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무르시, 나세르 이후 세속주의 전통 강하던 이집트에서 종교독재 추진하다 역풍 만나
⊙ 터키 에르도안, 경제업적 바탕으로 이슬람주의적 정책 강행하다가 중산층 등의 反정부 시위 사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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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反무르시 시위대가 군부가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했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
이슬람권(圈) 국가들에서 세속주의(世俗主義)와 이슬람주의가 정면 충돌하고 있다. 2011년 아랍 전체를 휩쓴 ‘아랍의 봄’ 사태 이후 이집트는 물론 튀니지·리비아·예멘·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中東)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크고 작은 시위와 내전(內戰)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같은 이슬람권인 터키에서도 최근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슬람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와 내전의 배경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면(裏面)에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간의 뿌리 깊은 갈등과 대립이 깔려 있다. 이슬람주의는 경전인 코란을 헌법으로 삼고 이슬람 율법(律法)인 샤리아를 토대로 통치하는 국가의 건설을 최대 목표로 한다. 이슬람주의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이슬람권이 식민 지배를 당한 것에 대한 반성과 자각에서 비롯했다. 특히 이슬람주의는 향락과 물질을 숭배하는 서양문명을 거부하고 원시(原始)이슬람의 순결한 정신과 엄격한 도덕으로 돌아감으로써 이슬람 사회를 재생해야 한다는 종교적 이념이다. 반면 세속주의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자는 것을 말한다. 세속주의는 인간의 합리성을 신뢰하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종교의 간섭을 배제한다. 세속주의는 또 서양 문명을 일부 수용하는 등 이슬람 사회의 해묵은 관습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집트 모델로 한 中東 독재체제
2011년 ‘아랍의 봄’ 이전만 해도 이슬람주의 세력이 정권을 차지한 국가는 혁명을 통해 신정(神政)체제를 구축한 이란밖에 없었다. 아랍권을 포함하는 중동 국가들은 대부분 세속주의 국가였다. 특히 아랍의 맹주(盟主)를 자처해 온 이집트의 정치체제가 중동 국가들의 국가 모델이었다.
이집트는 1952년 7월 육군 중령이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王政)체제를 타도한 이후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공화국이 됐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를 강력하게 통치하기 위해 철저하게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군부(軍部) 출신인 안와르 사다트와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된 후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했고, 세속주의는 국민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자리를 잡았다.
아랍 국가들은 앞 다퉈 이집트의 정치체제를 추종했다. 사담 후세인(이라크), 무아마르 카다피(리비아), 하페즈 알 아사드(시리아), 제인 엘 아비디네 벤 알리(튀니지), 알리 압둘라 살레(예멘), 오마르 알 바시르(수단) 등은 모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독재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또 세속주의를 국가 모델로 내세웠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침공으로 200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2000년 심장마비로 숨진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제외하곤 나머지 국가 정상들은 ‘아랍의 봄’ 때까지 건재했다. 하지만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리비아·예멘을 통치해 온 독재자들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사망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 독재자들을 축출한 일등 공신(功臣)은 세속주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층과 지식인,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는데, 정권을 잡을 만큼 정치적 조직과 정당을 구성할 능력이 없었다. 야당들도 독재 정권에서 탄압을 받아 온 탓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틈을 비집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슬람주의 세력이다.
무슬림형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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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형제단의 창설자 하산 알 반나. |
이슬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단체들 중 가장 강력한 조직이 무슬림형제단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슬림형제단은 중동 정치체제의 모델이라는 말을 들어 온 이집트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이집트의 사회운동가이자 학자인 하산 알 반나가 1928년 창설한 무슬림형제단은 그동안 두 차례 암살 음모에 연루돼 탄압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은 1948년 이집트의 마지막 국왕이던 파루크 1세 시절, 단원 가운데 한 명이 마흐무드 파샤 총리를 암살한 후, 불법(不法)단체가 됐다. 무슬림형제단은 1954년 나세르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다시 한번 불법단체로 규정됐다.
이후 이집트 역대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도 살아남은 무슬림형제단은 학교와 병원 등을 운영하면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벌여 노동자를 비롯해 농민과 도시 저소득층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아 왔다. 무슬림형제단 단원은 100만여 명이나 되며 이집트뿐 아니라 튀니지, 요르단 등 외국으로 세력을 확장해 이슬람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가 됐다. 무슬림형제단은 술 판매 금지를 비롯해 여성의 노출 금지 등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엄격한 집행을 주장해 왔다. 샤리아는 술, 도박, 매춘, 음악, 마약 등을 금지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 여성은 신체 노출을 피해 온몸을 가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6월 자유정의당을 창당하면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자유정의당은 당시 무슬림형제단의 대변인이었던 무함마드 무르시를 당수로 선출했다. 무르시는 지난해 6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이집트의 국가 최고지도자가 됐다. 무르시는 철저한 이슬람주의자라는 평을 들어 왔다. 이 때문에 무슬림형제단에서도 무르시는 강경파로 분류한다. 무르시는 대선 운동 기간 중 ‘이슬람이 해결책(Islam is the Solution)’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집트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공약을 제시했었다.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초기 통합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각종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이슬람주의와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이른바 파라오 헌법을 새로 제정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무르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통령이 내린 결정은 최종적인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으려다 국민들의 반발로 취소하기도 했다. 이후 제헌의회에서 마련한 새 헌법안(案)이 국민투표로 통과됐지만, 헌법 초안(草案) 작성에 이슬람주의자들만 참여하면서 세속주의자들과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새 헌법에는 샤리아가 명시돼 있고 여성과 소수(少數) 종교인 등의 인권을 침해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무르시 대통령은 또 정부의 주요 직책은 물론 각종 국영(國營)기관과 언론매체의 수장(首長)들을 모두 이슬람주의자들로 임명하는 등 이른바 ‘종교독재’를 해 왔다.
청년실업률 42.7%에 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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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 정책을 강행하다가 축출된 무르시 대통령. |
이 때문에 세속주의 세력은 물론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합세해 무르시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 4월 28일 ‘타마로드’라는 반정부 정치연합체를 결성했다. 타마로드는 아랍어로 ‘반란’이라는 뜻이다. 타마로드가 벌인 대통령 불신임 서명운동에는 이집트 전체 유권자의 절반에 달하는 2213만명이 참여했다. 타마로드는 서명운동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6월 30일 무르시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카이로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수백만 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민주화의 성지(聖地)’라는 말을 들어 온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는 50만여 명이 운집했다. 이는 2년 전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축출할 당시의 시위대 규모보다 큰 것이다.
세속주의 세력이 벌여 온 무르시 대통령 퇴진 운동에 이집트 국민들이 동조한 것은 경제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무르시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1년 동안 이집트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시민혁명으로 물러난 무바라크 전 대통령 시절인 2009년과 2010년 경제성장률은 4.6%와 5.2%였으나, 시민혁명 이후인 2011년과 2012년의 성장률은 각각 1.8%와 1.9%를 기록했다. 외환(外換)보유고가 2010년 말 360억 달러에서 2년 만에 130억 달러로 줄어들면서 이집트 파운드화(貨)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고, 전력난으로 관개시설을 돌릴 수 없어 식량 생산도 줄어들었다. 이집트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관광업도 치안 악화로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 2년 동안 이집트에선 살인사건이 3배, 무장강도가 12배 늘었다. 실업률은 지난 2010년 9.2%에서 시민혁명 후인 2011년에 12.1%로, 지난해 12.3%로 계속 상승했고, 올해는 13.6%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20~25세 청년실업률은 42.7%에 달하고 있다. 현재 전체 인구 9000만명 중 절반이 하루 2달러 이하 돈으로 연명하는 상황이다.
이집트 국민들은 독재 정권을 타도한 이후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새 정부를 출범시켰지만 무르시 대통령은 오히려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무르시 대통령은 경제 회복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무슬림형제단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 더 집중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軍部, 쿠데타 암중모색
이집트 군부는 연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지난 7월 1일 무르시 대통령에게 48시간 내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면 퇴진(退陣)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이 퇴진을 거부하자 7월 3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군부는 탱크와 병력을 동원해 무르시 대통령을 체포하고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또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비롯해 주요 장관들과 무슬림형제단의 주요 간부들을 구금하고 국영 방송국도 접수했다. 군부를 대표한 압델 파타 엘 시시 국방장관은 국영TV 생방송을 통해 무르시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하고 현행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킨다고 발표했다. 엘 시시 장관은 이어 새로운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아들리 알 만수르 헌법재판소 소장을 임시대통령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만수르 헌재 소장은 7월 4일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첫 조치로 의회 해산을 명령했다.
군부는 그동안 무르시를 축출하기 위해 상당한 준비를 해 왔다.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시나이 반도에 주둔한 국경수비대원 피살 사건을 구실 삼아 군부 실세(實勢)였던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을 경질할 때만 해도 침묵을 지켰었다. 하지만 군부는 정국(政局)이 어수선할 때마다 민심(民心)의 향방을 저울질하면서 쿠데타를 계획해 왔다. 군부는 국민들의 무르시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절정으로 치닫자 쿠데타를 결행한 것이다.
군부는 이집트 이슬람 수니파의 최고(最高) 종교기관인 알 아즈하르 수장 아흐마드 알 타입과 이집트 콥트 기독교의 교황 타와드로스 2세의 지지까지 얻어 냈다.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집단인 군부가 시민혁명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군부는 이집트 산업의 35~40%를 장악하고 있다. 또 군 출신들은 요직에 포진해 있다.
알제리 內戰의 前轍 밟을 수도
특히 주목할 점은 군부는 그동안 국민들의 원성도 들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론 강력한 지지를 받아 왔다는 것이다. 군부는 독재정권의 보루(堡壘) 역할도 했지만 1948~1973년 4차례 이스라엘과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아 왔다. 엘 시시 장관의 발표 직후 이집트 전국 곳곳에서는 군부의 쿠데타를 환영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특히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과 대통령궁 주변에 운집한 수십만 명은 축포(祝砲)를 쏘고 환호를 질렀다. 반정부 시위대는 “신(神)은 위대하다” “이집트여 영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기쁨을 표현했다. 카이로 시내 곳곳에서도 시민이 차량 경적을 울렸다.
이집트 군부가 헌정을 중단시키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한 것은 명백히 쿠데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의 축출을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정신을 계승하는 ‘제2의 시민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부는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이집트 국민의 의지와 열망을 항상 지지해 왔다”면서 이번 정치 개입이 쿠데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 지지 세력은 군부를 타도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입장이다. 무슬림형제단의 게하드 엘 하다드 대변인은 “군부는 명백한 쿠데타를 저질렀다”면서 “민주주의가 탈선(脫線)한 상황에서 저항 이외에 다른 선택이 뭐가 있겠는가”고 주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군부가 세속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이슬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7월 5일 금요기도회가 끝난 뒤 무슬림형제단이 군부를 타도하자면서 대규모 폭력 시위를 벌인 것도 강경 투쟁의 일환이다. 당시 무르시 지지파와 반대파가 유혈 충돌해 최소 37명이 숨지고 1000여 명이 부상했다.
문제는 무슬림형제단과 군부가 정면 충돌할 경우 자칫하면 이집트가 내전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군부는 7월 8일 무르시를 지지하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수십 명을 사망케 했다. 무슬림형제단이 군부에 전면적인 지하드(聖戰)를 벌이겠다고 나선다면, 1990년대 알제리처럼 이집트에서도 내전이 벌어질 수 있다. 알제리 군부는 1990~91년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승리하자 무력을 동원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다. 그러자 이슬람주의 세력은 무장 봉기했으며, 이후 10년 넘게 내전이 지속돼 20만여 명이 희생됐다.
이집트 전체 국민들 중 무슬림형제단 지지층은 30%가량이다.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은 앞으로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투쟁할 가능성이 높다.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이 ‘물과 기름’ 관계를 청산하고 상호 협력하기에는 국가 정체성(正體性)을 비롯해 지향점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집트 시민혁명의 제2막이 시작된 셈이다.
‘아랍의 봄’ 이후 독재 정권들이 차례로 붕괴되면서 아랍 각국에서 정권을 잡은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이집트에서 군부와 세속주의 세력이 다시 득세한 상황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튀니지 제헌의회 총선에서 제1당이 된 엔나흐다당(아랍어로 ‘부흥’이라는 뜻)과 모로코 총선에서 승리한 정의개발당은 모두 이슬람주의 정당이다. 리비아에서도 이슬람주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모래바람이 불면 아랍 국가들은 폭풍 속에 휘말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집트의 정치체제와 국가모델은 역사적으로 아랍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이집트는 고대(古代)에서부터 현재까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문명국으로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아랍권은 통상 아랍어를 사용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 국가를 가리키며, 아랍연맹의 회원국 22개국을 지칭한다. 이 아랍연맹의 사무국이 이집트 카이로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치체제와 국가모델을 둘러싼 이집트의 행보가 향후 아랍권 전체를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
계속되는 터키의 反정부 시위
터키에서도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치열하게 대결을 벌이고 있다.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중심지인 탁심광장에 있는 게지공원은 세속주의 세력의 중심지가 됐다. 터키 정부는 이 공원에 오스만튀르크 제국 시대의 포병부대 막사를 본뜬 조형물과 쇼핑몰 등을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과 세속주의 세력은 지난 5월 28일부터 이 공원을 점령하고 6월 22일까지 각종 반정부 시위와 집회를 벌여 왔다.
반정부 시위는 이슬람주의자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 퇴진 운동으로 비화됐다. 전국 주요 도시에선 에르도안 총리의 퇴진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졌고,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동안 폐쇄돼 왔던 게지공원은 지난 7월 8일 다시 문을 열었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시민단체들의 모임인 탁심연대(連帶)는 게지공원에서 터키의 미래를 논의하는 ‘포럼’을 열겠다는 계획이다. 탁심연대 등 시민 단체들은 그동안 20개 도시 100여 개 공원에서 밤마다 ‘포럼’이라고 이름 붙인 토론회를 열고 있다.
터키 반정부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참가자들이 대부분 세속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학생 등 젊은 층을 비롯해 직장인·은행원·학자·변호사·교사 등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때문에 세속주의 세력이 에르도안 총리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여성들이 대거 참여했다. 시위 도중 최루가스를 뒤집어쓴 ‘빨간 옷의 여인’이 반정부 시위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많은 여성이 빨간 스카프를 두르거나 붉은 옷을 입고 시위에 참가했다. 여성들이 시위에 적극 동참했던 것은 에르도안 총리의 이슬람주의 정책에 가장 큰 피해자가 자신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총리 집권하에서 여성을 겨냥한 이른바 ‘명예살인’이 연간 1000건에 이르는 등 여성 인권이 크게 위축됐다. 여성들은 특히 에르도안 총리가 추진하는 새로운 낙태금지법을 여성 인권을 탄압하고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로 회귀(回歸)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케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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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國父 케말 아타튀르크. |
탁심광장에는 터키공화국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년) 초대(初代)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케말은 1924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술탄제(制)를 폐지하고, 이슬람을 국교(國敎)로 정한다는 조항을 없애는 등 세속주의와 정교분리 원칙을 세운 인물이다. 이런 그의 이념을 ‘케말리즘’이라고 부른다. 케말리즘은 현대 터키공화국의 건국이념이 돼 왔다.
케말은 터키공화국을 기존의 이슬람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서구화(西歐化)한 국가로 변신시키기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예를 들면 이슬람 전통 복장을 폐지했고,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전통적인 페즈 모자(챙 없는 원통형 모자)의 착용을 금지했다. 여자들도 히잡을 쓰지 말고 서양식 옷을 입고 다니도록 했다.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비롯한 남녀평등권을 도입했고,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를 약간 변형한 터키어도 제정했다. 터키는 케말의 주도로 서구화됐다. 물론 지금도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지만 기독교 등 타(他) 종교의 활동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터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케말이다.
케말은 터키의 국민주로 불리는 라키라는 술을 매우 즐겨 마셨다. 케말은 이슬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해 온 금주법(禁酒法)도 폐지했다. 탁심광장은 바로 케말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때문에 탁심광장의 게지공원 재개발 계획은 케말의 정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 세속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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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터키 총리. |
터키공화국의 건국 이념인 케말리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 세력이나 지도자는 그동안 없었다. 하지만 에르도안 총리와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이슬람주의가 갈수록 확산됐다.
올 59세인 에르도안 총리는 대표적인 이슬람주의자이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스탄불 시장을 지내던 1998년 한 집회에서 ‘이슬람 사원은 우리의 병영(兵營)이며, 첨탑(尖塔)은 총검이고, 돔은 헬멧이며, 신도들은 우리의 병사’라는 내용의 시(詩)를 암송해 이슬람주의를 선동한 혐의로 4개월 복역한 적이 있다. 당시 터키 헌법재판소는 에르도안의 소속당인 복지당에 대해 세속주의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위헌(違憲) 판정을 내리고 해산 선고를 내렸다.
에르도안은 이에 굴하지 않고 2001년 이슬람주의를 추종하는 정의개발당을 창당했다. 정의개발당은 2002년 총선(總選)에서 승리했고, 당수였던 에르도안은 2003년 총리가 됐다. 2007년과 2011년 총선에서 연속 승리해 내리 3연임(連任)에 성공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지난 11년 동안 이슬람주의 색채가 강한 정책들을 추진해 왔다. 예를 들어 밤 10시 이후 모든 공공장소에서 주류(酒類) 판매를 금지하고, 종교 학교에서 히잡을 착용하고, 공공장소에서 남녀간 애정 표시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또 이슬람주의를 비판해 온 언론을 탄압하고 군부의 장성들을 해임했다. 반정부 시위대가 “우리는 이슬람 신정국가인 이란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에르도안 총리를 ‘독재자’, ‘술탄’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터키의 반정부 시위 사태가 계속됐던 근본 원인은 에르도안 총리가 주창해 온 이슬람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뉴욕타임스》는 터키공화국의 건설자이자 세속주의 정권을 세운 케말을 추종하는 세력과 이슬람주의 성향의 현 정권의 충돌이라고 분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터키의 사태는 일종의 문화충돌이라고 규정했다. 《포린 폴리시》는 에르도안 등 이슬람주의자들이 케말의 독재적 근대화를 독재적 이슬람주의로 대체하려다 세속주의자들의 반발을 산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슬람주의는 ‘아랍의 봄’ 이후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 국가이념으로 부상(浮上)해 왔다. 이슬람주의 세력이 각광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터키의 에르도안 총리와 정의개발당도 이슬람권에서 본받아야 할 ‘모델’로 부각됐다. 에르도안 총리의 야심은 바로 이슬람주의를 앞세워 터키를 ‘제2의 오스만튀르크 제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제2의 오스만튀르크’ 꿈꿔
터키는 에르도안 총리 집권 이후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대에서 1만 달러대로 3배 이상 증가하는 등 한마디로 말해 잘나가는 국가가 됐다. 지난 10년간의 연평균 GDP 성장률은 5%를 기록했고, 올해와 내년 성장률 또한 각각 4%로 전망된다.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도 GDP의 각각 6%, 36%로 웬만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보다 낮은 편이다. 실업률은 8.2%로 10년 만에 최저치를 보이고 있다. 터키가 ‘포스트 브릭스(post Brics)’ 국가가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23년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들어서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에르도안 총리의 속셈은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멸망할 때까지 470년간 세계를 좌지우지했다. 특히 터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하다.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셀림 1세는 1517년 이집트를 침입해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맘루크 왕조로부터 칼리프 직위와 계승권을 뺏어 왔다. 칼리프는 이슬람의 교황(敎皇) 같은 존재이다. 중동 국가들은 지난 400여 년간 칼리프 국가였던 터키를 상당히 존경해 왔다. 에르도안 총리는 앞으로 이를 더욱 발전시켜 자국을 이슬람의 중심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에르도안 총리가 이슬람주의를 강력하게 주창해 온 이유라고 분석할 수 있다.
실제로 터키는 EU 가입이 어렵게 되자 외교노선을 친(親)서방에서 탈피해 친중동으로 바꿔 왔다. 에르도안 총리는 “터키는 아랍 없이 살 수 없다”면서 “아랍은 터키의 두 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軍部 장악 성공
에르도안 총리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제한한 2010년 개헌(改憲)에 이어 현재의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2차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손에 쥐고 ‘이슬람주의적 민주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미 2010년 개헌을 통해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세속주의를 약화(弱化)시켰다.
개정된 헌법을 보면 헌법재판소, 최고법원 등에 대한 재판관 선출 또는 임명과 관련해 정부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 헌법재판소가 정당 해산을 판결하더라도 신설되는 의회 산하 정당해산검증위원회 위원 3분의 2가 찬성해야만 정당이 해산될 수 있도록 했다.
또 군 간부를 군사 법정이 아닌 일반 법정에서 재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헌법에 따라 세속주의의 보루인 군부와 사법부의 권한은 크게 약화된 상태이다. 특히 에르도안 총리는 현재 군부를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
터키 군부는 그동안 세속주의를 수호하며, 조국 근대화의 간성(干城)으로서 각종 면책특권(免責特權)을 누리는 집단으로 군림해 왔다.
군은 국민의 절대 신뢰를 바탕으로 조국 수호자로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군부는 또 세 차례(1960년, 1971년, 1980년)에 걸쳐 쿠데타로 합헌 민간 정부를 전복했다.
1997년에는 민간 정부를 강압적으로 위협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기도 했다. 터키 군의 병력은 61만명이나 된다. 현재 나토에서 영국, 프랑스 등과 맞먹는 전력(戰力)을 보유하고 있다.
막강한 터키 군부가 직접 에르도안 총리의 견제를 받게 된 계기는 현역 및 퇴역 장성 11명을 포함한 102명이 2003년 정부 전복을 모의한 혐의로 2010년 대거 체포된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현재도 전·현직 군부 인사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 사건을 빌미로 군부를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2023년까지 집권 목표
에르도안 총리는 내년 개헌에 성공하고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터키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집권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특히 에르도안은 터키를 제2의 오스만튀르크로 만들기 위한 ‘2023 플랜’이라는 야심찬 계획도 마련해 놓았다.
이 계획을 보면 이스탄불을 통과하는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50km의 대운하를 건설하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관통하는 제3의 교량과 터널, 제3의 국제공항도 건설한다는 것이다. 항공기와 헬리콥터와 군함을 자체적으로 생산한다.
새 주택 50만호를 건설하고, 연간 수출액 50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며, 독자적 위성도 발사하고, 모든 어린이에게 전자 책(e-book)을 지급한다. 전국에 22개 국립병원을 새로 세우고, 신혼부부 10만 쌍을 위한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총리로선 이런 장밋빛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이슬람주의라는 국가이념으로 국민들을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에르도안 총리가 바라는 대로 개헌이 실현될지는 미지수이다. 반정부 시위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세속주의 세력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터키의 젊은 층과 중산층은 세속주의를 선호하고 있다. 이집트 사태처럼 케말 정신의 수호자를 자임해 온 군부가 정치 전면에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에르도안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세속주의를 원하는 도시 주민들과 달리 농민들은 대부분 에르도안 총리를 적극 지지해 왔다. 또 에르도안 총리가 이슬람주의 정책을 포기할 가능성도 낮다. 때문에 터키에선 상당기간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세력 간의 갈등이 더욱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터키는 이집트와 함께 이슬람권의 두 축이다. 터키와 이집트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슬람권에 속한 각국의 국가모델과 정치체제 향방이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