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1회~20회]
11.제중원에서 1년 동안 한 일 - 일반환자 대부분 ‘가난病’에 신음
최초 1년 동안의 의료활동 보고서
처음 서울 재동 홍영식의 집터에 자리 잡았던 제중원은 1886년 가을에 구리개(현 서울 을지로2가 인근)로 이전한다. 재동의 제중원 건물은 6·25전쟁까지 존재했다.
제중원이 1년 동안 의료활동을 펼친 내용은 모두 첫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이런 보고서나 자료를 체계적으로 편집 및 보관했다는 것만으로도 제중원의 공헌은 막중하다. 미국 필라델피아 역사관이나 프린스턴대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와 개인 편지, 메모조차도 완벽하게 보관돼 있다. 자료 수집과 작성 및 그 보관에서 선교사들은 눈부신 공헌을 남긴 셈이다. 그 자료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생활과 선교, 그리고 한국 사회 상황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숨 쉬고 있다.
제중원, 한국의 전통 의료활동을 폄하하지 않아
제중원의 보고서를 보면 제중원은 옛날부터 있어온 한국의 전통의원 곧 혜민서나 전래의 진료방법을 절대로 폄하하지 않았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대해 가졌던 아주 신중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는 대상이 되는 사회의 재래문화나 생활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처음 광혜원을 개원하던 날에도 요란한 의식이나 행사를 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반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의 전래 치료법
물론 한국 전래의 치료방법 중에는 알렌이 때때로 ‘넌더리나서 말도 못할’ 것이라고 했던 것들도 몇 있었다. 소독하지도, 닦지도 않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침술은 매우 위험했다. 한번은 환자의 목에 침을 잘못 놓아 골수까지 뚫는 바람에 즉사하게 한 일도 알렌은 직접 목도했다. 공수병(광견병)을 치료한다며 호랑이 두개골 가루를 타 먹고, 상처 난 곳에 마늘을 갈아서 바르고 천을 감고 있기도 했다. 종기에는 암소의 배설물을 짓이겨 상처에 발랐고, 기관지염에 송충을 짓이긴 것을, 정신착란에 구더기를 쓰는 일도 목격됐다.
가끔 어린아이들 가슴에 뜸을 뜨기도 했다. 염병에 걸리면 역신의 침입이라 해서 환자를 메 동네 밖에 내버리고, 거기서 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렌이 이런 전통방법들을 폄하한 일은 없다. 오히려 희랍의 히포크라테스가 한국의 옛 의원들과 대담을 했다면 편했을 것이라고 점잖게 머리를 끄덕인 적은 있었다.
치료는 상하 계급 관통
알렌의 의료활동 대상이 위로 고종 임금이나 고관들부터, 아래로 걸인이나 나환자들에까지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 찡하다. 이는 한국 사회 혁신의 첫 상징이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참 모습이 이런 데에서 실천적으로 나타났다면 알렌의 공헌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교회가 처음으로 나병원을 대구에 설립했다. 당시 일왕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나병치료에 끼친 공로를 큰 상패로 치하한 일이 있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앓은 병
제중원 보고서에는 당시 한국인에게 어떤 질병이 많이 있었는지 나와 있다. 한국인의 위생상태가 엉망이었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가령 우물은 큰 돌로 쌓아 내렸지만 바로 옆이 시궁창이었다. 걸레를 빨고 요강의 배설물을 버리면 그 오물이 다 우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쥐들이 밤새 천장에서 뜀박질하며 다니는 상황이었으니 질병이 만연했고 종류도 많았다.
당시 가장 많이 앓던 질병은 학질이었다. 진료한 사람들의 10%가량이 이 병에 시달린 것으로 돼 있다. 다음이 위장계의 질병이다. 가난한 백성들은 배고픔에 뭐든지 먹으려 했고, 기회가 닿으면 폭식했기 때문이다. 매독과 성병도 가공할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폐쇄된 사회인데도 성병이 만연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결핵 환자도 많아 제중원에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결핵 환자 탓에 결핵부를 따로 두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 밖에 구순구개열, 그리고 탈장이라 해서 변 볼 때에 내장이 항문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병, 머리 부스럼과 각종 피부병, 기생충, 안질, 백내장 그리고 나병 등이 흔했다고 한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오는 질환들이었다.
천연두는 ‘마마’
정말 치사율이 높은 질병은 천연두였다. 천연두는 아주 흔해서 어린이들 대부분이 걸렸고, 그 병을 앓지 않은 어린이들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그 병을 앓고 나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 사망률의 절반가량이 천연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치사율이 높았다. 성인 대부분이 천연두 자국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누구나 한번은 걸리는 병이었다.
그런데 당시 천연두는 ‘마마’라고 부를 정도로 상감처럼 모셔졌다. 당시 백성들은 마마를 ‘마마님’처럼 여겨 무당의 굿을 통해서 잘 모시고 대접해야 병이 떠난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제중원에도 잘 찾아오지 않았다. 실제 보고서에는 알렌이 1년 동안 천연두 환자를 단 2명만 진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2. 미국과 고종, 그리고 알렌 - 종2품 ‘가선대부’ 벼슬 받은 알렌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한 때
미국이 오늘과 같이 부강한 나라로 성장한 것은 1840년에서 1890년, 그 반세기 만의 일이다. 50년 사이에 미국의 공장 생산고는 무려 7배 늘었다.
당시 미국사람들은 그런 비약적 발전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이시다”라는 함성이 전국에 가득했다. 당시 그들은 찬송가를 많이 작곡하고, 불렀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미국계 찬송가는 다 이 어간에 지어진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 전 국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며 대각성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선교운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온 것도 그 때의 일이다.
한국 최초 국립학교 교사들
고종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같은 미션학교들이 들어서자 국립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종은 1886년 여름 육영공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미국 대통령에게 3명의 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한다. 미국 대통령은 당시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다니던 유능한 학생 셋을 선발해 보냈다. 헐버트, 번커, 길모아 이 세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로 한국에 남아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다.
미국 대통령은 왜 하필 신학교 출신들을 보냈을까. 미국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 그 첫날에 기독교를 그 교육의 근간으로 하려던 생각이 놀랍고 고맙다.
하지만 2∼3년이 지나 육영공원이 폐쇄됐다. 이들 세 사람은 한국에 남아서 선교사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이 한국 근대교육 초기의 교사로 선발된 배후에는 알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헐버트는 후에 해아(헤이그)밀사와 동행해 초행인 한국대표들을 위해 온갖 큰 역할을 다 한다.
한국은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
1909년 미국 국무성의 문서에는 한국이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라고 하는 글귀가 있다. 여기서 기수라는 표현은 한국이 세계 기독교의 대표이자 상징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엄청난 평가는 알렌이 계속 미국 국무성에 보낸 서신을 근거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알렌은 1908년 “지금 한국에서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입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고종과 알렌의 우정
고종은 알렌과 인간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 알렌은 당시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술 외에도 대부분의 국내외 문제에 대해 고종과 논의하고, 마치 자문위원 같은 역할을 한다. 알렌은 이런 말까지 남겼다. “마침내 나는 이 지구상에서 왕족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라는 말에 주목하자. 미국선교본부도 이 특별한 총애를 줄줄이 기록으로 남기기 바빴다. 다들 혀를 차는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선교사 입국 1년 안에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기독교와 근대과학과 미국, 이 세 가지의 승리였다. 얼마 후 청국에서 오래 유폐생활을 하던 대원군조차도 귀국해서 곧 알렌을 찾아와 악수까지 하였다고 한다.
궁궐 안에서의 알렌
고종은 알렌에게 궁궐 안에 사무실을 하나 내주었다. 그리고 1886년 여름에는 벼슬도 내린다. 처음에는 정3품 당상급의 ‘통정대부’라는 벼슬이었다. 반년 후에는 종2품의 ‘가선대부’에까지 오른다. 그만큼 알렌이 고종에게 환심을 샀고, 고종은 알렌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고종과 민비가 얼마나 외로웠기에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사실 고종이 덕수궁으로 옮겨간 이유도 근처 미국공관 옆에 있고 싶어서였다. 만일 알렌이 미국의 명문 대학 출신 그리고 명문가 출신이 아니고, 또 그렇게 유능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면 두렵다. 한국근대사는 전혀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니 알렌 그 한 사람이 우리 근대사에 끼친 공적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궁궐에서 알렌을 그렇게 대접한 이유
왕족들도 알렌을 수시로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밤낮으로 알렌을 불러댔다. 신기한 치료방식도 보고 알렌과 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족들은 궁중에 밤새도록 남아서 정사를 보고 새벽녘에야 퇴청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그러니 알렌이 왕족에게 불려가는 시간은 대개 밤중, 그들이 일하는 시간이었고, 알렌에게는 잘 시간이었다.
알렌이 궁궐에 가면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시종들이 “담배를 피우라” “샴페인을 마셔라” “사탕과 과자를 먹어라” “커피를 마시라” 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했다. 알렌이 사양을 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알렌은 시종들이 그렇게 권하는 이유를 알았다. 당시 관리들에게 그런 서양의 식품은 신기한 것이었고, 이를 대접하는 것이 예우를 갖추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시종이 가져온 담배나 사탕, 과자 등을 그 자리에서 다 피우거나 먹지 않고 관복의 커다란 소매 자락에 집어넣고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3.초기선교사들의 인간적인 고초- 동료 헤론과 잦은 ‘충돌’ 마음고생
초기선교사들의 어려움
1880년대 중반에 한국에 찾아온 초기 서양선교사들은 고충이 심했다. 그 당시 한국은 유난히 가난했다. 집이라고는 한옥 초가집이 대부분이고, 음식도 소금국에 잡곡밥을 먹기가 일쑤였다. 여름엔 모기 빈대 벼룩, 겨울에는 이, 더위와 추위는 참기가 힘들 정도였다. 추위와 더위를 겪고 나면 다들 탈진할 정도였다.
위생 상태도 심각했다. 우물물은 도랑에 버린 물이 다 스며드는 오물이었다. 실제 호주 선교사 한 사람이 이 물을 먹고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사흘 만에 죽은 일도 있었다. 알렌 말로는 그 낯선 환경이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더구나 낯선 이방나라에 살면서 긴장한 탓에 늘 가슴이 조였고, 여가거리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선교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 수밖에 없는 형편에 성격차이가 그대로 나타났다. 여자 선교사들은 그 수가 아주 적어서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들었다. 벽지에서 혼자 살던 선교사도 있었다. 더러는 자살도 했고, 정신이상으로 본국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초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어느날 평양에 가면서 말 여덟 마리에 일상 생활필수품들을 가득 싣고 간 일이 있다. 프라이팬, 장화, 우산, 주전자, 이동식 침대, 변기, 과자, 스푼, 포크 등을 싣고 갔는데. 사람들에게 서양문명의 전시효과도 노렸겠지만 그만큼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초기선교사들은 본국에 있을 때에는 버터에 고기를 먹고,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기며 냉난방 잘된 집에서 살던 중산층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가난하고 낯선 한국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에 그려진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을 이겨내고, 한국을 세계기독교의 기수 국가로 만들었다.
알렌과 헤론의 불화
알렌은 유난히 키가 컸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은 꼭 알렌이 계단 2∼3칸 정도 내려와 포즈를 취한 것이 보인다. 외국공사들과 찍은 사진을 봐도 그가 유독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렌은 유난히 말 수가 적고 늘 점잖았다. 하지만 그런 알렌도 화를 참지 못하고, 인간관계의 갈등을 만든 일이 있다.
초기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명문대 출신들이었다. 알렌이나 스크랜턴 및 헤론은 이미 의학박사들이었고, 미국에서 교수 경력이 있는 이들도 많았다. 그중 헤론은 유난히 똑똑했고 자존심이 셌다. 그가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에 문제가 생겼다. 알렌은 헤론이 좋은 사람이지만 예의가 없다고 본부에 편지를 낸다.
이런 기록은 오래도록 남는다. 한번은 궁중에 함께 초대를 받았는데 헤론은 고종임금과 민비가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늦게 나타났다. 화가난 알렌은 헤론이 투기심이 많아,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다고 격분하였고, 반대로 헤론의 부인은 알렌 면전에서 “당신은 한국에 돈 벌려 왔고, 따라서 딴 일을 하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스크랜턴은 알렌이 보기 싫다고 나가서 다른 진료소를 개설한다. 초기 선교사들 사이에도 갈등은 있었다.
알렌은 마침내 선교분부에 이렇게 투기심이 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고, 부산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거기 가서 일하면서 선사들의 갈등 관계를 연구하겠다고 했다. 알렌은 1908년 ‘조선견문기’라는 책을 쓴다. 거기에 초기선교사들의 인간적인 문제들과 실상을 솔직하게 쓰고 있다. 변명이 아닌 진실을 쓰고 있다.
선교사들도 인간이었다
알렌은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을 잘 알고 있다. 알렌은 그 부흥운동을 통해 선교사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땅을 치며 회개하게 하였으며 그로인해 본국에 돌아간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알렌은 의미있는 말을 남긴다. 선교사들은 대개 생각하듯이 초인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정도의 높은 이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기대도 하고 있기에 부담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놓고도 많이 다퉜다.
알렌은 신앙인의 모습에 대해 실로 놀라운 식견을 제시한다. 신앙인이 세상 사람과 특별히 다르다고 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교사들도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요 시민이라는 것이다. 선교사들에게는 남과 구분지어 군림하고 자신감 지나쳐 독단적이지 말라는 간곡한 호소를 했다.
알렌의 고백
알렌은 가까웠던 한 선교사에게 이런 글을 남긴다. “곧 우리는 다들 잘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선한 일을 찾아서 헤맸고 충실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빛나는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파쟁과 갈등에 때로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늘처럼 쳐다보던 이들의 가슴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고 속에서 살아간 초기 선교사들의 애환과 고민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4.알렌, 한국 외교관으로 - 한국공사관 서기 발탁… 선교부와 이별
선교부를 떠난 알렌
알렌은 1887년 7월 주미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발탁되면서 선교부를 떠난다. 참찬관은 당시 ‘외국인 서기관’이란 관직이었다. 알렌은 선교사 일을 그만두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1889년 6월 잠시 한국에 귀국해 제중원에서 일했으나 결국 다음 해 초여름에 선교사직을 아예 그만두고 미국주재 한국 외교관으로 신분을 바꾼다.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직함은 끝난 것이다. 3년간의 치열했던 한국선교 초기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선교사들이 그를 떠나게 했는가
알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선교부의 창피한 싸움’에 개탄하고 있다. 장차 한국교회의 주춧돌을 놓게 되는 마펫은 알렌을 정면 공격한다. 선교하러 와서 충분한 전도의 시간을 거치지도 않고 먼저 ‘병원 같은 것이나’ 세웠다고 맹비난한다.
마펫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알렌이 선교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와 종교가 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기독교가 타협하고 양보해야할 것이 생긴다는 입장이었다. 마펫은 알렌을 선교부에서 깨끗하게 축출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시 선교사들 대부분이 신학적으로 인간적으로 알렌을 고립시켰다. 알렌이 선교사들과 사이가 멀어진 까닭은 알렌의 철저한 준법정신 때문이었다. 한미조약문은 개항한 곳 말고는 국내 여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출내기 선교사들은 마구잡이로 지방전도여행에 나섰고, 때문에 지방 관리에 의한 박해를 당하거나 감금당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때문에 일명 ‘어린이 소동’이라 해서 서양 선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구워 먹고 눈알은 빼서 카메라의 렌즈로 쓴다는 음흉한 소문이 나기도 했다. 빈톤이란 선교사는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한국 사람을 통해 저질 언어로 고종에게 회개하라는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미국 공사관에서 젊고 기고만장한 선교사들이 위험에 노출될 것을 우려해 공문을 보내 서울로 즉시 돌아오라고 해서 화를 면한 일은 비일비재다. 선교사들은 이런 선교 제한의 배후에 알렌이 있다며 공격했던 것이다.
분열과 갈등은 초대교회에도 있었다. 제자들도 서로 치고 박고 다퉜다. 예수님까지 판다. 바울과 베드로도 싸우고, 사랑의 사도 요한도 화를 냈다. 세상을 완전한 천사의 집단으로 보는 것이 전체주의다. 때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기준에 안 맞는 자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한다.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전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상이나 신앙은 무서운 것이다.
알렌이 선교부를 떠날 때
고종이 미국에 새로 세워지는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했을 때, 알렌은 ‘선교사들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거둔, 그런 공덕으로 조정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영향으로 선교사들의 입국을 가능케 하지 않았던가. 그가 한국선교의 닫힌 문을 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쫓겨나듯 물러나게 됐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알렌은 선교부에 몸담고 있든, 국가기관에 몸담고 일하든, 선교사로서의 정신과 사명감을 그대로 계속 가질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동료선교사들에게 아름다웠던 옛날처럼 변함없이 함께 잘 지내자고 말하며 발길을 돌린다. 떠날 때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 외로이 떠났다.
하나님은 한 시기에 한 가지 사명을 위해 사람을 보내신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다른 사명을 맡기신다. 그 전환기는 이렇듯 통절할 수도 있다. 가늠하지 못할 격변으로 임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 전형적인 변화를 알렌에게서 본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영광을 받으실지어다.
알렌, 그 뒤를 돌아보니
선교부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뒤돌아보니 그동안 걸어온 발자국에 피와 눈물, 그리고 땀이 배어 있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초기의 식구들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떠나는 이 길이 한국교회를 떠나는 길이 아니고, 그렇게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한국교회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할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알렌은 결심했다. ‘앞을 바라보자!’
세계와 한국의 교량역할을 한 알렌
알렌 그는 20세기 초 기울어지는 한국의 국운을 떠받쳐 자주 독립의 길을 가게 하려 했던 푸트나 포크 공사가 가고 나서 그 사명을 기도와 땀으로 이루기 위해 노력한 한말 최후의 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을 위해 더 큰 사명을 받은 것이다.
미국은 수호조약문에서 타국이 한국을 간섭하고자 하면 거기 반드시 개입하여 한국이 독립된 왕국임을 천명하고 그렇게 대우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 생전 처음 진출하는 그 시기에 알렌에게는 그 가교 노릇을 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가 처음 한국에 기독교의 입국을 가능하게 했던 그 교량역할처럼 말이다.
[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5.주미 한국공사관의 외교관 알렌 - 주미 초대공사 수행 ‘조약’ 체결 첫 임무
한국과 미국의 첫 가교
한국은 1880년대 초에 대개의 서양 나라들과 수교관계를 맺었다. 미국과는 1882년에 수호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을 맺을 당시 한국은 중국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한국은 1887년 미국에 주미 한국공사관을 세운다. 그때 알렌은 한국의 외교관으로 임명된다. 고종은 주미 한국 초대공사로 임명한 박정양 일행과 함께 알렌을 그해 9월 27일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당시 한국 조정은 국제관계나 미국의 정치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업무는 알렌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알렌의 손에 한국의 대미관계 전부가 위임된 셈이었다. 한국이 세계 최강의 미국과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세계 물정을 전혀 모르는 외교사절 일행과 동행한 알렌은 실로 막중하고도 엄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청국의 위협적인 방해공작
한국외교사절단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청국은 노골적인 방해공작을 펼쳤다. 출발 전부터 온갖 협박을 일삼더니 결국 인천에서 배를 타고 떠나려는 사절단을 물리적으로 막아 미국행을 저지했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은 우리 사절단을 태워가기 위해 그해 11월 13일 해군 군함 오시피호를 파견한다. 하지만 청국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청국은 무려 6척의 군함을 인천에 파견했다. 미국 군함의 진로를 막고, 포를 쏘며 위협했다. 미 군함은 포위망을 아슬아슬하게 뚫고, 미국 도착에 성공했다.
여기서 참 의아한 점은 미국이 한국을 도왔다는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당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청국의 위협에 맞서며 그런 모험을 감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중요시하는 나라이기에 가능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한국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한 이후에도 청국은 끈질긴 방해공작에 나선다.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올리기 전에 청국사절단을 먼저 찾아 인사하라거나, 연회나 회식 석상에서는 반드시 청국대표 옆에 앉으라거나, 업무를 처리하기 전 청국사신을 먼저 만나 문의하라는 등 억지 요구를 일삼았다.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한 알렌
1888년 정월 초하루 한국사절단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이후부터 알렌은 사절단의 일 전체를 실질적으로 관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청국의 위협에 떨고 있는 박정양 공사에게 담대해지라고 격려했다. 한국의 사절임을 잊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았다.
하지만 박정양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국을 거스르는 외교행동의 모든 책임은 알렌에게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써서 품에 안고 다녔다. 하지만 알렌은 끝까지 그를 돕는다. 박정양은 귀국 후 얼마 지나 알렌의 추천으로 총리대신이 된다.
1888년 1월 17일 한국사절단은 마침내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올린다. 한국과 미국이 대등하게 외교관계를 맺은 날이다. 한국이 세계대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데는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청국의 계속되는 위협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음에도 청국은 고종을 협박해 박정양을 귀국시키라고 다그친다. 고종은 할 수 없이 병환을 구실로 박정양을 소환한다. 고종은 알렌을 대리공사로 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런 고위공직을 외국인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반대에 부딪혀 알렌은 결국 참찬관 자격으로 미국에 계속 머물면서 1899년 9월까지 공사관 일을 혼자 전담한다.
이게 다 기생들이오?
미국은 한국사절들을 국빈의 자격으로 극진히 영접했다. 해군장관이 으리으리한 저택에 이들을 초대하고 미국 정가의 여러 고위 인사들을 부부와 함께 불렀다. 당시 그 고관 부인네들은 다들 가슴이 드러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런 모습을 일생 처음 본 우리 사절단이 아연실색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공식석상에 여인들이 나타나고,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는 현란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귀부인들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가 놀라서 알렌을 통해 조용히 물었다. “이들이 다 기생들이요? 그런데 왜 다들 나이든 기생들만 고른 거요?”
당황한 알렌이 “이분들은 고위 인사들의 부인들로 한국으로 말하면 정경부인 혹은 정부인들”이라고 설명하자, 한국 외교사절들은 또 한 번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이들이 곡마단이오?
놀란 것은 한국사절단만이 아니었다. 한국사절단은 모두 신분에 맞는 커다란 갓에 위엄 넘친 관복을 차려 입고 팔자걸음을 걸었다. 하루는 기차 안에서 미국 곡마단의 지배인이 알렌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한국사절단을 가리키며 알렌에게 “이 이상한 코미디언들과 계약을 맺도록 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하더라는 것이다. 알렌은 “이들이 한국의 고관들로서 자기는 이들을 인도하는 한국 정부의 고위 외교관”이라고 호통을 치며 눈을 부릅떴다고 한다. 워싱턴에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6.알렌과 시카고 세계박람회 - 삼태기·자래장롱·병풍… 초라한 한국관 전시품
세계박람회에 처음 나간 한국
1893년 4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콜럼버스의 미국 신대륙 발견 400년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에는 47개국이 참가했다. 마침 한국 참찬관으로 미국에 계속 체류하고 있던 알렌은 한국 조정에 박람회 개최 소식을 알렸고, 조정은 분주하게 출품할 품목을 준비해 박람회에 참가했다. 고종은 알렌에게 ‘명예사무대원’이란 직함을 주며 이 행사를 총괄하도록 맡겼고, 형식적으로 조정의 내무 참의 정경원을 파견했다.
한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로 성장했지만, 121년 전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한국이 세계에 얼굴을 내민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박람회란 말 그대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한국이 세계에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었을까. 아펜젤러는 한국이 ‘절간의 생쥐처럼 가난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한국을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알렌의 생각이 고맙지 아니한가. 알렌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박람회에 내놓은 물품들
오늘날은 한국 기업이 만든 스마트폰을 전 세계가 사용하고 있으며 국산 TV가 영국 왕실에 걸려 있다. 조선업 실적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렇다면 121년 전 한국은 세계인들 앞에 무엇을 소개했을까. 박람회장에서 한국관은 7칸 정도의 기와집 모양으로 지어졌다. 12㎡ 넓이로 4평도 안 되는 골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공예품이라며 전시한 것은 무명천과 발, 커다란 삼태기와 자개장롱, 비단과 병풍, 도자기 같은 것들이었다. 전체 물품 값은 당시 미화 1000달러에 못 미쳤다. 국악인들도 파견해 박람회장에서 국악을 연주하게 했다. 비록 내놓은 물품은 초라했지만 한국의 승정원일기나 왕조실록에는 “그래도 우리가 국제무대에 나갔다”며 자화자찬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알렌은 밤낮으로 박람회 준비에 열을 올렸다. 한국관 내부를 꾸몄고, 태극기도 지붕 위에 높이 달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국관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한국대표단들은 아무도 그런 알렌과 같이 하지 않았다. 외국인이 하루 종일 한국관을 홍보하며 호객행위를 한 것이다.
코크릴의 혹평과 윤치호의 실망
미국 뉴욕 헤럴드의 신문기자 코크릴은 한국관을 관람하고는 매섭게 비판했다. 고종이 한국의 폐품들을 헐값에 사서 보냈다고 혹평을 한 것이다. 코크릴은 친한(親韓) 인사였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발전이 기적이라며 찬사와 감탄을 아낌없이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런 비판을 했을까.
당시 미국 에모리 대학을 졸업한 윤치호는 박람회에 구경을 왔었다. 거기서 그는 미국이 일본의 종교에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 ‘황홀해’하는 모습에 격분했다. 그는 한국관으로 갔다. 윤치호는 한국관 앞에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국에, 세계에 처음 선보인 내 나라의 실체가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윤치호는 후에 한국이 출품한 물건이 조잡하고 멍청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다만 나는 그 처참한 모습에, 내 나라의 모습에 눈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윤치호는 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알렌에 대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그가 알렌을 만났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윤치호는 상처받은 가슴을 부여잡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떠났음이 분명하다. 그는 조국의 현실이 너무도 창피했다. 하지만 알렌은 이 가련한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박람회 자리를 지켰다. 알렌의 마음에는 한국이 언젠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알렌의 조국은 미국과 한국
윤치호 등 많은 이들이 한국이 출품한 물품을 부끄러워한 것과 달리 박람회를 연 주체인 미국은 한국의 공예품이 훌륭하다며 출품상을 줬다. 또한 국악이 매혹적이었다며 음악상도 수여했다. 신문은 한국관에 관객들이 모여든다고 칭찬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 조정에 ‘먼 나라인데도 박람회에 참여해 미국 정부나 국민이 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도 보냈다. 미국의 배려가 돋보인다. 정경원은 귀국 후 고종에게 미국이 박람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을 많이 돌봐 줘 감동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외교문서의 발신인이 바로 알렌이라는 점이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 하드가 휴가 중이었고, 공교롭게도 미국 대통령은 알렌을 주한 공사관의 공사 서리직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한국 조정이 임명한 미국박람회 파견 한국 책임자이면서 동시에 미국 서리 공사였던 것이다.
알렌은 이처럼 세계 최강국 미국과 빈약한 나라 한국을 동시에 대변하고 있었다. 한 곳은 태어난 조국이요, 또 한 곳은 마음을 준 제2의 조국으로 알렌에게는 둘 다 소중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7.명성황후 시해 참극에 맞선 알렌- 명성황후 시해 후 고립된 고종, 선교사들에 의지
알렌, 미국 외교관으로
알렌은 1889년 6월 한국 참찬관 직을 사임하고 귀국해 잠시 선교사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선교사들과 사이가 계속 편치 않아 인천과 부산 등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1890년 7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알렌은 그때 선교사 직을 아예 그만둔다. 알렌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외교업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말단직인 서기관으로 시작해 1897년 7월 미국공사에까지 오른다.
선교사들과 친했던 명성황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한다. 명성황후는 매우 총명했으며 특히 여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명성황후를 여러 차례 만났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은 명성황후가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보다 더 슬기롭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1년 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미국이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명성황후는 거침없이 “우리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자 언더우드 부인은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고 했다. 하늘나라가 그렇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랬더니 명성황후는 애처로운 얼굴로 그런 나라에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다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명성황후를 통해 기독교를 한국의 국교로 선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계획
일본의 해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한국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하면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할 음모를 꾸민다. 직전 공사인 이노우에는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로 미리 시해 계획을 다 꾸몄고, 후임자 미우라에게 실행을 맡겼던 것이다. 명성황후만 제거하면 한국 정복은 손쉬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명성황후는 이노우에의 음모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 있던 알렌이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알렌이 그만큼 순진했다는 뜻이다. 이노우에는 고종 임금과 명성황후를 여러 차례 만나 한국왕실은 일본이 꼭 지켜준다고 공문까지 써서 넘겨준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를 기만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1895년 4월 청국을 이긴 일본은 세계열강으로 급부상했고, 동시에 한국침략 계획을 구체화했다. 먼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했다.
일본 자객 20여명을 보냈다. 명성황후가 잠든 새벽 옥호루에 들이닥친 자객들은 궁녀들을 살해하다가 방구석에 숨어 있던 왜소한 명성황후를 찾아낸다. 그리고 도살한다. 이 참혹했던 광경을 당시 건축기사로 서울에 와 있었던 러시아의 사바스틴이 목격한다. 알렌은 어둠 속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뛰어가는 무리들을 우연히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일본 살인자들은 궁궐 뒤뜰의 우물에 사체를 던졌다가 다시 떠오르자 건져내 경복궁 뒷문 녹문 곁에 던져 놓고는 기름을 계속 부어 태운다. 사흘 동안 태운다. 명성황후의 흔적은 뼈 몇 개만 남았을 뿐이다. 일국 왕비의 최후의 모습은 이토록 비참했다.
고종이 기댔던 성벽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몸을 떨면서 용상 위에 앉아 꼼짝 못한다. 밤을 지새운 그는 새벽에 “밖에 외국 선교사들이 없느냐”고 간신히 소리친다. 군주가 붙들고 울 기둥은 선교사들뿐이었다. 소식을 듣고 알렌, 언더우드, 헐버트 등 선교사 네 명과 윤치호의 아버지가 달려갔다. 고종은 알렌을 보고 반기며 안도했다. 이들은 총을 가지고 가서 고종을 지켰다. 이 가련한 임금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들은 알렌과 미국 선교사들뿐이었다. 우리 정승들과 군인들은 다 어디 갔던가.
이들은 매일 당번을 정해서 두세 사람씩 고립된 고종 임금을 지켰다. 무려 7주 밤낮 동안 그랬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떨고 있었다고 한다. 알렌은 고종의 음식에 혹시 누가 독을 타 넣을까 해서 미국공사관에서 만든 식사를 세끼 때마다 배달했다고 한다. 수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평정을 찾은 고종은 “당신들이 나를 지켜주었다. 감사하다”며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알렌은 명성황후가 일본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때 안심시켰던 것이 죄책감으로 남았다. 알렌은 일본에 의한 배신감을 일생 잊지 못하고 산다.
알렌은 계속 타전했으나
이 난리 통에 들어선 친일내각은 명성황후를 가장 낮고 천한 신분으로 폐한다. 알렌은 구미 각국의 공사관들과 손잡고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성토하며 단죄한다. 알렌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공사관 안에서 조직적으로 계획됐고, 그들이 바로 살인자들이라는 것을 워싱턴과 세계 언론에 지속적으로 타전한다. 하지만 일본의 승승장구를 바라보던 미국 정부로서는 알렌이 손톱 밑의 가시였다. 오히려 미국 정부는 알렌의 활동을 제지하며 공식석상에서 발언도 못하게 하고, 왕실 출입도 금지했다. 일본도 가세해 알렌을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다그쳤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8. 알렌 외교관인가 선교사인가 -
1890년대 후반 주한 미국공사관의 전경.
1903년 주한 외국공사들이 한데 모여 찍은 사진. 당시 미국 공사였던 알렌(오른쪽 네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민경배 교수 제공
선교사들의 과감한 국내 전도여행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조정의 여권을 받은 것은 1898년 6월 10일 스왈런 선교사의 경우가 처음이다. 스왈런 선교사는 1907년 ‘하늘 가는 밝은 길’이란 찬송가를 지은 사람이다. 선교사들의 전도여행은 그전까지는 불법이었다.
정식 승인이 나기 전 선교사들은 조정의 법을 어기고 서북지방과 관북지역을 휘젓고 다녔고, 결국 ‘금교령’이 발포되는 사태를 초래한다. 심지어 빈톤이라는 선교사는 왕궁에 가서 대문을 열라고 야단을 치면서 고종이 수많은 궁녀를 거느린 것을 곧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소동을 벌이다 구속되기도 했다. 알렌은 선교사들의 이런 행동을 항상 경계하고 조심했다.
美 외교관으로 대사까지 승진
1890년 7월 9일 미국 대통령은 알렌을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알렌은 그해 11월 12일 부총영사, 1897년 미국 공사 겸 총영사, 1901년 6월 21일에는 주한 미국 특명전권대사로 승진한다. 1887년 11월 한국 외교관으로 미국에 가서 활약한 시간까지 합치면 알렌은 18년 동안 외교관으로 지낸 것이다. 알렌은 자신의 생애를 ‘묘한 인생길’이라 불렀다.
이런 알렌의 모습을 선교사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마펫 선교사는 알렌이 미국공사관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섭게 비난한다. 그는 미국 선교본부에 이런 글을 보낸다. ‘이제 알렌 박사는 정치계로 나갔으니 한국선교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아예 완전히 말소시켜야 합니다.’ 알렌을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로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알렌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미국공사관 옆의 덕수궁
1895년 초겨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겪은 고종은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불안에 떨던 고종은 결국 미국공사관이 있는 정동에 경운궁 곧 덕수궁을 짓고 거기서 머문다. 근대 한국의 격동기에 미국에 기댄 한국 왕실의 모습이다. 고종은 담 너머로 늘 미국공사관을 건너다봤고, 가끔 알렌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한번은 알렌이 옆 머리카락에 포마드를 바른 것을 보고는 “그것이 무엇이냐”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알렌은 포마드 한 병을 드렸다고 한다. 그만큼 격의 없는 사이였다. 또한 당시 알렌은 인천 바닷가에 별장을 하나 짓고 있었다. 그러자 고종은 고관 한 명을 보내 그 인근에 하계 궁전을 하나 짓는다고 산등성이 하나를 사들인 일이 있다.
미국공사관의 3면은 덕수궁에 맞붙어 있었다. 고종이 바라던 환경이다. 당시 미국공사관은 한옥으로 지어졌으며 외국 공사관 건물 중에는 가장 볼품없었다. 알렌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그 공사관 건물은 유형문화재 132호로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에 한 가지 곡절이 있다. 알렌은 한국의 임금이 있는 곳 옆에 미국의 힘으로 으리으리한 공사관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렌의 깊은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덕수궁보다 높은 데 지은 성당
사실 고종은 왕궁에서 눈을 들어 높이 쳐다보아야 하는 진고개(명동)의 높은 곳에 성당을 짓는 것을 보고 언짢아하셨다. 그래서 그 건축을 보류하길 바랐으나 천주교에서 강행하여 지었다는 말이 있다. 사실 현재 성공회 성당도 덕수궁을 압도하는 형세로 높이 웅장하게 솟아 있으며 거기에 영국공사관이 있다.
알렌, 세브란스병원 건축에 기여
1892년 여름 한국에 온 에비슨 박사는 제중원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옮기기로 하고 알렌과 함께 조정과 교섭해 그 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서울역 앞 대지였다. 1900년 에비슨은 미국 뉴욕에서 거부 세브란스씨로부터 병원 건설비로 미화 1만 달러를 받고 돌아왔다.
세브란스병원 기공식은 1902년 11월 27일 외국 사신들과 정부 고위 관리들, 그리고 한국 교인들과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날 미국공사 알렌은 감동적인 축사를 한다. 그가 이루어 놓은 한국 선교의 기념비적 성과가 이렇게 실체로 우뚝 서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은으로 만든 흙손으로 정초를 집례한다. 그날에는 9년 전 시카고에서 알렌과 길이 어긋났던 윤치호가 외무협판으로 나타나 알렌과 눈물겨운 악수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서먹하던 선교사들과도 감격으로 피차 악수한다.
조정과 알렌의 마지막 인연
세브란스병원은 기공한 지 2년 만인 1904년 11월 16일 개관한다. 알렌 역시 미국공사로 참석한다. 일본 고위 관리는 일본에도 현대식 병원이 여럿 있고 규모도 큰 것들이 있지만 설비는 세브란스병원에 따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실토한다.
알렌은 그가 해임되던 1905년 3월 세브란스병원의 경영에 대한 조정의 보조를 간청했고 조정은 논의 끝에 보조하기로 결정한다. 알렌이 한국을 떠나기 전 고종을 알현할 터인데 그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회신을 한 것이다. 그동안 알렌의 수고를 보상하는 조치였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19. 미국 외교관 알렌이 겪은 일들- ‘노다지’ 평북 운산금광 美 투자 유치 성사
운산광산의 전경. 평북 운산군 북진로 동자구에 있는 이 금광산은 미국의 J.R.모스가 채굴권을 얻어 1939년까지 경영했다.
1903년 10월 미국 신문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실린 고종과 미국 여성 에밀리 브라운이 결혼했다는 오보 내용. 민경배 교수 제공
알렌의 기구한 한국 생활
한국에서 알렌의 생활은 기구했다. 처음에는 의사로 시작했고, 다음에는 고종으로부터 한국 외교관으로 임명받아 일했다. 1890년 7월에는 한국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말단직이었지만 한국 주재 역대 미국 공사들이 병을 핑계로 자주 일본으로 휴가를 갔기 때문에 종종 임시공사직을 수행했다. 사실상 한국 주재 미국 외교관 대표로 처음부터 일한 셈이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에서 일하는 동안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을 모셨다.
그는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해주면서 고종 등 조정 인사들과 가까워졌고, 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며, 한국의 국익과 자주독립을 위해 실로 헌신적으로 일했다.
미국, 한국 운산금광에 투자
고종은 미국이 한국에 대대적으로 투자해 줄 것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길은 미국 자본이 한국에 쌓여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상수도사업이나 전차, 전화, 철도에 대한 미국 자본 유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가 한국에 손을 뻗을 때 미국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알렌은 고종에게 경인철도사업을 미국 모스사에 맡기도록 권했는데 알렌이 잠시 외국에 나간 사이에 일본 회사가 그 이권을 가로챘다. 알렌은 그 사실을 알고는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알렌의 최대 외교적 성과는 평북 운산금광이다. 알렌은 여러 자료에서 운산금광의 매장량이 아시아 최대라는 것을 알고는 1895년 7월, 25년 기한으로 미국 회사가 채굴권을 갖도록 교섭해 성사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명성황후의 입김이 있었다.
이 광산사업은 서북지방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게 했으며 수천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가히 근대 한국산업의 정점에 서게 한다. 그 수익은 1897년 시세로 미화 11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알렌은 고종에게 미화 1만3000달러를 진상했다. 선교사 출신의 외교관 알렌이 한국 최대의 금광 채굴권을 미국 회사에 맡기도록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얽히고설킨 국제관계에서 독립과 자주권을 확립하는 길은 미국의 대규모 투자를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금덩어리로 통용된 노다지
그때에 ‘노다지’라는 말이 금덩어리라는 말로 통용됐는데, 그 내력은 이렇다. 한국 노무자들이 금광석에 손을 못 대게 하느라고 미국인 기사들이 노터치(No Touch)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말이 한국인들에게는 금덩어리로 알려지게 됐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만’이란 말이다. 한번은 한국인 광부가 커다란 바위 덩어리에 깔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주변 광부들은 서둘러 큰 나무들을 세워 거기 밧줄을 감아 당겨 돌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보고 있던 미국인 기사가 ‘힘을 더 내자’는 취지로 “컴 온!(Come On) 컴 온!”이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한국 광부들은 그 소리가 ‘그만’ 하라는 소리인 줄 알고 밧줄을 놓았고, 바위에 깔린 사람이 사망하고 말았다.
서북지방 교회의 급격한 발전
당시 서북지방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장로교 한 교파 성도 수만 해도 전국 모든 교파의 성도 수를 합한 것의 약 3분의 2가 되었다.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가파른 상승세로 세계가 경탄하고 있었던 곳이다. 운산금광으로 인해 서북지방에 자본 유통이 매우 활발했다. 그 예로 운산부근 순천의 인구는 평양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헌금액은 2배 이상이었다. 이 생기 넘친 신앙과 경제활동으로 서북지방 성도들은 “우리에게도 이런 힘이 있구나”라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고종황제와 미 처녀와의 결혼 와전 소동
1903년 10월 2일의 일이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 텔레그래프’, 다음 달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그리고 신시내티의 한 신문에 한국의 고종황제가 미국 여성 에밀리 브라운과 결혼했다는 기사가 대문짝처럼 실렸다. 제목은 ‘한국의 유일한 미국인 황후!’였다.
그 기사에 따르면 에밀리는 한국 주재 미국 장로교 선교사 피터 브라운의 딸인데 당시 15세였다는 것이다. 결혼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는 고종 황제와 브라운양의 신혼행차 모습을 요란하게 스케치해서 커다란 삽화로 신문에 게재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선교사가 없었다.
이런 황당한 기사는 물론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어떻게 미국 거대 신문들에 이런 신기루 같은 기사가 실렸을까. 짐작 가능한 것은 알렌과 아주 친했던 콜로라도 스프링 텔레그래프지의 편집국장 리턴하우스가 알렌을 위해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알렌은 당시 친일정책을 펴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대들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안에서 한국에 대한 호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그런 여론몰이를 기도한 것이 황당한 사건의 동기였으리라는 짐작이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20·끝. 알렌 한국을 떠나다 - 알렌, 美 루즈벨트 친일정책 비판하다 해임 당해
알렌이 1904년 고종으로부터 수여 받은 태극대수장. 오른쪽은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알렌은 루스벨트의 친일정책을 비판하다가 1905년 해임됐다. 민경배 교수 제공
한국을 떠나는 알렌
1905년 6월 9일. 알렌은 한국에 입국할 때 거쳤던 인천항에서 미국 선박 ‘오하이오’호를 타고 한국을 떠난다. 항구에서 멀리 보이는 시골집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알렌의 나이는 26세였다. 21년을 머물고 다시 미국으로 떠날 때의 나이는 47세. 당시로서는 초로(初老)였다.
알렌은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한국 땅을 한참 바라보다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태극대수장’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1904년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것으로 왕족 이외에는 받은 사람이 없다는 영광의 훈장이었다.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던 한국이던가. ‘나는 이 나라에서 보낸 생애를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훈장을 받고 나서 알렌이 고종에게 보낸 감사의 글이다. 알렌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무릎에 파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알렌을 보내는 비운의 고종
알렌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은 것은 1905년 6월 2일이었지만, 해임 날짜는 그보다 앞선 3월 29일이었다. 후임인 모간의 부임 날짜는 6월 22일이었다. 한 달 뒤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다. 미국 정부가 일제의 한국 통치를 양해한다는 비밀각서다. 그해 11월 17일에는 굴욕의 을사늑약을 맺는다.
구한말 비극의 회오리가 부는 한복판에서 알렌은 사라져 간 것이다. 미국은 을사늑약 체결 후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 주재 미국공사관의 철수를 한국 조정에 통보한다. 그렇게 서두른 이유가 무엇일까.
떠나기 전 알렌은 마지막으로 고종 임금을 찾아간다. 고종은 알렌과는 20여년 지기(知己) 동료요, 막역한 전우였다. 혈육인들 이보다 더 가까웠으랴. 그 어느 때보다도 알렌의 도움이 필요한 때였기에 고종은 알렌의 소매를 차마 놓지 못했다. 그러나 알렌은 이미 머리털이 깎인 삼손과 같이 힘이 없었다. 뭐라 고별인사를 했을까. 고종의 눈가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알렌의 해임은 너무 가혹해
알렌의 해임은 너무나 가혹했다. 알렌은 해임되기 얼마 전 미국에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다퉜다고 한다. 서로 고성이 오갈 정도로 언쟁을 벌였다. 알렌은 미국 정부의 친일정책을 비판했다. 저 변두리의 작은 나라에 가 있는 공사가 대통령에게 덤비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알렌은 한국을 위해 그렇게 했다.
알렌은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부하 직원인 모간에게서 해임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한국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눈물을 흘린 대신들도 있었다. 한국 주재 외국 공사관의 외교관들도 미국 정부가 정신이 나갔다며 비판했다.
한국 실업인들과 타국 외교관들, 미국 선교사들, 한국 조정이 혼연일체가 돼 워싱턴에 알렌의 해임을 취소하라는 탄원서를 타전한다. 그러나 끝내 회답이 없었다.
알렌은 우리의 참 벗
우리는 그가 최후까지 일제의 한국침략을 고발하고 제지하고 정죄한 외로운 투사였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매한 품격과 기독교신앙을 가진 알렌은 일본의 간악을 방치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알렌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과 미국 정부가 손잡고 알렌을 몰아낸 것이다. 방치된 한국, 외로운 한국 근대사에 이런 막역한 친구가 어디 있었던가.
알렌의 헌신 덕분에 우리나라는 미국에 대해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되는 든든한 내 편’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친일정책을 내세운 또 다른 미국이 있었다. 한·미·일 삼국의 이런 구도는 아직도 남아 있다.
옛 동료들의 위로
알렌과 앙숙이었던 미국 선교사들 전부가 비통과 아쉬움으로 알렌의 해임을 아파하며 서로 손목을 잡고 놓지 못했다. 알렌은 그것이 제일 고마웠다. 알렌은 선교사들에게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일하는 것보다 고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럽다”는 말을 남긴다. 그는 그런 감격을 갖고 떠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알렌은 하나님을 위해, 한국을 위해 몸 바치고 살다가 떠난 우리 근대사의 기념비적인 존재로 길이 남을 것이다.
말년의 알렌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 오하이오의 토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한다. 또 알렌은 한국선교를 하며 기록해두었던 문서를 모아둔 상자 33개를 뉴욕시립도서관에 기증한다.
72세가 되던 해, 당뇨병으로 계속 고생하던 알렌은 두 다리를 절단하고 만다. 병이 너무 심해 죽음을 안식으로 기다릴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1932년 12월 11일 그가 74세 되던 해, 토레도시는 한국의 오랜 친구요 근대 한국의 개척자인 알렌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 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는 그렇게 갔다.
그의 사망소식을 들은 서울의 선교사들은 고별사를 남긴다. “알렌 박사님. 한국 어디에서든지 누구든지 그렇게 오래도록 불려지던 당신의 이름이 잊혀질 날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