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차 문학기행 시인 천상병편(서울 상계동, 2023년 6/24)
지난 토요일 오전에 부평구청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고 1시간 40분 만에 수락산역에서 내려 최가네순두부집에서 맛난 순두부찌개와 장수막걸리에 장떡으로 점심을 먹고 천상병공원으로 가서 상병이 형한테 미리 준비해간 인천막걸리 소성주 한 병으로 예를 올렸다.
그때서야 지금까지 무언가 응어리졌던 가슴이 후련해졌다.
비록 막걸리로 실제 대작은 못했지만....
내가 쓴 산문집 “바람처럼 재즈처럼”에도 “막걸리”란 제목의 글이 있는데, 첫부분은 이렇다.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만 드셨다.
나도 막걸리를 좋아한다.
막걸리하면 역시 수주 변영로 선생(논개라는 시의 작가)과 공초 오상순 선생과의 대작에 관한 일화가 즐비하게 구술되어 있는 수주 변영로 작품 “명정사십리”란 수필집, 대학 Freshman 시절에 교수님의 소개로 이 책을 읽었는데 정말 가관이다.
아무튼 막걸리는 우리민족과 떼어낼 수 없는 음주문화의 소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시인을 대표하는 시를 읊어보자.
귀 천
- 천 상 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ᆢ
얼마나 멋진 시어(詩語)들의 합창이란 말인가?
나는 천상병시인한테는 상병이 형이라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천상병시인처럼 인생을 그렇게 기이하게 살았던 시인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기인처럼 살다가 하늘나라로 영원한 소풍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상병이 형은 2022년 4월, 75세에 세상을 떠난 화천의 이외수 소설가, 2002년 세상을 떠난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스님과 더불어 기인 3총사로 불렸던 하늘나라 시인이었다,
그는 이들과 공동으로 시화집 “도적놈 셋이서”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이들 3총사 모두는 세상을 떴다.
시인은 1930년 1월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심온(沈溫)이다.
간사이에서 초등학교까지 졸업하고 해방과 동시에 부모와 함께 귀국했다.
경남 마산에서 중학교에 입학해서 그 당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춘수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어 등단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국 통역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1951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를 하고, 부산시장의 공보실장으로 근무하다가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음악가 윤이상,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화가 이응노가 간첩으로 지목되었으며, 시인 천상병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불행하게도 친구인 강빈구한테 막걸리 값으로 빌려 썼던 3만6천5백원을 중앙정보부에서 정치 공작금의 일부로 과장을 해서 그를 연루시켜 버린 것이다.
그때 모진 고문을 당하고,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 선고유예로 풀려났지만, 그 후에 4년 동안 행려병자로 살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에 1970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지인들은 천상병의 소식을 알 길이 없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유고시집 “새”를 출간했다.
이 소식이 신문에 실려 널리 알려지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천상병의 입원 소식을 알려왔다.
그래서 친구들이 서둘러 그를 찾아갔을 때, 유고시집이 될 뻔한 “새”를 받아들고 “내 인세(印稅)는 어찌 되었노?” 라고 건강한 목소리로 일간했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농담을 할 정도로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유고시집이 생기긴 했지만, 그때 친구의 동생인 목순옥씨가 간병을 해준 인연으로 1972년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때까지는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아내가 찻집을 하면서 얻는 수입으로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문의 후유증과 술에 의탁하는 평소의 습관 때문에 건강은 날로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1988년에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시인은 1993년 4월 28일에 간질환으로 의정부시 장암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조문객들이 건네준 부조금이 800만원 가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큰돈을 만져 본 적이 없던 이 가난뱅이 시인의 아내는 걱정을 하다가 친정어머니에게 그 돈을 맡겼고, 친정어머니는 아궁이에 넣어두면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신문지에 싸서 아궁이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방이 차다고 해서 그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가, 급하게 불을 껐지만 이미 돈은 잿더미로 변한 뒤였다.
잿더미를 들고 한국은행에 가서 절반인 400만원 정도를 돌려받았는데, 지인들은 타버린 400만원은 천상병 시인의 천국으로 가는 노잣돈이 된 거라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의 사후에 의정부 장암동에서 친정어머니와 같이 살던 부인 목순옥여사마저 2010년 8월 26일에 향년 76세로 사망하자, 시인의 주변 사람들과 의정부시의 노력으로 두 분의 유해를 의정부시립공원묘지(양주시 광적면 석우리 소재)에 같이 모셨다.
그는 2003년에 은관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목순옥여사가 운영했던 인사동 카페 “귀천” 1호점은 2010년 목여사가 소천한 뒤에 문을 닫았고, 그녀의 여 조카 목영선씨가 이어받아 현재의 2호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서울미래유산이란, 문화재로 등록이 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으로 서울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이다.
나는 8,90년대에 인사동엘 가게 되면 목여사가 운영하던 그 당시 귀천 1호점에 들러 그 유명한 모과차를 마시곤 했었으며 그의 시집들도 거기서 구입을 했다.
지난 2018년 4월에는 평동회원들과 한양도성 일부구간을 걷고 나서, 간만에 귀천카페에 들러 목영선 현여주인장과 그들 생전에 이곳을 드나들며 그들과 나누었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트래킹을 함께 한 배승진박사(제물포고 1년 후배)는 그날 차 값을 스폰서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 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이는 귀천(歸天)으로 널리 알려진 천상병(千祥炳) 시인의 “행복(幸福)”이란 시인데, 지금도 귀천 카페 벽에는 이 행복이란 시화(詩畵) 액자가 걸려있다.
또한, 강화도 건평포구에는 천상병귀천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의 인물조각상과 그의 시 귀천이 적혀있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시인은 고향이 마산인데 왜 강화도에도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이유는, 서울에 살면서도 여비가 없어 고향인 마산을 갈 수가 없자, 대신에 이곳 강화도 바다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이곳 건평항에서 고향친구인 박재삼시인과 막걸리를 마시면서 메모지에 시를 적어 그에게 건네 주었는데 그 시가 바로 “귀천”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입사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되는 것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도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은 삶을 살다간 사람, 주머니에 오늘 마실 막걸리 한잔 값의 돈이 있으면 늘 행복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
이렇듯이 변변한 문학관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천상병시인에 대한 기록은 태안반도 끝자락 영목항으로 가는 도중 시인의 마을로 들어서면, 대야도 어촌체험마을 갯벌이 끝없이 펼쳐지는 언덕배기 소나무 사이로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벽에 장독대가 있는 작은 집이 그나마 어렵사리 마련된 시인의 고택이다.
‘시인의 섬’이라는 푯대가 천 시인의 옛집임을 알리고, 간단한 이력 등을 적은 안내판이 손님을 맞는다.
시멘트 벽에 바로 난 살문을 열면 비닐 장판이 깔린 천장이 낮은 한 평(3.3㎡) 남짓한 방에 시집 등 몇 권의 책이 올려져 있는 앉은뱅이 책상과 자그마한 책장이 전부다.
다른 방에는 대나무 소쿠리와 시 ‘귀천’을 담은 액자, 천 시인이 고택 앞에서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그의 시 귀천의 구절처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손짓하는 구름을 향해 하늘로 올라간’ 듯 방은 햇살만 함께 한다.
고택 옆에는 천 시인의 애장품과 의자, 책 등 유품과 생전 절친하게 지내던 이외수 작가의 시화 등이 있는 갤러리도 있다.
현재, 천 시인의 고택을 관리하는 이숙경씨는 “남편인 고 모종인씨(2010년 작고)가 인사동 카페 ‘귀천’에 자주 드나들면서 천 시인 부부와 가깝게 지낸 인연으로 어느 날 목순옥씨로부터 장암동 고택이 재개발로 철거된다는 전화를 받고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와 지난 2004년 말에서 2005년 초께 복원했다”고 전한다.
의정부시에서는 늦었지만 천상병시인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문학기행을 마치면서 인사동 귀천카페 및 태안반도 끝자락에 있는 시인의 고택에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여 하루속히 시인을 위한 문학관이 건립되어 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