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중도일보] 대전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과 경부선,호남선 철도와 경부 및 호남,중부, 대진고속도로 등이
통과하는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갖춰 교통도시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대전하면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상징물로도 부각된다.
고속도로 개통과 국ㆍ지방도로 개선이 본격화된 70년대 이후 교통도시답게 대전의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 터미널은 주민의
교통수단으로 크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가용보급 확산과 고속철도 개통 등은 버스이용 고객 감소를 초래해 버스터미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 70년대 터미널-1970년대 대전 중구 대흥동(현 대림빌딩 자리)에 있던 시외버스터미널 모습. 사진제공=대전시
▲1954년 시외버스 첫 등장=대전에 시외버스가 등장한 것은 1954년. 대흥동 466번지에 전북여객이 설립돼 운행되면서
부터다. 1961년에 중부교통과 신진여객이 용전동과 대흥동에 소재해 운행에 가세했고 이후 1961년 말 대전의 시외버스 노선은
충남여객,계룡버스,신진여객이 운행한 것으로나타난다.이후 시외버스업체는 정부의 버스업체 기업화계획으로 충남여객은
금남,삼흥,충남교통의 3사로 분할돼 1965년에 면허를 얻어 발족하게 된다.
대전의 터미널이 지금의 모습을 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의 서부·동부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79년. 그 전에는 대전지역에 모두 5개의 터미널이 운영됐다.
터미널 운영 방법도 지금과 같이 다른 버스회사가 하나의 목적지별로 모여 하나의 터미널을 사용하는 통합형 터미널이 아니고 각 버스 회사마다 터미널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상남·봉화·광주 여객’으로 불리던 시외버스회사들은 중구 대흥동(현 대림빌딩 자리)에 3368㎡규모의 부지에 일반 시외버스터미널을 운영했다.
당시에는 정차 횟수에 따라 직행과 급행, 완행 개념이 있었다. 동구 정동(현 하나은행 정동지점 맞은편)에는 군 단위 정류소만 정차하는 직행시외버스 터미널을 1338㎡ 규모로 운영했다.
또 3개의 고속버스 터미널이 더 있었는데 한진고속과 동양고속이 동구 정동에 터미널(1186㎡)을 함께 두었다. 지금은 사라진 벤즈고속버스와 그레이하운드 회사는 동구 중동(585㎡)과 삼성동(1157㎡)에 각각 터미널을 꾸렸다.
1972년 대전에서 시외버스 운행노선은 논산·공주·신탄진·옥천·금산·조치원 등 6곳이었다. 1일 운행되는 차량은 모두 585대.
이후 1977년에는 시외버스 운행노선이 천안이 신설되면서 운행횟수도 논산방면에서 천안방면이 더 많아졌다. 하루 총 운행횟수는 780회. 천안의 도시팽창으로 대전과 천안을 오가는 교통량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 1981년 동부시외버스터널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해 있다. 사진제공=대전고속버스터미널
▲1970년에 9개 고속버스 회사 운행=1970년 7월 서울~부산간 428㎞의 경부선 개통은 그동안 철도가 전담해오던
장거리 운송을 고속버스 회사도 함께 맡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70년 12월 회덕~전주 사이 호남선이 개통되고 1975년
영동고속도와 1978년 중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대전 지역에 고속버스회사도 속속 들어섰다. 1969년 한진고속이 중동 76번지에
자체 터미널을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대양고속(정동 2번지), 동양고속 설립(정동 2-1번지)이 이어졌다.
1970년에는 한국그레이하운드(삼성동 114번지), 광주고속(중동 61번지), 한일고속(중동 75-3번지), 천일고속(중동 75-3번지) 등 모두 9개 고속버스 회사가 생겨나 도심 곳곳에 정류장이 연이어 들어섰다.
1971년에 이들 고속버스 회사들이 운행한 노선은 서울과 부산, 대구, 전주, 이리, 전주, 군산 등 7개 노선이었다.
하루 운행횟수는 230회였다. 이중 서울방면이 하루 120회로 가장 많았다. 대구는 36회, 천안은 28회였다.
▲비좁은 대전에 10개 터미널 도심 천덕꾸러기로=1977년까지 대흥동 및 정동 등 대전 도심에 시외버스터미널 3개와 고속버스 터미널 3개가 각각 운영되면서 교통체증 등으로 도심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신세였다.
당시 대전시의 인구는 50만여명에 행정구역은 88.2㎢. 현재 140만명 인구에 539.79㎢의 면적에 비할 때 1/5 수준도 안되던 시기였지만 터미널은 6개나 운영됐다.
1976년 대전시 도심에 위치한 고속·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일일 운행된 버스대수는 1000여대 수준. 이들 버스가 오가면서 도심은 교통체증 뿐만 아니라 시민들은 심각한 교통오염에 시달렸다.
시외·고속버스 회사마다 각자 차고지를 곧바로 터미널로 사용하면서 승객은 물론 버스를 정차할 공간도 없었다.
터미널 분산이전 계획은 1970년에 이미 마련됐다.1972년 4월 건설부 고시로 용전동에 6000평이 마련됐고 서부지역 시외버스정류장은 1972년 6월 충남고시로 유등천변에 4100평이 마련됐다.
1979년 60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1978년에 모든 시외버스 도심통과를 금지시키고 시외·고속버스 터미널의 외곽 이전
계획이 본격화됐다. 또 그동안 시외·고속버스마다 운영하던 터미널을 목적지 단위로 묶는 통합터미널을 추진하게 된다.
가장 먼저 외곽으로 빠져나온 대전고속버스터미널은 1979년 4월 20일 용전동 옛 나환자촌 자리에 터미널을 짓고 운영에 들어갔다.
충남 일원을 오가는 시외버스는 같은 해 7월 20일 유등천변에 마련한 부지에 서부시외터미널을 마련하고 운행에 들어갔다.
이어 같은 해 광주고속이 유성에 터미널을 만들었으며 옥천,금산,청주,천안, 무주 방면의 동부시외버스터미널은 1980년 10월부터
운영됐다.
▲ 1984년 대전고속버스터미널. 터미널 앞에 넓게 밭이 펼쳐져 있어 눈길을 끈다. 사진제공=대전고속버스터미널
▲대전 터미널의 미래는 불투명= 대전시의 터미널의 변화를 기상용어로 표한한다면 ‘동부시외·고속버스 터미널 차차 갬, 서부시외버스터미널 흐림, 유성시외버스터미널 화창’으로 말할 수 있다.
시설개선에 대한 강한 여론이 일었던 동부시외버스터미널과 대전 고속버스터미널은 아직 이렇다할 시설개선 계획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터미널을 한 곳에 모으고 그곳에 쇼핑센터까지 입주시키는 종합 터미널로 가야한다는 방향은
제시됐다. 하지만 터미널이 개인 소유인데다 대규모 점포 입점규제까지 걸려 투자자가 나서지 않는 등 아직 뚜렷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역시 세워진지 30년이 되면서 건물 곳곳이 노후되고 장애인 시설도 전혀 갖추지 못하는 등 시설개선이
당장 필요하지만 이를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난 2006년 대표이사가 사망 한 이후 가족간의 재산권 다툼으로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누구도 돌보지 않은 처지다.
반면, 유성종합터미널은 올 9월부터 도시철도 1호선 구암역 옆 10만 2080㎡ 부지에 여객터미널과 환승주차장을 갖춘
종합터미널을 착공해 2011년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유성종합터미널 계획은 현재 유성시외버스터미널과 금호고속
유성영업점의 교통 혼잡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대전=중도일보] 종합터미널이 들어선 1979년 이전의 대전 교통현황을 취재하기는 쉽지 않았다. 정보가 흘러 넘친다는 인터넷은
단지 어제·오늘의 내용만 담고 있을 뿐 ‘과거’에는 무관심했다. 역시 지나간 경험을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의 대표 운수회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주)금남고속은 지난 1965년 대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전-논산’ 노선을 첫 운행한 이후 대전시민에게 낯설지 않은
버스회사가 됐다. 지난 44년간 충청지역을 오가는 버스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故 유복열 씨가 금남고속을 세우고 버스 55대로
70개 노선을 운행을 시작해 지금은 335대 버스로 220개 지역을 오가는 규모로 성장했다. 금남고속 뺏지를 단 기사만
500명에 달해 전국 운수회사 중 규모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주)금남고속의 장일용(55) 대표이사를 만나 당시의 경험을
들어봤다.
▲ 장일용 대표(오른쪽)가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금남고속버스의 출발 점검을 하고 있다.
“현재 목적지 별로 다른 운수회사들이 모여 운영되는 복합터미널이 들어서기 전에는 회사마다 터미널을 운영했지요. 당시 대흥동과 원동 지역에 2개 시외버스터미널과 5개 고속버스터미널이 난립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장 대표는 당시를 “대기실 천막도 없이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승객이나 버스기사들이 고생을 많이 하던 때”라고 기억했다. 터미널에 장소도 좁아 정작 승객은 터미널 밖에서 기다리는 일이 흔했다고 말했다.
또 운임비도 지금과 현격히 차이나 1972년 당시 대전에서 논산까지 완행은 160원, 직행은 220원 하던 시기였단다.
장대표는 “완행·직행 개념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버스에 파란색 줄이 있으면 완행, 빨간색 줄은 직행버스를 의미했다. 요즘은
시간을 아끼려고 빠른 교통편을 찾지만, 당시에는 도로포장이 좋지 않아 한 시간이라도 버스를 덜 타려는 사람이 많았고 완행보다
정차하는 곳이 적었던 직행버스 요금이 조금 더 비쌌다”고 말했다.
시외버스의 황금노선은 어디일지 궁금했다. “서부시외버스가 생긴 후 1990년대 초반까지 대전에서 논산과 부여를 연결하는
노선이 황금 노선으로 통했어요. 많을 때는 15분 간격으로 시외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했죠. 논산 육군 훈련소에서 면회할 수 있던
때는 주말에 특별버스를 증차하기도 했습니다”
장 대표는 하지만 이 지역에 거주민이 줄면서 버스를 이용하는 고객도 줄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황금노선이 천안을 잇는 노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승객들의 이동을 보면 서울서 전철을 이용한 사람들이 천안에서 일제히 버스로 갈아타고 각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천안 지역으로 버스를 집중하고 있지요”
지금도 사람들이 거치지 않고 직접 이동하기를 원하는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장 대표는 강조한다..
“지난 2003년 ‘대전-이천’, ‘천안-포항’ 노선을 개척한 것이 지금 성과를 보이고 있어요.보통 새로운 노선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2년 동안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요”
올해로 30년이 된 서부·동부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의 시설개선 문제는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까. 이에 장 대표는
“30년 전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길 때 주변은 모두 텅 빈 벌판이었다. 그동안 터미널 주변 상황이 많이 변해 터미널이 다시
외곽으로 나가야 할 때라고 본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신탄진과 유성은 지금은 대전에 속해 있는 하나의 구에 불과 하지만 대전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1989년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전을 둘러쌓고 있던 대덕군을 포함시켜 지금의 대전땅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때 대덕군에 속해있던 신탄진과 유성이 포함이 되었지요.. 이당시 들리는 이야기로는 대덕군을 대전에 편입시키느냐.. 아니면 신탄진을 중심으로 대덕군을 하나의 소도시로 만드느냐에 고민을 했다고 하더군요,, 결론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되었지만 대덕군이 그냥 대전에 포함이 안되었다면 대전이 지금처럼 광역시로 크진 못했겠지요..
대덕군이 포함되느냐 마느냐에 상관없이 대전시 자체가 이미 100만이 넘었고 당시 충청지역만 직할시가 없었기에 충분히 직할시로 승격할 수 있었습니다.(직할시 승격 기준은 인구 기준이 아닙니다.) 대구나 광주 또한 달성군과 광산군을 따로 두고도 100만이 넘어 직할시 승격이 되었구요. 아마 광주가 광주직할시, 송정시, 광산군으로 분리가 되었다가 통합되는 해에, 대전이 직할시가 되면서 신탄진을 시로 승격시키느냐 아니면 통합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결국 통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압니다.(유성은 조선시대 공주군이었다가 일제시대부터 83년까지 대덕군 아니었나 싶은데요.)
버스라인 말씀도 충분히 맞습니다.. 인구면이나 충청지역에 유일한 직할시로써의 요건은 다 갖춘건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전이라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대덕군이 대전을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도시가 더이상 뻗어가지 못하고 순수하게 대전의 면적으로 볼때 지금처럼 크진 못했을꺼라는 말씀을 드린거였는데 제가 아무래도 표현력이 부족했나 보네요^^ 그 유사한 예가 청주가 아닐까 합니다.. 청원군이 감싸고 있고 도심지역은 뻗어나갈만큼 뻗어나간 상태에서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처럼요..
요런 걸로 토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유성읍은 1983년 대전시 중구로 편입된 것으로 나와있네요. 광주는 90만이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하고 88년 송정시, 광산군 합치면서 바로 100만 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전은 제 기억에 88년 100만에 조금 못 미쳤지만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충청지역에도 직할시가 있어야 한다는 여론을 타고 직할시가 된 것으로 압니다. 이전 댓글에 썼듯이 직할시 승격은 인구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첫댓글 금남고속 역사가 의외로 얼마 안되는군요, 흥미있는 기사 잘봤습니다. ^^;
대전에 첫 등장한 시외버스가 전북여객이라는 대목이 눈길을 끄는군요.
전북여객,, 터미널이,, 오래전 기억에 인동4거리에 있었죠,, 파란줄 빨간줄,, 마전,금산,부리 경유해서 무주까지 갔던 기억이 있네요,,
동부시외터미널............. 어째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요.....맨처음 모텔촌 사잇길로 버스가 출입을 할떄 참 신기했는데....(?)
지금은 한 광역시에 속한게 된 신탄진이 예전에 시외로 운행했던게 흥미롭군요.
신탄진과 유성은 지금은 대전에 속해 있는 하나의 구에 불과 하지만 대전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1989년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전을 둘러쌓고 있던 대덕군을 포함시켜 지금의 대전땅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때 대덕군에 속해있던 신탄진과 유성이 포함이 되었지요.. 이당시 들리는 이야기로는 대덕군을 대전에 편입시키느냐.. 아니면 신탄진을 중심으로 대덕군을 하나의 소도시로 만드느냐에 고민을 했다고 하더군요,, 결론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되었지만 대덕군이 그냥 대전에 포함이 안되었다면 대전이 지금처럼 광역시로 크진 못했겠지요..
유성은 공주시(당시 공주군) 관내였습니다.
대덕군이 포함되느냐 마느냐에 상관없이 대전시 자체가 이미 100만이 넘었고 당시 충청지역만 직할시가 없었기에 충분히 직할시로 승격할 수 있었습니다.(직할시 승격 기준은 인구 기준이 아닙니다.) 대구나 광주 또한 달성군과 광산군을 따로 두고도 100만이 넘어 직할시 승격이 되었구요. 아마 광주가 광주직할시, 송정시, 광산군으로 분리가 되었다가 통합되는 해에, 대전이 직할시가 되면서 신탄진을 시로 승격시키느냐 아니면 통합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결국 통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압니다.(유성은 조선시대 공주군이었다가 일제시대부터 83년까지 대덕군 아니었나 싶은데요.)
버스라인 말씀도 충분히 맞습니다.. 인구면이나 충청지역에 유일한 직할시로써의 요건은 다 갖춘건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전이라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대덕군이 대전을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도시가 더이상 뻗어가지 못하고 순수하게 대전의 면적으로 볼때 지금처럼 크진 못했을꺼라는 말씀을 드린거였는데 제가 아무래도 표현력이 부족했나 보네요^^ 그 유사한 예가 청주가 아닐까 합니다.. 청원군이 감싸고 있고 도심지역은 뻗어나갈만큼 뻗어나간 상태에서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처럼요..
버스라인님 대전이 직할시승격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충청지역에 직할시가 있는냐 없느냐는 상관이 없구요.광주는 직할시 승격당시 인구100만에도 훨씬 못미치는 90만밖에 되질않았습니다.그리고 유성은 직할시 되기전 87년에 대전시로 편입되었지요.
요런 걸로 토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유성읍은 1983년 대전시 중구로 편입된 것으로 나와있네요. 광주는 90만이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하고 88년 송정시, 광산군 합치면서 바로 100만 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전은 제 기억에 88년 100만에 조금 못 미쳤지만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충청지역에도 직할시가 있어야 한다는 여론을 타고 직할시가 된 것으로 압니다. 이전 댓글에 썼듯이 직할시 승격은 인구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이글귀가 가장 인상에 남네요..어떤 이유로 분사가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