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석민재
손톱만치도 살인 본능이 없지요
로맨스도 없고
생각이 많은 사람은 검정을 좋아해요
잊어야 할 것이 많아 무거워요
어른이 된다는 말 자체가 엉터리죠
아직도 축축한데
그림자 한 장을 이불로 덮고
사계절을 버텨요, 잘
맞다 안 맞다
식물 하나 안 키우는 사람들은 충고하지 마세요, 제발요
속이 새카맣게 탄다는 것은
눈물로 불을 끄면서 산다는 것
표정도 없이, 내공은 풍부하게, 충분하게
건투를 빌며, 하나 둘 셋
대학 안 나오셨나 봐요
교양도 없이
우리가 한두 해 알고 지낼 사이가 아닌데
불 좀 꺼 주실래요
전부를 잃게 되는 건 피차 마찬가지일걸요
조문/석민재
달밤에 강에 갔다가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노란 물에 비친 나는 호박(琥珀) 속 벌레 같다 물속의 화석 같다
지금 나는 살았을까 이미 죽었을까 죽은 나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어서 물속에 들어갔을까 강물
은 무슨 사연으로 나를 붙들었을까 어쩌다 저 표정으로 굳어졌을까 나를 기다리던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얼마나 나를 부르며 울었을까 누가 내 아이들을 달래줄까 뭐라고 달래서 재웠을까 나를 찾아 나선 남편은 어떻
게 됐을까 얼마나 목이 쉬었을까 친정엄마는 몇 번을 기절했을까 친정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끌어안고 또 얼마나
오열했을까 시체 없는 장례식장은 얼마나 허무했을까 얼마나 허전했을까 얼마나 안 믿겼을까 친구들은 무슨 말
로 남은 가족들을 위로했을까 가족들은 또 무슨 말로 그들의 조문에 응답했을까 영정 속의 나는 물속의 나는 어
떤 표정으로 있을까 물기슭에서 잠이 깬 물새들이 푸드득 거린다 나를 조문하던 달이 찌그러진 쟁반을 들고 와 소
주가 담긴 종이컵을 내민다
라스트 크리스마스/석민재
박수를 쳐요 챙 챙 챙 칼 부딪히는 소리 내며
와인이 붉은 눈처럼 내리구요 의자를 끌고 질 질 질
목매달 곳은 멀어요, 겨울밤은 길어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박수를 쳐요 챙 챙 챙
선물은 어디 있나요 눈사람은 어디쯤 오나요
손바닥은 성기, 박수는 그룹섹스―
서로의 손목을 잘 섞어야 해요 호호호
박수 치고 노래 부르고 수건이 돌아가요 노랗게
앞에서는 박수 소리 뒤에서는 칼 가는 소리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메리크리스마스!
촛불만 끄면 모든 손이 칼이 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열두 시가 되면 챙 챙 챙, 우렁찬 캐럴이 챙 챙 챙
새벽이 오면, 새벽이 오면 살과 피를 나눠 먹지요
피와 살을 나눠 가져요 우리
자, 웃어요 뻥 뚫린 입으로 뻥 뚫린 눈으로 뻥 뚫린
줄줄이 비엔나/석민재
불꽃놀이가 시작돼요
정수리가 터지면 꽃이 가장 예쁘게 피구요
복은 옆구리에서 흘러나와요 줄줄이
꼬리가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토막 내면
한 입 거리, 똥 덩어리만 그러니까 우리는 줄줄이
틀린 것은 빗금을 치지요, 옆구리를 찌르면서 하하하
꽃도 가짜고 이야기도 가짜지만 불은 진짜예요
엄마도 진짜고 아빠도 진짜지만 내가 가짜이듯이
불은 안전해요 가슴을 식히기에 정말 좋은
꾹꾹, 숨겨 놓은 내가 터져 나와 웃지요
머리부터 터질까요 엉덩이부터 터질까요
똥구멍으로 웃을까요 입으로 웃을까요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줄줄이 불 속으로 달려와요
옆구리가 터져 이렇게 웃고 있는데
출생의 비밀이 타고 있는데
또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고 있어요
빅풋/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석민재 시인의 약력 ]
석민재 시인
* 1975년 경남 하동 출생
* 2015년 '시와 사상'
*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시집 :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첫댓글 그냥 제 느낌인데..섬뜩하고 등골이 오싹한 시네요..
표현 하나하나에 한이 느껴지며, 차분히 말해주듯 써내려 가는 것이..마치 스릴러?! 같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