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는 아니지만 /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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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미안하더란 말입니다
그림자 없이는 내가 증명되지 않는데
그림자로 살아본 적 없이 끌고만 다녔다는 게
실은 그림자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살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오늘은 꼭 말 붙여보려 합니다
알록달록한 새들이 그림자를 열고 날아가는 꿈을 꿨거든요
산 그림자가 산속에서 푸드덕거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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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파도, 크고 환한 나비, 따뜻한 돌, 검은 연꽃, 투명한 새, 이슬의 숲, 우아한 방랑자, 바람과 이끼, 걷다가 문득 멈춰 나무가 된 고양이, 방울새 노래에 손뼉 치는 오래된 늪……
이렇게도 자유로운데
고작 사람에서 멈춰버린 나를 데리고 살아준 덕에
나라고 여겨지는 오늘의 내가 이만합니다
혹시 내가 아직 쓸 만하다면 다 그림자 덕분입니다
ㅡ 격월간 《현대시학》 2021년 7-8월호
ㅡ 푸른시의방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