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편 1장<분짝 別莊에서 맞이한 새해>: 신 기섭 自傳소설/ 매,世界를 날다
구름밭 위에서의 삶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현세에서 볼 때 분명
비현실적이나,할 수만 있다면 한번쯤 영위해 보고픈 신선놀음의 세계다.
해발 1200m고지(高地), 인도네시아 수도 쟈카르타에서 1시간 반 남짓 차로 달려 다다르는,
푸른 하늘의 문턱이 문득 이마에 닿는 듯 선영히 눈과 가슴에 와 담기는 곳,
상하(常夏)의 나라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흐트러져 피어나 있고
소슬한 가을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선듯하니 피부에 와 닿는 곳,
그 산자락 한 켠에 나의 부모님이 별장(別莊)을 마련하여 머무르고 계신다.
어느 가정이나 한국의 근대와 현대사의 격량을 헤쳐 나오면서 평탄치 못한 삶의 굴절을
거쳤겠지만, 우리 가정은 우리나라가 겪어온 역사에 접목(接木)되어 사연이 한결 기구하다.
그리고 그 궤적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태평양전쟁에 맥이 닿아 있다.
특히 파란만장한 개인사(個人史)로 점철된 아버님의 생애를 되돌아 보노라면
나라는 존재가 세상볕을 보게 된 그 자체가 때로는 기이하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아버님의 성함은 辛자敎자煥자 이시다.
자식교육을 위해 대구에까지 나오셨던 조부님의 뒷받침으로 일제시대에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東京帝國大學에 입학한 아버님은 일본인 학생들 틈에서 굴욕적인 민족적 차별과 수모를
꿋꿋이 이겨 나가시면서 학업에 정진하던 중, 1944년 2학년 수료 후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일본군 해군 소위로 임관, 2차대전에 타의로 인하여 강제 出戰 하시게 되었다.
미군 폭격기가 서릿발 같이 날을 세우고 일본 본토를 뜨는 전함과 수송선을
백발백중 침몰시키던 2차 대전 말기에 몇 차례 미군기의 공습을 용케도 물리치고
천운(天運)같이 싱가폴에 기항하여 그곳 해군본부에 배속 받은 후
거기에서 다시 인도네시아 조그만 섬, 안본으로 파견 배치 되셨다.
그후 수십 차례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역경을 치른 아버님은
일본이 패전하자,해군 중위의 신분으로 연합군에 의해 포로수용소에 수용 되었다.
당시 책임자급 일본군 장교들이 점령군에 의해 전범으로 무더기 처형을
당하는 가운데 아버님은 다행히 점령지 원주민들에게 인심을 얻은 탓으로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살아남아,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지
근 1년만인 1946년 초여름 어느 날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겼다.
본가(本家)에서는 해방 후 1년이 가깝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죽은 자식으로 치부하고
태평양전쟁으로 불귀의 객이 된 아들의 원혼을 위로한다고
산 너머 마을에서 요절한 어느 처녀와 짝을 지워 예식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아버님이 귀향한 날이 공교롭게도 영혼 결혼식을 치르는 바로 그 날 이었다.
예식에 참석했던 동네사람들은 홀연히 나타난
아버님을 보고 총각귀신이 나타났다고 혼비백산 했다 한다.
아버님은 당시 창군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야학을 열어 고향 젊은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언양 울산에서 10여년 교편을 잡으시다가 상경, 출판사를 경영하시며 자립의 터전을 세우시는 한편,
당시 실업자가 만연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해외 진출만이 한민족의 살 길이다'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정부의 해외이민정책 입안에 자문위원으로 관여 하셨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경향 각지 신문을 통해 동 분야의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브라질, 브르네이 농업이민을 추진하시고,
해외개발공사 창설에 헌신 하시면서
이민문제연구소, 열대농업연구소를 직접 설립, 운영 하셨다.
4.19 이후 민주화의 봇물이 터지자 울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으나
아버님의 이상(理想)이 현실(現實)과 조화되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 높았다.
인물,학식보다는 조직, 인맥이 우선하는 선거 풍토에서
아버님은 낙선이라는 정직한 패배를 감수 하셔야 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마침 선거철이 여름방학 기간이라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의 선거유세용 지프차에 실려 다니며 유세장(遊說場) 구석구석을 따라 다녔다.
고목이 다 된 큰 정자나무 아래 모여든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촌로들과 그들을 향해 '현실개혁'을
목청껏 부르짖던 아버님의 쨍한 목소리는 지금도 기억의 갈피속에 아련히 살아 남아 있다.
그날 따라 유난히 붉게 타오르던 어스름 녘 노을 빛 배경과 함께...
아버님의 출마는 지금 생각해 보면 현실적인 계산이 없이 일견 무모했던 듯 싶었으나,
그러나 그런 만큼 지금 다시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의 뜻은 높고 굳었던 것 같다.
'현실개혁'의 엘리뜨 의식이 강한 先覺者로서의 힘찬 외침은 수런대던 유세군중이
화답하는 힘찬 박수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이따금씩 이상을 잠재우며
現實 타협(妥協)에 둥지를 틀고 안존하려는 나의 꿈을 들 깨우기도 한다.
그렇다.
계산되지 않은,
옳다는 신념이 있을 때
주위의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소리 높여 외칠 수 있는,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용기, 그 기백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중한 우리들의 꿈이자
우리 민족이 가꾸어 나가야 할 희망의 불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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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월1일, 새해 첫 날 동틀 무렵에
제15편 2장<분짝 別莊에서 맞이한 새해>: 신 기섭 自傳소설/ 매,世界를 날다
아버님은 국회의원을 향한 당신의 뜻이 좌절되자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
수많은 사선(死線)을 넘었던,
그러나 자원 없이 무수한 인구(人口)가 득실대던
당시 한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탐스러운 자원이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보물섬,
적도의 나라 인도네시아로 홀홀 단신 떠나셨던 것이다.
여권과 함께 당시 국가에서 허락한 달러 소유한도인 '미화 100불'을 안주머니 깊숙이 간직한 채......
아버님은 아직도 자신의 人生은 [100불 짜리 人生]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시의 척박한 시대적 삶을 이 말같이 함축적으로 상징화시키는 말도 드문 것 같다.
아버님이 인도네시아로 떠나가신 이후 그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릴 때까지 우리 가정은 전적으로 어머님의 힘으로 꾸려 나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미지의 세계에 단신으로 뛰어 들어 밀림을
개척하시는 아버님의 모험적인 삶이 가슴 깊이 와 닿았으며 아버님의
부재(不在)가 오히려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아버님이 보내오시는 인도네시아의
풍물이 든 그림엽서, 바틱 옷, 정교한 민속 조각품들은
이국적인 삶을 동경하는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어느덧 내 삶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버님이 인도네시아의 원목시장에 뛰어들 무렵의
인도네시아 시장은 한 마디로 일본인들의 독무대였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한 원목 공급선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오퍼 가격의 조작을 통해 한국 수요자에 대한 농락은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하반 수출의 대표적인 업체였던 동명목재는
수출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적자폭이 커지는 기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명목재 강(姜)사장이 면밀히 원인분석을 해 본 결과
적자의 원인은 다름아닌 비싼 원목 수입가에 있다는 걸 알아 냈다.
동명목재는 그때까지 거래해 오던 일본 오퍼상과 손을 끊고 아버님과 직거래를 텄다.
남태평양의 거친 파도와 맞서며 선적한 50여 원목선이 1년에 거쳐 양질의 원목을
적기에 공급하게 되자 동명목재는 흑자회사로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일약 수출랭킹 1위로 도약, 대한민국 최초로 1억불 수출의 영광을 안았다.
그 이후 세계 경제를 강타한, 세계 경제의 판도를 뒤바꿔 놓은
1973년의 오일 쇼크. 사업을 확장시키던 아버님의 타격은 엄청났다.
그리고 또 다시 재기를 다지며 현지 합판공장을 짓고 오늘까지 이어온 10여 년의 세월...,
그 부모님을 찾아 나는 다시 비행기 트랩에 오른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네시아는 내게 있어서 제2의 조국인 셈이다.
현대건설에서 해외공사 업무과장으로 부임해 2년간 수마트라 섬에서 두마이 정유공장
공사를 마치고 인도네시아를 떠나온 나는 2년만에 다시 부모님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불과 2년 사이에 인도네시아는 변해 있었다.
공항에 내리면 손을 벌리곤 하던 세관원의 무질서는 없어지고
대신 질서 잡힌 신공항(新空港)의 산뜻한 모습이 시야에 잡혀왔다.
84년 3월 이후로 쌀 수입국에서 쌀 수출국에서 쌀 수출국으로 전환했을 뿐 아니라
싱가폴에 원유를 수출하여 그곳에서 정제된 석유를 다시 수입하던 기현상도 없어졌다.
그 사이 건설된 두마이, 찔라짭, 발릭빠빤 정유공장 가동으로 더 이상 값싼 원유를
수출하고 정제된 값비싼 석유를 재 수입하는 넌센스를 연출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공원 속의 도시 쟈카르타를 빠져 나와 쟈고라위 고속도로를 거쳐
보골 식물원을 돌아 반둥으로 향하는 구절양장(九折羊腸) 산길
양켠의 산등성은 온통 푸르디 푸른 홍차밭 일색이다.
홍차밭은 잔잔한 파도이랑처럼 물결치는 장관을 이루며
흡사 잘 정돈된 잔디밭을 보는 듯 상큼한 눈 씻김을 선사한다.
해발 1,000m를 넘는 고지에까지 뿌연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채 무한정 뻗친 저 홍차밭은
과거 350여년 간 인도네시아가 화란의 식민지로 있을 때 개간의 대역사가 이루어졌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저 거대한 보골 식물원 역시 과거 화란 총통의 집무실이자 정원이었다.
대통령관저 근처에 살던 부모님이 오스트렐리아 업자가 조성한
분짝 별장지대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50대 중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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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월1일, 새해 해질 무렵>
제15편 3장<분짝 別莊에서 맞이한 새해>: 신 기섭 自傳소설/ 매,世界를 날다
적도의 나라지만 高度에 따라 기온의 변화가 심하게 나타나고 자라나는 식물의 분포도 달라진다.
아치형 창문을 단 현대식 별장에는 이름 모를 열대의 꽃들이 화려한 색상의 대비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고 코스모스, 분꽃, 붉은 철쭉, 채송화 , 향나무가 낯익은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봄이 되면 한국에 돌아오는 강남제비가 바로 거기서 재잘거리며 눈높이에서 빠르고 낮게 오고 갔다.
정원을 빙 둘러 '아마릴리스'라는 이름의 난(蘭)꽃이 어머님의 정성으로
수백 송이 서로가 빛깔을 시샘하듯 다투어 피어나 있었다.
밝은 햇빛을 받고 활짝 피어나 채송화는 발끝에 불꽃을 지핀 듯 작은 장미송이 마냥 붉게 타올랐다.
앞 정원에 자리잡은 풀장에는 바로 이마에 걸린 듯 가까이 보이는 하늘이 티끌 한 점 없이 거울 속
같이 말갛게 잠겨 있고, 그 속을 눈부신 빛살을 받은 구름덩이가 목화송이처럼 한가로이 떠다녔다.
이따금 고추잠자리 몇마리가 선명하니 빨간 색실을 허공에 수놓듯 오가고
푸른 몸뚱이를 한 왕 잠자리가 심심찮게 고추잠자리 떼와 어우러지기도 하였다.
정원 한 켠의 작은 연못에는 호박(琥珀)빛을 딘 잉어가 좁은 선회가 권태로운 듯
푸드득 힘차게 수면을 차고 올라 허공에서 비늘을 털어내곤 깊은 자맥질을 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열흘 간 나를 비워내고 자연의
맑은 공기,밝은 햇살, 아름다운 경관들로 나를 다시 채웠다.
한국에서 겪었던 잡다한 모든 생각은 저절로 사라지고
세상을 관조하듯 스스로 침참돼 가는 내 자신이 또렷이 보였다.
아침 저녁으로 산등성을 거슬러 올라 별장지대를 산책했다.
산 위로부터 졸졸 흘러내리는 도랑물소리는 어디서건 길동무하며 따라와 내 귀를 씻어주고
각양각색으로 가꾼 집들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잊었던 색깔에 대한 감각을 되찾게 해 주었다.
이마를 맞대고 나란히 이어진 별장들은 허리 께에 오는 낮은 담장으로 저마다의 아름다운
개성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어떤 집은 사철나무 울타리만 있을 뿐 아예 대문조차 없었다.
별장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클레이 코트로 잘 다듬어진 테니스장, 넓은 정원에 꾸민 미니 골프장,
주말을 위한 별장 단지라서인지 그 집조차도 주인이 없이
집을 지키는 현지인들로 마냥 고즈넉하고 한가롭기만 했다.
지나치다가 내키면 현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잘 가꾸어 놓은 남의 집 정원을 내 집인 양 거닐 수도 있었다.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툼한 오버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매서운 시베리아북풍을 견디던
겨울 한복판에 섰던 내가, 어느 한 순간 여름의 나라에 와서 선선한
가을의 절기를 만끽하고 있다는 게 현세의 일 같지 않고 스스로 믿기지 않았다.
연말 개인 휴가원을 내고 훌쩍 날아온 또 하나의 세계.
어릴적 만화를 유난히 탐닉햇던 나는 '도토리의 이상한 모자'가 그럴 수 없이 부러웠었다.
마치 나는 빨간 모자를 쓰고 눈을 감고 소원을 중얼거리기만 하면 원하는
어느 나라,어느 곳이든 데려다 주는 만화의 그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1986년 정월 초하루 그곳에서 어머님이 챙겨 주시는 한복을 입고
쟈카르타에 거주하는 형님 가족과 함께 부모님께 세배 드리곤
조카들과 어울려 온 가족이 윷놀이를 하고 '고우 스톱'과
'도미노'(인도네시아 카드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다음날 깜붕(현지인 마을)으로 가서 그들의 삶을 구경하고 닭을 사와
고아 먹으면서 부모님, 형님과 함께 앞으로 우리 가족들의 번영을 위한 구상을 했다.
서로가 나눠야 할 임무, 한국에 남아있는 내가 해야 할 일,삶의 몫에 대해 깊이 생각을 나누었다.
또 하늘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각자의 기도로서 우리 가정을, 서로를 축복하였다.
분짝 別莊에는 연말 연초에 쟈카르타에서 한국인 네 가족이
하루 걸러 다녀 갔으며, 그 중 한 가족은 이틀을 묵고 갔다.
S건설 상무로 인도네시아 공사수주를 책임지고 있다는 분은,
"당신 아버님은 인도네시아가 일본인.중국인들의 차지가 되었을 때
왜 한국인의 몫은 없는가? 하고 이 땅에 뛰어든 최초의 개척자입니다.
그 뜻이야말로 나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20년 전 그 당시 한국의 누가 그와 같은 진취성과 개척정신을 가졌습니까?"
정월초 쟈카르타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홍콩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KAL기는 무려 6시간 스탠바이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홍콩에 파견된 KAL직원이 사과하며 승객의 양해를 구하는 해명 방송을 하였다.
여름의 나라에서 거꾸로 겨울의 나라 한 복판으로
깊숙이 진입하고 있다는 실감이 비로소 다가왔다.
과연 서울은 그동안 두껍게 쌓여 얼어붙은
눈으로 인해 차는 벌벌 빙판 길을 기어가고 있었고,
한껏 움추린 어깨 위로 겨울바람은 매섭게도 몰아쳐 댔다.
그러나 내 가슴은 아직도 여름의 나라에서 지닌
온기가 가시지 않은 양 마냥 훈훈하고 느긋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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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年1月3日, 해뜰 무렵 >
몬트리올,캐나다 漏家에서
청송(靑松)카페<http://cafe.daum.net/bluepinetreesenior >지기
베드로 문이 2021년10월29일(금)에 다시 옮김
곧 이어 제16편 <육영수 女史의 편지 >가 계속 連載되오니
"신 기섭 自傳소설/ 매,世界를 날다 많이 구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