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도 대신 한국에 첫발 -근대 의료·교육 씨 뿌리고 4대 걸쳐 한국 섬겨
오늘날 서울 경신학교와 연세대의 전신이 되는 언더우드학당.
1885년 4월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학교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1886년 고아 두 명으로 이 학교를 시작했다
자손 4대와 더불어 한국을 섬긴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元杜尤·1859∼1916)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한국으로 파송한 최초의 목사 선교사이다. 언더우드보다 앞서 1884년 9월 20일 내한한 알렌은 평신도 의료선교사였다.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뉴욕에서 한국 선교의 장도에 올라 일본과 부산을 경유하여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동승했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는 갑신정변 이후의 시국불안으로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단 일본으로 회항했다. 언더우드는 서울 도착 3일 뒤부터 알렌이 개원한 제중원에서 한국 선교 개척자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1916년 57세의 나이로 서거하기까지 30여년간 한국 선교를 위해 충성하였다. 한국명을 원두우로 지은 그는 또한 신촌 원씨의 조상이 됐다. 원두우 본인으로부터 아들 원한경, 손자 원일한, 증손자 원한광·원한석까지 4대에 걸친 자손들도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해 왔다. 그는 미국에서 가료 중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의 유해는 아들, 손자와 더불어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그의 형 존 토머스는 뉴욕에서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트사를 세우고 사업에 대성하였다. 존은 막대한 재정 지원으로 동생의 한국 사역을 도왔고 세계 선교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원두우가 성경을 새로 번역하여 찬송가를 편찬해 낼 때 경비와 출판비도 지원했다.
동생 언더우드가 대학을 세우기 위해 오늘날 신촌의 연세대 부지를 매입할 때는 재정을 지원하여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란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비문처럼 실로 그의 가문은 대를 이어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바쳐 한국을 섬겼다.
한국 선교 개척의 최고 공로자
언더우드 선교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에 정착한 후 뉴욕대를 졸업하고 뉴브른스윅신학교를 마쳤다. 언더우드는 19세기 말엽 미국 교회에서 해외 선교의 열의가 높을 때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애초 인도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이후 한국 선교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자 한국이 그를 부른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84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국 선교의 장도에 오를 때 그의 형 존은 뉴욕에서 시카고까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며 전송하였다. 형을 돌려보내고 계속 기차 여행을 하던 중인 1884년 12월 22일 그는 첫 선교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언더우드는 26세에 내한해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1908년에는 ‘The Call of Korea: political, social, religious’라는 선교체험기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 조정은 문호를 개방했지만 천주교 전파를 금지하고 있어서 개신교의 선교 역시 허용하지 않았다. 선교 활동이 불가했던 그는 제중원 교사로서 의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교 활성화의 길을 모색하였다.
황해도 재령을 비롯한 북한 지역을 두루 답사하고 자급 자치 자전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선교정책을 세웠다. 선교 용어로 한글을 택하고 교회마다 야학을 세워 한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한영사전과 한국어 문법책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글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4부 악보가 있는 찬송가도 간행하였다. 국민 지식의 증진으로 국가가 부강해지도록 ‘그리스도신문’을 간행해 국내외 뉴스, 각종 상식과 기독교 복음 기사들을 실었다. 그 외도 많은 저작 문서들을 간행했다.
그는 학교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갖고 고아 두 명으로 고아원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 경신학교와 연세대의 전신이 되는 언더우드학당이었다. 대학 설립의 비전 실현에 죽을 때까지 매진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병원 사업도 적극 지원해 그 자신이 제중원에서 가르쳤으며, 토론토의대 교수였던 에비슨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두 사람은 평생토록 단짝이었다.
언더우드는 당연히 교회 설립에도 헌신했다. 새문안교회를 필두로 21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마펫 베어드 밀러 에비슨 외에 다른 많은 동료 선교사들의 한국 파송을 주선했고, 그의 형제들이 경제적으로 크게 지원하였다. 미국 남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할 계기를 제공하고 초기에 재정을 지원한 이들도 언더우드 형제였다.
언더우드는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이 되었으나 전체 생애 동안 교파를 초월한 연합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외에도 YMCA 청년운동의 주춧돌을 놓는 등 많은 개척사역을 펼쳤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교수]
◇최재건 교수=미국 예일대(M. A. & STM)와 하버드대(Ph. D.)에서 공부하고 연세대, 백석대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은 연세대 신과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서학의 수용과 발전' '근현대 부흥운동사', 'The Korean Church under Japanese Colonialism' 등이 있다.
2. 선교사 준비와 내한
-네 살 때 인도선교사 간증에 감동 선교 꿈 꾸며 신앙교육 받아 뉴욕대 졸업후 신학·의학 공부
언더우드 선교사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미전도 지역’ 조선의 선교사를 자원했다. 젊은 시절의 언더우드(왼쪽)와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가 도착했던 제물포항 전경
편안한 목회 사양, 고달픈 선교사의 길로
언더우드는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최고 최대의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그가 기독교 선교와 한국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더 연구·평가되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 안에서는 물론 한국 교계나 관련 기관에서조차 무시되고 외면돼 왔다. 오히려 미제의 앞잡이로 몰리기도 했다.
북한의 '천리마'란 월간지에서 '언더우드 족속의 120년 행적'이란 제하의 글이 2008년에 약 1년간 연재되었다. 그 글에서 언더우드 가는 "독초마냥 뿌리를 내리고 5대에 걸쳐 선교사, 의사, 교육자, 해방군, 외교관 등의 허울을 쓰고 미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정책 수행에서 돌격대적 역할을 놀았다" (2008. 2월호·77쪽)고 기술되었다. 언더우드의 공을 평가절하하려는 시각은 한국 사회에도 편만해 있다. 그러므로 본 연재를 통해 그의 선교 일대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어릴 적부터 신앙훈련을 받다
언더우드는 네 살 때에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어느 인도 선교사의 간증에 감동 받고 난 후의 일이었다. 장성하여 인도 선교를 지망한 것도 그때 받은 감동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의 꿈을 꾸며 그의 부친 토머스(Thomas Underwood)의 신앙교육 아래 경건한 신앙생활 훈련을 했다. 부친은 신앙의 가문으로서 선대로부터 이어온 경건한 신앙전통이 대를 이어 잘 계승되도록 영적훈련을 시켰다.
주일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집에서는 교회에서 들은 설교나 성경공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히브리서 전체와 많은 성구들도 외우게 했다. 기도하는 것도 생활화했다. 언더우드는 외가 쪽으로도 와우(Waugh) 목사의 목회, 출판, 선교의 열정을 물려받았다. 부친과 친한 고아원 사업의 선구자 뮐러 박사에게도 영향을 받아 많은 영적 자산을 전수받았다.
그는 열 살 때 이러한 경건생활을 훈련하는 모습에 관해 감동적인 일화를 남겼다. 그는 형 프레드릭과 함께 프랑스 브룡 슈메르 지방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에 자기 전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두 형제를 본 학우들이 놀리며 장난치고 방해했다. 며칠간 이런 일이 계속 되었지만 그들은 기도하기를 계속했다. 나중에는 그들도 감동하고 기도하고 취침하게 되었다. 두 형제의 취침 전 기도는 마침내 기숙사 전체로 확대되었다.
사명과 소명은 훈련 받은 자에게 주어진다. 그는 선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화란개혁파 교회의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도 쌓았다. 거기에 더하여 1년여 동안 의학 공부도 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회중이 시편 103편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라는 구절을 읽다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기도에 몰입하자 언더우드도 깊은 기도의 경지에 들어갔다.
이런 훈련과정에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16)란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형에게 선교사로 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형은 자신의 타자기 회사에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만류했다. 그에게 좋은 조건으로 목회할 자리도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초지일관 부르심 받은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다짐했다.
박해의 땅, 조선으로 향하다
그런 와중에서 되새긴 말씀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라는 구절이었다. 이 말씀은 그가 서구의 백인 우월 사상에서 벗어나게 했고, 후일에 한국 선교 현장에서 인종차별 의식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해 동포주의적 기독교 사상의 바탕에서 선교했고, 여러 교파 선교사들과의 연합 정신을 강조했다.
언더우드는 신학생 때 조선에 사는 1300만명의 사람들이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것은 그를 한국으로 부른 음성이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병인박해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송 받은 9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참수형을 당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평신도 천주교인들이 순교했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없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했다. 사실상 선교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사로 가기를 자원했다. 1884년 12월 22일쯤에 뉴욕을 기차로 출발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요코하마, 부산을 경유하여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해 서울에 입성했다.
처음에는 뉴욕 브루클린 라파에트가 장로교회의 맥윌리엄스가 한국 선교를 위해 재정을 지원했다. 나중에는 그의 형이 후원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 가는 그의 부친이 영국 런던에서 잉크, 복사용 카본 사업으로 한때 번창했다. 나중엔 동업자의 자금 횡령으로 사업이 어렵게 되었다.
1872년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뉴욕에서 그의 아들 존이 설립한 언더우드타이프라이터 회사가 번창하여 부를 누리게 되었다. 언더우드 가는 사업에 재기했을 때도 부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재산은 하나님이 일시 맡겨두신 것으로 여겼다. 존은 그가 받은 물질적인 축복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재정위원장으로서 한국 선교의 개척자가 된 동생의 후견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3. 한국에서의 첫 사역- 알렌 도와 환자 돌보며 자택서 학생 모아 교육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언더우드 선교사는 노방전도에 힘썼다. 한국 입국 15개월 만에 첫 세례를 주기도 했다. 사진은 1898년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가운데)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앞줄)가 그리어슨 의사 부부와 노방전도에 나섰을 때 모습.
서울은 외국 세력들의 각축과 갑신정변 등의 정국 속에서 더한층 어수선해졌다. 같은 북 장로교 선교사인 알렌이 언더우드보다 6개월가량 먼저 내한했으나, 그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이 선교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조정과 협약해 제중원(처음 얼마간은 광혜원이라고 불렸다)이라는 서양식 병원을 세웠다.
언더우드도 내한하여 제중원에 출근했다. 그는 의학도들에게 물리 화학 영어를 가르쳤다. 수술하는 알렌을 도와 하루 70여명의 환자도 돌보았다. 그는 여러 가지 기술과 의료지식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준비된 선교사였다.
언더우드는 내한한 지 3개월 되던 1885년 7월 6일, 미국 북 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그가 자기 집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 일은 예수교학당, 언더우드학당, 경신학교의 시원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교육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의료선교는 선교를 시작하게 하는 추진력이 있었지만 선교를 발전시키는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 설립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대학을 설립하려는 꿈도 있었다.
탁월한 언어 습득 능력
내한 이후 급선무는 한국어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한국어 선생은 일본 체류 중에 만난 이수정이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과 연계되어 체일(滯日) 중 도쿄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수정은 루미스 선교사 집에서 산상수훈을 보고 놀랐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동양의 5복과 예수님의 8복이 너무나 달라서 충격적이었다. 그는 마침내 세례를 받고 마가복음도 번역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오면서 이수정이 한국어로 번역한 쪽복음 성경을 들고 입국했다. 이런 일은 선교역사상 경이적인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선교사가 현지에 가서 그 나라의 말과 글을 배우고 문법책 만들고 사전을 만든 후에 성경을 번역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
언더우드의 한국어 선생으로는 이수정 외에 서광범 송덕조 등이 있었다. 송덕조는 프랑스인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불자전’ 편찬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언더우드는 어학 구사력이 출중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여 불어를 구사하는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어와 신학연구를 위한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서구 고전어들은 한국어 성경을 번역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어학 습득을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열의를 지닌 사람이었다.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어 일본어를 구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일어 습득을 위해 도쿄에 가서 하루 8시간의 정규 과정의 수업을 받았고, 집에 와서는 또다시 가정교사에게 어학 훈련을 받는 집중력을 보였다. 그 무렵 대학 설립 문제가 많은 반대에 부딪치자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학 공부도 너무 급하게 많이 하여 일본어 소화불량에 걸렸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어 습득과정에서는 일화가 많다. 한번은 “없는 것이 없다”고 쓰인 어느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찾는 품목마다 그 가게에 있지 않았다. 주인에게 항의하자 “그러니 없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소”라며 주인이 큰소리를 쳤다.
말의 뜻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을 알고 놀랐다. 또 한번은 모자를 사러 가서 “이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갓이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는 이를 ‘가시오’란 말로 알아듣고 얼른 뛰어나왔다.
노방전도에 힘쓰다
한국어 훈련을 1년간 하자 어느 정도 한국말 구사가 가능해졌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다운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설교도 하고 간단한 전도용 소책자도 간행하게 되자 약수터나 골목, 샛길에 가서 책을 읽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질문을 주고받았다. 가두(街頭) 대화는 발전하여 가두집회가 되었다. 큰 길거리나 동리에서 설교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밤에 나눈 사랑방 대화도 모임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노방전도나 사랑방 전도는 초기 한국교회 성장의 텃밭이었다.
언더우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1886년 7월 18일 세례를 베풀었다. 첫 수세자는 노도사, 곧 노춘경이었다. 수세자들에게 한문 사복음서와 ‘구령혼설’ 같은 전도 문서를 읽게 하였다. 성만찬에도 참석하게 하였다. 1885년 6월 21일부터 외국인들이 모여 예배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자 한국인들도 간혹 암암리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부터는 선교금령 속에서도 수세 지원자가 증가했다. 특히 황해도 소래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청하러 온 이들 가운데는 “국왕이 우리를 처형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괜찮습니다”라고 하며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작은 나무십자가를 등에 매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
4. 성경의 한글번역- 한국에 없던 ‘빵’과 ‘양’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
아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등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위원, 언더우드는 1887년 성경을 번역 출간하기 위해 한국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했다.
사진은 1906년 완성된 신약전서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종교이다. 언더우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한국이 자기를 부른다는 믿음을 갖고 이 땅에 왔다. 그는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가 한국에 처음 입국했을 때 이미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한 ‘마가가 전한 복음서 언해’가 발행되었고,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스코틀랜드인 로스 선교사를 도와 신약성경 전부를 번역한 ‘예수성교전서’가 발행되었다.
‘바늘 귀’냐 ‘바늘 눈’이냐
만주에서 로스를 도운 사람들은 그의 어학 선생인 이응찬을 비롯해 백홍준 김진기 등 6인의 청년들이었다. 그 후 언더우드는 내한한 지 1년여 만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이수정역의 마가복음서를 고쳐서 출간했다. 그는 이때 기존의 번역본을 사용할 것인지, 새로 번역하는 것인지를 두고 무척 많이 고심했다. 기존 번역본은 사투리와 한문 투가 심했고, 오역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 번역본을 일일이 고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새롭게 번역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1887년 2월에 성경전서를 번역 출판 보급하기 위한 ‘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4월에 ‘한국상설성경위원회’로 개명하고 그 밑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를 두었다. 1893년에는 ‘상설성경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와 번역위원들이 가장 중시한 것은 기도였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 간구했다. 선교사들의 거취에 따라 번역위원들의 면면이 다소 달라졌다. 언더우드 외에 북감리교 선교사들인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존스, 북장로교 선교사 피터스와 게일,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 등이 공헌을 했다. 한국인으로는 김정삼 이원모 이승두 등이 한국어 성경 번역위원으로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어학적 재능과 학습 집중력이 뛰어나 한국에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어를 구사했고, 피터스는 그 자신이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게일은 한글과 한문에 조예가 깊어 한국 고전 문학작품들을 영역하고 천로역정 등을 한역했다. 레이놀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서 뛰어난 히브리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번역 작업에는 애로도 많았다. 성경 원어에 해당하는 용어가 한국어에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위원들은 복음서 몇 구절을 가지고 하루 종일 토론하기도 했고, 한국인들과 논의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게일은 한국에는 ‘빵’도 없고 ‘양’도 없는데 이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결국 ‘빵’은 ‘떡’으로 번역되었고, ‘양’은 교회에서 흔히 쓰는 용어가 되었다. 그들이 ‘바늘 귀’냐 ‘바늘 눈’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였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누가복음 18장 25절이 조선인의 주장을 따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로 번역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선교사들은 흠정역의 ‘eye of needle’에 따라 ‘바늘 눈’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은 신에 대한 칭호를 ‘하나님’이냐 아니면 ‘천주’ 또는 ‘상제’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다수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으로 정하기를 주장하였고, 언더우드는 한동안 이 용어를 거부하였다.
3차에 걸친 번역 작업
성경 번역과 출판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번역위원이 각자 맡은 부분을 단독으로 번역하였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각 위원들이 번역한 본문을 동료 위원들이 함께 읽고 비판하고 제언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그 위원이 다시 임시 번역본을 제출하게 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 임시 번역본에 대한 독회를 열어 토론한 후 다수결로 채택하고 임시로 출판해 3년간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06년에 번역위원회가 각 개인의 것을 개정한 신약전서가 출간되었다. 이때 처음 간행된 성경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보다 비싸게 책정되었는데도 첫 2만여권이 모두 예약으로 팔렸다. 구약까지 완간된 것은 1911년에 이루어졌다.
언더우드는 누가복음과 시편의 일부를 맡았고, 번역 전체를 총괄하였다. 성경전서가 출판되었을 때 그는 성경 원어를 통달한 한국인이 나와서 더 완전한 번역본이 나오게 되기를 대망하였다. 성경번역위원회는 성경이 번역된 후 곧 성경개역위원회로 개칭해 존속되었다.
1911년 조선성서공회관이 건립되었을 때는 언더우드가 그 초석을 놓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번역위원회 위원장 직무에 충성했다. 아펜젤러도 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행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부근에서 조난당해 순직했다. 그는 자기를 돕던 조한규를 구한 후 익사했다. 우리가 한글성경을 매일 보게 된 것의 배후에는 이처럼 충성한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5. 언더우드와 한글- 복음전파 위해 한글 보급 앞장 ‘한글 재창조자’
언더우드(맨 왼쪽)는 선교활동에 한글을 공식 언어로 정하고 영한사전과 성경공부 교재 등을 출간했다.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서울선교지부 선교사들과 언더우드 가족이 모였다
한글이 빠르게 보급된 이유는 선교사들의 공이 크다. 한글을 선교활동의 공식 언어로 사용했고 성경을 한글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보급됐고 한글이 보급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해졌다.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 박사는 기독교 때문에 한글이 살았고 한글 때문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되었다고 말했다. 한글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은 것도 언더우드와 제임스 게일(1863∼1937) 등의 선교사들이 그 우수성을 널리 홍보한 데서 비롯됐다.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했으나 조정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민간에서 대중화되지 못했다. 한글은 1801년 신유년 천주교박해 때 공문서에서 처음 사용됐다. 당시 가톨릭 교인들이 교리 공부를 위해 일반인보다 한글을 더 잘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이 한문과 한글로 전국에 천주학을 믿지 말라는 내용의 ‘척사윤음’이란 반포문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리델을 비롯한 프랑스인 신부들이 ‘한불자전’을 만들었다. 이 사전은 어느 순간에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박해시대의 어려운 상황에서 은밀히 제작됐는데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의 한국어 공부와 성경번역에 도움을 주었다.
개신교에서는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로스가 한국어 입문서인 ‘Corean Primer’(1877)를 처음 펴냈고, 그의 동료인 매킨 타이어가 ‘Notes on the Korean language’(1879)를 간행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글 연구와 대중화 작업은 언더우드가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처음 한글을 접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글을 선교용어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성경 찬송가 전도문서 신문 기타 기독교 서적을 모두 한글로 간행했다. 서민들이 쓰는 한글이 기독교 복음 전파에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를 한글의 재창조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어 문법과 영한 한영사전의 출판
언더우드는 한글을 언어학적으로 연구해 서구 세계에 이를 발표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선교사들의 문법책과 사전을 참고하고 동료들과 어학선생의 도움을 받아 내한한 지 1년도 안 돼 문법책을 거의 완성했으며, 3년여에 걸친 편찬작업 끝에 두 권의 책을 1890년 요코하마에서 출간했다. 당시 서울에는 인쇄소가 없었다. 그는 거기서 한글 활자가 없어서 활자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직접 한국어 활자의 지형을 떴고, 교열을 보고 감독하는 고역도 치렀다.
이런 산고 끝에 처음 발행한 책은 문법책인 ‘한어문전’이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총 425쪽이나 됐다. 이 책은 후임 선교사들에게 한글 공부의 길잡이가 됐다. 두 번째로 발행한 책은 ‘한어자전’(영한사전)이었다.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었는데 1부 한영부는 197쪽이었고, 2부 영한부는 97쪽이었다.
사전을 출판하는 경비는 600∼700달러가 소요됐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그런 거액을 들여 사전을 만드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그 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선교지에서 겨우 4년을 보낸 어학 실력으로 문법책과 사전을 만드는 것에 그들이 의구심을 품고 반대했던 것은 그럴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선교부가 부담해주지 않으면 모금을 해서라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그 일을 강행했다. 다행히 선교본부의 미첼(Dr. Mitchell) 총무 내외가 내한해 지원을 약속해줬다. 출판이 되자 동료들이 놀랐고 그 책은 그 후 25년간 애독됐다. 영한부는 1915년에야 후손들에 의해 약간 보완됐으며, 한어자전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애용하는 각종 영한사전들의 효시가 됐다.
전도문서와 성경공부 교재 간행
1894년을 전후로 한국 내 선교활동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노방전도와 사랑방전도에 힘쓰며 복음을 전했다. 여기서는 전도문서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묘축문답’ ‘구령혼설’ ‘진리이지’ 같이 한문으로 된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했다.
나중엔 전도지를 번역해 쓰기 시작했다. 그는 ‘성교촬리’와 ‘상제진리’를 발행했고, 1891년에는 네비우스 부인의 ‘기독교 문답(Christian Catechism)’을 ‘예수교문답’이란 제명으로 출간해서 사용했다. 1893년에는 같은 책자를 ‘그리스도 문답’이라고 고쳐서 사용했다. 1894년에도 ‘복음대지’ ‘부요록’ 삼위일체를 설명한 ‘삼요록’ 등을 번역했다.
아펜젤러와 같이 집필한 ‘예수행적’이란 전도지도 활용했다. 1894년에는 언더우드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에 대해 쓴 ‘복’이란 문서를 만들었다. 성경공부용 서적은 다른 필자의 저서들을 번역하거나 그가 직접 집필해 사용했다. ‘모세 제도의 공과’와 ‘요한공부’ 등이 그것이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6. 언더우드의 교회 설립- 사랑방서 모인 14인 첫 예배… 새문안교회 탄생
새문안교회는 1887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1910년에는 자립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500여명이 모여 헌당예식을 가졌다
새문안교회 내 원두우 기념비
언더우드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고 조직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였다. 한국 근대화를 이룩한 공적은 교육,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목표는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였다. 조정의 천주교 박해를 의식하고 금교정책을 따라가는 선임 알렌과의 마찰도 세례를 비롯한 전도 활동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생명을 걸고 수세를 원하는 자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주장했다. 중국에서도 모리슨 선교사가 정부의 금교 제재를 풀기 전에 세례를 베푼 예를 들었다. 한국에는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안 그는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외국인들뿐이었지만 1885년 6월 21일, 언더우드는 이들과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 모임에 언제부턴가 한국인들도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암암리에 1886년 7월쯤 노춘경(노도사)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1887년 1월 23일 주일에는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세례 받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는 이후 “복음 전파자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임무를 받은 제가 어떻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문안교회, 최초의 조직된 교회
1887년에 이르러 수세 요구자 증가는 교회 설립의 요구로 이어졌다. 마침내 1887년 9월 27일 화요일 저녁, 언더우드의 사랑방에서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서상륜, 백홍준 두 장로가 택정된 한국 최초의 조직된 장로교회의 시작이었다.
물론 1884년 황해도 솔내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나 이는 한국인 평신도들의 공동체였다. 언더우드의 집에 모인 13명의 참석자는 서상윤의 전도로 만주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로스 목사로부터 수세를 받은 자들이었다. 이 자리에는 로스 목사도 언더우드의 초청으로 참석했다.
그들은 개척 선교사로서 감회와 감격을 나누었다. 언더우드는 ‘씨가 뿌려지는 곳마다 그 씨에 뿌리가 나서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 같다’는 글귀를 남겼다. 나머지 한 명은 그날 세례를 받았다. 새문안교회 설립은 한국인의 자발적 기독교 수용의 증거다. 여기에 언더우드의 목회자적 역할이 더해져 한국 개신교는 수용과 전래가 합일되어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서상륜은 생명을 담보한 만주의 봉천 영구부터 의주와 솔내, 서울을 거치며 권서인으로 활동했고 로스 목사의 성경 번역에도 관여했다. 그는 의주에 머무르지 않고, 물론 거기 안주할 수도 없었지만 솔내를 거쳐 서울에서 주로 권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서울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언더우드도 처음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서씨 가문에서 서경조를 비롯한 목회자를 배출한 것은 믿음의 전승이 잘 계대(繼代)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귀한 일이고 축복이다. 앞으로도 잘 계승되길 기원한다.
21개의 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1887년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부의 제재는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소위 ‘영아소동’ 사건이 일어났다. 서양인들이 한국 어린이를 잡아 눈알을 뽑고 사진기 렌즈를 만든다거나, 간을 빼어 약을 만든다는 괴담이 난무했고 급기야 폭동으로 이어졌다.
서양인들은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실제로 이화학당 정문 수위는 살해되기도 했다. 폭동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야 진압되었다. 이런 여파 탓에 1888년에는 새문안교회 신도 수는 50여명이었다. 이후 교세는 점진적으로 증가해 1889년 263명, 1901년 401명으로 성장했다.
1894년 청일전쟁 전후로도 선교활동은 자유로웠다.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에 따라 새로운 교회도 개척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93년에는 사평동교회, 1894년에는 현재의 서교동교회가 개척됐다.
새문안교회는 한국교회의 모교회라고 한다. 그 이름을 처음에는 정동교회라고 했다. 언더우드 사저가 있던 곳의 지역 이름을 따라 정한 이름이었다. 지금의 예원중학교 자리다. 1890년에는 돈의문을 오늘날의 경향신문 자리로 옮겨 ‘신문’, ‘새문’이라고 칭하여 교회명도 새문안제일교회(新門內第一敎會)라고 붙여졌다. 그 후엔 새문안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에는 자립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500여명이 모여 헌당예식을 가졌다.
언더우드는 이후 지금의 서교동교회, 영등포교회를 비롯해 총 21개 교회를 설립해 목회자로서 선교사의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7. 교육선교의 시작, 고아원 - 고아들 입히고 먹이고 재워주며 영어·성경 가르쳐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아원 학교를 시작으로 교육 선교 활동을 펼쳤다. 사진은 1913년 덕수궁에서 열린 제1회 조선주일학교대회. 이 때 강사가 언더우드 목사(강단 위)였다. 언더우드는 1910년 고아학당의 규정을 담은 책을 발간했다. 국민일보DB
언더우드는 서구식 교육을 통해 한국 근대화에 공헌했다. 몇몇 소년을 모아 매일 아침 영어를 가르친 것이 시초였다. 그의 교육 사역은 한국에 온 어느 선교사보다도 먼저 시작되었다. 그는 1885년 7월 6일,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상황을 보고하고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가 건물을 구해 여건을 갖추면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펼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아펜젤러는 그 다음달인 8월 3일부터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이화학당의 시원도 스크랜턴 부인이 1886년 5월 31일 어느 소실 한 명을 데리고 가르치기 시작한 데에 있었다. 이때는 영어교육이 주된 교과목이었다.
고아원에서 성경과 영어교육 시작
언더우드의 교육선교가 시작된 곳은 고아원이었다. 그는 1886년 2월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 김윤식을 통해 조선 정부의 교육사업 허가 통보를 받았다. 학생은 언더우드의 어학 선생이 데려온 고아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 초 새 건물을 마련한 사실을 선교본부에 보고하면서 전도하여 기독교를 전하는 일이 불가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교육하는 일부터 실시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아 학교 사역을 준비한 후 1886년 5월 11일 개교하였다.
교실은 서울 정동에 있던 그의 사택 옆 한옥 사랑채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교육선교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 교육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갈망했다. 아펜젤러도 1886년 6월 8일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명칭의 현판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 역시 고아들이 첫 학생들이었다.
언더우드는 학교를 시작하면서 등록금은 받지 않았다. 전액 장학제도로 운영했으며, 먹이고 입히고 잠도 재우고 목욕도 시켰다. 변변한 목욕시설이 없어 고무 튜브를 사용했다. 한 번은 개학 후에 어느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 여자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여학교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일은 정신여학교를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선교사들의 학교와 당시 조선의 서당은 어떻게 달랐을까. 언더우드가 가르쳤던 과목들은 국어 한문 영어 성경이었다. 학생들은 숙식을 같이 하면서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야 했다. 8시까지 세면과 방 청소를 한 후에 한문 공부부터 시작했다. 외국인 선생과 함께 아침 기도회를 가졌고, 그 후에야 아침을 먹었다. 오전에는 주로 암기 위주로 영어공부를 했고 이어 성경공부를 했다. 오후에는 다른 수업과 놀이, 한문공부를 하고 하루 일과를 끝냈다.
학생은 개교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10명으로 늘었고 이후 25명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더 늘어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서양식 교육에 쉽게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온갖 소문만 들끓었다. 서(양)귀(신)들이 아이들을 키워 노예로 판다. 살찌도록 길러서 잡아먹는다, 염통을 빼어 약을 만들려 한다. 눈알을 빼어 사진기 만드는 데 쓴다. 남색을 즐기려 한다는 등 헛소문이 난무했다.
고아원 학교에서 경신학교로
이 때문에 알렌은 언더우드의 교육선교 활동을 시기상조로 보고 제동을 걸었다. 선교본부도 적극적으로 교육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던 동료 선교사들 중에도 교육선교를 반대했다. 임금이 하사하는 학당 현판도 그들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결국 1897년 3년간 학교를 폐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반면 감리교선교회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들은 학당 현판을 하사받아 정부가 인가한 교육기관이 됐고 감리교 선교본부의 지원과 동료 선교사들의 호응을 받아가며 성장했다.
언더우드는 왜 고아원으로부터 학교 교육을 시작했을까. 조선 정부는 처음에 이 일을 사회사업으로 보고 설치를 허가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는 정부가 설립한 동문학(同文學)의 무상교육이 호응을 얻는 것을 보고 무상교육을 적용하면 학생들의 반응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당시 서울에는 고아들이 많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무상교육을 실시해 원대한 교육선교의 실마리를 풀려 하였다.
서구식 교육을 고아에게 적용한 사례는 조선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구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육은 대개 고아들을 돌보고 가르친 데서 출발해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 한국은 서구에 대한 인식이 늦어 청일전쟁 이후에야 서구문화와 서구교육을 받아들였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고아원 학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예수교학당, 언더우드학당, 민노아학당 등의 이름을 거쳐 결국 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이곳에서 도산 안창호, 우사 김규식이 배출됐다. 오늘날 한국이 교육 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공로가 지대하다. 그들은 문맹률이 높고 서민교육이 부재했던 구한말,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헌신하면서 한국의 백년대계의 초석을 놓았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8. 언더우드와 찬송가 - 한국 최초 오선 악보집 ‘찬양가’ 독자 출간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4년 한국 최초로 4성부 ‘찬양가’를 출판했다.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찬양가에 악보를 표기해 한국의 음악 발전에도 기여했다.
언더우드는 찬송가를 편찬하는 방면에서도 개척자였다. 그는 1888년 고종황제 탄신일에 새문안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애국정신을 고양하는 뜻을 지닌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높으신 상주님, 자비로운 상주님, 긍휼히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 보우하소서.”
그는 한국어 찬송가를 조속히 간행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그가 편찬한 ‘찬양가’의 서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것을 찬송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1889년 여름, 한영사전의 원고를 탈고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찬송가 편찬에 착수했다. 그는 미국에서 장로교인들이 사용하는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한국어 노랫말을 서양 곡조에 맞추는 번역 작업은 까다로웠다. 이는 글자에 정한 수가 있고 자음에도 고하청탁(高下淸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92년에 출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888년까지 13곡을 골라 번역했다.
원래 계획은 성경번역 작업과 마찬가지로 감리교회와 함께 연합찬송가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찬송가가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내용 조정이 필요해지면서 지연됐다. 그러는 동안 1892년 감리교 선교사들은 ‘찬미가’를 출판했다. 로드와일러와 존스 선교사의 편찬으로 27곡이 수록된 무악보 찬송가(가사만 있는 찬송가)였다.
한국 최초의 4성부 음악책
언더우드는 독자적으로 출판을 계획하고 계속 추가하여 번역하고 개정해 갔다. 마침내 1894년 요코하마에서 ‘찬양가’란 이름으로 인쇄돼 출판했다. 이 책은 예수성교회에서 간행하였고 삼문출판사에서 보급했다. 출판 과정에서 소요된 적지 않은 비용은 언더우드의 형이 헌금해 충당했다.
찬양가는 4성부 악보로 작성된 찬송가로, 88곡에 악보가 붙어 있었다. 한국 최초로 서양음악 악보가 제시된 음악책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문맹이던 시절에 곡조를 읽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서야 나왔다.
1894년 간행된 찬양가는 근대 한국음악사에서 가장 귀중한 유물이 되었다. 지금 이 책은 ‘문화재청 고시 제2011호, 등록문화재 #478호’로 등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찬양가에 대해 “우리나라 최초의 오선 악보집이면서 최초의 악보 있는 개신교 찬송가집으로 한국 근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고 소개했다.
찬양가는 117장으로 편집되었다. 가사의 번역은 다른 사람의 것도 있었다. 그 찬송가들 가운데 7곡(또는 9곡)은 한국인이 작사한 것이었다. 93장의 “어렵고 어려우나 우리 쥬가 구하네”는 백홍준 장로가 작사한 것이었다. 그 외 6곡은 작사자 미상이다.
한국인이 작사한 이 곡들은 제4장의 ‘이 세상을 내신 이는’, 29장의 ‘우리 주의 피를 보면’, 38장의 ‘우리 예수 큰 공로가’, 61장의 ‘예수의 높은 이름이’, 113장의 ‘깃브다 구쥬 왕되니’, 115장의 ‘나는 밋네, 나는 밋네 여호와’였다. 찬양가는 판을 거듭할수록 분량이 늘어났다. 1895년 판에는 159곡, 1896년 3판 때는 160곡이 되었다. 1898년 4판 발행 때는 164곡이 수록되었고 1900년에는 182곡이 수록되었다.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번역 출판, 사용 과정에서 많은 난관을 겪었다. 이 책에서 그가 신(神)의 호칭으로 ‘여호와’와 ‘아버지’만 사용하였다는 점과 선교사들의 연합찬송가 출판 결정에 위배되었다는 것 등이 반대 이유였다. 이 때문에 전체 장로교회들이나 전국 교회들에서 사용되지 못했다. 주로 서울 지역과 남장로교 선교 지역에서만 사용됐다. 이북 지역 장로교회에서는 ‘찬셩시’가 주로 사용됐다. 찬양가는 1908년 감리교와의 합동 찬송가가 출판될 때까지 사용됐다.
초기 찬송가는 100부 합창
초기 교인들은 찬송가를 어떻게 불렀을까. 처음에 교인들은 중국어 찬송가를 우리말로 ‘주예수애아(主耶蘇愛我)’라고 음역해 가사 뜻도 모른 채 불렀다. 세월이 흘러서는 찬송가 가사를 한지에 써서 걸고 선교사가 먼저 부르면 회중이 따라 불렀다. 어떤 곡들은 미국인들의 이별가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추어 불렀다.
게일 선교사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우리나라의 뱃노래 가락에 맞추어 작사하기도 했다. 전통 민요인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서양 음률을 따라 부르는 일이 쉽지 않아 교인들은 제각각 곡을 넣어 불렀다. 따라서 100명이 모이면 100부 합창이 행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는 ‘예수사랑 하심을(Yes, Jesus loves me)’ 찬송을 영어로 불렀다.
찬송가는 한민족이 지닌 음악 혼을 깨웠다. 서양 음률로 보급된 찬송가는 한국 음악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 배후에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기도와 사랑의 씨 뿌림이 있었다. 교회는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음악은 교회를 통해 전승, 발전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9. 언더우드의 북한 전도여행 - 서구인 최초로 이북 답사… 평양감사 환대 받아
언더우드는 세 차례에 걸쳐 북한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 소래교회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평양과 의주 등을 돌아보며 복음 전파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사진은 1905년 건립된 황해도 소래의 선교사 휴양소
언더우드는 한말에 서구인으로서는 최초로 이북 지방을 답사했다. 1886년 말 황해도 솔내(소래 또는 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서상륜이 찾아와 그곳 교회 상황을 알리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요청했다.
언더우드는 이미 생겨난 교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선교를 위해 북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해 북한 지방을 돌아보기 원했다. 당시에는 외국인이 안심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동료 선교사인 알렌으로부터도 많은 반대를 받았다. 산골에서 산적이나 맹수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음식은 물론 마실 물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정한 때가 오기까지는 죽지 않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고 믿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향한 열의와 믿음으로 북부 지방을 탐사하는 여행을 준비했다.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장차 선교 거점으로 삼을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도 1887년 3월 8일자 편지로 평양이 산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사실을 확인시키고 그곳에 선교지회(station)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의주, 개종자들이 몰려오다
마침내 언더우드는 1887년 11월 추수감사절 전에 북한 여행을 위해 출발했다. 기독교 소책자와 몇 가지 기본 약품들을 조랑말에 싣고 호조(護照)를 발급받아 첫 번째 북한 여행을 떠났다. 호조는 일종의 여행증명서였는데 이를 지방 관리에게 보여주면 조랑말과 침구, 엽전, 숙박 등 편의를 얻게 되어 있었다. 비용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중에 계산했던 후불제도였다. 그는 송도 솔내 평양을 거쳐 국경지대인 의주까지 여행했다.
첫 방문지는 솔내였다. 그곳에는 서경조와 서상륜 형제가 선교사들의 손길이 미치기 전에 전도해 세운 한국 최초의 교회가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서병조 외 3명의 어린아이와 백홍준의 처 한씨와 이성하의 처 김씨 등 7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식을 거행했다.
언더우드는 평양에서도 의외의 환대를 받았다. 당시 평양감사가 호의를 보여 말과 여행비를 보조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찾아간 곳은 변경의 의주였다. 그곳이 서상륜 형제를 비롯한 여섯 의주 청년들의 출신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청년들은 만주의 우장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 선교사들의 성경 번역을 돕고 번역된 한글성경을 사람들에게 배포하며 전도해 교회를 세웠던 신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의주에서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개종을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광경을 본 언더우드는 이곳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년 뒤 마펫과 게일 선교사도 이곳을 방문해 선교 가능성을 탐지하고 언더우드의 선견지명에 공감했다.
환대 속의 북한 여행
염려 속에서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그는 예상치 않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동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쉴 때는 책을 팔고 설교도 했다. 그러나 숙박시설이나 음식 때문에 고생을 겪기도 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여인숙이나 가정집 사랑방은 너무나 비위생적이었다. 밤에 온돌방에서 자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주인이 군불을 너무 많이 때는 바람에 마치 난로 위에 자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나 빈대, 벼룩의 공격에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때의 경험들은 이후 지방 여행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토대가 됐다.
두 번째 북한 여행은 1888년 4월 시행했다. 이때는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타고 함께 제물포까지 왔던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동행했다. 언더우드는 이번에도 솔내에 들려 세례를 주었다. 지난 여행으로 만난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주민은 옷소매에 감자 부침개까지 싸가지고 와 그에게 주었다. 그는 위장이 나빴지만 모두 먹었고 배앓이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여행은 중도에서 포기해야 했다. 조선 정부의 선교 금령 통지를 받은 선교회와 미국 공사관이 그들에게 즉시 서울로 돌아오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금령이 내려진 것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정부의 건축 중지 명령을 어기고 덕수궁에서 높이 바라보이는 성당을 명동에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궐보다 높게 성당을 짓는 일로 은밀히 행하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이후에 제재를 받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전도 열정은 계속 타올랐다. 정부 경영의 육영공원에서 가르치던 서양인 교사들이 사직하자 언더우드는 정부로부터 그 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를 가르칠 자유가 주어지면 하겠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세 번째 북한 답사는 신혼여행을 기해 이루어졌다. 그는 두 번의 여행 경험 덕분에 한층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여행 경험은 후임 선교사들의 길잡이가 됐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10. 결혼과 신혼여행 - 8년 연상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와 결혼
1889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의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번째와 다섯번째)와 짐꾼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다. 상대는 릴리아스 호튼(Lillias Horton). 의료선교사로서 언더우드보다 8년 연상이었다. 호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그녀는 여성 의사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인 1888년 3월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성 의사가 귀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됐던 길을 버리고 미지의 나라 조선을 향했다.
선교사로 평생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던 그녀는 ‘선교사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선교관이 같았던 호튼과 언더우드의 결혼은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더 효율적으로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혼여행이 선교여행으로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을 이용해 북한 답사 계획을 세웠다. 여행의 관심사는 선교지회의 장소를 어디로 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주와 평양을 염두에 두었다. 그곳에서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팔면서 전도하는 권서인들을 돌보고 기독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반대가 극심했다. 폭력을 제외한 온갖 반대가 그들에게 제기되었다. 남자들도 안 가는 곳을 외국인 여성이 가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성 선교사도 지방 여행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간남자와의 접촉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에 여성을 위한 선교는 여성만이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자 선교사가 지방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만 해도 큰 공헌을 하던 시절이었다. 반대자들은 신부가 돌아오게 된다면 죽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본부도 여의사의 활동이 위축될 것을 염려해 이 여행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우리 둘이 결혼함으로써 더 많이 쓰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선교여행은 일종의 시험이 될 것입니다”라고 3월 11일자 편지로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그들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889년 3월 14일 신혼여행을 떠났다. 어려운 여행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항상 보호해주신다는 믿음과 사명으로 출발했다. 그들보다 앞서 결혼한 벙커와 애니 앨러스 선교사 부부는 반대 앞에서 그런 여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갔으며 때로는 걷기도 했다. 사실 가마를 타기보다는 신랑을 따라 걸을 때가 더 많았다. 말을 탈 수도 있었으나 당시에 말 타는 여자는 기생 같은 천민 신분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요단강 세례’ 베풀다
여행의 주요 방문지는 송도 평양 강계 의주였다. 그들이 도중에 잠을 잘 때는 볏짚을 한 발도 넘게 깔고 그 위에 일본식 매트와 이부자리를 폈다. 온돌방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와 빈대, 벼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서양 여성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은 어디에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다. 밤에는 창호지를 뚫었고 낮에는 무턱대고 몰려들었다. 강계에서는 피신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돌림병이 도는 곳을 포함해 도처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다. 산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고, 조수와 말과 마부들이 납치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총을 써야 할 형편에서도 그들은 선교사였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붙잡힌 8명의 산적들에게는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과자들로서 이전에 일본인 여행객 한 명을 살해한 자들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범죄자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많은 배상을 해야 했다.
언더우드 부부 일행은 여러 곳에서 대접을 받았다. 원님을 대접하는 파티를 열기도 했다. 송도에서는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의주에서는 100여명의 수세 지원자 중 33명을 선발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올바른 사람을 수세자로 뽑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딘스모아 미국 공사는 ‘기독교 사업’을 하면 안 된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언더우드는 의료사업을 기독교 사업이라고 여겨 전도하거나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해 공사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수세 지원자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국경을 넘는 일은 그가 출발 전 중국 통행증을 받아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이 압록강 세례 사건이었고 이 일은 일명 ‘한국의 요단강 세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신혼여행을 겸한 제3차 북한 선교여행은 2개월여 만에 끝났다. 1600㎞의 대장정이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가 세례를 베풀었으며, 사경에 처한 환자들을 치료했다. 모든 여정을 통해 600여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여행에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선교책자를 나누어주기도 했으며 그들 마음속에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심었다.
또 개종자들을 격려하고 장래의 선교 가능성을 확인했다. 언더우드는 부부가 협력하는 선교사업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과 여성도 지방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