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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여름에 갔었던 서봉사지
며칠 전 검색 중에 용인 수지에 있는 서봉사지의 발굴 소식이 있었습니다. 2013년부터 시작한 발굴이 올해 4차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마침 꼭 3년 전인 지난 2013년 7월에 서봉사지를 답사했던 적이 있어서 그때의 답사기를 올려 봅니다.
기사에 보니 현재는 발굴이 많이 이뤄져서 지금의 모습은 발굴을 시작하던 3년 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참고 문헌 : 「용인 서봉사지 - 시굴 및 1차 발굴조사」- 2015. 용인시, 한백문화재연구소
용인서울간고속도로에서 본 광교산. 왼쪽부터 형제봉, 비로봉, 광교산이 능선으로 이어져 있고, 가운데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광교산 남동쪽 중턱에 서봉사지가 있다.
- daum지도 로드뷰 캡처
용인 수지
나라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은 골리앗도 이런 골리앗이 없다. 주변에 신도시 하나쯤 뚝딱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일산, 분당, 평촌, 중동 등으로 시작한 신도시 건설의 햏렬은 끝도 없이 외곽으로 외곽으로 수도권을 확장해 나간다. 근래에도 판교, 교하, 광교 같은 곳들이 속속 새로운 도심으로 변모했다.
용인의 북쪽 끝에 있는 수지는 경부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동쪽의 죽전과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수지도 90년대 후반부터 개발이 되더니 어느덧 아파트촌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수지면이던 지명도 이제는 용인시 수지구가 되었다.
근래에는 수지의 남서쪽에 수원의 광교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수지의 상현지구가 서로 맞닿아서, 이제는 영동고속도로가 아파트촌 사이로 지나간다.
수지에는 정암 조광조의 묘와 정암을 모신 심곡서원이 있어서 수지의 명소였는데, 심곡서원 주변이 아파트로 둘러 싸이더니 최근 마지막 남은 서쪽 산자락마저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어, 이제는 심곡서원에서 사방을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아파트뿐이고 서쪽으로 불과 300여m 떨어진 정암선생의 묘소도 아파트로 막히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살아남았던 서원과 정암의 묘소는 꿈에그린아파트에 막혀서 서로 꿈에나 그려야 하려나 보다.
광교산 자락의 서봉사지
수지의 서쪽은 광교산으로 막혀 있고 광교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은 정평천을 이뤄 탄천으로 흘러간다.
이 정평천 주변은 신봉동이라고 아파트촌이 빼곡한데, 이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오래된 절터인 서봉사지와 그곳에 남아 있는 현오국사비가 있다.
신봉동(新鳳洞)이란 지명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신리(新里)와 서봉동(棲鳳洞)을 합치면서 한 글자씩을 따서 신봉리(新鳳里)라 한데서 유래된 것이며,
이전의 서봉동이란 지명은 서봉사에서 나온 것이 분명 할 것 같다. 혹은 광교산의 다른 이름인 서봉산(棲鳳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절 이름이 산 이름에서 유래 되었는지, 반대로 산에 절 이름이 붙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정평천을 따라 양쪽에 들어선 신봉지구 아파트촌이 끝나고 용인서울간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면서부터는 길가에 온갖 음식점들이 쭉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어느 덧 계곡 속으로 들어선다.
계곡이 거의 끝나가는 골짜기 깊은 안쪽에 자리한 서봉사이기에 밖에서는 절의 존재를 알 수 없어서,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는 폐사 관련 이야기가 전해오는지도 모르겠다.
다리 건너 도로가 끝나는 곳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서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서봉사지가 나온다.
계곡에 놓인 짧은 다리의 '수잔교'라는 이름이 좀 특이해서 다리의 명판을 보니, 발주자 이름이 '김수잔'이다. 뭐지? 싶었는데 좀 전에 길가에 보였던 '사유지......'란 표지가 떠올랐다. 사유지여서 다리도 개인이 놓으면서 다리 이름도 개인의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다리 이름을 보자니 철원의 유명한 다리 '승일교' 생각이 났다. 6.25를 전후해서 북과 남이 이어서 공사를 해서 이승만과 김일성에서 한 자씩을 따서 승일교라 지었다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전해졌지만, 나중에 확인된 건 다리를 완공한 공병대장이 자기 이름을 다리에 붙였다는 이야기. 그 공병대장 이름이 박승일이었다나.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그 이야기를 읽으며 허탈한 웃음이 났던 것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작은 계곡 건너면서부터가 서봉사터이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 현오국사비 비각이 보인다. 비각은 1979년도에 세웠다고 하는데 축대도 그때 쌓았을 것 같다.
절터에 오르면 깨지고 부서진 탑의 파편들이 널려있다.
경사진 산의 사면에 들어선 절터여서 전각들이 층층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본격 발굴은 아니고 수목 제거와 시굴만 진행된 상태로 보인다. 3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경사진 산자락의 절터여서 장마철에 유구와 사면의 유실을 막기 위해 비닐로 임시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서봉사지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의 광교산 자락에 있는 서봉사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광교산(582m)의 남동쪽 자락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절터에 보물 제9호인 현오국사탑비가 있어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서봉사에 창건에 관한 문헌 기록은 없으며 현장에 남아있는 현오국사탑비 비문에 대정(大定) 25년(1185년)에 왕명을 받들어 서봉사에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태종실록에 태종 7년(1407년)에 주변의 사찰들을 통폐합하면서 '서봉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고 천태종에 소속시켰다' 기록이 있다.
17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99년(정조 23)에 각도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소재·연혁 등을 기록한 책인 <범우고(梵宇攷)>에는 절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어,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서봉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1900년대 초의 기록인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사지는 밭으로 변하고 초석 수개가 잔존한다", "석비는 높이 육척 고려승 부석사주지 현오국사의 비로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다. 석탑은 14척 정도로 도괴되었다."며 폐사된 이후의 서봉사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범우고와 사탑고적고의 기록의 기간이 1세기 남짓한데 그 사이에 완전히 폐사된 연유가 궁금해진다.
한편 광교산과 서봉사 인근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각각 왜군과 청군을 상대로한 조선군의 전투가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비롯되었을 추정되는 전해오는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라거나, 청군이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위의 기록으로 보아 서봉사 폐사의 직접 원인은 아니 것으로 보인다.
서봉사지(瑞峰寺址) 2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명문 막새기와. (사진 : 연합뉴스 2014.11.24)
현재 4차 발굴이 진행중인 서봉사지의 모습.
<서봉사지 발굴 뉴스>
고려시대 절터 서봉사지 4차발굴, 드러나는 규모 - 티브로드 2016.07.19
http://ch4.tbroad.com/content/view?parent_no=28&content_no=63&p_no=8360
경사진 산자락의 절터여서 장마철에 유구와 사면의 유실을 막기 위해 비닐로 임시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서봉사지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의 광교산 자락에 있는 서봉사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광교산(582m)의 남동쪽 자락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절터에 보물 제9호인 현오국사탑비가 있어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서봉사에 창건에 관한 문헌 기록은 없으며 현장에 남아있는 현오국사탑비 비문에 대정(大定) 25년(1185년)에 왕명을 받들어 서봉사에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태종실록에 태종 7년(1407년)에 주변의 사찰들을 통폐합하면서 '서봉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고 천태종에 소속시켰다' 기록이 있다.
17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99년(정조 23)에 각도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소재·연혁 등을 기록한 책인 <범우고(梵宇攷)>에는 절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어,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서봉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1900년대 초의 기록인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사지는 밭으로 변하고 초석 수개가 잔존한다", "석비는 높이 육척 고려승 부석사주지 현오국사의 비로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다. 석탑은 14척 정도로 도괴되었다."며 폐사된 이후의 서봉사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범우고와 사탑고적고의 기록의 기간이 1세기 남짓한데 그사이에 완전히 폐사된 연유가 궁금해진다.
한편 광교산과 서봉사 인근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각각 왜군과 청군을 상대로한 조선군의 전투가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비롯되었을 추정되는 전해오는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라거나, 청군이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위의 기록으로 보아 서봉사 폐사의 직접 원인은 아니 것으로 보인다.
비신의 앞면, 하단에 표면이 떨어져 나간 손상이 많다.
사진 :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상단의 제액은 띠를 장식한 테두리안에 '증시현오국사비명(贈諡玄悟國師碑銘)' 8글자가 전서로 써있다.
비문은 당시 초서의 대가로 이름 높았던 문신 유공권(柳公權 1132∼1196)이 썼다고 하는데, 표면의 마모가 심해서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쉽다(글자가 잘 보인다고해서 다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
사진 :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흐린 날씨에 비각 안의 비를 폰카로 찍으니 화질이 선명하지 못해서 문화재청의 사진을 내려받았다.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龍仁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 보물 제9호
고려 중기의 고승인 현오국사의 승탑과 함께 세워졌을 비이다.
명종 8년(1178)에 스님이 세상을 떠났고 7년 뒤인 1185년에 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이지명(李知命)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초서의 대가로 이름 높던 유공권(柳公權)이 썼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이름은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俗姓)은 왕씨(王氏)라고 한다.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인종, 의종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으며 "歸信(귀신), 國泰(국태), 重興(중흥), 부석사(浮石寺)를 차례로 住持(주지)하였다" 한다.
비문에 나오는 절 이름들이 모두 낯익고 가본 곳들이라 반가운데 '國泰(국태)'라는 이름만이 낯설어 검색해보니, 산청 웅석봉 아래의 지곡사의 초기 이름이 국태사라고 한다. 기억해 뒀다가 웅석봉 등산하고 내려올 때 들려봐야겠다.
의종에 이어 즉위한 명종도 스님을 궁궐로 불러 가사를 하사하고 법회를 주석하게 하는 등 예우를 다하였다.
명종 8년(1178) 6월 29일 스님이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이 부분의 비문은 떨어저 나간 곳이 많아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지를 않다). 개경 동남쪽 귀법사(歸法寺) 임시안장 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추증하였다. 7월 17일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으며, 11월에 장단현 대탁산에 모셨다.
비문의 말미(末尾)에는 「大定二十五年 乙巳二月 日門入等奉 宣銷峰寺立石 興王寺大師 敏求 刻字」라는 기록이 있어, 대정(大定) 25년(명종 15년 1185), 현오국사가 입적한지 7년 후에 서봉사에 비를 세웠으며, 흥왕사(興王寺)의 대사(大師)인 민구(敏求)가 각자(刻字) 하였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탑비와 함께 만들어졌을 승탑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그 부분이 떨어져 나갔을 수도) 현재도 승탑은 행방을 알 수 없다.
3년전 서봉사지에 다녀와서 검색해보니 대부분 현오국사비에 댜한 문화재청 해설문이나 현장의 안내판 쓰인 정도의 단편적인 글들만이 있을 뿐이어서 아쉽더니, 엊그제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 보니 「옛님의.....」카페에 비문 전문과 번역문이 올라 있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 글이 올라온 걸 보니 선과님이 최근에 서봉사지를 다녀오신 것 같다.
비문의 전문과 선과님의 답사기는 여기에서 볼 수 있어요~~ ^^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518?q=%C7%F6%BF%C0%B1%B9%BB%E7%BA%F1
뒷면
규수형(圭首形) 비
신라말부터 등장하는 전통적인 거북받침(龜趺), 이수(螭首)를 생략해서 단순하고 간략화 되었으며, 비신 상단의 귀를 접은 이런 형태의 비를 규수형 이라고 한다.
이런 규수형 비는 보광사 대보광선사비(1358년 부여박물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비(1393년)와 청룡사 보각국사비(1394년),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비(1398년) 등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비석들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말인 이 시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 볼 수 있다.
1185년에 세워진 현오국사비는 이런 양식의 비 중에 가장 빠른 시기에 세워진게 아닐까 한다.
좀 더 뒤로는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1224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앞면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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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청 지곡사는 그냥 둘레길 걷다 만나세요. 엄천사도 있구.
영암사지 자료에 지곡사 나와요!!! ㅎ
다음 주에 용인에 물놀이 가는데 심곡서원이랑 이곳을 함께 볼까나... ㅋ
요즘 제가 용인에 없지만,, 고기리 산사랑 한번 가볼만은 해요.
답사기 검증하시게? ㅋ
용인 물놀이 하는데서 가까운 곳에 포은의 묘와 충렬서원이 있음. 포은 묘소 들렸다가 심곡서원으로 넘어가는 순서로 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