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상업고등학교3학년
보통 여상3학년 2학기엔 실습을 나가야 정상이고 교실에 남아 있으면
모자란 애 취급을 받았어요. 그 때만해도 용모단정 뭐 그런게 우선이던
시절이었고 자필이력서 글씨만 예뻐도 좋은 점수를 받고 이력서에 붙은
사진의 얼굴이 반반해도 취직하기 좋은 시절.
얼굴 반반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은행으로 대 기업으로 학교 추천으로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해서 나가고 그렇지 못한 애들은 교실에 남아서
수업을 받고...우리반 반장은 공부는 잘해도 인물이 못나서 취업이
끝까지 안되던 그러던 시절이었어요.
상과 공부는 잘 하지 못하고 국어 한문 같은 과목을 잘하는 나는
우리집 맞은 편 2층집 아저씨가 사무장으로 일하시는 사법서사
(현, 법무사) 현*일 사무소가 있는 서소문 중앙일보사 옆 빌딩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했습니다.
그곳은 주산 부기 자격증 보다는 타자를 잘치고 한문을 많이 알면
되었으니까 내가 일하기엔 아주 적합한 곳이었지요.
1980년 가을,
세상에 처음 발을 내 딛는 나는 두려운 것 투성이었고
교복외엔 사복이 있을 리 없던 내가 브라우스를 입고
교복치마 아닌 양장 스커트를 입고. 몸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한 그런 모습이고 신발은 또 어떤가?
그 당시 캐주얼화는 무조건 랜드로바(금강제화 브랜드 명)
라고 불리웠으나 난 이름도 없는 벽돌색 랜드로바를 신고 출근을 했다.
검정색 국제스타킹만 신던 내가 남영나이론의 커피색가락스(여자라면 안다)
스타킹을 신고 그 스타킹은 요즘의 것과 달리 비싸기만 하고 올은 어찌나 잘 나가는지...
초보 여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서울 시내의 등기소를 돌며 서류를 발급받아 오는 단순업무였고
발급 받아온 서류에서 살아있는 등기가 뭔지 볼 줄 알면되고
그 많은 한문을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사무실에는 사법서사와 사무장님외에 나를 포함한 3명의여사원이 있었고
그중 제일 나이 많은 왕언니는 사무장이랑 가끔 반말로 맞먹는 서른은 되어
보였으며 그 선배는 타자는 엄청 잘쳤으나 한문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명동에서 맞춰 입었다는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다녔으며 다른 선배의 말에
의하면 그 선배는 사법서사 사무실에서 잔뼈가 굵어서 사무장을 찜 쪄먹을
실력을 가진 중졸이라고.
1980년대의 법원에서 일에 관련한 등본을 발급받는데 지금처럼 전산화가
된것도 아니고 서류를 찾아서 복사기로 일일이 복사를 해서 스태플러로
찍어서 법원의 표시를 서류에 구멍을 뚫어서 주는 방식이었으며
법원에서 복사하시는 분의 대부분은 팔에 토시를 끼고 계셨다.
어느 날
원고만 보고 타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엄청난 스피드로 타자하는 왕언니가
등본을 발급 받아 오라고 주소와 500원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급행료”이니까 빨리해와~ (당시 등본 발급료가 한 통에 50원으로 기억함)
그래서 난 서소문 법원으로 갔고
서류를 신청하고 500원을 내고 기다렸는데도
한 참을 기다려도 신청한 서류가 나오지 않기에
접수 받은 아저씨(공무원)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급행료 까지 냈는데 왜 안나 오나요? ”....아주 큰 소리로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본인이 일하는 쪽 그 쪽으로
들어오란다...그래서 들어갔더니
마구 화를 내신다.
어느 사무실에서 왔느냐하면서...
난 그때 까지도 그 아저씨가 화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더 기다렸어야 했나?....“급행료 내면 빨리 해준다 했는데요..빨리 안나와서...”
그 아저씨가 구체적으로 나에게 뭐라고 나무랐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급행료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서야 느낌으로 알 수 있었으며
내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저씨는 또 얼마나 당황했을까?
아저씨 보기에도 고3 실습나온 애처럼 보이는 아이의 말에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난 그날로
사법서사 사무실을 그만뒀다.
엄마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고
월급도 많이 주고 하는데...하며 섭섭해 하셨지만
15일 근무한 월급 75,000원을 받고
서랍에 있는 옥편과 볼펜을 챙겨서 집으로 왔다.
(그 당시 은행초봉이 8만5천원인가 했다는 소릴 들었으니
내 월급은 엄청 많은 거였다)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로 돌아 간다는게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계속 일하면서 때때로 급행료를 내면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 싶어서 주저함이 없었다.
일시키는 왕언니가
그 급행료 라는게 그런용도라는 것 만 가르쳐 줬어도
그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을 세세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공무원이 급행료를 챙기면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온 사람의
서류를 먼저 발급해 준다는 것도 그 나이의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세상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살아지는 곳이 아니었다.
그 짧은 기간 에도 내가 닮고 싶은 한 아주머니도 봤다
어느 날 동대문 등기소에서 발급신청서를 작성하시는 50대 아주머니
셨는데 그 아주머니가 작성하신 신청서에 쓴 글씨가 어찌나 멋지던지
나도 저 나이쯤엔 저렇게 글씨를 멋지게 써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다.
지금 그래서 글씨를 잘 쓰느냐?
그 아주머니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의 글씨체나마 유지하고 있다 싶다.
난 아직도 내가 첫 실습을 나갔던 그 계절이 되면
처음 들어가봤던 서울역앞 대우빌딩도 생각나고
쳐다보기만한 중앙일보사 빌딩도 생각난다.
가을 바람에 낙엽이 날아다니던 그 쓸쓸한 서소문 거리에서
보잘 것 없이 작고 초라한 갈래머리 여고3년생의
첫 세상 경험은 짧게 끝이 났지만
세상에서 받은 그 무서운 상처는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저씨 얼굴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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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대법원인터넷 등기소 http://www.iros.go.kr/
에서 인감증명서를 제외한 모든 서류가 등기소에 방문하지 않고도
발급되고 있음을 참고로 알려 드립니다.
헉.,..내 친구
술 먹고 무단횡단 한거 우째 알았을꼬.
내 동창이자 참 좋아하던 친구놈도 작년에 술 먹고 넘어져 죽었습니다....나쁜 놈!!
커피님이 계속 그 일을 했으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ㅎㅎㅎ
사무장을 하거나
사무장을 찜쪄먹었을
겁니다 ^^*
급행료 땜에 망했네요..ㅎ
한양에서 잘 나가시다가
지금은 오데로 가서
무었을 하시 나이까??
여기도 한양이라고
하는것 같은디유~
네..
오토바이
필요 없겠네요..ㅎ
자전거로 커피
2잔만..(1잔은 북님 꺼 ..) 배달 와요..ㅎ
커피배달 함흥차사......
배때지 (죄송)기름끼가 끼어서..........ㅎ
원동기도
아무나 안 된다는
바퀴 공포증 ...
자전거도 무섭기는 마찬가지 라는...
년식이 좀
되신 모양...ㅎ
님의 연식보다는...
그래도 좀 덜 되었다는...ㅋ ㅋ ㅋ
울 집사람 내가
부황으로 어혈을 빼서
피부가 맨들 맨들....ㅎ
사회 초년생 에피소드...ㅋㅋㅋ
이글 그대로 사연 보내면, 당첨될듯 싶습니다 ^^
정말요?...그럼 함 보내볼까요?
그런데 어디로 보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