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차 문학기행 소설가 박경리편(경남 하동군, 4/15)
토지 소설가 박경리는 1926년 12월 2일에 경남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 328번지(현, 경남 통영시 문화동 328-1)에서 태어났으며, 2008년 5월 5일에 작고했다(향년 81세).
본명은 박금이(朴今伊)이며, 박경리라는 이름은 소설가 김동리선생이 붙여준 필명이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46년에 김행도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이후 사고로 아들을 잃고 딸과 함께 생활하며 아들을 잃은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딸 김영주(金玲珠)와 1973년 결혼한 시인 고(故)김지하(2022년 5월 8일 작고)는 그녀의 사위이다.
우리는 4월 15일(토) 오전에 순천문학관을 기행하고, 광양 다압면 홍쌍리매화마을을 한 바퀴 돌아, 곧 바로 화개장터를 들러 기념품들을 사고 벚꽃이 피는 시절에 섬진강에서만 채취한다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벚굴과 재첩국을 맛보았다.
이어서 우리는 하동군 낙양면 평사리에 조성된 박경리토지문학관을 찾았다.
주차장에서 한참을 오르다 보면 꼭대기 좌측 끝으로 박경리문학관이 위치해 있다.
앞쪽으로는 섬진강 줄기, 평사리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앞마당과 기와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우리가 도착한 때가 늦은 시간이라서 마침 퇴근을 준비하는 문화해설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짤막한 해설을 들을 수가 있었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이곳 하동 평사리가 토지 소설의 무대가 된 첫 번째 이유는 만석꾼이 나옴직한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다음은 역사적 무게와 이야기가 넘치는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평사리 들판은 크기가 서울 여의도의 3배쯤 된다고 하며. 게다가 전봇대나 다른 장애물들이 없어서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해설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우리보고도 꿈꾸는 자가 되라고 하며, 우리한테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면서 이는 박경리선생의 평생 좌우명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2권(산문집 “바람처럼 재즈처럼” 과 역사기행문 “걸어서 삼남길”)이나 출판했으며, 지금도 3번째 책(문학기행문, 가칭 “별 하나에 사랑과”) 출판을 위해서 오늘처럼 문학기행을 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문학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문학관은 박경리 선생의 삶처럼 소박하고 정갈하게 꾸며져 있고, 대부분의 전시물들은 소설 토지와 박경리선생과 관련된 것들이며 일부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토지를 연재할 당시의 옛 신문들과 잡지들을 볼 수가 있고, 원고지에 쓴 자필 원고와 유물들도 있다.
세월이 켜켜이 묻어있는 흑백사진들이 더욱 정겨웠으며, 소설가님의 생전의 방송영상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처럼 전시관 내부는 20~30분 정도로 여유롭게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특별히 연대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22세 때인 1948년에 인천 전매국에 취직된 남편을 따라서 인천시 금곡동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고 있는 인천이라서 더욱 반가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과 박완서님과 젊은 시절에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박완서님과 관련한 문학기행은 이미 예정이 되어 있다.
아래의 내용은 1973년 6월 3일 밤, 온몸으로 써내려갔다던 ‘토지’의 서문이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이어서 문학관 바로 아래에는 최참판댁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소설 “토지” 속 주인공인 최치수와 최서희 일가를 중심으로 한 생활공간을 재현한 곳이다.
TV 드라마 ‘토지’도 이곳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 전통 한옥을 잘 구현해 당시의 가옥 형태와 마을공동체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행랑채, 안채, 사랑채, 별당 순으로 거닐다보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만큼 생생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넓은 마당에 나무들도 보이고, 의자도 있는데, 의자 추측 끝에는 앉아있는 최참판의 동상도 있다.
관람하기엔 늦은 시간이라서 친구 임용표교수(충남대 원예학과 퇴임)가 소개한 황실차문화원 김미숙원장을 만나 그 유명한 황실차를 한잔 대접을 받았어야 하는 것인데 이미 퇴근을 해서 만나보지는 못했다.
김원장은 실제로 최참판댁 무대에서 윤씨부인 역할로 근무 중이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토지문학관 기행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숙소인 순천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다는 소녀 박경리는 이때의 넓은 독서가 훗날 글을 쓰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박경리선생이 문단에 나오게 된 동기는 소설가 김동리선생의 도움이 컸다.
1955년 그녀는 필명을 지어준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이 현대문학지에 발표되면서 문단에 진출했다.
이어 현대문학지에 단편 ‘군식구’, “전도(剪刀)”,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 ”반딧불“. 벽지(僻地)”, “암흑시대” 등의 문제작을 계속 발표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단편을 쓰다가, 1959년에 “표류도”(현대문학, 1959. 2~10)를 발표한 뒤로는 주로 장편을 썼으며, 1963년 단편 14편을 모아 소설집 〈불신시대〉를 펴내면서 작가로서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의 후기에서 “암흑시대”가 “불신시대”를 잇는 작품임을 암시했는데, 두 작품은 여주인공의 형편이나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 체험과 심적 변화 등의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불신시대〉가 종교와 병원을 중점적으로 비판한 반면에 〈암흑시대〉는 무책임하고 경박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횡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어 6·25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시장과 전장(1964)을 발표했다.
박경리는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그려낸 문제작을 발표했다.
그녀의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대표작 〈토지〉에서 최씨 집안의 중심인물이 두 여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장편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의 주요인물도 여성이다.
특히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가 있는 “김약국의 딸들“에는 한 가정에서 운명과 성격이 다른 딸들이 나오는 반면에 ”파시“에는 6·25전쟁 직후에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주로 전쟁 미망인을 등장시켜 악몽과 같은 전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초기의 작품들을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또는 사소설(私小說)이 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토지”는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가장 오래 머무르며 작품을 쓰며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1994년 8월까지 25년간 집필된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를 완결지은 작품으로 한국대하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치기까지 역사의 격랑 속에 한 양반 가문의 몰락과 전이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들이다.
그녀는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의 집필을 계속하여 그녀는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 그리고 그 자식들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恨)을 새로이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 후, 박경리는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1999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회촌길 79-1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이는 작가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살았던 작가의 집을 시림박물관인 박경리뮤지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다.
이곳에서 글을 쓰고, 텃밭을 일구며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후배 양성에도 큰 노력을 기울이셨다는데 후배 작가들한테 창작공간을 만들어 주려고 사비를 털어 토지문화관을 설립했다고 함.
문화관 곁에는 동상이 서있고, 동상 하단 대리석에는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라는 그녀의 평상시의 인생관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박경리는 문학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2003년 문학과 환경문제를 다루는 계간지 〈숨소리〉를 창간했고, 2004년 자신이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환경 에세이집 〈생명의 아픔〉을 출간했다.
2008년 5월 5일 그녀가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까지 썼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유작 시 39편이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으로 발표되었고, 문학관 마당 우측에 있는 동상 밑받침 대리석에는 이 제목이 글로 새겨져 있다.
소설집으로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가을에 온 여인(1963), 파시(1965), 박경리단편선(1976), 박경리문학전집(1979), 토지(1989), 가설을 위한 망상(2007) 등이 있다.
그밖에 시집으로는 우리들의 시간(2000), 에세이는 원주통신(1985)과 가설을 위한 망상(2007) 등이 있다.
수상 내역을 살펴보면,
1957년 현대문학상, 1959년 내성문학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칠레정부 선정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기념메달(1996), 금관문화훈장(2008) 등을 받았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1999)으로 선정되었다.
한편, 그녀가 태어난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도에 있는 주황색 외관의 2층 기념관 건물은 박경리선생의 집을 설계한 유춘수 건축가가 설계했으며, 기념관 앞 정원에 있는 동상은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제작했는데, 밑받침 대리석에는 유고시집 제목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라는 글씨가 하동 토지문학관에서처럼 새겨져 있다.
동상을 뒤로 나지막이 산을 조금 오르다 보면 통영 앞바다 한산섬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지난 2013년 2월에 나는 통영 여행길에 거기 박경리기념관을 둘러보고 묘소에서도 예를 갖추었다.
이 또한 내가 문학기행을 기획하게 된 일종의 데자뷰가 아닐까^
2023년 4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