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향(文鄕)과 예향(藝鄕)의 고을, 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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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화재청 | 전화번호 | |
작성일 | 2014-05-14 | 조회수 | 135 |
문향(文鄕)의 고을, 강릉 강릉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문향(文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풍속조에 의하면 ‘강릉의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라 글을 배우는데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 찼고 배움에 게으른 자는 함께 나무라며 꾸짖었다’고 하였다. 강릉은 ‘강릉산수갑천하(江陵山水甲天下)’라는 말처럼 우리나라 산수 가운데 최고라고 칭할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어서 많은 풍류 문인들이 찾아 들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강릉 사람들의 성품을 풍요롭게 길러 주어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문향 강릉을 대표하는 문인은 율곡 이이와 교산 허균이다. 이이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성현(聖賢)이다. 그는 그의 시호(諡號) 문성(文成)처럼 학자인 동시에 사상을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문(文)은 도덕박문(道德博聞), 즉 학문이 높다는 뜻이며 성(成)은 안민입정(安民立政), 곧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행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허균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이상을 추구했던 개혁가였다. 백성이 주인 되는 민본국가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그의 선구적인 사상은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가 되었다. 율곡 이이와 교산 허균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강릉은 실제 문향(文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출신지를 분석해 보면 강릉이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2,792명 가운데 강원도는 309명으로 2. 42%에 불과하다. 그러나 강원도의 문과급제자 가운데 강릉 출신은 126명으로 강원도에서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강원도 전체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이다.
위대한 예술인을 배출한 예향(藝鄕) 강릉을 예향(藝鄕)으로 만든 인물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다. 신사임당은 위대한 어머니 이전에 시(詩)·서(書)·화(畵) 모두에 탁월한 역량을 가진 위대한 예술가이다. 신사임당은 산수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회화를 소화해낸 화가였다. 초목과 벌레를 섬세한 눈으로 그려낸 <초충도>는 세심함과 예민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꼼꼼함과 예리함이 있다. 묵직한 붓놀림으로 그려낸 산수화나 대나무 그림에서는 그녀의 대범함과 단호함이 드러난다. 신사임당의 탁월한 필력에는 자신의 세계관과 철학의 깊이를 담은 자신만의 서체를 개발하였다. 초서뿐만 아니라 해서와 전서 모두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탁월한 시적 감각을 가진 시인이었다. 시의 원천은 정서적인 감수성과 학문적인 깊이다. 신사임당의 시는 유년시절을 보낸 강릉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허난설헌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사회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천여 편이 넘는 시를 쓰기 위해 고뇌하며 살다간 인물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외로운 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간 인물이다. 시인의 시와 흔적은 죽음과 함께 조선에서 불살라졌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시는 조선을 벗어나 남의 나라 중국에서 부활하였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나라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중국 문인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그녀의 위대함은 돌고 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700년 역사의 강릉향교 강릉을 문향과 예향으로 이끈 교육의 중심에는 강릉향교가 있었다. 홍귀달은 『향교중수기』에서 ‘강릉에는 풍습이 문학을 숭상하여 그들 자제가 겨우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면 곧 향교에 들어가 배웠으며 시골 구석구석 마을에까지 선비들이 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와 조용한 몸가짐을 하고 있었다. 이는 모두 글을 읽는 사람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향교는 조선후기 서원이 지방 교육을 전담하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강릉에도 오봉서원과 송담서원 등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강릉은 다른 지역과 달리 향교가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하였다. 강릉향교는 현재 우리나라 340여 개 향교 가운데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강릉향교실기』에 의하면 1127년(고려 인종 5)에 내외향교가 있었는데 병화로 불탄 후 200년이 가깝도록 중건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국가 공식 역사기록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강릉향교의 공식적인 창건은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1313년(고려 충선왕 5)이다. 강릉존무사 김승인이 강릉시 화부산 기슭 현재의 자리에 대성전을 갖추어 향교를 재창건한 것이다. 2013년을 기준으로 창립 700주년이 되는 강릉향교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향교의 역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강릉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이다. 관학인 향교는 크게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祭享空間)은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공자의 제자와 우리나라의 성현을 모신 동무와 서무가 있다. 강학공간(講學空間)은 강의실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의 위치에 따라 향교의 구조는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학후묘 그리고 병립식(竝立式)이 있다. 이들 가운데 제향공간인 묘(廟)가 강학공간인 학(學) 보다는 상위에 있다. 향교가 건립되는 지형에 의해 그 위치가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평지일 경우는 앞쪽이 상위인 반면 경사지일 경우는 높은 뒷쪽이 상위이다. 따라서 평지 향교일 경우는 전묘후학의 구조이며, 경사지 향교일 경우 전학후묘의 구조이다. 화부산을 배경으로 경사지에 건립된 강릉향교는 상위의 제향공간이 뒤쪽 높은 곳으로 가고 강학공간은 앞쪽 낮은 곳에 자리한 전학후묘의 구조이다. 현재 강릉향교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교직사, 재방, 제기고, 화장실 등의 건물과 일각문, 협문, 진학문 등의 문이 있으며 강릉향교묘정비 등 비석 2기가 남아 있다. 교직사 앞에 연못 천운지가 있다. 특히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는 향교의 상징이다. 향교에 은행나무가 있는 것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 은행나무가 있는 단, 즉 행단(杏壇)이었기 때문이다.
강릉 교육의 산실 한편 강릉향교는 강릉 교육의 산실이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의 유생(儒生)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인 『청금록』도 함께 폐지되었다. 이후 강릉향교에서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순종 3) 명륜당(明倫堂)에 화산학교(花山學校)가 건립되었는데, 이는 근대 지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와 고향을 지키겠다는 것을 목표로 유림 지도자들에 의해 설립된 근대학교다. 향교 재산을 교비로 충당하여 운영하였으나, 1911년 폐교되어 양잠전습교로 변신하면서 본래의 설립 정신과 거리가 멀어졌다. 1928년에는 향교의 명륜당에서 강릉공립농업학교(구 강릉농고)가 개교하여 비로소 현대식 중등교육이 실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8년에는 강릉공립상업학교가 향교에서 개교하였으며, 1940년에는 강릉공립여학교가 개교하여 이듬해 현 위치로 옮겨갔다. 1941년에는 옥천국민학교가 역시 향교에서 개교하여 194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9년에는 강릉향교 재산으로 사립학교인 명륜중고등학교를 구내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본래 강학공간이었던 명륜당을 개방하고 유교이념으로 교화선도에 매진하는 한편, 충효교육원을 신축하여 시민의 교화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강릉향교는 강릉 교육의 산실이었다. 강릉향교는 전국 최고의 향교이다. 건축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대성전은 조선 초기 건물로 보물 제214호로 지정될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리고 제향의 측면에서 강릉향교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 향교 가운데 가장 많은 성현(聖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교육적인 측면에서 15세기 이후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私學)의 발달로 전국의 향교들이 그 기능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릉향교는 여전히 강릉 교육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변신을 통해 여전히 지역 교육의 중심인 강릉향교는 과거에 존재하였던 박재화된 역사가 아니라 강릉 교육을 선도하는 미래이다.
글 차장섭(강원대 교양학부 교수,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