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91
6월17일[연중 제1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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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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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OwlaWEIIk
[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흑석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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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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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voqAWppm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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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오늘 복음은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악인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밭을 노립니다.
나봇은 아합에게 포도밭을 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벨 여왕이 나서서 일을 꾸며 나봇을 죽게 합니다. 나봇은 반항도 못 해보고 포도밭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말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독재자가 나타나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데모라도 해서 저항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대로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지배하에 있었지만,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악인에게 맞서면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주인공은 사이코패스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본인이 그 사이코패스보다 더 악랄한 존재가 됩니다. 같이 놀면 같은 존재가 됩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권을 잡으니 더 악랄한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쿠데타를 해 보니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들고일어서지 못하게 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싹부터 잘랐습니다. 그리고 무려 49년 동안 20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독재정권을 유지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를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과 맞서면 나를 따르는 이들도 그를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은 마음에 미움을 가지게 될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민중이 귀족과 종교에 대해 들고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런데 몇몇 선동에 일반 시민들은 수많은 사제와 귀족들의 머리를 단두대에 올려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미움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범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와 맞서지 않고 그를 감싸셨습니다.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기기 위해 입맞춤하실 때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끌려가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유다를 감싸신 이유가 ‘하.사.시.’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에 잘 드러납니다.
“적어도 마지막 시간까지, ‘죄악’을 숨겨 두어, 제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로 그들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7-224)
만약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드러내셨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당신 제자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나쁜 생각이 깃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악인에게 맞서면 안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고 분별하는 장소입니다. 더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수록 더 정화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 저항하거나 맞서기보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으셨는지 먼저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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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악 프로그램 중에 ‘가요 톱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순위를 정하는 겁니다. 경쟁이 치열하면 매주 순위가 바뀌곤 합니다. 5주 연속 1등 하면 자연스럽게 다음 순위로 1등이 정해집니다. 20위 권 밖에 있지만 사람들이 점차 좋아할 만한 노래도 정해서 들려줍니다. 순위는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노래도 흐름이 있는지 어떤 때는 서정적이고 조용한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과 춤이 어우러진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K Pop이 사랑받으면서 솔로 가수가 아닌, 그룹이 순위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HOT, 동방신기 그리고 방탄 소년단이 있습니다. 걸 그룹에는 SES, 핑클, 소녀시대 그리고 뉴진스가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았던 1991년 가요 톱텐 1위 곡은 이렇습니다.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김지애의 몰래 한 사랑,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이선희의 추억을 책장을 넘기면, 노사연의 만남,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있습니다. 33년 전의 노래인데 지금도 멜로디와 가사가 생각납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슴 벅찬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 중에 ‘노아의 방주’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홍수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탈출기’가 있습니다. 앞에는 깊은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홍해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린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정말 기적처럼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나왔습니다. ‘5병 2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카인의 죄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 첫 번째 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갔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죽였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독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아합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 때문에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봇을 억울하게 누명 씌어서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억울한 죽음이 많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는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보여줍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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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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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인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아합은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모략을 세우거나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이제벨과는 달리 하느님과 율법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였기에, 거짓 증언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에 매우 충실한 사람으로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불의와 폭력에 내던져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을 감았습니다. 나봇이 무고하게 죽었지만, 아합은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겉으로는 모른 척하였지만 그 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무죄한 의인이 희생한 대가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욕망은 아합에게 나봇의 죽음을 가리고, 포도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아합과 닮았습니다. 이제벨처럼 직접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 악행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때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빈부 격차를 가속화하며 가난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악법과 불의한 구조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만일 그 법으로 어떤 이득을 얻게 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욕심은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고, 지금 곧바로 얻게 될 이익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어려운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희생적 선택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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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은 악보다 강하고, 언제나 항상 선이 악을 이깁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이 말씀에서, 대사제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 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19-23)
이 이야기를 번역되어 있는 대로만 읽으면, 예수님께서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바리사이들 같은 분이 되어버립니다. 우선 먼저 우리말 성경의 번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 존댓말이 없긴 한데, 우리말로 옮길 때 예수님 말씀을 존댓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사실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왜 나에게 묻느냐?”라고 말하는 경우는 실제 현실에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니 실제로 대사제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전 경비병을 향해서 하신 말씀도 엄하게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씀으로 번역했다면, 또 존댓말로 번역했다면 분위기와 느낌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 대신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포기하여라.’, 또 ‘앙갚음하지 마라.’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신 것은 맞습니다.
2) 재판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모욕과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마태 26,67-68)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베드로 사도는 그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1베드 2,23)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2-3)
3)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 그 곁에 서 있던 자들이 ‘하느님의 대사제를 욕하는 것이오?’ 하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저분이 대사제인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네 백성의 수장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23,1-5)
대사제가 바오로 사도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이 신성 모독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대사제가 율법대로 재판하지 않는 것을 항의했습니다.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은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5절의 말도, 사과하는 말이 아니라 대사제를 꾸짖는 말입니다. 대사제답지 않게 행동함으로써 대사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은 대사제 자신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합해서 생각하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행을 당해도 그냥 참으라는 뜻이 아니고, 악에 굴복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같은 악행으로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19.21) 우리는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선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반드시 ‘선’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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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전에 부모님은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교육을 잘못 시킨 자신의 탓이라 여겨 자식에게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그런 부모님의 엄명에 눈물을 흘리고 잘못을 뉘우치는 산 교육을 몸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교육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쟁과 야합, 이기심과 허영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가 선으로 악을 이기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역설적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도 당해야 속이 풀릴 것 같은 세상인데, 막상 그렇게 한다고 내 맘이 편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은 상처와 폐해는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복하고 원망해도 이미 저질러진 악은 또 다른 악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이 이제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권력을 남용한 사례는, 오늘날에도 권력 남용으로 인권과 사회 정의가 유린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과 불의 앞에서도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역설적 가르침은, 악의 힘은 더 이상 악이 전염시킬 힘이 없는 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불의 앞에 침묵이나 타협이 아닌, 정의를 외치는 것은 정당한 예언자적 소명입니다. 하지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은 불의한 악의 힘에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 정의의 실현은 하느님께 맡기라는 믿음의 요청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의 용서와 자비에서 드러난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역설적인 하느님의 반전 드라마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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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용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자에게 어떠한 반대적 반응도 보이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더 잘 대해 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 밀어 주며 더 맞으라'고 하시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한 대만 맞아도 아프고 화가 날 지경인데 얼굴을 내밀며 더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다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나를 학대하고 경멸하며 혹사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장사꾼들은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하나 이윤을 따지고 돈을 벌지 않으면 비정한 경쟁의 삶의 자리에서 지고 말 것입니다.
군인들이나 경찰관들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다간 군대의 규율은 무너져 버리고 정복하거나 방어하려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며, 질서와 공안을 위한 경찰관들의 체제 또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시다니, 이래서는 정의로운 판결이 불가능할 것이며 감옥은 개방해야 하고 소송제도는 폐지해 버려야 할 것이며 판사나 변호사들이 해야 할 일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이 달라는 대로 다 내어 주고, 꾸려고 하는 자의 청도 다 들어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한 사람들의 끝없는 요청에 계속 시달릴 것이며 끝내 빈 털털이가 되어 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자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정의롭지 못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그릇된 악으로 우리를 내몰아 버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말씀은 세상 살기 참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태오 복음의 오늘 복음과 같은 장인 5장의 앞부분이 말하고 있는 바, 즉 '참된 행복의 선언'이라 표현되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 먼저 언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늘나라와 연결되는 삶 안에서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늘 나라, 즉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이 지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성서의 다른 구절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지상의 삶'의 눈으로만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오늘의 복음말씀은 바로 '하늘나라의 삶'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한 없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바로 '미움은 미움을 계속 낳지만, 사랑은 사랑을 계속 낳는다'는 참으로 확실한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자세를 통해 하늘 나라가 바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우리 함께 희망해 봅시다.
남에게 먼저 그렇게 살으라고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내가 먼저 그렇게 한번 살아 보도록 합시다. 제한 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할 때, 오늘의 복음말씀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실감하며 참된 행복을 이 지상에서부터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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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폐기되는 '탈리오' 법>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3-25;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치는 소위 동해형법(同害刑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모든 종류의 형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의 장치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다.(신명 32,39-43; 집회 28,1; 이사 35,4; 예레 46,10; 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탈리오(talio)"는 "이러한,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의 법전에서 발견된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앗시리아와 그리스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문화권에서는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되고 국가에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응보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리오법은 언뜻 보기에 적용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악(惡)을 선(善)으로 되 갚으라고 하신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것이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악(惡)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이 예수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악은 분명히 악이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이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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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5,39)
참으로 우리가 문학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로 오늘 복음에 관한 일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딸을 죽인 유괴범을 찾아내 잔혹하게 살해하는 영화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제가 당사자라면, 아 주님은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자식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를 가한 자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내재 된 복수 심리를 고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딸의 유괴범을 살해한 아버지를 선뜻 판단할 수 없게 하고, 일정 부분 동조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동시대의 일반적 형태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제한된 복수마저 예수님은 폐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원한도 보복도 없는 새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원수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5,38~42) 이 가르침의 방점은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시며, 새로운 삶의 자세를 제시합니다. 손바닥을 마주친다면 그와 더 나을 게 무엇이냐는 말씀이겠고, 또 그렇게 악인에게 악으로 맞선다고 한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신중하라, 는 말씀 같습니다. 물론 주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원수와 같았던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23,34)라고 기도하시며, 당신 말씀하신 용서를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뜻은 비겁하게 도망치라는 의미보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폭력으로 맞서 저항하지 말고 보복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2코6,5.7)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또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12,19) 또한 구약의 잠언에 보면 “ ‘내가 악을 되갚겠다.’ 하지 말고 주님께 바라라. 그분께서 너를 도와주신다.”(20,22),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25,21-22) 결국 우리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 그리고 사실 복수는 더 커다란 복수를 가져오기에, 악인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 모릅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게 인간의 일반적인 심정이고 정서이지만 그런 방법은 참된 해결이 아닌 악순환으로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할 수 있기에 공정하신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고 신앙인의 경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정의는 승리합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보복과 복수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를 기다리면서 정의의 하느님께 복수를 맡겨두고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시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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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꼬마 아이와 큰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어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이가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어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바보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자가 정색하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스승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렇다. 네 말도 맞다.”
어쩌면 자기를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진리를 향하는 방법인 바보들과 다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설득해 봐야 무의미한 논쟁이고 이를 얼른 끝내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 동의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논쟁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당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것이 가장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더 큰 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니 그보다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넓은 마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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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는 가짜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땅에서 하늘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군주처럼 남을 지배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철저히 섬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질서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습니다. 뿌린 씨가 잘 자라려면 씨 자체가 자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뿌려진 땅이 비옥해야 합니다. 비와 햇빛도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튼실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될 때 선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으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심지도 않고 수확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 투자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신앙생활, 편안한 방법으로 영적성장을 기대하거나 하느님을 체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일한 신앙생활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더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고 기쁨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겨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의 겨자씨가 되어 주위에서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내 주위의 누구도 그 품에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가장으로, 부모로, 자녀로서, 스승으로, 제자로, 각자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힘들고 지친 사람들, 여러 이유로 외롭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 씨앗이 아주 작다 하더라도 잘 가꾸어 그 말씀이 나를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 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나무 되어 모든이의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때를 기다리며 인내로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힘을 얻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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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스스로>
마태오 5,38-42 (폭력을 포기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나 스스로>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아무도 나를
물들이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에게
스미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군림하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빼앗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에게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짓밟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떠받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없이 하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죽이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위해
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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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폭력을 포기하라>
“악에 대한 승리의 비결은 주님과의 일치뿐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경계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다산>
“남용이 ‘백규’ 구절을 날마다 세 번씩 외우자,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논어>
저절로 참삶이 아니라 한결같은 노력으로 이뤄지는 참삶임을 깨닫습니다. 험하고 거친 인생 광야 여정, 성인이 되기보다는 악마가, 괴물이, 폐인이 될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참 중요한 일이 참사람이 되는 일이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요, 이를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훈련에 온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구체적으로 진리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를 뜻합니다. 어느 피정온 자매가 밤에 보내온 메시지와 이에 대한 답글입니다.
“우울증으로 방황하다 계단에서 넘어져 1년반 정도 의식잃고 병원생활하다 6월8일 별세한 친구입니다. 구원은총 청하며 피정기간에 연미사봉헌합니다.”
“예, 그렇게 연미사 봉헌합니다. 너무 불쌍하네요.”
벙사, 사고사, 객사, 자살자등 불쌍하게 살다가 불쌍하게 세상 떠난 이들이 곳곳에 너무 많습니다. 유비무환이 답입니다. 살아 있을 때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그리고 영혼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끝으로 성모님께 바친 전구입니다.
“당신 안에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도록 만드시고 환영하신 분, 동정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 역시 복음의 너그럽고 충실한 씨뿌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사랑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5 대당명제인 “폭력을 포기하라.”입니다. 200주년 주석성경은 “보복하지 말라.”입니다.
보복은 물론 일체의 폭력을 배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격성, 잔인성, 폭력성, 배타성을 꿰뚫어 통찰한 예수님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괴물을 순하게 길들이는 일 역시 평생 수행의 목표가 됩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군더더기 설명이 불요할 정도로 자명하게 공감하는 예수님 복음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완전히 압도하며 능가하는 의로움의 실체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1.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2.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져 돌려 대어라.
3.또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5.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우리 내면의 상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괴물을 순치할 수 있는 평생과제입니다. 결코 무저항주의자로, 겁보로 비겁한 자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 사랑의 저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일일이 악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악의 박멸이 아니라 아예 악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예방이 제일입니다. 이렇게 인간 탐욕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악은 제어할 수 없습니다. 건드릴수록 강해지는 악이요 결코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악에 대한 처방은 선善이 아니라 성聖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삶뿐입니다.
무지의 악이요 악의 신비입니다. 발본색원할 수 없는 악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성공한 적도 없고, 피흘리는 혁명이 성공한 적도 없습니다.
세계나 국내현실을 보세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악의 세력이 약화되기는커녕 날로 강해지는 느낌입니다. 교황님의 평화를 위한 기도 요청입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단, 미암마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위해우리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자.”
무엇보다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전쟁의 참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악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의 자발적 실천 뿐입니다.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방법이요 악을 무장해제 시켜 무력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이 권한 사랑의 저항은 내적 힘의 반영이요 존엄성의 발휘입니다. 무력으로 악마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힘, 내적 사랑의 힘으로 악마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래서 말씀과 기도의 수행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져가는 일치의 삶이 우선입니다. 폭력이, 보복이 일순간 통쾌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선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폭력이요 보복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듯 하나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의 악의 괴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진리의 실천으로 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거룩하게 합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만이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 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 장면을 보세요.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농간으로 유약하고 탐욕만 가득한 아합은 중심을 잃고 무죄한 나봇을 합법을 가장하여 감쪽같이 죽이고 나봇의 땅을 제땅으로 만듭니다.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악행을 태연히 감행할 수 있는 아합이요 이제벨인지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또 현재의 세상에서도 반복되는 악의 현실을 체험합니다. 잔인무도하고 사악한 이들이 여전히 활개치는 현실입니다.
악과의 영적전쟁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아합왕과 왕의 아내 악녀 이제벨에 의한 나봇의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은 다윗에 의해 죽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들뿐 아니라 인류역사상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어나간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보상될 수 있을는지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악의 화신같은 아합과 이제벨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같은 이름이요, 회개와 더불어 영적 분발을 촉구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모두 악과의 전쟁에서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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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26.31ㄱ)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르4,26-34)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나라'이며, '이미와 아직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가치와 내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땀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비록 미미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 마지막 때에는 큰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아 보일지라도 엄청난 가능성이 숨어 있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결코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겨자씨의 비유)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곧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입니다.
내 마음의 창고 안에 성령을 채웁시다! 성령을 채우기 위해,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는 모든 신앙행위(미사.기도 등등)에 온 정성을 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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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JE97bbTkq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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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일일이
악인에 반응하는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오랫동안
악인에게
맞서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맞섦과 반응의
연속이었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맞서다 묶이게
되고
맞서다
더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악인에게 맞서다
악인을 닮아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맞서는 방법을
버린 후에야
다른 길을
찾게됩니다.
악인이 만들어
놓은 덫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이 상황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입니다.
의탁의 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골몰하고
집중해야 할
대상은 악인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악인을
맡겨드립니다.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악인에게
반응하는
우리의 힘이
멈춰야 평화가
옵니다.
악인은
하느님의 빛 앞에
모두 드러날 것이며
어둠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믿음은 의탁이며
악인에 맞서지 않는
멈춤입니다.
악인은
하느님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맞서지 않을 때
사라지는
악인의 속성입니다.
새롭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의탁의 멋진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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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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