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 교수를 회고하며
지병이 있어 오래 고생한 것도 아니고 몸이 불편하여 앓아눕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세상을 뜨니 남은 사람의 허탈함은 무어라 말 할 수가 없다. 며칠 전까지도 제자의 수필을 첨삭하여 인터넷에 올렸는데 소천 하셨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끝마무리를 하고 떠나셔야 하는데 그냥 가셔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수필을 사사한 사람으로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삼계 김학 교수님은 수필을 위해서 태어난 분이었다. 1980년 월간문학으로 수필에 등단했다. 서해방송에 재직할 때는 날마다 수필 한편을 써서 “밤의 여로”라는 프로를 방송했다. 방송국에서 퇴직한 뒤 2001년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반을 개설하여 수필 강의를 했다. 인기가 있어 전북은 물론 광주 순천 대전 부여 등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한 반으로는 안 되어 수요반 목요반 금요만 목요야간반 등으로 나누어 강의를 했다. 이어 전주안골노인복지관과 꽃밭정이복지관에도 수필반을 개설하여 수필가를 양성했다. 5년 전에는 신아문화대학을 설립 거기에서도 문하생을 배출했다. 적어도 500여명의 수필가가 문하에서 나왔다.
김학 교수의 수필 강의는 특징이 있다. 교제를 편집하여 미리 제자들에게 인터넷으로 보내어 사전에 읽고 오게 한다. 수업시간에는 먼저 돌아가며 칭찬을 하게 한다. 칭찬 릴레이다. 다음에 교재 내용을 읽어가며 자세히 설명을 하고 한 시간을 마친 뒤, 다음 시간에는 수강생의 작품 4가지를 읽고 각자의 느낌과 수필 평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수필 작품의 발전과 향상을 꾀한다. 칭찬을 하도록 하는 것은 남의 장점을 살려 그것을 수필 감으로 하려는 의도이고 수필에서 부정적인 것 남을 비하하거나 헐뜯는 내용은 금하도록 한다. 자신도 평소 어느 자리에서나 남의 흉을 보거나 비난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제자가 모여드는 까닭은 또 있다. 아무리 못 쓴 작품이라도 인터넷으로 보내면 친절히 첨삭하여 돌려준다. 그 많은 제자들이 수없이 보내는 작품을 일일이 첨삭하여 돌려주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작품이 쌓인다고 했다. 그리고 우수한 작품은 전국의 문예지에 소개하여 실어주고 인터넷에도 올려 영구히 남긴다. 또 제자들에게만 작품을 창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손수 쓴 작품을 교재에 실어주어 모범을 보인다. 학사장교 출신인데 ‘나를 따르라’는 군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솔선수범한 수필이 쌓이고 쌓여 ‘수필아 고맙다.’ ‘손가락이 바쁜 시대’ 등 17권의 수필집과 제자들의 수필집에 발문을 쓴 것을 모아, 평론집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을 3권 펴내기도 했다. 그런 공로를 인정하여 전국의 각 단체에서 주는 수필상을 수상했다. 목정문화상, 펜문학상, 원종린 문학상, 영호남수필 대상, 전북수필 문학상 등 다양하다.
김학 교수는 아이디어도 다양하다. 몇몇밖에 안 되는 수필가를 모아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였고 제자들의 모임인 행촌수필문학회도 이끌었으며 은빛수필문학회와 꽃밭정이수필문학회도 탄생 시켰다. 남원방송국에 근무할 때는 춘향 뽑기 미인대회를 창안하여 성공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문학행정에도 역량을 발휘하여 전북수필문학회장, 전북문협회장. 펜클럽회장, 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갑자기 김학 교수님을 떠나보내고 나니 허탈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날마다 여러 편의 수필과 문학소식이 오지 않으니 컴퓨터를 켜기도 싫다. 전북의 큰 별이 떨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수필을 열심히 쓴다고 칭찬하는 분이 안 계시니 수필 쓸 힘도 없어진다.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하늘나라에서도 먼저 간 제자들과 만나 수필 상담 이어가기를 빈다.
( 202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