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은 그가 옛 친구임을 알아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해 사방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네가 내 계책을 조조에게 말해 주어 어그러져 버리게 한다면
강남 여든 한 고을 백성들이 실로 불쌍하게 되네.
그들의 목숨이 모두 자네에게 달렸으니 알아서 하게!"
겨우 마음을 놓은 방통이 서서에게 매달리듯 말했다.
서서가 약간 웃음기 머금은 얼굴이 되어 대꾸했다.
"이편의 83만 인마의 목숨은 또 어떻게 하고?"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로 나의 계책을 깨뜨려 버릴 작정인가?"
애가 탄 방통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
그제야 서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염려 말게. 일찍이 나는 유황숙께 두터운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아닌가?
아직껏 한 번도 거기에 보답할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없네.
거기다가 조조는 내 어머니를 핍박하여 돌아가시게 한 원수가 아닌가?
일찍이 내가 말한 대로 그를 위해서는 평생 단 하나의 계책도 내놓지 않을 것이네!
그런 내가 이제 어찌 자네의 그 좋은 계책을 깨뜨릴 리 있겠는가?
다만 나도 조조의 군중에 있는 만큼 조조가 싸움에 한 번 지고 나면
돌과 옥을 가리지 않고 동오쪽 사람들이 이쪽을 죽일 것인즉 나 또한 면하기 어려울 것 같네.
자네는 내가 그곳에서 몸을 빼낼 마땅한 계책이나 하나 일러주게.
그러면 나는 입을 다물고 멀리 피해 버리겠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방통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살아났다.
"원직 자네처럼 높은 식견과 긴 안목을 가진 사람이 그만 일을 가지고 어찌 어렵다 하는가?"
이윽고 방통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
이번에는 서서가 궁한 쪽이 되어 매달리듯 말했다.
"정말로 마땅한 계책이 없어 그러네. 바라건대 좋은 가르침을 내려주게."
"정히 그렇다면 내 한 방도를 일러주지."
서서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걸 알아들은 방통은
그렇게 말한 뒤 서서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일러주었다.
부근에는 아무도 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심을 하느라고 귀엣말을 한 것이었다.
방통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기를 다한 서서는 몹시 기뻐했다.
방통은 절까지 하며 고마워하는 서서를 뒤로하고 배에 올랐다.
한시바삐 호랑이 굴 같은 조조의 진채를 벗어나
강동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한편 조조의 진중으로 돌아온 서서는
그날 밤 가까운 사람 몇을 몰래 불러 진중에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
동탁이 죽은 뒤 서량을 근거로 만만찮은 세력을 기른
마등과 한수를 이용한 헛소문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그러잖아도 마음이 어수선하던 조조의 군사들이라
그 헛소문은 더욱 기세 좋게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다음날이 되자 군사들은 두셋만 모이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군사들의 그런 심상찮은 거동이 조조에게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오래잖아 그 내용을 알아낸 장수 하나가 조조에게 달려가 알렸다.
"서량주의 마등과 한수가 모반하여
허도로 군사를 몰고 짓쳐 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군사들 사이에 파다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슨 패신에 홀린 것일까.
조조는 평소의 세밀함 답지 않게 소문의 진상을 캐 보는 대신 놀라기부터 먼저 했다.
곧 여러 모사들을 불러모은 뒤 걱정스레 의논을 시작했다.
"내가 남쪽으로 군사를 내면서
마음속으로 가장 걱정한 게 바로 마등한 하수였소.
군중에 떠도는 말이 비록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길은 없지만
그 둘을 막을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구려."
어쩌면 방통은 그 같은 조조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고
그 계책을 서서에게 일러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며 말했다.
"이 서는 승상의 녹을 먹으면서도
아직껏 한 치 공도 세우지 못해 보답을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제게 3천 군마만 내려주십시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관으로 달려가 그 험한 목을 지키겠습니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곧 승상께 기별을 올려
남북이 서로 호응할 수 있게 할 터이니 바라거니 서량의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서서의 그 같은 말에 조조는 기뻤다.
그때 것 입 한번 제대로 열지 않던 서서가 스스로 어려운 일을 맡고 나선 까닭이었다.
이제 서서의 마음도 돌아서는가 싶어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허락했다.
"만약 원직이 가 준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소?
산관에도 또한 군사들이 있으니 함께 거느리도록 하고
여기서는 우선 3천의 마보군만 이끌고 떠나도록 하시오.
장패를 선봉으로 삼고 밤낮으로 달려간다면
늦어서 일을 그르치지는 않게 될 것이오."
☆☆☆
이에 서서는 조조에게 작별하고
장패와 더불어 산관으로 떠나갔다.
방통이 헤아린 대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조조와 그의 대군이 오래잖아 겪게 될 참화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한편 조조는 서서를 보내자 적이 마음이 놓였다.
북방의 일은 잊어버린 듯 자신이 거느린 진채를 돌아보는데,
먼저 말에 올라 강가에 있는 보군의 영채부터 살폈다.
과장은 있다 해도
수십만에 이르는 대군이 강을 따라 흡족한 마음으로 수채마저 살폈다.
큰배 한 척을 내어 중앙을 대장 기를 높이 걸고
양쪽으로 진을 이뤄 벌여선 배들 사이를 지나는데,
때는 건안 12년 겨울인 11월 15일이었다.
수천의 활과 쇠뇌를 감추어 실은 큰 배 위에 높이 앉아 보니
자신의 수채 또한 위용이 그럴듯했다.
거기다가 날은 맑고 포근한데
바람 한 점 없어 물결마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래저래 호기가 솟고 흥이 오른 조조가 문득 영을 내렸다.
"큰 배 위에 술을 내고 풍악을 마련하라.
오늘밤에는 거기서 모든 장수들과 함께 흠뻑 마시리라."
이윽고 해가 지자 동편 산 위로 보름달이 솟았다.
밝기가 마치 해가 뜬 듯하여 장강 일대에는 흰 비단이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
조조는 배 위 높은 곳에 앉아 좌우를 둘러보았다.
수백의 문무관원이 늘어섰는데,
문관은 모두가 수놓은 비단옷이요.
무관은 한결같이 칼을 차거나 창을 짚고 있었다.
그들이 각기 차서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자
조조는 다시 눈길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았다.
남병산이 그린 듯 떠 있는 동쪽으로는 시상부근이 아련히 눈에 들어왔고
서쪽에는 하구로부터 흘러오는 물이 보였다.
남쪽으로는 번산이
북쪽으로는 오림이 있으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탁 트여 넓기 그지없었다.
그 같은 경색의 아름다움에다 이제 며칠 안으로
그 모두가 자신의 호령 아래 들어서게 된다는 생각에 조조의 마음은 흥겹고도 즐거웠다.
"내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이래 나라를 위해
흉악한 무리를 없애고 해로움을 뿌리 뽑으며
맹세하고 바란 바는 사해를 깨끗이 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땅이 있으니 바로 이 강남이다.
나는 이제 백만의 대군을 거느린 데다 내 명을 받들어 일할 그대들까지 내 곁에 있다.
비록 장강이 험하다 해도
공을 이루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강남을 평정하고 천하가 조용해진 뒤에는
그대들과 더불어 부귀를 누리며 온 누리가 태평함을 즐기리라!"
☆☆☆
조조가 그렇게 호기를 부리자
문무의 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맞장구를 쳤다.
"바라건대 하루바삐 개가를 올리도록 하옵소서.
저희들은 죽을 때까지 승상께 의지해 복덕(福德)을 누릴 것입니다"
그 말에 더욱 흥이 난 조조는
좌우를 재촉해 모두에게 술을 돌리게 했다.
밤이 깊어지자 조조가 술이 올라 남쪽 언덕을 가리키며 비웃듯 소리쳤다.
"주유, 노숙아, 어찌 그리도 천시를 모르느냐?
이제 다행히 투항해 온 이들이 있어 너희는 배와 가슴에 큰 병을 품은 꼴이 되었다.
이게 하늘이 나를 돕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순유가 그런 조조를 급히 일깨워 주었다.
"승상께서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일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두렵습니다."
"자리에 앉은 그대들이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마음으로 믿는 이들이다.
의심할 게 무어 있겠는가?"
조조는 크게 웃으며 그렇게 순유의 말을 받은 뒤
다시 하구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유비하고 제갈량도 들어라.
너희는 어찌 개미새끼만도 못한 힘으로 감히 태산을 헐어 보려 하느냐?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런 다음 다시 여러 장수를 돌아보며
술 주정인지 속마음인지 모를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
내 나이 이제 쉰 넷이나 강남을 얻게 되는데 은근히 기쁜 일이 하나 더 있다.
지난날 교공과 내가 매우 가까운 사이였을 때,
나는 그 두 딸이 모두 빼어나게 아름다운 걸보고 은근히 탐낸 적이 있다.
그런데 뒷날에 이르러 뜻밖에도 그 두 딸은
손책과 주유에게 각기 시집을 가고 말았다.
나는 그걸 늘 애석하게 여겼으나
이번에 장수가에 새로 동작대를 세우면서 속으로 다짐한 게 있다.
강남을 얻으면 마땅히 교공의 두 딸을 데려와
그 대 위에다 두고 노년을 즐기리란 것인바,
이에 그 소원을 풀게 되었다."
☆☆☆
조조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는데
홀연 까마귀 한 마리가 남쪽으로 날아가며 울었다.
그게 불길하게 들렸던지
조조가 문득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저 까마귀가 어찌하여 밤에 우느냐?"
"달이 너무 밝아 날이 샌 줄 알고 둥지를 떠나 날며 운 것 같습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좋게 해석해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무엇이 좋은지
다시 큰소리로 계속해 웃는데 몹시 취한 듯했다.
한참 뒤에 갑자기 몸을 일으킨 조조는
날이 크고 긴 창을 들어 뱃머리에 꽂고 술을 강에 부어 제례로 삼았다.
하신에게 멀지 않은 싸움에서의 승리를 비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석 잔을 거듭 마신 조조는
뱃머리에 꽂았던 창을 뽑아 비껴들고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창으로 황건적을 깨뜨리고 여포를 사로잡았으며
원술을 없애고 원소의 땅을 되찾았다.
위로는 깊이 새북이요, 옆으로는 멀리 요동까지
천하를 종횡(縱橫)하는 동안 이 창은 한 번도 대장부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아직껏 뜻대로 하지 못한 이 땅과
그 경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감개가 없겠느냐?
내 이제 노래를 지어 그 뜻을 드러내 보고자 하거니와
그대들도 함께 어울려 이 노래를 받아 보도록 하라."
그리고는 소리 높여 노래했다.
술잔은 노래로 마주해야 하리
우리 살이 길어야 얼마나 되나
견주어 아침이슬에 다름없건만
가버린 날들이 너무 많구나
하염없이 감개에 젖어 보지만
마음속의 걱정 잊을 길 없네.
무엇으로 이 시름 떨쳐 버릴까
오직 술이 있을 뿐이로다.
푸른 그대의 옷깃 아득히 그리는 이 마음
오직 그대로 하여 이리 생각에 잠겨 읊조리네.
사슴의 무리 슬피 울며 들의 쑥을 뜯는구나
나에게 귀한 손님 오면 거문고와 피리로 반기리
☆☆☆
거기까지 듣고 있던 하후돈의 얼굴에
문득 감개의 빛이 어렸다.
임협의 거칠고 분방한 젊은 날을 청산하고,
효렴에 추천되어 낙양으로 올라온 청년 조조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어 울분과 좌절을 술로 달래던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조조는
그에게 그 노래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거기까지만 들려주었는데 이제 그 나머지를 듣게 된 것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데서 중단되었던 그 노래가
내일이면 천하를 모두 움켜지게 될 이 밤,
어떻게 끝을 맺게 될지 하후돈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장수와 모사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하가 모두 평정된 뒤에 조조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는
그들 모두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밝고 밝은 저 달빛 어느 날에 비추임을 그칠까
그 달빛 따라 오듯 이는 시름 끊을 수가 없구나.
논둑 길 넘고 밭둑 길 건너 그릇 되이 서로 헤어져 있네.
헤어짐과 만남 함께 이야기하며 마음은 옛정을 떠올린다.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나네.
나무를 세 번 둘러봐도 의지할 가지 하나 없구나
산은 높음을 싫어하지 않고 물은 깊음을 싫다 않으리
주공은 입에 문 것을 뱉어가며 천하의 인심 얻기에 힘썼네.
노래가 끝나자 모두 즐겁게 따라 불렀다.
조조의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적어도 그 노래에서 드러나는 그의 뜻은
손님을 맞기 위해 밥 먹다가
세 번이나 입에 문 것을 뱉고 일어섰다는 주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신이든 무관이든 오랫동안 이상의 인물로 배워 온
주공을 본받으려는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어쨌든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런데 그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뜻밖의 참사가 일어났다.
문득 좌 중의 한사람이 일어나 조조에게 이렇게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대군이 싸움을 앞두고 서로 맞서 있는 마당에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불길한 노래를 부르십니까?"
모든 사람이 놀라 보니
오랫동안 조조를 섬겨 오며 여러 가지로 공이 많은 유복이란 선비였다.
조조가 여전히 창을 비껴 든 채 흥이 싹 가시는 얼굴로 되물었다.
"내 노래 중에 어디가 불길하단 말인가?"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나네.
나무를 세 번 둘러봐도 의지할 가지 하나 없구나>란 구절이
바로 불길한 소립니다."
유복이 눈치 없이 제 곧은 것만 믿고 그렇게 대답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불같이 노해 들고 있던 창을 유복에게 내지르며 소리쳤다.
"네 어찌 내 흥을 깨느냐"
창은 그대로 유복의 가슴을 꿰뚫고
한소리 짤막한 비명과 함께 유복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원래 조조가 노래한 그 구절은
남쪽으로 도망간 유비와 손권을 아울러 비웃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유복은 그것을 뜻만으로 따져 거꾸로 조조 쪽에다 끌어 붙이고
불길한 소리로 해석해 보리니 조조가 어찌 노하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오를 대로 오른 술기운까지 겹쳐
그처럼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융통성이 좀 모자라긴 해도
유복은 그만 죄로 조조가 마구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벼슬이 양주자사요, 합비에서 몸을 일으킨 이래 난리로 있으나마나한 주의 다스림을 바로잡고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며 널리 둔전을 실시케 한 공신 중에 하나였다.
그런 그가 말 한 마디 잘못한 죄로
눈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으니 술자리가 제대로 이어질 리 없었다.
모두 술이 확 깬 얼굴로 술렁거리다가
조조의 눈치를 보아가며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