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안경점 종로에 개업한 안경점, 명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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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16. 16:05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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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안경점
종로에 개업한 안경점, 명안당
요약 1920년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전문안경점이 등장함, 최초 안경점 명안당의 주인은 장희원.
세브란스나 일본의 기술자를 통해 또는 독자적으로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 등이 전문안경점을 개업함.
초기에는 안경점에서 시계와 안경을 같이 다룸.
주로 미국제 금테 안경을 취급, 가격은 3원 50전부터 7원까지 다양했음.
한국인이 경영하는 안경 전문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0년 4월 2일 <동아일보> 창간 축하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날 종로에 있는 동양당 시계포와 명안당이 광고를 냈는데, 모두 안경 전문점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당 시계포의 주인은 이성렬, 명안당의 주인은 장희원으로 되어 있다.
안경은 도입 초기엔 잡화의 한 종류로 취급되었다.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는 외국의 상사들이 수입해 들여온 안경을 각종 잡화와 함께 팔기 위한 광고가 보인다.
그때의 안경은 일종의 액세서리였다. 이른바 개화기의 상징물로서 권위를 나타내는 액세서리로 취급되었다. 신문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으레 양복을 입고 안경을 끼고 다녔다.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면 지식층으로 보였고, 인품도 남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이 나쁘지 않은 사람도 예사로 안경을 끼고 다녔다. 젊으나 늙으나 이런 풍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잡화로 취급되었던 안경은 도수가 있는 것도 착용해봐서 좋아 보이면 내것 이었다. 도수가 없는 것도 마음에 들면 값을 치르고 샀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전문 안경점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세브란스에서 배운 사람, 일본의 기술자를 통해 배운 사람, 혹은 독자적으로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이 속속 개업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 세브란스에서 배웠다는 것은 에비슨에게서 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비슨은 세브란스 병원을 창립한 바로 그 캐나다 선교사를 말한다. 그는 세브란스에서 처음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안경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안경이 처음 보급될 당시의 일이 많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안경 제작기계를 설치한 후에 우리가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안경알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테의 형태가 너무 자주 바뀐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이 찾지 않는 형의 안경 재고가 많아 우리가 기대했던 이익이 많이 줄어들었다. 몇 년 후 안경 제작사가 독자적으로 사업을 벌이게 되어 우리는 또다른 사람을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내 안경 장사를 익힌 한 젊은이가 나타나 장소만 대여해준다면 기계류와 안경알 및 테의 재고품 전량을 기꺼이 매입하겠다고 했다. (중략) 그 안경상은 우리를 위해 일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사업을 크게 확장하여 일반 대중들에게도 거래했다. 그는 휘하의 모든 조수들을 훈련시켰고, 돈을 많이 벌어···."
이 기록에 나타난 시기는 1900년대 초다. 안경 제작기계라는 것은 렌즈 연마기를 말한다. 에비슨이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갔을 때 그 곳에서 연마기를 들여온 것이었다. 그러나 안경 제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안경에 까다롭게 군 것은 일본인들이었을 것이다. 재고가 생겨 고심하고 있는데 안경 장사를 익힌 한 젊은이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장사에 성공한 듯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안경점을 최초로 했던 사람은 이때의 젊은이로 보인다. 단지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안경을 팔았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초기에는 안경점에서 시계와 안경을 같이 다루었다. 동양당 시계포와 명안당도 마찬가지였다. 업주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없지만 명안당은 그후 계속 활발하게 광고를 해서 초창기 안경점의 실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명안당은 주로 미국제 금테 안경을 취급하고 있었는데 가격은 3원 50전에서 7원까지 다양했다. 금 한 돈에 5원 50전 정도 할 때였다. 또 5년에서 25년까지 보증을 해주고, 그 동안에 안경테가 변색되면 100원을 주겠다고 선전했다.
보증기간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것은 물론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섯 개 이상을 주문할 때는 만년필 한 개를 주겠다는 문구도 보인다.
이런 방식을 사용한 것은 물론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에 맨 처음 상륙한 일본 안경점인 대학당은 자동 렌즈 연마기에 판매원을 20여 명이나 둔 큰 상점이었다. 한국인 경영 안경점은 주로 미제와 독일제를 가지고 일제와 경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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