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만일,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한무리의 태양의 광휘가 일었다면 그 존재는 유난히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지금의 경우도 바로 그러했다. 한 무리의 태양광이 솟아나듯 나타나자 모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연히 시선을 돌리게 되었으며 그들은 저마다 눈이 부심을 느꼈다.
그 악마상도 마찬가지여서 그 놈은 마악 남궁벽을 끝장내려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고 악독한 마소를 흘렸다.
"크흐흐...... 죽고 싶은 놈이 또 하나 있군."
눈부신 태양광...
그 가운데에는 알고 보니 한 사람의 절세 준미한 백의서생이 장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치 성자를 보는 듯한 그는 다름 아닌 백상인이었다.
그는 장내의 상황을 살피면서 예의 그 신비노인의 출현을 기다렸었으나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흘러가자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쳐나왔던 것이다.
백상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요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 마공을 거두시오. 그것은 사람의 심성을 해치는 것이오. 만일 그런다면 나는 당신을 살려줄 수도 있소."
"크카카카......"
악마상은 괴소를 터뜨리더니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으로 말했다.
"허튼 소리마라. 네가 어떻게 감히 나를 살리고 죽일 수가 있단 말이냐?"
백상인은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럼...."
말과 동시에, 홀연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태양광이 일제히 폭출되어 일순 사방의 어둠을 깨뜨려 버렸다.
"카아아악......"
그 바람에 악마상은 갑자기 괴로운 괴소성을 터뜨렸다.
백상인은 미소하며 말했다.
"어떻소? 이제 나의 말을 믿겠소?"
그 말에 악마상은 일순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교활하게 눈알을 굴리면서 남궁벽의 전신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앗! 맹주......"
불성십이무왕 등은 놀라 소리를 질렀고, 남궁벽은 온몸의 기력이 다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된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기력이 쇠잔해진 것 같았다. 악마상은 그의 몸을 집어 들더니 흉측한 입 근처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흉악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자를 살리고 싶으면 꼼짝마라! 그리고 너는 자결해라!"
이 광경에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했다.
"정말 마성이 골수에 든 자로구나. 어쩔 수가 없다!"
"어떻게 할 테냐?"
악마상은 입을 크게 벌리면서 위협했다.
백상인은 가볍게 탄식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네가 초래한 바이니..."
말과 동시에, 돌연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태양광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화르르르륵......!
마치 하나의 거대한 빛무리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또한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악마상이 이것을 발견하고 입을 크게 벌려 남궁벽을 삼키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 가공할 빛무리가 그의 전신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케에에에엑......!"
소름끼치는 단말마, 그와 함께 거대한 악마상이 거짓말처럼 터져나갔다.
꽝! 콰우우우......
그 파편들이 터져나가자 환각처럼 거기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짓이겨진 참혹한 혈육이 하나 누워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는 황천길로 떠나버린 신도운악의 시신이었다.
마도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먼저 동생인 신도운형을 무맹에 파견하고 뒤이어 자신 스스로가 가공할 무예를 연마하기까지 온갖 심혈을 다 바친 그 그의 최후는 이렇듯 허망하고 초라했다.
장내는 다시 옛모습을 되찾고 환한 대낮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대세를 짐직하고 달아나려던 지옥이로와 세외의 구마들이 무맹의 원로들과 불성십이무왕 그리고 오노사 등에게 포위되었다.
남궁벽의 몸을 살펴본 뒤, 제갈박이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찌 그리 급하게 가려고 하시오? 우리는 좀 더 볼일이 남은 것 같은데?"
지옥이로는 연신 사방을 둘러보며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상인의 기이한 무예에 대한 경악감과 신도운악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실의보다도 그 얼굴에는 일종의 알수 없는 의문과 회의감이 감돌고 있었다.
"뭘 그리 살피는가? 당신들의 희망은 이제 모두 사라진 것 같은데?"
제갈박이 다시 말하자, 지옥천로는 안면을 흉측하게 일그리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기고만장(褶俗?晙)할 것 없다. 내 분명히 말하지만 네놈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잠시 후면...."
제갈박은 그에게 다가들며 조소를 흘렸다.
"잠시 후라? 그때가 오겠소? 당신은 그전에 당신 상전을 따라가야 할 텐데."
지옥천로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뿌드득! 너는 나를 왜 죽이려고만 하느냐? 나는 당연히 포로로 될 수도 있는데?"
제갈박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과거와 같은 오류를 다시 한번 되풀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과거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오늘과 같은 살륙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흔히 일벌백계(一罰百戒)라고들 하지."
"악독한 놈들!"
지옥이로는 다시 한번 이빨을 갈아붙이더니, 문득 사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정말 지금 너희들의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가 없다. 특히 저 너희들의 동조자는.. 그래서 얘긴데 우리에게 시간을 달라. 더도 말고 일각의 시간만.."
그가 말한 동조자란 바로 백상인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때 백상인은 남궁벽의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남궁벽은 다행히 약간의 내상과 기력이 탈진되었을 뿐 큰 상세는 없었다. 아마 신도운악이 펼친 암흑장의 마력에 의해 전신의 기력이 모두 빨려나간 것 같았다.
제갈박은 백상인은 힐끗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당신들은 너무 위험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줄 수가 없어."
지옥이로는 안면을 흉악하게 일그렸다.
"악독한 놈들! 너희들이 정파를 자처하나 죽는 사람의 소원도 못 들어준단 말이냐? 나는 이대로 죽게 된다면 제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때, 마악 남궁벽의 응급조치를 끝낸 백상인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음, 그럴 텐가?"
제갈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조금 전의 그 백상인이 보여준 신위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관념이 매우 많이 변해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백상인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무예를 소유한 무림의 일대구성이요, 절세의 기재인 것이다.
제갈박은 지옥이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그러나 시간은 앞으로 꼭 일각뿐이오."
"흐흐, 여부가 있겠느냐. 만약 일각이 지난다면 나는 그 즉시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할 것이다. 물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하여, 지옥이로를 비롯한 십일 명은 장내의 중앙에 둥그렇게 모여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일각의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들 열한 명의 안색은 어느 정도의 기대와 희망, 그리고 백상인 등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안색은 눈에 띄게 변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시간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것은 당사자에게 말할 수 없는 초조감과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대체로 이러한 상상 못할 공포를 견디어낼 사람이 있을까?
마침내, 그 일각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지로는 그 일각의 시간을 다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며 신형을 움직였다.
"빌어먹을! 우린 그자에게 속았어!"
서로 뜻이 통하는 쌍둥이답게 지옥천로도 똑같이 신형을 날렸다.
스스슷.....
"나중에 봅시다..!"
그것을 바라본 나머지 세외구마들도 거의 동시에 뒤따라 신형을 움직였다.
휘휘휘휙....!
원래가 강호경험이 노련한 노마들인지라, 그들이 달아나는 방향은 서로 달라서 무맹의 인원들로 하여금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자연 불성십이무왕 등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여기에서 그들을 놓치면 차후 어디에서 그들을 잡을 것이며, 특히 세외의 구마들은 차후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보복을 감행해 올시 그 문제가 결코 가벼울 수가 없는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 번.....쩍......
한무리의 금빛 광채가 현란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백상인이 나선 것이다.
순간, 사방으로 날아가던 열한 명의 마두들은 일순간 멈칫하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크아아악...!"
마치 합창을 하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들의 육신은 그대로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땅에 닿기가 무섭게 그들의 육신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푸스스스.....
그것은 한 인간으로 볼때 참으로 허망한 종말이었다.
전체 무림으로 볼 때에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짝짝짝짝....
제갈박은 박수를 치며 백상인은 칭찬했다.
"대단하네. 자네는 정말 대단하이."
"과찬의 말씀입니다."
백상인이 겸사의 말을 하자, 홀연 십이원로들이 나서서 제갈박의 말을 거들었다.
"지나친 게 아니야. 훌륭한 것은 그대로 인정을 해야 마땅하지. 흘흘...."
"아미타불, 무림의 구성이외다. 노납은 여태 시주같은 기재를 본적이 없소."
"기린아(麒麟兒)야, 그는. 이로써 무림은 또다시 평화를 되찾게 되었소."
"무량수불, 우리 무당파는 시주의 공덕을 기리 기릴 것이오."
이때, 겨우 기력을 절반쯤 회복한 남궁벽이 일어서며 말했다.
"하하.. 이제는 무림맹주직을 자네가 맡아야 하지 않을까."
백상인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저는 맹주가 될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맹주님이 계시는데 제가 감히....."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 그럴 줄 알았네. 무림맹주의 직위마저 짐으로 여기다니, 역시 자네답네. 헌데 아까의 그 기이한 무예는 언제 연성한 것이지?"
"가전의 무예입니다. 지난 삼년간 연성한 것이지요."
"가전이라.. 그럼 바로 백가신화가 아닌가?"
남궁벽은 감탄을 거듭하며 말했다.
"역시 용의 새끼가 이무기일 수가 없듯이 자네의 백가신화는 정말 위대하네."
이 말에 백상인은 정중히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지나간 저의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의 하나였지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걱정이 되는 것이라니, 그게 대체 뭔가?"
남궁벽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는 방금 전에 세외의 아홉 마두들을 죽인바 있습니다. 헌데 이 일로 그를 세외세력이 중원을 넘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화를 불러들인 것이 아닐지요?"
"하하, 겨우 그 문젠가?"
남궁벽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을 말게. 그놈들은 모두 언젠가 없어져야 할 놈들이었으니 하늘도 결코 자네를 꾸짖지는 않을 것일세."
제갈박도 나서서 말했다.
"그 말이 맞네. 그리고 그들 무리들은 일단 절대자가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좋아하게 되어 있지. 자신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로 권력 확보에 여념이 없을 걸세. 왜냐하면 그들의 체계는 정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걱정을 덜겠습니다."
백상인은 그에게 깍듯이 예를 표하고 답례했다.
"하하, 설혹 그들이 감히 헛된 생각을 하더라도 자네만 있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 아닌가? 핫핫, 자 이제 모든 것이 종결된 듯 하니 이만 떠나기로 할까?"
남궁벽의 말에, 그들 모두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듯 했다. 주위는 조용했고, 더 이상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대종사인 신도운악이 죽은 지금, 이미 모든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허나, 한 가지 의문은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 지옥이로 등은 도대체 누굴 기다린 것일까? 그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회의와 의문을 가진 채 죽어가야 했던가? 이 수수께끼는 정말로 답답하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더욱이 백상인의 경우는 그 답답한 기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했다. 그는 이 배후의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신비노인은 어디로 왜 사라졌으며, 또 언제쯤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일행은 서서히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이곳의 일은 종결되었지만 아직 산 아래의 격전은 미지수인 것이며 당연히 분초를 다투어서 그들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악마봉의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며 내부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헌데, 그때였다.
마악 신법을 펼쳐 저마다 신형을 날리려던 그들은 일순 흠칫하며 신형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가?
산 아래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어느 바위의 위, 마치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사람 하나가 그곳에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그가 워낙 사람 같은 느낌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겨우 이제서야 그를 발견했었는지도 모른다.
노인(老人).
그는 이번엔 평범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백상인은 누구보다도 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가 찾고자하던 바로 그 신비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안녕들 하신가?"
노인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신비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심 그 음성에서 일종의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고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노인의 그 기이한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으며 용모 또한 선량해 보이고 아릅답게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평범한 마의를 걸쳤지만 노인의 용모는 정말 신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서 그 누가 사악한 기운을 읽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보면 볼수록 노인의 온화하고 어린아이처럼 해맑으며 부드러운 안색은 선량하고 평온한 안식과 믿음을 주는 것이었다.
남궁벽은 앞으로 나서서 포권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노선배께선 누구십니까?"
노인은 은은히 미소하며 대답했다.
"자네들이 찾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일세."
"예....?"
남궁벽은 일순 의아해졌다.
자신들이 현재 찾고 있던 사람이 있었던가?
남궁벽은 일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은 다시 말했다.
"자네는 지옥이로 등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는가?"
남궁벽은 이 노인의 말이 더욱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제가 어찌 알 수가..."
이때, 노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게 바로 나일세..."
"......"
남궁벽은 가볍게 경악했다.
지옥이로 등이 최후에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그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와 그들과의 관계는 대체 어떠한 것일까? 남궁벽이 내심 크게 곤혹해 하고 있을 때, 노인이 다시 물었다.
"자네는 신도운악의 사부가 누군 줄 아는가?"
이 물음에 의해서 남궁벽은 퍼뜩 머리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남궁벽은 경악하며 물었다.
"그럼 그 최후의 절기를 전수해 준 사람은 바로....?"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장난삼아 한수 가르쳐 봤지."
"그, 그렇다면....."
남궁벽의 안색이 대변했다.
대체 이 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노인이 정말 신도운악의 사부라면 그들과는 이미 적이 된다.
"자넨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실로 그러했다.
이 노인과 그 공포스러운 저주의 악마절학과는 어떻게 연관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남궁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선배님께서는 제자의 복수를 하러 오셨군요?"
그런데, 의외로 노인은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자네는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듣는 군."
".....?"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내가 신도운악에게 한수 가르친 것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고. 따라서, 나는 그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네. 자네는 내가 일이 바빠서 미처 그 애들을 구해주지 못했는 줄 아는가?"
"......"
"내게 있어서 그들은 단순히 시험도구일 뿐이고, 일단 시험이 끝난 지금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네. 나는 일부러 자네들이 처리해주길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제야 남궁벽 등은 아까 지옥이로 등이 회의와 불신의 표정을 짓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끝까지 이 노인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모든 의리와 인명, 그리고 사제지간의 정분마저 간단하게 버리는 이 노인의 말은 그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런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남궁벽은 내심 치솟는 한기를 느끼며 물었다.
"노선배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왜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가? 그런 비인도적인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그리고 괴물 같은 당신은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남궁벽은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노인이 그의 마음 속을 마치 들여다본 듯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안색이 붉어진 것은 결코 수치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남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다. 그는 바로 백상인으로, 그의 무예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초월한 가공무쌍한 것이었다. 만일 그 경지를 그가 이번에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노인 또한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고 있으며 그에게선 백상인보다도 더한 일종의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현 무림의 맹주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모두 그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전혀 속수무책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의 당혹감이란 일종의 자괴의식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남궁벽을 바라보며 노인은 말을 이었다.
"나의 주의는 이른바 도에 있네. 도에 합당하다면 모든 일이 옳고 만일 도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적으로 생각하지...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도성이라고 하네. 아니 도마라고도 부르지."
"......"
"그리고 나는 천축에서 왔다네."
천축.
이것이 주는 의미는 매우 컸다.
과거 백가신화에 전해진 광검도 실은 천축에서 전해진 것이라 하지 않던가?
듣고 있던 백상인은 내심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설마 했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노선배께서는...."
남궁벽이 다시 입을 열었으나 노인은 그의 말을 잘라 대답했다.
"내가 중원에 온 이유는 나의 도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네. 나는 중원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험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일 뿐이네."
"......!"
시험대상으로 삼는다.
그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단순히 정복이란 말은 인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이란 말은 그대로 악마의 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를 시험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단 말인가? 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것의 주된 목적은....."
노인은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 아이를 만나보기 위함이었네."
남궁벽은 한순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이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백상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상인이 어떠한 존재인가?
그는 그야말로 남궁벽 그 자신이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무림최고의 보물이 아닌가?
그러나, 아직은 미완성의 보물이었다.
비록 상상불허의 성취를 이미 이루고는 있지만 앞으로 그는 무한한 성취를 이룰 것이 분명하며 그로인해 차후 강호 무림의 앞날은 찬연히 피어날 것이다.
지금껏 말은 안했지만 남궁벽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자신의 목숨 이상이었다.
공인.
사람이되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힘을 합해서 목숨이라도 버려가면서 지켜야 할 이 땅위에 가장 중요한 존재, 백상인은 바로 그러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남궁벽은 일순 말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즉시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는 아직 어리니 모든 일은 소생이 책임지겠습니다."
남궁벽은 단호한 음성을 흘려냈다.
헌데 그때,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맹주님!"
바로 백상인이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가?"
"예......"
"자네는 결코 자네 혼자만의 사람이 아님을 명심하게."
"저는 충분히 강합니다, 맹주님!"
남궁벽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그가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 세월동안 강호 최대의 기린아로서 알려져 왔던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부쩍 늙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조심하게."
"예."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노인 즉 도마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