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으음…….”
나실은 눈가에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은 마치 누군가 눈꺼풀을 출입문으로 착각하고 노크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기에 눈을 떠야 했지만 뜨고 싶지 않았다. 전신에 느껴지는 피로는 나실의 눈꺼풀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만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눈꺼풀이라는 문을 두들기던 강렬한 햇빛은 결국 눈꺼풀은 무시한 채 나실의 눈동자를 침습해 왔고,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만 했다.
나실은 살며시 눈을 떴다. 하얀 해가 자신의 경계를 가린 채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실은 한 동안 눈을 껌뻑거리며 하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고요했다. 하얗게 빛나기만 할 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고요한 하늘 아래에서 나실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일을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톨루크를 불러냈었지. 불러내는 거 까진 좋았는데, 이놈의 풍마가 먹는 게 부실한지 그냥 '금시조의 발톱'에 찢어져 버렸지. 그래, 그리고 난 또 피를 토하고 쓰러졌지. 왜 쓰러진 걸까? 체력? 체력도 문제가 있었겠지. 쉬레인의 성배가 매일같이 발목을 잡아채는군.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른걸. 그래…… 아마 원소 교란이었을 거야. 원소 교란이라니…… 쳇, 나도 칠칠치 못하군. 초심자나 하는 실수나 하고 말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지? 기억이 없네. 원소 교란을 일으켰으니 분명 기절했겠지. 그러면 '금시조의 발톱'을 막지 못했겠군. 분명 휩쓸려서 어딘가에 내동댕이쳐 진 채 끝장났겠지. 결론은 난 죽었다는 거군. 라시니아, 티스, 멜빈은 괜찮을까? 내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괜찮았겠어. 어쨌든 죽고 나니 참 편하네. 이렇게 따뜻하게 햇볕이나 쬐면서 편하게 드러누워 있기만 하면 그만인가 보네. 아아, 햇볕 좋다. 그런데 하늘에 그러진 선들은 뭐지?’
나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자신의 눈을 거스르는 정체불명의 선이 명확하게 보였다. 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허공에 아치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선에는 뭔가가 너덜거리며 걸려있었다. 나실은 다시금 눈을 세차게 껌뻑였다.
“저승의 하늘풍경은 이상하기도 하군.”
나실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마의 따스한 감촉은 여전했다. 그 느낌이 좋아서 나실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고요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일 이란 게 언제나 사람 뜻대로 돌아가라는 법은 없었다.
“어, 나실. 일어났네. 몸은 괜찮아?”
어딘가에서 라시니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실은 픽 하고 웃고는 대꾸했다.
“아아, 라시니아가 저승까지 따라왔나 보네. 그래도 길동무가 있으니 외롭지는 않겠군.”
나실은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았다. 나실은 잠시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쉬고 싶었겠지만 갑자기 느껴진 옆구리의 통증이 그를 방해했다.
“어서, 일어나! 이 잠꾸러기 나실! 멀쩡히 살아서 뜸금없이 저승타령이얏!”
“아…… 아야……! 어라? 라시니아?”
나실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라시니아의 푸른 원피스가 보였다. 나실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라시니아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가는 선도 보였다. 그건 선이 아니었다. 천으로 된 마차 지붕이 날아가고 남은 지붕 뼈대였다. 하지만 마차는 대체적으로 멀쩡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자 티스와 멜빈도 보였다. 티스는 빗자루를 들고 마차를 쓸고 있었다. 멜빈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나실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나실은 바닥을 짚어보았다. 손바닥에 까칠까칠한 모래의 감촉이 전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옷은 그가 토해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나실은 황급히 입가를 닦았다. 말라붙은 피의 흔적이 손바닥에 묻어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금시조의 발톱’은?”
나실은 머리를 쥐어 잡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라시니아가 손을 내밀어 나실을 일으켜 세워줬다.
“글쎄요. 어쩐 일일까요.”
모래를 쓸어내던 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은 라시니아를 째려보고 있었다. 라시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티스를 바라보았다.
“음? 대체 무슨 일인데? ‘금시조의 발톱’은 그냥 지나쳐 간 건가?”
나실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보통 생기기 시작하면 안도리나 대로 전체를 휩쓸어야만 사라지는 ‘금시조의 발톱’은 그 광포한 힘의 흔적만 남긴 채 온데간데없었다. 비록 마차 천장이 날아가긴 했지만 멀쩡하게 목숨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후우, 나실님,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하는 말은 전부 사실이랍니다.”
“무슨 소리야. 설마 이런 큰일을 이야기하면서 거짓말하겠다는 거야?”
티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봐요. 어차피 말해봐야 저만 바보가 될게 뻔한데……. 솔직히 저도 제가 직접 보지않고 듣기만 했으면 절대로 믿지 않을거에요.”
티스는 고개를 돌렸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실은 속으로 ‘아차’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태도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아…… 아냐! 믿을게, 믿을게. 뭐든지 다 믿을테니 전부 말해보라고. 네가 말을 해야지 내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금시조의 발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거 아냐. 게다가, 혹시 모르지. 설령 내가 모른다 해도 대학에 그 일을 보고하면 정확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나실의 말을 들은 티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티스는 잠시 침묵하였다.
…
…
“나실님! 나실님!”
티스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나실은 피를 토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단 하나의 선택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가 순순히 ‘금시조의 발톱’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티스는 밖을 보았다.
-쿠우우우……
‘금시조의 발톱’은 아까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줄어든 거리만큼 티스와 멜빈의 목숨도 짧아져 있었다. 티스는 나실을 내려다보았다. 나실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시니아는 계속해서 잠들어 있었다. 어차피 일어나있다 하더라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티스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눈물이 사라지자 결의에 찬 그녀의 눈동자가 들어났다.
“그래,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어. 못할 것도 없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티스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도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양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티스는 천막문 앞으로 다가갔다. 서 있기도 힘든 마차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티스는 외쳤다.
“계속해서 지기만 할 줄 알아! 이번에는 내가 이겨주겠어!”
티스의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저 거대한 회오리 앞에 티스의 마력과 실력은 보잘것없기 그지없었다. 그러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저 야수를 없앨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티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양손의 검지를 힘껏 깨물었다.
“윽!”
두 손가락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티스는 자신의 양 팔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양 다리, 목, 양 뺨, 그리고 이마에 까지 마법진을 그렸다. 온 몸에 피의 문양을 그린 티스는 전에 읽은 적이 있는 한 마법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수인을 맺는 티스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인의 법칙에 어긋남 없이 수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수인을 마친 티스의 손은 희미하게 빛났다. 이제 스펠을 외워야 할 차려이다. 솔직히 티스는 이 스펠을 자신이 잊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우수한인재인 티스가 그것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바르르 떨렸다.
“내 안에서 침윤된…… 무한의…… 힘…… 나와 함께하고 나와…….”
스펠은 영창하는 중간 중간 자주 끊겼다. 그럴 때 마다 그녀의 음성에는 습기가 어렸다. 결국 티스는 스펠을 다 외우지 못하고 중단하였다. 질끈 감긴 그녀의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티스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자기희생마법 같을 걸 내 같은 겁쟁이가 쓸 수 있을 리 없어. 흐으흐윽…….”
티스는 흐느꼈다. 잠시 찾아들었던 용기는 이미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고 절망과 공포 그리고 패배가 그녀의 몸을 옭아매었다. 그 무게에 짓눌려 까무러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쿠우우우우……!
어느덧 ‘금시조의 발톱’은 마차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 세기가얼마나 센지 마차가 거센 바람에 조금씩 밀릴 정도였다.
“이랴! 이랴! 어허, 이놈들이……! 이랴!”
멜빈은 다급하게 말들은 재촉했지만 바짝 얼어버린 말들은 꼼짝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멜빈은 마차에서 내려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사람이 말의 힘을 이겨낼 리가 없었다.
-푸르릉, 히힝…… 히힝!
말들은 평소처럼 얌전하게 굻지 않고 거세게 저항했다. 조급해진 멜빈은 고삐를 확 잡아당겼다. 그게 화근이었다.
-푸르릉! 히히힝!
“어, 어 어! 으…… 으아아!”
멜빈이 재촉할 때는 꿈쩍도 안하던 말들이 갑자기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멜빈은 고삐에 손이 묶인 채 땅바닥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으으…… 멈춰! 멈춰! 으아아악!”
멜빈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말들은 주인의 처절한 음성을 철저히 외면한 채 본능에 충실하고 있었다. 멜빈의 옷은 전부 찢어져 맨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피부도 거친 대로의 표면에 찢겨나갔다. 극렬한 고통 속에서 멜빈은 한 가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거대한 태풍 속에서 공포에 떨다가 메마른 땅에 머리를 처박고 죽느니 차라리 이렇게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죽는 게 나을 것이라고……. 멜빈은 한 동안 외우지 않았던 기도문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기도라도 하면 죽으면서 고통이 덜어질 것이라 믿었다.
-히힝, 푸릉…… 푸릉……
그러나 기도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말들이 멈춰 섰다. 멜빈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대자로 누워버린 멜빈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말들의 몸통이었다. 말들은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말의 눈으로 옮겼다. 말들의 눈에는 공포가 있었다. ‘금시조의 발톱’이 가져다 준 공포와는 전혀 다른 공포였다. 멜빈이 그 공포를 쫓아 마차를 보려고 했지만 고통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첫댓글 대단히 길게 쓰시네요...
비축분이니까요.
수학여행을 갔다 왔더니, 새 소설이 올려져 있는군요. 잘 봤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