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들(34세, 1795년)
어린 아들의 어여뿐 얼굴에는
비오나 개나 드모지 걱정이 없다
볕난 풀밭에 송아지처럼 뛰여가고
익은 실과 나무에 잣나비처럼 기여 오른다 (53)
언덕 우에서 쑥대 화살 쏘아던지고
시내 웅덩이에 잎사귀 배를 띠운다
분주히도 세상을 경리하는 자들이여!
이 아이와 함께 놀아본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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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시처럼 장편시 다음으로 오언율시, 곧 40자의 짧은 시를 배치하였다. 적성농가에서 지은 시, 기민시 등과 다른 환경에서 읊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자식복이 없었다. 모두 6남 3녀를 낳았으나 살아남은 건 2남 1녀... 아들은 장남 학연(1783)과 차남 학유(1786)만이 있었다. 시를 지을 때는 이들이 13살, 10살이었으니 아마도 학유가 노는 모습같다. 정약용은 아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음지었을 것이다.
어린 아들은 풀밭을 뛰어다니고, 나무에 기어오르고, 화살 쏘기를 하고, 잎사귀배를 띠우는 등 건강하고 흥미로운 활동을 하루종일 하고 있었다. 양반의 아들이 정말 저렇게 놀았을까?
한말 때 고종이 테니스를 치는 외국인들을 왜 힘든 일을 하인들한테 시키지 않느냐고 했다지만 실제 조선시대에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맨땅에서 서로 힘들게 반복적으로 공을 넘기는 모습이 마치 노역을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말달리고 활쏘고 들판에서 뛰어노는 일은 건강에 필요하다고 봤을 것이다.
마지막 구절 “분주히도 세상을 경리하는 자들이여! 이 아이와 함께 놀아본들 어떠하리”이라고 하였는데 일에 얽매인 자는 아마도 그 자신을 말하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 아이처럼 세상모르고 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심정을 담은 듯하다.
드모지는 도모지의 오타처럼 보이는데 아무튼 도무지의 옛말이고, 잣나비도 잔나비의 오타같으며 원숭이를 가리킨다.
<穉子>
穉子美顏色
陰晴了不憂
草暄奔似犢
果熟挂如猴
岸屋流蓬矢
溪坳汎芥舟
紛紛維世者
堪與爾同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