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윗부분의 맨 끝은 부드러운 놋으로 되어 있고 절대 끊어지지 않는 가죽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신발 바닥에는 약 7.5 센티미터 정도의 송곳같은 쇠못(Spikes)이 부착되어 있었지.
만일 이 신발에 차이거나 밟히면 날카로운 못에 찍히는 것 같은 똑 같은 효과가 나타나.
바울은 평화의 복음의 신발이라고 표현하면서 평안 (Peace) (eeivrh,nhh) 또는 평강을 로마 군사의 신발과 연결시키고 있어.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해 복음의 신발과 평안을 연결시키는 것은 평안은 신발처럼 우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송곳 같은 스파이크를 통해 적군을 발 아래 짓밟는 공격용 무기이기 때문이야.
약간 다른 복음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 공격은 아니라고 분명히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응, 그러니까 어원을 따져봐야돼.“신고”라는 헬라어를 살펴 보아야 하는데, 그 단어의 원어는 “휴포데오”라고 되어 있는데 “휴포”는 아주 강하게 ‘아래로’ 라는 뜻이요, “데오”는 ‘묶다’라는 뜻이지.
즉, 신발을 ‘꼭 조여서 잘 메다’라는 뜻이 되는 거야.
그러므로 평안의 신발을 신는다는 뜻은 마치 로마 군사가 신발을 꼭 조여서 잘 신고 있는 것처럼 평강을 ‘꼭 붙들어 메다’, 평강을 우리 마음, 곧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꽉 붙들어 놓다’라는 뜻이 돼.
묘하게 말이 또 되네…
이렇게 신발을 꼭 조여서 신은 상태가 되면 “준비가 된 것”이야.
다른 말로 하면 신발을 꼭 조여서 잘 신고 발바닥을 땅바닥에 딱붙이고 차렷하면 준비가 됐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말하자면 평안이 우리 마음 속에 든든히 자리 잡고 있으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영적 전투에 대하여 승리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야.
그러면 정지 상태가 되어 있다는 뜻이겠군.
여기서 평안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해.
평안은 원어로 ‘에이레이네이’인데, 이 원어의 성경적 개념, 헬라적 개념은 어떤 힘이 있어서 안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지.
하늘의 하얀 구름을 만들며 죽 전진하는 비행기! 그것이 헬라적 개념의 평안이지, 정지 상태는 아냐.
성경에서의 평안은 멈춰져 있는 것을 평안이라 하지 않아.
오히려 무한한 에너지가 있기에 그 에너지에 의해서 자신의 사명을 계속 감당하고 있는 상태가 평안이지.
그러므로 평안의 반대 개념은 힘이 떨어진 상태 즉, 비행기가 연료가 떨어져 추락하는 상태야.
혼란과 초조함이며 감당할 수 없음으로 인한 불안이 평안의 반대 개념이지.
이는 무한한 힘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력이 죽어가는 상태를 말해.
영적으로 보면 평안을 잃는 것은 우리 영혼이 혼탁하여지고 영력을 잃은 것을 의미해.
어느새 생각지도 않은 죄악의 상태로 빠져 버리는 것을 말하지.
그러면 그 영혼의 마음 속에는 평강이 사라지게 되며 꾸준히 미는 인내력이 없어.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를 놓쳤기 때문이지.
평안을 잃은 모습은 마치 어떤 군인이 더위와 피곤에 지쳐서 땅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과 같아.
이것이 평안을 잃을 때,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야.
아, 나도 알겠어. 맨발로 자갈밭을 걸어간다는 것은 피투성이요, 좌절이요, 절망이지.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신발이라는 말은, 복음으로부터 임하는 평안을 말하며
이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과 및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을 붙든 것을 의미해.
즉,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 누리는 하늘의 평안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영어로 “Peace With God”이라고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누리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였음을 말하지.
왜 안쓰던 영어까지 쓰고 그래? 국어사랑 나라사랑 아니었나?
아니 이건 개념 정의상 필요해. 또는 “Peace of Go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이지.
그 평안은 하나님이 소유하신 평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이란 뜻이야.
이 평안은 하나님의 승리하는 힘이며 또한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지.
오늘은 사탄이 잠잠하네?
이 평강이 성도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임할 때 사탄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지.
사탄이 아무리 성도의 마음을 무너 뜨리려고 난리를 쳐도 마음은 마치 발을 땅에 세게 붙이고 조금도 요동치 않는 그런 상태와 같아.
전혀 요동치 않게 하는 그 인내와 지구력이 바로 은혜의 평안이야.
그럼 평안이 없을 때는 생지옥이겠네?
비슷해. 이 평안이 마음에 없을 때 언제나 초조해.
걱정과 염려와 모든 짜증과 신경질과 삶의 요동들이 마음과 삶에 가득하게 돼.
여러 가지 외적 조건은 갖추어져 있는 것 보여도 그럼에도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지.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안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안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성도의 삶은 감정 변화가 심해지지.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마음은 복음의 평안이 임하지.
즉, 성도는 복음의 평안의 신발을 단단히 착용한 상태가 되는 거야.
감정이 요동치지 않아야겠네.
그렇지.사탄이 우리에게 가장 쉽게 접근하여 다스리는 부분이 감정 부분이야.
감정 부분은 그 만큼 예민한 부분이라 우리는 사탄에 속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돼.
사탄의 통치가 우리의 감정을 주관하면 우리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욕설과 혈기를 나타나.
우리가 혈기를 부리는 때는 사탄이 우리의 감정을 주장했다고 보면 전혀 하자가 없어.
성경에서는 “사람이 성(혈기)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하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잖아?
아니, 오직 유일한 방법은 평안의 신발을 신어야 돼,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해.
그러면 사탄의 역사, 곧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역사가 완전히 차단되지.
로마 병사의 신발의 정강이 받이를 보면, 바울은 평안을 정강이 받이와 연결했어.
정강이 받이는 동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병사의 다리가 멍이 들거나 상처를 입거나 뼈가 부러지는 것을 막아주었어..
특히 특수 사명을 받은 병사들, 예를 들어 연락병이랄지 특수 지령을 담당하는 병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산속이나 지름길로 다녀야 할 때가 많았는데, 그들은 특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아주 험난한 길을 가야 했어.
이들이 정강이 받이를 하지 않는다면 다리에 심한 타박상과 상처를 입게 것이었고,
다리에서 상처가 나며 피가 많이 날 수도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어.
특수 지령을 받은 병사의 다리에 문제가 생기면 그에게 맡겨진 중대한 특수 사명은 실패로 끝나게 되는 거야.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병사는 반드시 정강이 받이를 해야 돼. 험한 산이나 절벽 바위등에서 다리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며, 계속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사명을 주었는데 어려운 상황이 주어지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겠네.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삭막한 상황과 또한 어려운 대인관계를 맞이할 때가 많이 있지.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고, 부부 관계가 어려워지고 계속 오해가 생길 때가 있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오해를 받을 때가 있어.
이때 만일 정강이 받이가 없으면 멍이 들고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고 쓰러지게 되는 거야.
그러나 정강이 받이로 상징되는 평안을 취하고 있으면 삭막한 상황과 어려운 대인 관계 속에서도 전혀 상처 받지 않고 멍들지 않은채, 계속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거야.
아 조인트 까이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역시 성경도 군대를 다녀와야 이해가 잘 된단 말이지..
바울 당시 사명을 감당하는 병사는 홀로 급한 길을 다니며 적군을 만나 일대일로 맞 붙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
이 때 병사를 향한 적군의 일반 공격은 정강이를 발로 차는 거야.
만일 정강이 받이가 없으면 순간적인 고통으로 고개를 숙이게 되고 그러면 적군은 칼로 목을 내리치는 거야.
그러나 놋으로 만든 정강이 받이를 신고 있으면, 적군이 아무리 발로 차도 절대로 고통 가운데 쓰러지지 않으며, 고개를 떨구지 않게 되지.
선교사나 목회자들은 더 단단한 장구가 필요하겠는데?
영적으로 보면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을 흔히 특수한 사명을 띈 사람들인데, 이들에게는 특별한 고통스런 환경이 주어지며 어려운 만남과 대인관계와 오해가 종종 주어지지.
이때 만일 그들에게 평안이라는 무기가 없으면 그들의 사명은 실패로 끝나게 돼.
그리스도의 평안을 유지한 사람들은 그 모든 불편한 대인 관계 속에서도 그 마음이 병들지 않고 오히려 더 영롱하고 아름답게 훈련돼.
무서운 병마와 감당할 수 없는 저주스런 사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병들지 않고 수정처럼 거룩하고 맑은 사람이 되지
형이 지난번 말해준 유석경 전도사 생각난다. 말기암으로 죽기까지 치료도 안하고 기뻐하면서 전도만 하던...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했지.
스파이크의 용도도 궁금해지는데?
평안은 스파이크, 곧 발바닥의 송곳과 연결되어 있어.
이 송곳으로 로마 병사는 발을 땅에 꽉 박고 흔들리지 않게 서 있어.
이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이지.
바람이 오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이 치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성도로 하여금 성도에게 맡겨진 사명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하도록 만들어주지.
사람들이 귀한 사명을 때려치울 때는 평안을 잃을 때야. 사명을 포기하면 그 만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결국 나중에 할 일이 없어서 비참하게 되지.
사명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전에 움직이지 말아야 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해야 돼.
그 인내의 힘은 평안에서 나옴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은 움직일 계획이 없는데 자기 맘대로 자꾸 움직이는 사람들은 평안이 없어서, 즉 그 신발에 스파이크가 없어서 자꾸 미끄러지는 거야.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 가며 오라 하실 때 올 수 있으려면 그 마음에 복음의 평안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근데 아직도 평안이 공격용 무기라는 설명이 약간 부족한데?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평안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선포하고 있지.
‘상하게’라는 말은 포도 열매를 포도주 틀에 넣어 즙을 만들어 버릴 때 사용하는 동사야.
이처럼 ‘상하게’라는 뜻은 ‘뼈를 상하게 하다’, ‘완전히 작살이 나서 가루가 되다’라는 뜻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탄을 상하게 만들어 짓이기지.
심판의 포도틀에서 사탄을 포도즙으로 만드는 장면이 이와 같이 묘사될 수 있겠지.
주의 복음은 원수의 뼈를 작살나게, 가루가 되게 해.
평안의 복음의 신발은 신은 신자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어.
승리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이신데 두려움이 있을 곳이 없지.
전능하시며 승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대장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 이후로, 사탄이 지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성도의 평안의 신발 아래야.
“너희 발 아래”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성도의 평안의 복음의 신발 송곳 아래를 말해.
와 통쾌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 전신갑주 다 너무도 각각 중요하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라고 약속을 주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은 거인들과 험한 일들이 많았어.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발바닥으로 걸으면 그 땅이 자신의 땅이 되었지.
아 형, 그러니까 성도는 걸어야겠구나!
그렇지,성도가 하여야 할 일은 걷는 일이야.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힘차게 걷는 것이지.
복음을 들고 전진하며 전진하고 전진하는 것, 그것이 평안의 힘이지.
특히 다른 군병들과 함께 같은 신발을 신고 행진할 때 그 기세가 얼마나 등등하고 자랑스러운지 몰라.
평안을 누리는 자들이 함께 그 평안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함께 전진하고 전진할 때, 사탄의 권세를 밟아 버리게 되지.
같이 힘차게 전진한다는 것을 보니, 전도가 생각나는데?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위로부터 들려오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과
바울이 로마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했듯이
전도하지 않으면 그만큼 군사 수가 늘지 않겠지.
너무 보험 판매왕 같은 멘트인데? 영혼구원보다는 그리스도 군사 수를 생각하다니?
형답지 않네?
아니,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고 영원히 천국의 복락을 누릴 것이요, 전도하는 말을 헛되이 농담으로 들으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유황불 못에 던지워져서 영원히 죽지도 않고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발은 멸망해 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며 전도하는 자의 발이지.
그래야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진리의 발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발이지.
# 평강을 모두 평안으로 통일 적용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스데반 황 목사님 설교와 윌리엄 거널의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흐르는 음악:새찬송가 185장 이 기쁜 소식을 502장 빛의 사자들이여
배경 그림: 작자미상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족식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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