고 진짜 의원이기를 바란다."
사밀여후의 눈빛은 보다 강렬해졌다. 그녀는 초조와 긴장감에 휘어 감겨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백무영은 그녀가 아무리 포악히 말하더라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뿌예지지 않는 심연(深淵)의 빛깔이 이러할까?
사밀여후는 백무영에게서 하해(河海)의 깊고 오연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
다.
'보통 놈이 아니군.'
사밀여후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백무영의 왼맥을 낚아챘다.
"무, 무슨 짓이오?"
백무영이 놀라 소리칠 때, 백무영의 곡지혈(曲池穴)을 타고 강한 진기의
힘이 흘러들었다.
그녀는 백문영이 내공을 지니고 있는가 위심하고 진기를 흘려 보내는 것
이다.
"으으……!"
백무영은 일부러 신음을 내었고, 사밀여후는 진기가 백무영의 몸에서 흩
트러짐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곡지혈에서 손을 떼어 내며 손을 휘저었다.
"요즘 신경이 날카로와졌기에 사람을 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의심이 생
기지. 네가 혹시 자객이 아닌가 걱정하여 무공을 시험해 본 것이다. 호
호! 얼굴이 누렇게 뜬 백면서생이 일류고수가 아닐까 겁을 내다니… 나
도 늙었나 보군."
그녀는 백무영에게 품었던 일말의 의구심을 모조리 지우게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백무영에게 천만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밀여후는 거대한 태사의(太獅椅) 위에 걸터앉았고, 손에는 봉황옥홀(鳳
凰玉笏)이 쥐어졌다.
신민(臣民)의 수가 극소수이기는 하나, 일국을 이룩하고 있는 사밀여후를
수십 년 간 이끌어 온 여황(女皇)다운 권위가 느끼어진다.
"난 몽고의 제왕(帝王)을 섬기던 여인이지. 제왕이 사망하신 이후, 어떤
남자도 섬기지 않고 얼굴을 뭉개어 버리고 성녀(聖女)가 되었지. 호호!
난 제왕을 제외한 모든 남자를 무시한다."
그녀가 제왕이라 여기는 인물은 철목가(鐵木家)의 대성황(大聖皇)이리라.
그는 바로 성길사한(成吉思汗).
그는 대륙을 정복한 천년의 패자가 아니던가?
그가 죽은 지 이백여 년. 한데 사밀여후는 그를 섬기는 여인이었다 하니,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성길사한의 묘(廟)를 지키는 성녀(聖女)의 역할을 하였던 여인이
었을지도…….
"사밀왕부는 위축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대사막과 초원지방은 변란의 소
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지."
"변란이라면?"
"피보라를 바라는 악마가 있다. 그 자는 철목선풍(鐵木旋風)이라는 자이
지. 호호! 그 자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대사막의 지배자가 되고자 한
다. 그 자는 이미 가공한 세력을 이룩했으며, 사밀과 몽고를 한꺼번에 허
물어 뜨리고자 한다. 그 자는 미쳤어. 그 잔 스스로 제이의 철목진(鐵木
眞)이라 여기고 있으며, 어리석은 유목인들은 그 자가 철목진의 환생이라
여기고 추종한단 말이야."
철목선풍.
백무영도 몇 차례 들은 바 있는 이름이다.
철목선풍은 몽고왕야 묵탑과 격돌하고 있는 인물이며, 지난 겨울부터 사
막 일대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군소부족을 규합하여 거대세력을 이룩하였으며, 기존의 세력을 하나
하나 흡수하는 가운데 절대자로 군림해 가고 있었다.
소문에 의한다면, 그의 무공은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도달하였으며, 검술
의 경지는 어기비검(馭氣飛劍)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의 일 검 일 장을 받아 내지 못하며, 이미 오백여 명의 대막영
웅(大幕英雄)이 그에게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백무영은 대막의 세력판도에는 관심이 없는지라, 철목선풍이라는 자가 어
떠한 짓을 저지르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데, 오늘 자신이 피납되어 온 일과 철목선풍의 등장과 연관이 있는 것
이다.
"사밀과 몽고가 하나로 뭉쳐야 그 자를 꺾는다. 저 못난 계집을 살리는
일은, 그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흘 안에 저 계집을 살려야 한다. 살
리지 못한다면, 너는 피떡으로 뭉개어진다. 넌 우리들이 선택한 마지막
의원이다."
사밀여후의 눈길이 보다 사악해졌다.
백무영은 많은 여장부를 알고 있다. 그들의 기도는 남다른 바 있었다.
하지만 사밀여후만한 기도를 보여 준 여장부는 없었다.
'일국을 다루는 인물답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의 목숨을 좌
지우지하는 태도는 못마땅하군.'
백무영은 울컥 의기가 일어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사밀여후의 일 장도
받아 내지 못할 처지에 불과한 것이다.
"네가 필요한 걸 무엇이든 대 주겠다. 뭐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암중에
이 곳을 보호하고 있는 세 명의 노호법(老護法)이 네게 모든 걸 갖다 줄
것이다. 명심해라. 다른 마음을 먹다간 즉사한다는 것을!"
사밀여후는 냉막히 말하며 일 장을 쳐냈다.
쿵-!
둔중한 파괴음이 일어나며 수정벽에 장인이 깊게 찍혔다.
수정 가루가 분분히 피어 오르는 가운데, 사밀여후의 몸뚱이가 둥실 떠올
랐다.
그녀는 자욱한 향기를 가르며 날아올라 암문 뒤로 사라져 버렸다.
백무영은 다시 진맥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괴여인이 열두 가지 독에 당하였으며… 독은 입을 통해 목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 내장을 녹여 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괴소녀의 입 안에는 비둘기 알만한 우윳빛 구슬이 물리어 있다.
그것은 피독신주(避毒神珠)로, 그것을 물고 있는 한 독기가 억제된다.
백무영은 한 시진 정도 진맥하다가 피독신주로 인해 괴소녀의 병세가 악
화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피독신주는 양(陽)의 기운을 갖고 있다. 여인은 자고로 음(陰)의 기운을
지니고 있지. 피독신주의 양기가 여인의 원초적인 음기를 제압하기에, 독
기가 더욱더 깊이 파고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피독신
주를 제거한다면, 이 여인은 독에 녹아 버린다.'
백무영은 여러 가지 해독약을 생각해 봤다.
해독약을 제조하는 과정은 꽤나 복잡하다. 그리고 약재를 모조리 구입한
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백무영은 이것저것 골똘히 생각하다가 허공에 대고 외쳤다.
"필요한 물건이 있소!"
"말하시오!"
허공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누군가 백무영이 볼 수 없는 장소에서 백무영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오풍초(烏風草)와 천년설련실(千年雪蓮實)이 필요하오. 그리고 잔(盞)이
하나 필요하오."
"기다리시오!"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금빛 그림자 하나가 병풍 뒤에서 떠올랐다.
검은 그림자는 찰나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얼마 후, 백무영은 누군가 안으로 접어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는 하되, 감각은 여전하다.
그는 육감으로 금의인영이 다시 나타난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앞으로 상자 하나가 사뿐히 날아 내렸다.
상자 뚜껑은 열려 있는 바 그 안에는 오풍초와 천년설련실, 그리고 커다
란 금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풍초는 구하기 힘든 것인데…….'
백무영은 사밀왕부의 저력에 대해 저으기 감탄하게 되었다.
'저 여인을 구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독제독(以毒
制毒)의 방법. 훗훗, 내게는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독(毒)이 있고또한 가
장 강력한 해독제가 있다.'
백무영은 회심의 미소가 지으며 두 가지 약재를 짜서 즙으로 만들었다.
방 안에는 여러 가지 도구가 마련되어 있는지라, 작업하는데 어려움이 없
었다.
잠시 후, 백무영은 곤옥(崑玉)으로 깎아 만든 소도(小刀)를 손에 쥐었다.
그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있었으며, 잔을 팔뚝 아래 놓았다.
'그것은 바로 나의 선혈이다!'
그는 곤옥비수로 팔뚝을 베었다.
핏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며 두 가지의 약즙이 담긴 잔 가득히 핏물이
고이게 되었다.
백무영의 핏속에는 마박이 물려 준 독혈(毒血)이 담기어 있다.
솔직히 백무영이 법륭사에서 신의로 소문나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의 피는 천 가지 독을 없애는 해독제인 것이다.
그는 피가 가득 든 잔을 들고 침상가로 다가갔다.
그 때, 여인이 처음으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쩍쩍 갈라진 입술을 벌렸으며,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날… 죽게 내버려둬요. 날 살린다 하더라도… 그대는 죽고 맙니다."
"아……?"
백무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난 살고 싶지 않아요. 난 악마의 부인이 될 수 없어요. 왕야는 날 악마
에게 시집보내려 합니다. 묵탑… 그는 악마입니다. 그는 이미 수십 명의
첩이 있는 자. 으으, 그런 색마에게 시집가는 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일
이에요. 부디 저를 죽게 해 줘요."
여인이 애절히 말할 때, 백무영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대는 흑란(黑蘭)이군! 이제야 알다니……."
누워 있는 여인은 흑란이었다.
남장을 입고 난주에 와서 백무영에게 술을 사 달라고 했던 미소녀.
그녀가 자살하기 위하여 독을 먹고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다.
"제발 날 죽게 해 줘요."
흑란은 백무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력이 희미해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소중한 것, 이유는 목숨이 소중하기 때문이지.'
백무영은 삶과 죽음의 쌍곡선 사이를 걸어왔다. 그는 누구보다도 죽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조용히 잔을 흑란의 입가에 대었다.
"마, 마시지 않겠어요. 난 죽어야 합니다."
"살아야 하오."
"으으, 제발… 날 이대로 죽게 놔 둬요. 난 묵탑 같은 악마에게 시집갈
수 없어요."
흑란은 강제로 묵탑왕의 첩으로 내정이 된 것이며, 사흘 후 결혼식이 거
행될 예정이었다.
흑란은 묵탑왕을 끔찍히 혐오하고 있기에, 그와 결혼하느니 가출하리라
작정하고 가출을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잡히게 되자, 이번에는 죽을 작정을 하고 약왕고로 숨어 들
어가 열두 가지 독약 병을 깡그리 비워 버린 것이다.
백무영은 흑란으로 인하여 죽을 위기에 빠진 바 있다. 하지만 흑란을 원
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흑란은 그에게 따스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해 준 여인인 것이다.
'무공이 없어 구하지 못하는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
백무영은 착잡히 여기며 잔을 기울이고자 했다.
흑란은 입술 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입을 꽈악 다물고 있는 한, 잔 속의 혈액을 흘려 넣을 수 없다.
백무영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품안에 손을 넣어 베수건을 꺼냈다.
베수건에는 작은 물체가 쌓여져 있었다.
그는 지키는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게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물건을
흑란에게 쥐어 주었다.
"이건 낭자의 물건이니, 돌려드리겠소."
"아, 이것은……."
흑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잔 속의 혈액이 흑란의 입술 속으로 모조리 흘러들었다.
잔은 곧 텅 비어졌으며, 흑란의 목구멍에서 꾸르륵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약기운은 지극히 강렬한지라, 그녀는 즉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백무영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침갑(針匣)을 열어 삼백육십 개 혈도에 꽂
았다.
침을 타고 검은 피고름이 흘러 나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흑란의 얼굴
이 제 빛을 찾게 되었다.
백무영은 하루 종일 흑란을 치료하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처음보다 더 부시시해졌다.
그러나 그는 피로함이 아니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속에 복수의 검을 갈고 있는 백무영이지만, 죽어 가는 목숨을 살리
게 되었다는 정신적 포만감에 겨워 인간의 미소를 입가에 짓는 것이다.
흑란의 얼굴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이며 딸깃빛 입술이 고름 덩어리 속에서 제 모습을 나타내는
걸 본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백무영은 흑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숙위통령인 금면
낭낭 모특나가 다가섰다.
모특나는 경장을 걸치고 있었으며, 등 뒤에 두 명의 여나찰을 대동하고
있었다.
여나찰은 흑란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모처로 이동되리
라.
모특나는 백무영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빨았다.
"큰 기대는 않았는데, 대단하군요. 그대는 가히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입
니다."
"과찬의 말이오."
백무영은 머리카락은 손바닥으로 빗어 넘겼다.
그의 오똑한 콧날이 우람한 남성미를 느끼게 했다.
'애석한 일이다. 여후가 그렇게 결정하다니…….'
모특나는 애절한 눈빛으로 백무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참 까만 눈빛을 빛내다가 대뜸 말을 건넸다.
"함께 갈 데가 있어요."
"어디를?"
"호호… 가 보면 압니다."
모특나는 백무영의 완맥을 낚아채고 경공을 펼쳐 빠르게 움직여 갔다.
백무영은 몸이 붕 떠오르는 가운데도 흑란을 바라봤다.
흑란은 업혀 이동되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뒤덮다 못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 그러나 난 늘 흑란의 아름다운 얼굴을 기억하고
있겠다!'
백무영은 암굴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사밀왕부의 북쪽 칩실 리 지점, 단장애(斷腸崖)라는 절벽이 서 있다. 단장
애 위쪽은 만년빙(萬年氷)에 뒤덮여 있었다.
백무영은 모진 눈보라 가운데 모특나와 마주 보게 되었다.
모특나의 어깨 위로 눈발이 쌓였다.
모특나는 한참 동안 백무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애절한 갈망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난 사내들을 경멸해 왔어요. 솔직히 세상이 남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걸
증오하고 있지요."
"왜 그런 말을?"
"솔직히 말해 그대를 꽤나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영무선생."
거위털 같은 눈발이 분분히 날리는 가운데 모특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
랐다. 그녀는 백무영보다 열 살 이상 연상인데, 백무영에게 연정을 느끼
게 된 것이다.
"내 감정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귀하가 이제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길?"
"하나는 생로(生路), 하나는 사로(死路)예요. 사실, 왕야는 비밀을 유지하
기 위해 귀하를 죽이고자 합니다. 난 귀하를 죽이기 위해 이 곳에 데리고
온 겁니다. 이 곳은 일컬어 빙하지곡(氷河之谷). 천 년 넘게 얼음에 뒤덮
인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빙하지곡은 사막의 기적이다.
다른 곳은 열사(熱砂)이거늘, 이 곳만은 늘 극한의 한기에 휘감기어 있으
며 만년설이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곳이다.
"내가 사는 길은?"
백무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인생의 침전은 그의 감정을 단단한 화석(化石)으로 굳게 한 것이리라.
"나와 함께 도망치는 길입니다. 천축(天竺)에 가요. 가서 함께 새로운 삶
을 누려요. 난 능력이 있는 여자니까, 그대를 봉양할 수 있을 거예요. 솔
직히 이 곳을 떠나면 너무나도 많은 걸 잃게 되는 거예요."
모특나의 가슴이 바짝 다가섰다.
봉긋한 육봉이 백무영의 앞가슴에 조용히 밀착되어 왔다.
무르익은 여체가 주는 나긋나긋한 촉감이란, 처음으로 비단 이불을 덮고
자는 기분과 비슷한 것이다.
모특나는 상당히 흥분하고 있었다.
백무영이 바란다면, 이 자리에서 등에 차가운 눈을 깔고 백무영을 위해
허벅지를 열어 주는 일을 서슴지 않으리라.
"함께 가요. 나의 색노(色奴)가 되어 줘요. 아니, 나의 남편이! 난 남자에
굶주렸어요."
모특나의 슴결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백무영의 남성미에 정신이 녹아 버
린 것이다.
실로 화끈한 유혹의 순간이다.
백무영은 문득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느꼈다.
그녀의 말이 사심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기에, 그리고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힘든 길이기에 스스로도 도피하고 싶다는 충동
이 어느 정도는 있기에.
하지만 모특나를 위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모특나는 모르지만, 모특나를 추적해 온 자들이 있다.
그들은 모특나가 백무영을 제거하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은밀히 추적해 온
것이다.
그들은 근처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백무영은 본능으로 그들이 흘려 대는 살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승낙하면, 모특나는 나와 함께 죽는다!'
백무영은 입술을 질겅 물었다.
"난 늙어 빠진 계집관 살을 맞대는 걸 싫어해."
그는 애써 거칠게 말했으며, 뜨겁게 흥분된 모특나의 숨결에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눈보라가 주는 한기보다 더한 냉기가 숨결에서 스미어 나왔다.
그녀는 감당하지 못할 모욕감에 전율하는 것이다.
"천한 잡종 놈! 죽어랏!"
모특나는 치를 떨며 일 장을 후려갈겼다.
살기 서린 음풍수(陰風手)가 백무영의 가슴에 부딪치는 찰나 폭음이 터져
나왔으며, 백무영의 몸뚱이는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떠올랐다.
그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끌며 자욱한 안개에 휘어 감긴 빙하의 골짜
기로 떨어져 내렸다.
모특나는 자지러지는 얼굴을 하고 절벽 끝으로 다가섰다.
"바, 바보… 바보!"
스스로를 증오하는 것인지, 백무영을 증오하는 것인지 모를 말이다.
모특나는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사밀왕부의 불청객은 이렇게 사라진 것이다.
하루의 인연은 속절없이 과거로 파묻힐 것이다.
모특나는 어깨 위에 눈이 한 치 넘게 쌓일 때까지 움직일 줄 몰랐다.
그녀는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가 된 듯 우두커니 서 있었으며,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은 얼어붙어 두 줄기 흰 선을 그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