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에 보배를 담으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찬송가 259장(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교회에 몰래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사도 바울에 대한 오해와 반발까지 일어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권을 변증하기 위하여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 거짓 교사들은 인간의 외적 탁월성을 늘 자랑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족보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출신 성분을 자랑하며 자기들의 외모, 말 잘하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반면에 사도 바울을 은근히 깎아내렸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 사도 바울이 들지도 않았고, 사도 바울은 외모도 별로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말도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그럴듯한 추천장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정통성을 흔들고 다시금 유대주의 가르침을 퍼뜨려서 성도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하여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사용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들을 들어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비천한 자를 들어서 세상의 존귀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시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영광을 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러한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보배롭고 가장 값진 생명의 복음, 구원의 진리를 세상적으로 볼 때에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맡기시어 그 진리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담보하기 위하여 놀라운 능력도 그 질그릇 같은 사람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면 절대로 믿을 수 없고 사람을 보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놀라운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영광을 그 사람에게 돌릴 수 없고 오직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하신다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 자신도 보면 말을 잘 못합니다. 아마도 말 더듬이였을지라도 모릅니다. 마음에는 온갖 할 말들이 충만하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하면 자꾸만 말이 더듬어지고, 쑥스럽고 힘들어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그의 대적자들은 사도의 말이 시원치 않고 그 몸도 약하고 보잘것없다고 하여 비난거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놀라운 이적도 보여주시고 탁월한 영적 지식을 맡겨주셔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능력있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약점까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7 말씀에 사탄의 가시가 그의 몸을 찔렀다는 비유적인 표현을 한 것인데, 그것은 그의 몸이 극도로 약한 면이 있어서 때로는 성도들에게 큰 걱정꺼리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연약한 몸을 가진 바울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남을 고치지 말고, 자기나 고치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쓰신다는 역설적인 영적 원리를 알았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러한 예가 참 많이 나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사용되었던 사람 모세도 본래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잘 못하는 모세를 들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헌법인 십계명을 선포하였고 토라 율법을 가르치게 하셨던 것은 기이한 역설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큰 죄를 범했던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초대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나타내시고, 이방 지역인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하셨던 일도 기이한 역설입니다. 독일 사람 죠지 뮬러 목사님 역시 그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썽을 많이 피웠던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었는데, 하나님은 그를 붙잡아서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목회하면서 고아의 아버지로서 크게 사용하시고 외국 선교를 위한 강력한 후원자로 크게 쓰셨습니다. 그의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면 절대로 상상 못할 일입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본래 청년기와 결혼한 후에도 난봉꾼이요 싸움꾼이요 술꾼이요 선교사님을 훼방하여 돌을 던져 치는 패역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사로잡으니까 완전히 변화되어 기생집을 전도하고 친구들을 전도하고 깡패들을 전도하며 치유의 은사를 맡기셔서 온 강토를 다니면서 일제 시대에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폐병환자였고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청년으로서 죽기만 바라던 청년이었는데 주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변화되었고 그가 치유의 은사를 받아 온 세상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로 크게 쓰임받았지만 본인 자신은 여전히 늘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 소변처리를 못하는 환자였던 것이니, 참으로 하나님은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이러한 역설적인 원리를 우리는 명심하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늘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배를 담아 두셨으니, 영적인 자부심을 가집시다.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부러워하지 아니할지 몰라도 우리도 세상 사람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부럽지 않고 재벌도 부럽지 않고 국회의원, 대법관도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종종 세상의 시련과 역경의 부딪힘 속에서 우리 질그릇이 부서지고 금이 갈 때에 도리어 우리 속에서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빛이 깨진 틈 사이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와 영광과 소망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과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금가고 깨지는데 우리 속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존재가 함께 있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기뻐합시다. 분명히 주님께서 큰 능력을 드러내주실 것이요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진대 우리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립시다. 우리 자신은 여전히 질그릇에 불과함을 항상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가시면 우리는 그냥 한 줌 썩은 새끼 줄이요 불 탄 부지깽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선한 일에 쓰임받기를 소망하면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내어드립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를 쓰실진대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드립시다. 설령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주권 아래 겸손하게 감사하면서 자족하면서 자기의 직무를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