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로 잡혀간 스데반
행 6:8-15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8-15 / [체포당한 스데반]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베풀고 있었다. 9) 어느 날이었다. `자유인의 회당' 사람들과 구레네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지방과 아시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논쟁을 걸어왔다. 10) 그러나 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내지 못하자 11)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모세를 저주하고 하나님까지 모독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다. 12) 격분한 군중들이 스데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유대인 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과 함께 스데반을 붙잡아 의회로 끌고 갔다. 13) 거짓 증인들은 계속하여 스데반이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는 말만 한다고 떠들어댔다. 14) 그들이 소리쳤다.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어 버리고 모세의 율법도 모조리 없애 버릴 것이라고 이 사람이 장담하는 것을 우리는 들었소.' 15) 그러자 의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스데반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의 논증을 이기지 못한 자유민들과 구레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들이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해 스데반을 공회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8-9) 스데반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데반과 신학적 논쟁을 벌인 자들은 소위 ‘자유민들’의 회당에 출석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헬라파 지도자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자 스데반을 고발하였던 그들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10-14) 스데반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친 박해의 시초가 되는 사건입니다. 스데반과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기와 분노를 가지게 된 그들은 예수를 거짓 고소하던 증인들처럼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합니다. 스데반을 대적하는 자들이 고발했던 죄목은 크게 두 가지, 곧 율법과 성전에 대한 모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모습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이 묘사는 당시 문헌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된 표현으로서, 스데반을 다시 한번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책의 저자인 누가는 제자들이 성령의 도움과 지혜를 구하면 도와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눅 12:12; 21:15). 누가는 이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말합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에 관한 약속이 제자들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을 강조하고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히브리서 11장 38절의 말씀처럼(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성경 속에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움과 지혜로 무장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에도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복음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교회와 성도가 사회로부터 공공의 적이 되는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세상과의 논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기업체의 휴게실에서, 퇴근 후의 회식 자리에서, 오랜만의 동창회에서 그리스도를 뜻하는 기독교의 이름은 앞 글자가 바뀐 너무나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악하고 이성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라면 스데반처럼 지혜와 성령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인격의 은사
이정익 목사
은혜를 “카리스”(Karis)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나타내는 헬라어 접미사로 끝에 “마“를 붙여서 ”카리스마“(Karisma) 하면 은사라는 말이 됩니다. 은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주시는 선물이라면 은사는 사역을 효과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이루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 은사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은사에는 능력의 은사가 있고 사역의 은사가 있고 인격의 은사도 있습니다. 인격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지혜의 은사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니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로부터 전도하는 길에서 많은 핍박과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스데반은 지혜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지혜로운 대답은 성령이 함께 하신 지혜의 대답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지혜를 누가 당할 수 있습니까. 전도자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전도를 하면서 얼마나 대담하게 예수님의 일대기를 전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까지 자신 있게 전합니다. 그러니까 반론은커녕 수만 명씩 회개하고 결신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언변 때문이 아닙니다. 그날 베드로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고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땅이 주는 지혜가 있고 성령이 주는 지혜가 있습니다. 땅이 주는 지혜는 꾀에 불과하고 술수에 가까운 지혜입니다. 얄팍한 재주에 불과한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주는 지혜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극히 제한된 지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주는 지혜와 성령이 주는 지혜는 살리는 지혜이고 덕을 쌓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아이를 엎고 온 두 여인을 재판할 때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그 판결은 너무나 절묘한 지혜에서 나온 판결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솔로몬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가 하늘로부터 온 지혜였고 성령이 주신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그런 재판이 또 나옵니다. 몸이 하나이고 머리가 둘인 기형아가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이 이 아이가 한사람이냐 두 사람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 문제를 가지고 랍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랍비가 대답합니다. “막대기로 그 아이의 머리를 때려 보라, 아이 둘 다 아파하면 한 사람이고 한 아이는 울고 또 한 아이는 웃고 있다면 두 사람이다“. 이것이 하늘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 대답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고 이유가 없습니다.
고전14장20절에서는 “지혜에는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 12장8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엡1장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마10장16절)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힘으로 이기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로 이기고 시험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에서 지혜로워야 하고 그 지혜로 인정받고 살아가고 하나님께 영광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그 지혜의 힘으로 가는 곳 마다 승리하게 전도하였습니다. 그 지혜는 성령이 주시는 은혜이고 자본이고 힘입니다. 그래서 은사 중에 지혜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 지혜의 은사는 인격의 은사입니다.
지식의 은사
고전12장8절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숨겨진 진리를 발견해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은 분명 지식의 은사입니다. 신학자들을 보면 이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발견한 진리를 세상에 알려 줍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알고 분별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나 연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위로부터 주어진 지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지식도 있습니다. 그 지식은 아래로부터 주어진 지식(야3장15절)입니다. 오늘은 지식을 만용스럽게 사용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들이 너무 드라이 합니다. 너무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지식인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그 글 속에는 영감이 없습니다. 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읽은 후에는 허무만 남습니다. 읽을수록 정신이 더 메말라집니다. 책이라고 해서 다 양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책들도 많습니다. 세계적인 지식인들은 지식을 자랑하다가 스스로 무신론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유신론자가 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무신론자의 말을 하고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글을 쓰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지성인이라고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 지식이 모두 아래로부터 주어진 지식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지식에는 생명을 살리는 영감이 들어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위로부터 주어진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 글속에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힘이 들어있고 삶을 회복시키는 힘과 생명을 부여하는 지식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위로부터 성령이 주시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라고 함부로 사용하거나 자랑하면 안 됩니다. 지식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힘과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도 하늘이 주는 지식이 있고 땅이 주는 지식도 있습니다. 사람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살려내는 힘을 가진 지식은 그 지식이 사용될 때 값을 발휘하게 되고 힘을 발휘하게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에도 세상을 변화시키고 갱신시키는 생명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생명력을 지닌 지식이 성령이 주시는 지식의 은사인 것입니다.
긍휼의 은사
롬12장8절을 보면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긍휼 즉 Eleos는 동정심이 특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죄를 짓되 수없이 지어도 언제나 찾아오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위로하는 마음, 중보 하는 마음이 모두 성령이 주시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긍휼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중보기도 하는 마음도 긍휼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기도하는 그 마음도 긍휼의 마음입니다. 어떤 문제나 고통을 지닌 사람에게 뜨거운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도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또한 자비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곧 자비를 말합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은 유일하게 자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은 사람이 베푼 자비를 말합니다.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환란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무력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 노약자를 돌보려는 마음이 모두 성령이 주시는 자비의 마음이고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눈에 눈물이 있습니다. 언제나 마음과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 사람은 TV 연속극만 보아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TV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 마음에 이 긍휼의 마음이 충만합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십시오. 남 몰래 흘리지 말고 창피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펑펑 흘리십시오. 할 수 있으면 통곡이라도 하면서 흘려보십시오. 그 마음에 얼마나 긍휼의 마음이 풍성하면 눈물을 펑펑 흘리고 통곡하면서 보겠습니까. 그런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좇아가서 돕고 함께 하고 나눕니다. 긍휼의 은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 마음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은사가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우선 귀찮아집니다. 그래서 피하게 됩니다.
TV를 볼 때 눈물은커녕 저건 감독이 시킨 거야 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웃으면서 앉아 시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삭막하고 메마르면 그런 모습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은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은사로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권면의 은사
롬12장8절을 보면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위로하는 일도 은사입니다. 어떤 분은 위로를 참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로자, 격려자, 조언자, 베푸는 능력은 모두 권면의 은사입니다.
직분 중에 권사라는 직분이 있는데 그 직분은 위로하고 권면하는 직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직분 중에 유독 권사라는 말만 없습니다. 굳이 근거를 찾는다면 롬12장8절 “위로하는 자”라는 용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권사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권사는 나이가 연륜이 있어야 하고 신앙의 연륜도 있고 덕망이 있는 분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권면하고 위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면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젊은 부부들이 부부 싸움을 하고 사네 안사네 하고 야단을 떠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참 철없는 부부들입니다. 성격이 안 맞아 못 살겠다고 말 합니다. 그것은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부부는 마음에 맞아서 산다고 말했습니까.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쌍둥이도 내가 낳은 자식과도 마음이 맞지 않는데 남남끼리 만나 살아가는데 마음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부부는 마음이 맞아서 사는 관계가 아니고 맞추어 가며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오늘 부부들은 서로를 맞추려고 노력하거나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젊은 부부들 사이에 불행스러운 일들이 자꾸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로를 깊이 알고 차이나는 성격을 맞추어가기 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부부사이에 할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었었습니다. 남편은 바깥사람이기 때문에 바깥일을 전담하였습니다. 아내는 안사람이라고 해서 집안의 일을 전담하였습니다.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돌이 비교적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업무가 혼동되고 구분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이 오늘 부부사이에 충돌이 더 심해진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 갈등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권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또 시부모와의 갈등이 많습니다. 이 관계는 운명적인 관계입니다. 고정된 문화를 가진 한 가정에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새 사람이 들어오면 충돌은 불가피 합니다. 그 가정의 문화를 익히기 까지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유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시부모는 자기 문화에 순종하도록 성급하게 강요합니다. 오늘 새 세대 며느리들이 이를 순순히 따르며 순종할 리가 없습니다. 이 시부모와의 관계는 이렇게 운명적인 관계인데다 강요까지 주어지니까 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네 안사네 하고 갈등이 극에 달해 마침내 이혼직전까지 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격려 자가 필요하고 권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신앙의 갈등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앙심이 얕아서 체험이 없어서 매사 흔들리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 찾아가 신앙의 삶을 말하고 영적 체험의 삶을 설명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가까이 가서 설명하고 격려하고 영적인 권면이 이루어지게 되면 훨씬 문제들을 직시하게 되고 해결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 권면이 필요해서 세워진 직분이 권사라는 직분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권면과 격려와 안내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심한 사울이 얼마나 갈등하고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때 그는 어떻게 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것들과 너무 다른 길을 발견하고 나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바나바가 찾아갔습니다. 가서 그를 격려하고 안내해주고 갈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사울이 그토록 반대하고 핍박하였던 사도들과의 만남에 사울은 상당히 주저하였을 것입니다. 사도들 역시 사울과의 만남이 반가웠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를 좁혀주고 해결해 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나바를 대표적인 안내와 권면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런 은사 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가정에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이런 은사를 가진 분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은사 자에게는 늘 사랑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늘 격려를 받게 됩니다. 신앙의 삶은 은사를 받아서 활용하는 삶입니다. 은사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지혜의 은사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 반대자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 하였다”고 했습니다. 지혜의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스데반은 그 지혜로 당당하게 신앙을 간증하고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부활의 예수를 전하며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하였습니다. 그리니까 사람들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듣고 누구도 능히 당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주는 지혜를 누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은사의 삶입니다. 성령께서 이런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그 은사를 통해서 사역을 감다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은사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이렇게 자신 있게 살아가며 사역하도록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고 은혜이고 은사입니다.
체포당한 스데반 집사
김영규 목사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하지 못하여,(8-10)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1-14)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6:8-15)
스데반 집사의 활약
본문에서부터 7장까지는 스데반 집사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앞서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데반은 사도들의 직무를 덜어주기 위해 교인들이 뽑은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입니다. 평신도 일군입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을 보면 사도들 못지않습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 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역사에서 아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의 방향을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 받은 교회는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바로 이 구분에 의해서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장에서 12장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보면 유대 땅에서의 복음 전파입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가이사랴까지. 이 부분의 주된 사역자들은 12사도들이며 그 중심인물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둘째 부분은 13장에서 28장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이방에서의 복음 전파입니다. 안디옥에서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아가야, 로마까지. 이 부분의 중심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사도행전의 전반부에 속해 있습니다. 크게 보면 베드로 사도가 중심이 된 12사도의 사역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다시 분석해 보면 1장에서 5장까지는 베드로 중심의 사역 장면입니다. 6장, 7장, 8장은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의 활동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은 사도 바울의 회개 장면이고, 10장과 11장은 베드로에 의해서 최초의 이방인 고넬료를 전도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보면 6장, 7장, 8장은 그 중심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의 담당자는 사도가 아니라 집사들입니다. 스데반은 교회사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유대인 혈통의 한계지점인 사마리아까지 복음을 확장시킵니다. 그 사역 이후에 복음은 이방으로 향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지역에 스데반과 빌립이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이방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평신도입니다. 사도들과는 다른 경로로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역은 사도들 못지않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활동은 단순이 재정 담당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신유의 능력을 행하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 모든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박해자들에게 대항하여 당당히 복음을 변론하는 변호인이 된 일입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단 한 편의 설교를 하고 그 설교 때문에 돌에 맞아 순교 당했습니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중요한 시점에 사도가 아닌 평신도 집사가 앞장서서 공회에서 설교를 하고 순교까지 당했을까? 어떤 주석가는 반대자들이 사도들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꺼려해서 집사를 잡아 들였다고 합니다. 다른 주석가는 스데반이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일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스데반의 활약은 최초의 교회가 어떻게 박해를 극복하고, 세계의 교회로 발돋움 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활동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박해자들에게 대항했는지 배워야 합니다.
박해의 주동자 헬라파 유대인들
스데반이 당한 박해의 주동자들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이 누구인지는 지난주에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박해자들의 출신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자유민이란 별명이 붙은 유대인들,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BC63년 폼페이에 의해 로마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의 후손들이란 설이 유력합니다. 이 당시 약 4000여명의 자유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에는 자유민이라고 했는데, 종전의 개역 한글판에는 “리버디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Liberti'no"”이며, 라틴어로는 libertinus이고 그 의미는 자유인이란 뜻입니다.
사도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들이 모이는 회당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이들의 출신지가 네 곳입니다. 첫째는 구레네인데 지금의 리비아입니다. 둘째는 알렉산드리라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도시로, 이집트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한 때는 유대인 인구가 전체 도시의 5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최초로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길리기아입니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남부 지중해에 연한 지역입니다. 길리기아는 바울 사도의 고향입니다. 아마 여기에도 유대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넷째는 아시아인데, 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으로 에베소를 중심한 지역입니다. 이들이 다 한 회당에 모이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다섯 곳의 회당에 모이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약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출신지별로 각기 다른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헬라파 유대인들이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을까? 그 이유는 정치적입니다. 아마 이들은 율법적인 논란보다, 기독교에 의해서 유대인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유대인들이지만 보다 더 경건한 정통적인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신중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앞서 보신 대로 가말리엘이 그 대표자입니다.(행5:34)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는 한 가지만 다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가말리엘은 이점에 있어서 매우 신중합니다. 예수가 메시야인지 시간을 두고 보자!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런 신중함이 없습니다. 과격합니다. 성경이나 교리적인 관찰은 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인 입장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순수한 종교인은 살인하지 않습니다. 항상 정치적인 종교인이 종교를 빙자하여 살인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나, 사도 바울을 박해한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많은 시간을 유대인 회당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회당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마4:23,12:9,13:54, 막1:21,39, 3:1,5:22,6:2, 눅4:15,16,20,33,44,6:6,13:10, 요6:59,18:20) 그러나 율법적인 바리새인들과는 안식일 논쟁과 같은 교리적 논쟁을 하셨을 뿐입니다. 정작 예수님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못 박아 죽인 세력은 주로 사두개파, 헤롯, 빌라도와 같은 정치적 집단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방 선교를 하면서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를 했습니다.(행9:20,13:5,14,14:1, 17:1,10,17, 18:4, 19,26,19:8) 그럴 때마다 바울을 박해한 사람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아니라 주로 정치적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때로는 붙잡아 때리고, 가두고,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은, 교리적인 문제보다는 이런 정치적인 동기가 더 강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를 박해하는 이면에는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큽니다. 우리는 이러한 박해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박해자들의 2단계 전략
박해자들은 두 단계의 전략을 사용합니다. 첫 단계는 논쟁입니다. 반대자들은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했습니다.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9) 논쟁의 주제는 아마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냐 하는 문제였을 겁니다. 이 논쟁에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첫째는 구약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해석을 유대인들이 당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능력에 앞도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하지 못하여”(10)
그러나 이 논쟁에 졌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습니다. 논쟁의 약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겼다고 해도 별 소득이 없습니다. 특히 복음 전파에서 논쟁은 백해무익합니다. 논쟁은 마귀의 수법입니다.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 SBS 방송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이상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영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신앙을 폄하하고 이슬람교를 선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2000년 간 믿어 온 종교요, 현재에서 수십억의 인류가 믿고 있는 신앙의 도리를 난도질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어디서 신앙 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만 교묘하게 인터뷰해서 만든 의도된 작품입니다. 이런 천박한 방송과는 논쟁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논쟁을 만들어 세인의 관심을 끌려는 전략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한 대응입니다. 앞으로 이런 방송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마세요. 저는 앞으로 이 방송을 안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다 안 보면 그만입니다.
개인전도 역시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논쟁 때문에 시간과 힘을 빼앗깁니다. 논쟁하려는 의도가 믿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에 이긴다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논쟁에 진 사람이 예수 믿는 것 봤습니까? 졌으니까 기분 나빠서 안 믿어요. 논쟁은 마귀의 수법입니다. 마귀는 가만히 있는 하와에게 찾아와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뻔한 얘기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결국은 마귀의 작전에 하와가 휘말렸습니다. 마귀는 멀쩡한 욥을 놓고 하나님과 논쟁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논쟁을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요즘 사회적인 이슈들을 놓고 논쟁이 치열합니다.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는 일방적인 논쟁이 대부분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쟁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논쟁이기 때문에 결과가 없습니다. 말은 많은데, 열매가 없는 논쟁이 오늘날 세상에 가득합니다.
둘째 단계는 거짓과 폭력입니다. 논쟁에 졌을 때 박해자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한 방법으로 대항해 왔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하지 못하여,(10)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득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1-14)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님을 판 것처럼 거짓 증인들이 돈에 진리를 팔았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언으로 스데반이 체포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스데반을 체포했습니다. 공회를 열어 정치 재판을 했습니다. 거짓 증인들로 거짓 증언을 하게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율법을 고치겠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의 죄목과 똑같습니다. 성전 모독죄와 율법 모독죄! 예수님이 말씀한 성전은 부활하실 자기 육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율법 부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거나 없애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죽이기 위해!
목적이 정해진 폭력입니다.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캄보디아에서, 현재의 북한에서. 지금 우리가 받는 도전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를 향한 악의적인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 교회가 끼쳐 온 선량한 역할들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리고 오직 헐뜯고 폄하하는 데만 열심을 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전략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면이나, 실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의 부족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처럼, 부족한 것을 바로잡아 가십니다. 징계를 하시든지, 연단을 하시든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수단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아무튼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처럼 사단의 계획적인 공격을 이겨야만 합니다. 세상의 도전을 이기는 교회, 그 선봉에 서 있는 정윤 가족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대결이 갖는 역사적 의미
스데반 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복음이 유대교와 충돌하고, 그 장벽을 넘어섰다는 점입니다. 유대교는 성경의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메시야가 왔을 때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메시야 없는 율법의 종교로 남아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나타나야 됩니다. 그리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거부하는 유대교와 메시야를 인정하는 기독교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유대교를 넘어서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전 인류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사건은 바로 이런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몇 단계의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첫 단계는 앞서 말씀드린 유대교의 장벽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고, 야고보 사도는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에서 가르쳤고, 또한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을 향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8-10)
두 번째로 부딪친 장벽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입니다. 로마 황제들은 약 300년 가까이 집요하게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네로 황제는(AD64), 로마 시에 불을 지르고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그리스도인을 산채로 태워 자기 정원을 밝혔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사도 역시 이 시기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도미시안 황제는(90-96),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황제숭배 거부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로마의 클레멘트가 순교하고, 사도 요한 밧모 섬에 유배 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트라얀 황제는(98-117), 기독교인을 애국심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그나시우스를 비롯한 다수의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161-180), 기독교에 반대하며 자연재해의 책임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져스틴이 이 시기에 순교했습니다.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는(202-211),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레니우스가 순교했습니다. 막시미누스 황제는(235-236), 기독교 성직자를 처형시키도록 했습니다. 히폴리투스가 순교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는(249-251), 박해를 로마제국 전체로 확대시켰습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기독교 척결하라고 했습니다. 발레리안 황제는(257-260),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집회권을 박탈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리겐, 키프리안 이 순교했습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는(303-311), 로마 시대 최후 최악의 박해자였습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성경을 불태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권리 유보시키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황제들의 집요한 박해를 이겼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참수를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돌에 맞아 죽고, 사자 밥이 되고,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무려 300여 년을 지하 동굴에 살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최악의 박해자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가 끝나고, 드디어 콘스탄틴 황제 시대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드디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 나아가서 세계의 종교가 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고비마다 교회는 박해의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새로운 장벽이 생겼습니다. 불신 언론의 장벽, 다원주의 문화의 장벽, 악랄한 선동자들의 장벽 등등.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은 만들어 내는 것은 마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최선봉에 서 있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에는 중립 지대가 없습니다.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처럼 용기 있게 도전의 장벽을 넘어서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영광의 빛으로 가득했다
복음을 들고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선 스데반입니다. 그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박해자들 앞에 서 있는 스데반, 순교를 앞둔 스데반,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얼굴은 돼지기름이 줄줄 흐르는데, 영적 투쟁력은 없는 무기력한 모습은 아닌가요? 스데반처럼 평신도지만 사도 이상으로 능력을 가진 성도가 되세요. 복음을 들고 민족의 장벽을 뛰어 넘는 전도자가 되세요. 매 순간 하늘의 예수님을 목격하는 영안이 열린 자가 되세요.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그런 스데반에게 하나님은 천사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천사의 얼굴로 사는 비결
양인순 목사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얼굴>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심봉석 작시, 신귀복 작곡의 노래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 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는 얼굴
언제 들어도 어린 시절의 애틋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입니다. 여러분 가슴 속에 동그라미만 그려도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있는지요?
서양에서는 얼굴이란 단어를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널빤지’란 뜻의 라틴어 ‘파키에스(facies)’에서 유래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얼굴을 단순히 모양이나 형태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얼굴을 단순히 모양새가 아닌 그 사람을 표현하는 인격으로 보았습니다.
<얼굴>에서 ‘얼’은 ‘영혼(정신)’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큰 상처나 아픔을 당하며 사람이 멍해집니다. 그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얼빠진 사람같다’ 라고 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도 ‘얼빠진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굴’은 ‘통로’‘거하는 곳’을 말합니다. 영혼이 거하는 곳, 영혼의 통로가 바로 얼굴이란 의미입니다. 얼굴에는 몇 개의 굴이 있을까요? 7개가 있습니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코, 두 개의 귀, 그리고 입입니다. 각 굴마다 그 사람을 표현하는 얼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리키는지 아세요? 이마는 얼굴에 들어갈까요? 안들어 갈까요? 네~ 이마는 얼굴이 아닌 머리에 속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얼굴은 ‘눈 코 입이 있는 머리의 앞면’을 말합니다. 해부학적으로는 미간부터 턱 끝까지를 얼굴이라고 합니다. 인류학적으로 얼굴의 모양은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뉩니다. 북방계는 넓은 이마, 작은 눈과 입술, 흰 피부,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을 가진 형태를 말합니다. 전에 한국에서는 북방계의 얼굴이 미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족집게로 머리털을 뽑아 이마를 넓히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남방계는 이마가 좁고, 눈이 크고, 짙은 눈썹과 쌍꺼풀이 있습니다. 남방계는 돈을 주고 쌍꺼풀 수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북방계인지 남방계인지 구분이 되십니까? 최근 들어서는 북방계 얼굴보다는 남방계 얼굴을 미인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북방계 33%, 남방계 23%, 나머지는 중간형에 속한다고 합니다.
얼굴에는 80개의 근육이 있는데 그 근육을 모두 사용하면 7,000가지 정도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화가 난 표정, 심술궂은 표정, 울상 짓는 표정보다는 기왕이면 이쁜 표정, 밝은 표정, 미소 짓는 표정을 지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답니다. 남녀 배심원 각각 5명에게 잘 생겼거나 예쁘게 생겼다고 평가된 죄수 그룹(A)과 못생겼거나 보기 흉하다는 평가를 받은 죄수 그룹(B)을 재판하게 했습니다. A그룹에 부과된 벌금은 평균 5041달러였고, B그룹은 10만52달러였습니다. 무려 20배의 차이가 났습니다. 물론 배심원 중 누구도 외모를 고려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외모와 겉으로 풍기는 인상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꽃미남(꽃처럼 예쁜 남자), 얼짱(얼굴이 아주 잘생긴 사람), 자연미인(얼굴을 뜯어고치지 않은 미인), 생얼(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훈남(얼굴이 못생겼지만 정이 가는 남자)…. 얼굴과 관련된 신조어들이 이 시대의 세태를 반영합니다. 얼굴의 모습이 사람을 구별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개인을 표현하는 힘과 능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을 성형하고, 외모를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풍겨나는 인격입니다. 외모는 좀 부족해도 그 사람을 통해서 들어나는 인품이 탁월하면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따릅니다. 따라서 좋은 얼굴, 좋은 표정, 좋은 인상을 풍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얼굴의 모습은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얼굴은 우리의 영혼이 거하는 집이기에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안하면 내 표정 역시 좋은 인상으로 들어납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얼굴의 표정들이 어떻습니까? 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봅니다. 물론 그러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지요. 내 시선이 특별히 오랫동안 머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무표정하다는 것입니다. 화장도 예쁘게 하고, 남자답게 생겼는데 얼굴에 표정이 없어요. 봉숭아 씨처럼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들이 많습니다. 외국에 가면 거리의 표정이 굉장히 밝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얼굴을 보면 Hi! 인사를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다 좀 아는 사람을 만나면 하이 파이브를 하고, 허깅을 하고, 펄떡펄떡 뛰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거리에서 그런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좀 나은 편입니다. 만나면 반갑다고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기쁜 표정으로 하이 파이브를 하고, 허깅을 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왕이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밝은 표정, 힘찬 표정, 감사하는 표정, 희망이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옆에 분에게 이렇게 한번 고백해 보면 어떨까요? “지금부터 내 얼굴은 당신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내 얼굴은 당신의 기쁨이 되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표정관리의 대가가 등장합니다. 이 분은 단순히 표정관리가 아닌 삶으로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얼굴로 살아야 될 것인가를 보여준 분입니다. ‘면류관’ 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스데반 집사’입니다.
15절 말씀에 보시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아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천사의 얼굴을 본적이 없기에 어떤 모습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잘 생긴 얼짱일까요? 유명한 배우 브룩 쉴즈를 보고 미인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탤런트들을 보고 미남, 혹은 잘생겼다고는 할지 몰라도 천사의 얼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에서 나오는 기쁨의 얼굴, 평화스런 얼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얼굴입니다. 오늘 스데반이 바로 천사의 얼굴을 가진 주인공입니다.
얼굴에 대한 에피소드를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은 아마 에이브라함 링컨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링컨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그가 미남이냐 추남이냐를 놓고 씨름을 한답니다. 추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링컨이 자기의 못난 외모를 감추기 위해서 구레나룻 수염을 길렀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링컨 얼굴에서 구레나룻 수염을 컴퓨터로 지워보니까 그는 굉장히 추남에 가까운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에 관한 이런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링컨이 의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합니다.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요!”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굉장한 욕입니다. 어떻게 감히 연설을 하고 있는데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고 합니까?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보시오! 내가 만약 얼굴이 두 개라면 왜 하필 이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소!” 그 한 마디에 의회에 폭소가 터졌답니다.
자신을 원숭이라고 조롱을 하고, 두 얼굴의 사람이라고 비난을 해도 링컨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머감각으로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오늘 미국 대통령 가운데 그를 지금도 가장 존경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외모가 아닌 링컨의 따뜻한 성품과 인격이 아닐까요? 비록 얼굴은 좀 부족해도 그 인격에서 풍겨 나오는 따뜻함과 평안함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링컨은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얼굴은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을 보여주는 축소판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무감동, 무감각, 무표정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정답은 천사의 얼굴입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 향 내음이 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 향기가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 기쁨과 평강의 모습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침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표정을 보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교회를 평가합니다. 비록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기쁜 얼굴, 감사의 얼굴, 희망찬 얼굴을 하고 산다면 그들 가운데 물음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스데반의 삶을 통해서 그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낼 실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처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우연히 이 땅에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세 전에 모태로부터 우리를 택정하셔서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살면 불쌍한 자입니다. 결국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한 평생을 살게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가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쫓기는 삶(driven man)이요, 또 다른 하나는 부름받은 삶(called man)입니다. 쫓기는 삶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리고 부름 받은 자의 대표적인 모습은 다윗 왕입니다.
쫓기는 삶은 어떤 삶인가? 환경을 지배하기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사울 왕은 환경적으로 보면 다윗을 쫓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쫓기는 인생을 삽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마감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적으로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쫓기는 인생을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바로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가치에 삶의 목표를 두면 그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자기가 정한 목표치에 도달하면 만족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 스스로도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권모술수를 부려야 합니다.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결국 그 얼굴에는 항상 쫓기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불안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처럼 쫓기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부름 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다윗은 실제로는 쫓겨 다닙니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삶은 평화롭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넘쳐납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그는 하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름 받은 자의 삶입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환경을 지배할 줄 아는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소명을 발견했기에 가능한 삶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역경이 몰아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이 과정을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분명한 뜻이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뛰어 넘습니다.
스데반은 부름 받은 자의 삶을 산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어렵습니다. 매일 홀로 사는 여인들을 구제하는 중책을 맡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립니다. 그는 어떤 위협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들을 향하여 당신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지적합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신성 모독죄로 붙잡힙니다.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스데반을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스데반은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보십시오. 스데반은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무고하게 자신을 정죄하고, 돌을 던지는 자들에 대해서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에 스데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천사의 얼굴로 빛이 납니다. 죽음의 자리, 중상모략의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고요함이 마침내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면류관’으로 영원히 빛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사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려 가는 삶은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 입술에 찬송이 있습니다. 비록 폭풍우가 몰아쳐도 그 속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러났니 너는 내것이라.” 하나님의 자녀요 택함 받은 자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자는 언제나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에 이끌려가는 쫓기는 인생이 아닌 부름받은 자로서의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려 가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첫 번째 비결인 줄 믿습니다.
둘째, 성령 충만한 삶을 살라.
스데반이 무고하게 자신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시련 속에서도 원망 불평하지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일시적인 표정관리는 분명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들이 삶의 무거운 짐에 눌릴 때, 힘들고 고통스런 인생의 터널을 지날 때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는 비결은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 충만에 대해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목소리부터가 좀 다릅니다. 허스키한 부흥사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표정이나 태도가 근엄하고 거룩해 보입니다. 기도할 때도 열광적으로 합니다. 때로는 귀신을 내 쫓는다고 손으로 눈을 찌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비정상적인 어떤 모습처럼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지혜 충만과 연결됩니다. 3절에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자격이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받는 자입니다. 5절에 보면 스데반이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입니다. 10절에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른 사람들이 감당치 못했다고 증거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통해 삶의 열매가 나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그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 충만하면 저절로 이런 열매가 맺힙니다.
지난 주 말씀 드린 것처럼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충만하여 성령을 쫓아 행하면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면 삶 가운데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화평의 열매가 열립니다. 오래 참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히면 그 삶은 어떤 상황에서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주님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 얼굴은 바로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유대인으로서 나치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코리 텐붐 여사가 있습니다. 그의 언니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독일군에게 사살되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을 간증하러 다니던 어느 날입니다. 간증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녀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자신들을 성추행하고, 언니를 죽인 독일 군이 자기 앞에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안됩니다. 저 인간만은 제가 악수할 수 없습니다.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다가옵니다. 한 사람씩 악수하는데 진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속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 그는 일기에 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도저히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네가 용서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악수를 했고, 그를 껴안아 주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심장을 껴안는 그 순간, 봄눈 녹듯이 증오가 녹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중요하다.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순종의 삶이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의 마음이 불편하고, 혼란스럽습니까? 내 안에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있지 않다는 성령님의 사인입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다가가십시오. 그 속에 해같이 빛나는 천사의 얼굴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셋째, 은혜의 삶을 살라.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자일 뿐만 아니라 은혜도 충만한 자입니다. 충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넘쳐흐르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삶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뤄집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삶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교만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남을 정죄하고 미워합니다.
이 시대의 탁월한 영성작가인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은혜(grace)’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은혜는 우리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세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에 목말라 있다.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물 한 방울 속에 태양의 모습이 담기듯이 은혜라는 한 단어 속에 신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대의 목마름은 바로 은혜의 갈증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은혜를 망각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문제요, 교회의 문제요,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깨닫고 은혜가운데 사는 자는 영혼의 닻을 평강의 항구에 든든히 내릴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했기에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리에서 주님의 용서를 합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우리의 모습은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노예상인 이었던 뉴톤이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지은 찬송이 305장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리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충만하게 받을 때 우리는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천사의 얼굴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천사의 얼굴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사십시오. 성령 충만하십시오. 그리고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 충만한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바로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해같이 빛나는 천사의 얼굴이 되어 세상을 이기며,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사의 죽음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첫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자신의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그의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맨 끝에 있는 말을 주목합니다. 즉 15절에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그것을 스데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밝고 환하게 빛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얼굴이 어두울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을 그저 그의 얼굴이 빛났다는 뜻으로만 보는 것은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의 얼굴이 빛났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때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및 소아시아에서 온 소위 자유민들, 즉 노예였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스데반에게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이 논쟁에서 말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자 사람들을 매수해서는 그가 하나님과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발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붙들어 공회에 세우게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의 혐의를 확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십중팔구 그 악랄한 고발자들과 모든 공회원들 앞에서 긴장해 있거나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분기에 차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환한 얼굴을 하고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겠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천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계획과 할 일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는 늘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듯 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뜻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그의 할 일과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지혜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했을 뿐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예수가 참으로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그의 아들이심을 영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행7:55-56은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자기가 서있다는 사실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하며 살아야 함을 의식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하는 하나님의 일로 인한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들이 그의 얼굴로 하여금 천사의 얼굴 같이 보이게 했던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으로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집사의 한 사람으로 택하여 세움을 받았지만 단지 구제하는 일과 교회의 재정을 출납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이적기사를 행했고 특히 병든 이들을 고쳐주는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주신 은혜와 권능은 그로 하여금 또한 뛰어난 사고능력과 언변을 구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본문 9-10절에 보면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와 더불어 논쟁하던 사람들이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공회에 붙들려 가서 그를 고발하는 자들과 온 공회원 앞에서 행한 설교는 참으로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신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바를 적시할 때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을 만큼(행7:54)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을 칠 때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간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다름없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얼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로 천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 같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로 스데반과 논쟁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으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스데반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인 것입니다. 죽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이 죽을 때 그것이 순교가 됩니다.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진리와 믿음과 의를 지키며 살 때에 순교의 위험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명하시는 그의 일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벌어질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그에게로 받아주시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순교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이었기에 그 어느 사도들에 앞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순교는 자랑스러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 한 천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위로를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믿음과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 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순교적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일은 늘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적 삶의 자세를 항상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그 천사와 같은 얼굴을 우리도 늘 지니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두려운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돌을 맞아야 할 일이 없는데 돌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은 악한 사람을 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을 칩니다. 거짓된 세상은 거짓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기에 악하고 거짓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순교의 위험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처럼 스데반의 죽음도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악한 세상은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순교적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은 사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반성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바른 말로 깨우쳐주는 사람을 향해 이를 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이 하는 말을 막으려고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으며,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 계속 돌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며 진리를 말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부끄럽게 여겨서도 안 되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천사 같이 사는데도 고난을 당한다고 탄식할 것 아닙니다. 천사 같이 살기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교적 삶을 사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순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한 순교자를 만드는 핍박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를 만드는 일은 악한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서지 못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바로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하게 살며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 때문에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며 거짓말로 인격의 흠집을 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소리에 귀를 막고 바른 소리 하는 입을 막으려 하거나 그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마음에 찔리는 말을 해주면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얼른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감정을 품고 그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그런 자보다 더 딱하고 불쌍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같은 믿음의 사람을 부당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쓴 본문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서 들었겠습니까? 누가는 끝까지 바울을 동행했던 그의 동역자였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바울에게서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행7:58에 보면 사람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했습니다. 이 사울 자신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음을 보았으면서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리면서도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던 사람들 중에 사울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돌에 맞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던 스데반에게 계속 돌을 던지도록 사람들의 겉옷을 받아 지켜준 사울이었습니다. 나중에 다메섹을 향해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 자신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행22:20)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자신이 흘리게 한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자신의 생명으로 갚을 또 하나의 순교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아 순교적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를 해야 할 때에는 순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나 먼저 그 누구도 순교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이들로 가득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나 고통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영성
김상복 목사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公會) 중에 않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도행전 6:8-15.
얼굴은 그 사람의 거울입니다.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인터넷에 중학교 여학생이 “제 얼굴이 네모인데 예뻐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라는 글을 올렸더군요. 십대에게는 얼굴이 아주 중요해서 모두 예뻐지고 싶어 합니다. 사실 여자들 대부분이 얼굴을 예쁘게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저는 제 아내보다 조금 연상이지만 얼굴을 보면 10년 이상은 차이 나 보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세수만 하면 그만인데 제 아내는 세수한 다음에도 얼굴에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요즘은 세수하고 나면, 이미 늦었으니 싫다며 손사래를 쳐도, 아내가 그래도 다르다며 손질해줘서인지 제 얼굴이 좀 좋아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우리를 보여주기에 얼굴이 자기 값을 하면 ‘얼굴값을 한다’ 하고, 자기 값을 못하면 우리 언어가 많이 순해져서 요즘 잘 쓰이지 않지만 ‘꼴값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배우 이영애 씨의 얼굴값은 1,500만원이랍니다. 최근에 이영애 씨가 허락 없이 자기의 얼굴로 광고를 낸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5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답니다. 또 어떤 개그맨은 200만원을 받아냈는데, 사람에 따라 얼굴에 따라 가격이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자기 얼굴값을 한 스데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스데반의 얼굴이 어떠했기에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했을까요? 사실 그 당시에는 카메라도 없었고, 그의 초상화도 남겨진 바 없으며, 성경에도 기록이 나오지 않으므로,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스데반을 보면 그 얼굴이 천사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이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정연해서도 아니요, 성형수술을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발하는 광채와 경건함이요, 예수를 만나고 성령 충만한 데서 배어 나온 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할렐루야교회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의 얼굴들을 스데반 같은 천사의 얼굴처럼 변화시켜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우리 모두 함께 드리고 싶은 기도제목입니다.
스데반이 어떤 사람이었고 또 그 내면이 어떠했기에 광채 나는 천사 같은 얼굴이었을까요? 대답은 하나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스데반의 가슴에 충만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가슴속에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면 우리의 눈길과 모습과 느낌이 변하여 천사 같은 얼굴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오늘 스데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특징으로 여기에 여섯 가지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1. 은혜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에서는 은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즉, 스데반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설령 돈과 명예와 지위는 없었는지 몰라도, 이목구비가 정연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스데반은 충만한 은혜를 확실히 체험하였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를 스데반이 넘치게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떡하든지 하나님과 친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과 축복과 친절과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라고 간증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영원 전에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건강과 가족과 교회와 믿음과 사랑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예배하며 살 수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에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고 계시는 것이 체험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얼굴 표정과 눈길과 모습만 쳐다봐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하나님과 친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를 원합니다.
2. 권능이 충만한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 뭔가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 힘은 자기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겨온 흔적이었습니다. 시련의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여 승리해온,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얼굴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해도 주 예수님은 강하십니다. 능력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역사하셔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차분하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영적인 힘이 사람들에게 느껴지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연약한 자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여러분의 얼굴을 통해 힘을 공급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지혜로워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역시 자기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혜가 부족합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모든 상황을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스데반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무리 부족해도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알면 희망이 있습니다. 매일 지혜가 부족하면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말과 판단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충고와 상담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했습니다.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며, 찾는 자가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입니다.
지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땅에서 오는 사람의 지혜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3장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의 여덟 가지의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약3:7-8).
① 성결합니다(pure). 악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순수하고 투명하고 정직합니다. 꿍꿍이속이 없이 있는 그대로 깨끗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② 평화롭습니다(peace-loving). 새 교우 성경공부시간에 어떤 분들은 자기소개를 하면서 우리 교회 교인들의 얼굴이 환하고 평화스러워 보여서 등록하게 되었다고 하시는데, 그 때마다 저는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옆 사람을 한번 쳐다보세요. 환하고 평화롭게 보이시는지. 우리는 이 속에서 오래 살아서 잘 느끼지 못해도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갈등 속에서 헤매던 영혼이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 하늘의 지혜입니다.
③ 관용합니다(gentle). ‘관용’이란 우리말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주는 넓은 마음을 말하지만, 여기에서 본래 뜻은 ‘젠틀하다’ 즉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습니다. 남자는 젠틀맨이 됩니다.
④ 양순합니다(submissive). 이 말은 양보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양순하면 양보심이 있겠죠.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를 고집하기보다 늘 다른 사람을 앞세우는 양보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줍니다.
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full of mercy and good fruit). 긍휼은 잘못한 사람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냥 덮어주고 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했어도 그것을 일일이 따지거나 야단치거나 고함지르지 않고, 그저 못본척 눈감아 주는 것입니다. 남의 장점은 기쁘게 말해주지만 단점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주는 겁니다. 시시콜콜 자꾸 지적하고 ‘벌써 몇 번째냐?’며 질타하면 이제 그 사람 얼굴만 봐도 ‘또 이번엔 뭘 지적할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긍휼함으로 자꾸 선을 베풉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의 선한 말과 행동과 모습을 체험합니다.
⑥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impartial and sincere). 사람을 판단할 때 지방색, 장애자, 출신학교에 대한 편견 없이 동등하게 대하고 누구나 다 좋게 생각해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위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과 뒤, 속과 겉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말과 마음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 없이 그대로 투명하게 받아도 되니 참 편안합니다.
⑦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습니다(peacemakers).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5:9)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가는 곳마다 평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화목을 일으키는 평화의 사도로 모든 일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위로부터 온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⑧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a harvest of righteousness).
말과 행동이 의롭고 거짓이 없이 옳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땅에서 오는 사람의 지혜는 일곱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입니다. 그리하여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고 요란과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약 3:15,16). 인간의 지혜만 갖고는 이런 갈등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만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지혜도 구해서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기 바랍니다.
4. 스데반의 얼굴은 성령 충만한 얼굴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는 매일 순간마다 그의 말과 행동을 성령께서 이끌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나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성령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움을 찾아 살아가는 모습을 ‘성령 충만’한 얼굴이라고 합니다.
5. 당당한 얼굴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모습을 보면 누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스데반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역사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실재 때문에 사람들이 스데반을 당해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모든 면에서 부족해도 하나님과 성령님을 의지하여서 어디를 가든지 당당한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의 적들은 그의 당당한 모습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잡으려고 거짓증인들을 내세워 거짓증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거짓말은 사실에서 하나를 보태거나 하나를 빼면 만들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다시 짓겠다고 했다느니, 모세 율법을 다 고치겠다고 했다느니 하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신 적은 있습니다. 모세율법의 참 뜻을 바로잡아 설명해주신 적은 있습니다. 이렇게 사실을 살짝 비틀어서 상대방에게 좋지 않게 보이도록 하는 악마적이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방법으로 그들은 스데반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권력과 폭력으로 스데반을 억압하였습니다(12절). 백성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체포해서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에 대해 여러분이 아무리 옳아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면 벌써 진 것입니다. 옳은 사람이 왜 폭언을 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진리와 진실은 있고, 아무리 금덩어리가 진흙 속에 쳐 박혀 있어도 금덩어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보시고 들으셨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냅니까? 사람들이 몰라주고 오해해도 아무 상관없어요. 마지막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억압과 위협을 하고 두려움과 긴장과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영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혹시라도 폭력적인 요소가 있으면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서 성령께서 그 폭력적인 성향을 치워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지혜가 풍성하여 평화와 화해와 일치를 심어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은 이런 특징들이 다 종합된, 한마디로 천사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우리는 천사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천사가 나타나니까 환해졌다는 성경기록을 보면 환한 얼굴임에 틀림없습니다. 천사들의 그 광채 나는 얼굴, 지혜롭고 은혜롭고 능력이 있고 하늘의 기적이 있는 그 얼굴은 결국 성령 충만한 얼굴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얼굴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서 여러분의 가슴속에 성령 충만하여 늘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위로부터 오는 지혜들이 풍성히 나타나는 얼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