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가시리에 갔을 때에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외가 친척으로서 가장 가까운 6촌형이 되는 정태원 씨를 찾고, 어렵게 그 여식들인 숙희, 봉희, 명희의 3조카를 만났다. 하지만 외조부가 사시던 집터는 알지 못하고있었다. 가시리 3397번지라는 본적 주소는 있지만 지도에도 없고 인가도 없는 깊은 산속이어서 찾지 못했다.
세종에 사는 사위가 11월13일 4일 일정으로 제주로 가족여행하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두말 할 것 없이 가기로 했다. 가족의 성화로 5차로 모더나2가백신
과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준비했다.
지난번에 ‘가시리’라는 표제로 글을 써서 숙희 조카에 보냈던 것을 가까운 친척에게 돌렸던 모양으로, 그것을 본 서울에 있는 외가 재당숙 된다는 鄭公鐵 씨로부터 전화가 와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가시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가시리에 가게되면 옛 집터를 찾는데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그 분은 제주와 왕래하기 좋은 김포공항 가까운 등촌동에 살고 있다고 했고 제주에도 아파트와 차도 두고있어 자주 간다고도 했다. 그래서 11월13일제주로 가게 되었다고 공철 씨에게 전화 했더니 제주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로서는 그런 고마운 일이 없다.
세종에 사는 사위네는 SUV로 목포로 내려가 배에 차를 싣고 제주로 먼저 간다고 했고, 우리는 제주항공 편으로 가기로 했다. 오전에 공항에 도착, 마중 나온 사위네 차를 타고 몇 군데 구경하고 한림읍 해변에 있는 켄싱턴호렐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집사람의 동창생이 경영한다는 귤농장이 있는 南元邑 爲美里로 갔다. 그 귤농장에 귤따기 체험을 하고 있는데 정공철 씨가 찾아왔다. 나는 일행을 거기에 남겨두고 혼자 공철 씨 차를 타고 가시리로 갔다.
가시리에서 이장을 했었다는 공철 씨 동생 景雲 씨를 만나 그 분의 차를 따라 나섰다. 도중에 동네 터박이 촌로를 만나 집터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어디라고 특정 하지 못했다.
“혹시 산욱이라는 사람 아십니까”
“고산욱이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나와 동창이고 잘 알지요”
이 사눅이라는 이름은 어릴 때 이모 댁에 가면 자주 들었고, 이종 형 高昇學 씨 아들이고 이모님 손자가 된다. 산욱이 모친은 이종 형과 일본에 잠깐 살았지만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종 형 곁을 떠나 산욱이를 데리고 제주로 돌아 와버렸다.
“산욱이 부친이 나의 이종 형 고승학입니다”
“고승학 씨요? 알지요. 오래 전에 두어 번 왔는데 일본서 왔다고 소문 났었지요”
“그럼 집은 어딘가요?” 옆에 있던 경운 씨가
“우리 동네에 살았는데 죽었고 그 가족도 떠나 거처를 몰라요”
“아이고, 내가 너무 늦게 찾아온 거 같습니다”
경운 씨의 길 안내로 한라산 중턱 깊숙한 산속 임도를 따라 차 2대가 올라갔다. 본적지 주소 가시리3397번지는 지도상에 없고, 노변에 임립 하고있는 수목으로 시야도 좋지 않은 산길을 좌로 우로 돌면서 경운 씨의 기억을 더듬어 여기가 그 자리라고 결론을 내린 한 지점을 찾았다. 거기는 넓은 무밭으로 변하고 있었다. 경운 씨 말로는 그 밭은 몇 사람이 인접 땅을 사들여 합쳐 밭으로 개간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실로 85년만에 외갓집 자리를 다시 보는 것이다. 어릴 때 그 초가집에 가려고 기어올라갔던 기억, 외할머니의 흰머리, 변소를 못 찾아 부엌에서 실례한 일 만감이 교차한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 뿐, 그저 산속에 있는 흔한 장면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때, 이렇게 높은 데를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네” 하고 뒤에 서 있는 두 분을 돌아보았다.
“그 땐 버스도 없고 택시도 없는 시절이니 걸었겠지요”
“하지만 제주 항에서 가시리까지는 먼 거린데 버스도 택시도 없다니 어린 나를 데리고 어떻게 걸었을까?”
“글세요”
아마도 우마차를 얻어 타고 왔을지 모르겠다고 짐작 해볼 뿐, 이제 물어볼 사람도 없다.
12시에 우리 일행과 가시리에 있는 ‘자연사랑미술관’에서 만났다. 이 미술관은 가시리 출신의 사진작가가 폐교된 가시리소학교를 전시관으로 보수한 건물로, 공철 씨가 여길 가면 가시리와 제주의 아름다운 면을 한눈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산을 내려가자마자 갔던 곳이다. 전시된 사진 중에 정태원 씨 교사시절이 찍힌 여러 장의 졸업사진이 있었고 그 가운데 공철 씨와 숙희조카의 졸업사진도 있었다.
점심으로 가시리에 사는 봉희네 집 앞에 있는 은하수가든에서 갈치조림을 먹기로 약속했었다. 우리 가족6명, 공철 씨 형제, 봉희조카 부부 모두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한 가운데 얘기를 나누며 점심을 들었는데 봉희조카가 표선 항에서 사온 싱싱한 부시리를 집에서 회로 떠서 식당에 가져온 그 회맛은 일품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모두 바로 앞 봉희 네 건물로 건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가 응접실에서 보이차를 마셨다. 잠시 환담하고 헤어질 때, 귤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오전에 위미에서 귤 따는 체험을 하고 귤 한 상자 얻었으니 귤이 두 상자가 되었다.
그렇게 내 나름의 가시리 두번째 행보는 끝났다. 이번 탐사는 공철 씨 형제 분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감사한 마음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떠나는 날 제주공항근처에 있는 김희선 몸국에서 해녀가 물질을 끝내고 먹는다는 몸국을 먹었다. 여행 동안 혹사한 위를 달래주는 시원한 탕이었다.
아쉽게도 제주시에 사는 숙희와 명희의 두 조카가 성당 일로 동석하지 못했는데 서울에 돌아오자 바로 숙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춘, 같이 동행하지 못해 미안해요, 혹시 산소를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거가 있으면 좋은데……”
“있지. 공철 당숙이 보내준 족보 일부에, 외조부 묘소가 ‘安坐洞 가득남도川 東田 西南向艮座’라 써있는데 알아봐요”
“알았습니다. 묘소와 집터 소유주도 알아보겠습니다” 전화는 끝났다.
2022년 11월
goldwell
첫댓글 goldwell님: 세종에 사는 사위가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기회에
함께 가시자는 권유로, 지난 5월에 이어, 제주여행을 하게 되셨군요 ...
지난 번 제주 가시리에 가셨을 때는 외6촌 형을 찾아, 그 여식들을 용케
만날 수 있는 소득을 거두었으나, 이 번에는 재주 내왕이 찾은 외가 재당숙
鄭公鐵씨로 부터 가시리에 대한 많은 상식도 얻었고, 그 분도 함께 하는
기회를 가졌으나, 외조부가 사시던 가시리 소재의 집터를 찾는 데는 역시
실페하셨으니 공허한 마음이 컷겠습니다. 대신에 제주여행에서 부인의
친구가 경영하는 귤 농장이며, 공철씨가 권유한 가시리 '지연사랑미술관'도
관람하시고, 멋진 호텔 숙소와 맛있는 제주 조기저림 음식들을 사위가족과
공철씨 형제, 외6촌형의 딸인 정봉희 질녀내외등 10명이 오붓하게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오셨으니 스트레쓰해소에 ;큰 보람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족보에 적혀 있는 외조부 묘소의 위치를 욋6촌형의 띨(숙희)에게 알렸으니, 무슨
연락은 또 오겠지요 ... 좋은 목적의 즐거운 제주여행기, ' 속 가시리 '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고르지 못한 동절 기후에 강녕하시기를 빌면서 ...
제선 님
내 개인에 대한 사연을 읽어주셔서 감사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인생이 있습니다. 어쩌다 저는 외가를 의식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외조부의 산소도 모르고 지낸 것이
후회막급입니다. 한국사회는 모계보다 부계를 우선하는 풍조가 있어
그렇게 묻혀 살다 보니 늦게 정신이 들었다고 할까 이제야 외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머 늦었지요.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물을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소홀하게 지내 왔는지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Goldwell님: 2차 탐방기 "続 가시리"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습니다만, 세월이 가도 어릴쩍 외갓집의 추억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련한 꿈으로 남아있읍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 강산에 몰아닥친 풍파는 모든 것을 흔적없이 아싸 가버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갓집은 거저 꿈 속에 그리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끈질긴 집념으로 어쩌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옛 외갓집의 집터를 찾아내어 ...비록 채소밭으로 변해 있긴 하나.. 그 위에 서 볼 수가 있었다하시니 참으로 대단하시고 부럽습니다.
이 핵가족시대에, 전국에 흩어져서 재 나름의 삶에 여념이 없고, 소식마저 끊긴 친척,친지들을 아름아름으로 더듬어 찾아내어 "가시리" 현장까지 이르게 되는 , 일종의 迷路찾기와 같은 "続가시리"를 읽으니 경이와 경의를 금할 수가 없릅니다.
어언간에 또 한 해가 갑니다. 코로나가 또 기승이니 주의를 하십시요.
逸泉 님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마땅히 퇴출되어야 할 사고방식이지요.
저는 그런 분위기에 싸여 그 긴 세월을 본의 아니게 살았던 거 같습니다. 이제 나이 들어 어머니
고향인 제주를 찾으니 흔적도 없습니다. 이럴 때 만시지탄이라고 하는 거 같습니다. 금년 5월
가족이 제주관광을 한다기에 옳지 이 기회에 외가 가시리를 찾아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그리고
11월 두 번째로 가시리를 찾아 외가 친척의 도움으로 옛 집터도 찾았습니다. 그것을 비망록으로
엮은 것이 이 두 편의 “가시리”입니다. 개인 사정이므로 공개를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생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서투른 글을 마다 하지
않고 읽어주시고 분에 넘치는 말씀까지 주셔서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금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의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goldwell님:
님의 그 執念! 대단 하십니다.
이번 속 가시리..를 읽으며........공터가 된 엣 外家를
찾아 나서신......어머니의 故鄕! 우리에게 있어서
어머니! 란 永遠한 憧憬이요.. 그리움 이요...
生의 본터....입니다...
‘자연사랑미술관’에서 만났다.
.....정태원 씨 교사시절이 찍힌 여러 장의 졸업사진이 있었고
그 가운데 공철 씨와 숙희조카의 졸업사진도 있었다.....
모두가 追憶이요.....이정도로 찾으신것도 奇蹟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에 어머니! 란 像이 있습니다...
내가 어릴적에는 그져 하늘만컴 위대했던 그 어머나가
세월따라 늙고 야위고 병덜어서......고생하시다
떠나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走馬燈처럼.......스칩니다...
저는 現在 釜山에 어머니의 4촌 男 동생兄弟가
살고 계십니다. 그중 작은 동생분은 朴광노 테니스 선수로
老益壯을 자랑하는 敎育者出身의 外三寸이 계십니다.
가끔 카톡도 보내주시고....조카인 저가 年上이라서.........
goldwell님의 글을 보며..... 소중한 외 삼촌의
존재가....더욱 마음에 와 닫는 군요..
어려운 걸음 잘 하셨습니다.건강하시니 마음먹은대로
旅行하시고 가 보고싶은 곳도 찾아다니시고......
많이 부럽습니다.....健康하실 때 健康잘 지키시고.....
紀行文도.....演歌모임에도 많은 活動 期待합니다.
로사 님
서투른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왜 이제야 외가를 찾는 것인지
너무나 무심했던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자신이 혼자라도 건너가서 찾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못했는지 후회막급입니다. 돌이켜 보면 42년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제주로
관광 여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왜 와조부 님과 외조모 님의 산소도
찾지 않고 돌아와 버렸는지, 늘 그 후회의 마음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제주로 두 번의 관광 여행을 하게 되어, 저 혼자 외가 동네를 찾아서 우여곡절
끝에 친척도 찾고 옛 집터도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소는 찾지 못했습니다.
현지에 며칠이고 머무르면서 찾아야 마땅한데 그러지 못해 한스러울 뿐입니다.
이번에 이 글을 공개하게 된 것도 로사 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감기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감기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