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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동북공정은 역사전쟁이다 /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
이장희 추천 0 조회 101 16.01.04 19:3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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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은 역사전쟁이다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동북공정(東北工程). 우리가 흔하게 접한 단어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동북(東北)이 무얼 의미하는지 짚고 넘어가자. 동북은 동북아시아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일본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영어로는 극동(Far Eastern Countries)이라면 대충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이야기하는 동북은 만주지역을 이야기한다. 즉 이 지역에서 탄생한 고조선을 포함해 고구려 발해도 동북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말이다.

 

다음으로 공정(工程)은 연구(study)을 뜻한다. 어떤 학자는 프로젝트(project)라고 칭하기도 한다. 중국이 추진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연구다. 그러면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중국은 고조선, 발해, 그리고 고구려는 한국의 조상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입증하겠다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정치외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여기에는 음모가 숨어있다.

만약 북한이 분열한다면, 중국은 북한을 점령하겠다는 계략이 숨겨 있다. 북한에 진주하겠다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대단히 부상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석학인문강좌, 동북공정 문제 다뤄

 

우리의 관심 속에서 점차 멀어지는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제고와 일반대중의 이해증진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이 마련한 석학인문강좌가 28일 서울 서초구 구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동아시아 역사의 구조적 특성’이라는 주제로 첫 강의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동북공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김 교수의 강의를 요약한 내용이다.

 

 

동북공정은 역사전쟁이기도 해

 

2003년에 고구려 역사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동북공정’ 논쟁이 발생하여,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계가 ‘역사전쟁’을 치른 바 있다.

중국 학계는 고구려가 한(漢)나라의 군현(郡縣) 안에서 건국, 발전하였고 고구려가 중국의 왕조들에 조공(朝貢)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고구려 사가 중국 역사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한국 학계는 고구려가 한의 군현을 축출하면서 건립되어 책봉-조공 체제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중국의 왕조들과 대항하는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역사는 당연히 한국의 역사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중국 측 주장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영역은 대부분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와 중복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였다. 반면 한국 측 주장은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건립한 국가라는 사실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고구려의 역사 논쟁은 당사자들의 잣대가 다름으로써 발생했고, 격화된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을 야기한 고구려 역사 귀속 논쟁은 현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발생한 대표적 역사 논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발생한 역사 논쟁이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중국과 티베트(吐蕃), 중국과 베트남(越南), 중국과 타이완(臺灣), 중국과 타일랜드(泰國), 중국과 동(東) 투르크(突厥), 중국과 몽골(蒙古), 중국과 일본(日本) 등 중국과 인접한 나라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역사 논쟁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과 티베트의 역사 논쟁은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침공과 14세 달라이 라마의 망명,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 설치 등을 계기로 중국 역사학계와 티베트 인(혹은 그 독립을 지지하는 국제 학계) 사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중국 학계에서 티베트가 원대(元代) 이래로 중국의 ‘불가분할적(不可分割的)’ 일부였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티베트 측은 당대(唐代) 이래로 한 번도 독립성을 잃은 적이 없다가 인민해방군의 침공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베트남의 역사 논쟁은 1979년 중월전쟁(中越戰爭)을 전후하여 격화되었다. 중국 학계가 중월관계사(中越關係史)를 책봉과 조공이 교환되고 문화가 교류된 평화 주조(主潮)의 관계로 규정하는데 반해, 월남 학계는 중국의 침략과 월남의 반격이 끊임없이 반복된 밀고 댕기는 싸움의 관계라고 주장하였다.

 

월남도 중국의 역사 속에 포함시켜

 

월남 최초의 왕국인 문랑국(文郞國)의 영역이 중국의 서남부까지 포괄되었는지, 중국의 1000년 북속시대(北屬時代)의 식민지 경영이 월남 사회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는지, 중국에 대한 월남의 선제공격도 존재하였는지 등 논쟁의 쟁점은 중월관계사 전반을 포괄하였다.

 

중국과 타이완의 역사 논쟁은 이른바 ‘통독논쟁(統獨論爭)’, 즉 타이완이 중국과 통일해야 하는가, 아니면 독립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 논쟁과 맞물려서 진행되었다. 타이완 도내의 여론과 학계가 통일파와 독립파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 학계는 타이완 통일파와 함께 이 논쟁의 일방을 형성하여, 대만 독립파가 주장하는 논리에 대항하였다.

 

타이완의 통일파와 중국 학계는 타이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인 이주민에 의해 경영되었고 청(淸)이 타이완을 침공하여 정씨(鄭氏) 정권을 붕괴시킨 뒤부터 내내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기 때문에 타이완은 이미 명청(明淸) 시대부터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타이완의 독립파는 중국에서 이민해 온 타이완인은 이미 중국인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을 형성하였고 중국계 이민(移民)의 타이완 경영은 중국 국가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저명한 독립운동가 사명(史明)이 <대만인사백년사(臺灣人四百年史)>에서 화란(和蘭)과 정씨(鄭氏) 정권, 청조(淸朝), 일제(日帝), 중화민국(中華民國) 등 타이완을 지배한 역대 국가들은 모두 대만을 침공한 외래(外來) 식민정권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타이완 역사 논쟁은 타이완의 근현대 ‘4백년’ 역사의 성격을 핵심적 쟁점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이 외에도 돌궐어(突厥語)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통합하여 독립된 동돌궐공화국(東突厥共和國)을 건립하려는 세력과 중국 학계 사이에서도 ‘범돌궐주의(泛突厥主義)’의 역사적 타당성을 주요 쟁점으로 치열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흉노(匈奴)와 돌궐(突厥), 몽고(蒙古) 등 북방 유목민 사회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중국 학계와 이에 반대하여 독립된 몽고사(蒙古史) 체계를 수호하려는 몽고 학계 사이에서도 역사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운남(雲南)에 존속한 남조(南詔) 왕국의 후예들이 태국(泰國)으로 이동하여 현대 태국인을 형성하였다는 태국 학계의 주장에 대해, 중국 학계에서는 완강하게 부정하면서 남조의 영역과 인구는 시종일관 변동 없이 중국의 일부만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영토 논쟁인 댜오위타이군도(조어대군도, 釣魚臺群島)=센카쿠제도(尖閣諸島) 영유권 논쟁 역시 류쿠(琉球) 문제에 대한 역사 논쟁과 깊은 내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

 

류쿠(琉球)는 중국의 명(明)과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한 독립 왕국이었으나,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의 침공을 받아 양속(兩屬)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 일본의 오키나와현(?繩縣)으로 편입되었는데, 일본은 센카쿠제도(尖閣諸島)를 오키나와 현에 소속시켰다.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벌어진 이들 역사논쟁의 공통점은 논쟁의 일방은 언제나 중국이었고 다른 일방은 중국인이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거나 중국에 신속해 있었던 일개 ‘지방’이었다고 주장하는 나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이러한 역사논쟁이 이른바 ‘중국적 세계질서’라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유산에 기인하였음을 뜻하며, 이들 역사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역사의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중국적 세계질서’는 중국과 다른 나라들의 다양한 관계에 의해 형성되었으니, 제도적 관계로는 내속(內屬) 관계와 종번(宗藩) 관계, 화친(和親) 관계 등에 의해 구성되고, 비제도적 관계는 통사(通使) 관계와 전쟁 관계 등으로 구성되었다.

 

‘내속(內屬)’이란 중국 국가의 군현(郡縣) 등 직접적 지배체제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 국가에 내속 된 국가 등 정치체제는 독립적 주권을 상실하고 중국 국가의 직접적 지배를 받게 된다. 내속은 비중국계 역사공동체가 중국과 융합하여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가장 효과적인 원인의 하나였다.

 

 

동북아는 원래 요동을 일컫는 말

 

 

이제 세계의 중심축이 동북아로 이동한다는 말이 많다. 물론 중국, 한국 일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동북은 옛날 우리의 조상인 예맥계의 고구려, 고조선, 발해 등을 비롯해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부침했던 요동지역을 일컫는 곳으로 이다. 동북공정은 이 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 속에 포함시키겠다는 내용이다. 사진은 김한규 교수. ⓒ ScienceTimes

 

 

전통시대에는 중국이 동아시아 세계를 독점하지 않았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 역할이 중국에 의해 독점되지는 않았다. 고대의 동아시아 세계는 장성(長城) 이남의 농경사회와 장성 이북의 유목사회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송(唐宋) 교체기, 즉 10세기 이후에는 요동이 중국과 밀고 댕기는 새로운 대항 세력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중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요동의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고(蒙古), 만주(滿洲) 등이 차례로 통합국가를 건립하여 중국을 지배하고 주변의 다른 역사공동체들을 내속시키거나 책봉-조공체제를 이용하여 통제하였다.

 

그러나 요동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 내포되어 있음으로 인해 요동 역사공동체들의 정체성이 크게 약화되고, 요동에서 존속한 역사공동체들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기억이 희석됨에 따라, 요동을 환절로 하였던 한중관계사의 특성까지 망각되었다.

 

중국역사에 있어서 당송(唐宋) 교체기는 여러 획기적(劃期的)인 시기 가운데 하나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삼성제(三省制)와 균전제(均田制), 조용조세제(租庸調稅制), 부병제(府兵制) 등 고대의 국가 기본체제가 육부제(六部制)와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양세법(兩稅法), 모병제(募兵制) 등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농민의 사회적 지위가 제고되어 항조항량(抗租抗糧)의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서민문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체제이념인 성리학(性理學)이 등장하였다. 획기적 변화는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 주변의 다른 역사공동체에서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천년왕국 신라가 고려에 의해 대체되고 신분제 사회가 관료제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월남(越南)은 천년의 ‘북속시기(北屬時期)’ 즉 중국 국가의 지배시기를 끝내고 자주적 독립 왕국 시대의 문을 열었다.

 

티베트에서는 토번(吐蕃) 왕국이 와해되고 불교에 의한 정교일치의 독특한 국가체제가 건립되었다. 이와 멀지 않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고대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독특한 막부(幕藩) 체제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변화는 장성(長城) 이북에서 일어났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기본 구조는 장성 이남의 농경사회와 장성 이북의 유목사회가 대립하는 역학적 관계로써 설명될 수 있는데, 이때 양대 세력이 대립하는 기본 축은 중국의 정치, 군사적 중심인 관중(關中)과 유목사회의 중심인 막북(漠北)을 잇는 선이었다.

 

이 선의 가운데에는 황하 이남 장성 북쪽의 오르도스(河套)가 있었다. 농경과 유목이 모두 가능한 오르도스는 전국시대 이래로 두 세력의 우열을 가르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그러나 10세기, 즉 당송 교체기 이후에는 장성 이북과 장성 이남의 양대 세력이 대립하는 기본 축이 동쪽으로 크게 이동하였다.

 

중국의 중심은 관중에서 산동(山東)으로 이동하고 장성 이북의 중심은 막북에서 요동(遼東)으로 이동함으로써, 그 대립 축의 가운데에 놓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가 새로운 쟁탈의 전략적 요충이 되었다.

이후 요동을 통일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언제나 연운십육주를 탈취하여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중국의 일부 혹은 전부를 통합하여 지배함으로써 일련의 통합국가들을 연속으로 건립하였다.

 

시서(詩書) 시대, 즉 상(商), 주(周) 성읍국가 시대만 하더라도 중국(中國)은 ‘사국(四國=四方之國)’에 대응하는 말로서, 국제사회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성읍국가, 즉 상읍(商邑)과 주읍(周邑)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영토국가 시대로 전환된 전국(戰國) 시대 이후의 ‘중국(中國)’은 ‘이적(夷狄)’에 대응하는 말로서, 황하 중하류 유역, 즉 중원(中原) 일대에 존속한 역사공동체(즉 역사 경험과 역사의식을 공유한 공동체)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동북아는 원래 요동을 일컫는 말

 

따라서 전통시대의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언제나 광범한 별개의 공간이 개재되어 있었으니, 여러 역사 문헌에서는 이를 가리켜 흔히 ‘요동(遼東)’이라 표현하였다.

즉 전통시대의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이 요동이라는 제3의 공간을 통해 이루어졌으니, 요동을 매체, 혹은 환절로 한 한중관계사는 요동이라는 변수에 의해 규정되었다.

 

‘요동(遼東)’이란 ‘관동(關東)’, 즉 ‘산해관 이동(山海關 以東)’의 권역을 가리키는 특수한 역사적 명칭이다.

‘요동’은 원래는 ‘요원(遼遠)한 동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요하(遼河)’라는 강 이름이 사용된 뒤부터는 ‘요하(遼河)의 동쪽’이란 의미를 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협의의 ‘요동’은 요동성(遼東城) 혹은 요동군(遼東郡), 요동도사(遼東都司), 요동성(遼東省)이나 그 권역 등을 가리켰으며, 광의의 ‘요동(遼東)’은 관동의 전역을 포괄하기도 했다. 광의의 ‘요동’을 대체하는 말로서 ‘만주(滿洲)’ 혹은 ‘동북(東北)’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요동의 또 다른 대체어인 ‘동북’은 중국인들이 일제의 정치적 의도에 대항하여 ‘중국의 일부’(즉 중국의 동북 지방)임을 강조하기 위해 역시 의도적으로 현대에 사용하는 명칭이다. 이에 반해 ‘요동’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중국 문헌에 등장하여 전통시대 내내 빈번하게 사용된 역사적 용어였다.

 

요동은 수 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부침했던 곳

 

고구려를 비롯해 고조선 등 우리 조상이 흥기했던 ‘요동’이란 말은 ‘만주’와 ‘동북’에 비해 현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고, 시대적 상황과 사용자의 의식에 따라 그 공간적 범주가 신축 변화하여 일정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대에 정치적 의도로 유포된 용어가 아니고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사용된 역사적 용어이기 때문에, 관동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보다 적합하다.

 

이들 요동의 역사공동체들은 중국 문화와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 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국인들과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였다.

동호계의 선비(鮮卑)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가운데 여러 연국(燕國)과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을 건립한 바 있었고, 예맥계의 맥인(貊人)은 조선(朝鮮)과 고구려(高句麗)를 세우고 예인(濊人)은 부여(夫餘)를 세웠다.

 

숙신계의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은 예맥계와 융합하여 발해(渤海) 건립의 주체가 되었다. 특히 10세기 이후에 동호계의 거란(契丹)이 요(遼)를, 몽고(蒙古)가 원(元)을 각각 세우고, 숙신계의 여진(女眞)이 금(金)을, 만주(滿洲)가 청(淸)을 각각 세웠음을 함께 고려한다면, 요동의 세 계통 역사공동체들이 얼마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였는지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요동의 거란인(契丹人)은 발해(渤海)를 병합하여 요동을 통일한 뒤, 곧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탈취함으로써, 요동과 중국 일부를 함께 아울러 지배하는 통합국가 요(遼)를 건립했다. 그 뒤를 이어 역시 요동의 여진인(女眞人)이 요(遼)를 멸망시키고 요동을 통일한 뒤, 연운십육주를 발판으로 하여 중국으로 진출, 회수(淮水) 이북의 중원(中原)을 점유함으로써, 역시 요동과 중국을 통합하여 지배하는 금(金)이라는 통합국가를 경영하였다.

 

다시 그 뒤를 이어, 요동 서북부에서 발흥한 몽고인(蒙古人)이 요동 전역을 석권하고 중국으로 들어가서 강남(江南)을 포함한 중국 전역을 아우르고, 통합국가 원(元)을 세워 요동과 중국뿐만 아니라 막북(漠北)과 티베트까지 통합 지배하였다. 그 뒤 잠시 중국 세력이 명(明)이라는 ‘반동적(反動的)’ 국가를 세워 중국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다시 요동을 석권하고 청(淸)을 세운 만주인(滿洲人)이 연운십육주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국 전역과 요동을 통합 지배하였다. 10세기 이후 요동 세력이 연운십육주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서 요동과 중국을 통합 지배하는 과정이 1천여 년에 걸쳐 발전적으로 반복된 것이다.

 

거란인이 세운 요(遼)와 여진인이 건립한 금(金), 몽고인의 원(元), 만주인의 청(淸) 등은 모두 중국을 지배한 국가이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 중국을 지배한 국가들, 예컨대 진(秦)이나 한(漢), 진(晉), 수(隋), 당(唐) 등과는 근본적으로 국가적 성격이 다르다.

 

진, 한, 진(晉), 수, 당 등이 중국인에 의해 건립되고 중국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한 국가였다면, 요, 금, 원, 청 등은 요동인들에 의해 건립되고 요동에서 발흥하여 요동과 중국을 아울러 지배한 국가였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국가 주권이 비중국계 역사공동체의 가문에 귀속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동인이 중국인을 지배하는 다원적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후자는 전자와 다른 국명의 제작 원리를 갖고 있었고, 요동과 중국을 따로 지배할 이원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전자와 다른 세계질서의 운영 원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 한, 진, 수, 당 등의 국가들과 요, 금, 원, 청 등의 국가들을 일률적으로 동일한 ‘중국 국가’로서 단일한 역사체계 안에 수납하는 중국 학계의 입장과는 달리, 두 계열의 국가들을 ‘중국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한 국가’와 ‘요동에서 발흥하여 요동과 중국을 통합, 지배한 국가’로 각각 분리하여 별개의 두 역사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책봉과 조공은 공생의 전략이었다

 

중국이 착수한 동북공정에서 동북은 쉽게 이야기 해서 요동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요녕성, 요하성, 길림성, 러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흑룡강성 등 5개 성이 위치한 지역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 지역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할거하여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중국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한족의 부침은 간단한데 비해 만주지방에서 출현해 중국과 자웅을 겨루었던 민족과 국가들에 대한 역사연구는 부족했다.

 

이제 만주지역이 중국 땅이 된 만큼 이들 민족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수용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의 조상인 고조선, 고구려 등도 포함이 된다.

산업화를 기반으로 세계 최대 경제대국(내년에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됨)으로 부상한 중국은 군사력에 있어서도 최강을 자랑한다. 중국은 이러한 동북공정을 통해 과거에도 세계를 지배한 최강의 대국이었다는 것을 으스대기 위한 목적도 있다.

 

 

동북공정의 대상인 요동지역은 한중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다. 또한 완충지대였다. 한국은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두 나라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사진은 김한규 서강대학 교수 ⓒ ScienceTimes

 

 

짚고 넘어갈 것은 비단 동북공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북공정이 있다. 서부지역의 위그루 신강지역 이민족들도 중화사상통일을 위해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이다. 서남공정도 있다. 인도 국경지역과 베트남 미얀마 국경지대 이민족통합작업과 국경선 정리 작업의 일환이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을 목적으로 한국연구재단이 기획한 석학인문강좌가 12일 서울 서초구 구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김한규 서강대 교수는 그의 세 번째 강의 ‘동아시아 세계사상의 한국’을 통해 중국을 에워싸고 있는 아시아국가들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김 교수의 강의를 요약했다.

 

요동지방, 한중관계 결정하는 변수

 

한국과 중국의 사이에 개재한 요동은 언제나 한중관계를 결정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한국의 역사공동체적 정체성은 지리적으로 격리된 중국보다는 오히려 인접하고 있는 요동에 의해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역사상 한국에 대한 치명적인 외부의 침입은 언제나 중국이 아니라 요동 방면에서 왔다는 사실, 그리고 요동과 한국의 관계를 순치(脣齒)의 관계로 이해한 전통적 사고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요동을 환절로 한 한중관계사’의 특성만으로 세계사상에서 한국이 점하였던 위상과 좌표를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

 

전통시대에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던 수다한 역사공동체들 가운데서 중국 외에 한국과 베트남, 일본, 몽고 등 4개의 역사공동체만 현재 독립된 국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동아시아 세계사상에서 한국이 점한 위상’은 바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원래의 ‘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 ‘변강’에 병존하였던 그 수많은 역사공동체들이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는데, 이들 네 역사공동체들만 생존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특히 한국이 그 숱한 역사적 굴곡을 겪으면서도 장구한 기간 독립된 국가를 영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는 한국사 연구자를 비롯한 동아시아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근본적 질문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은 곧 동아시아 역사상에서 한국이 점한 위상에 대한 이해를 유도할 수도 있다.

 

일본이 그 역사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이 대륙과는 바다를 두고 고립된 지리적 위치에서 발견될 수 있다. 몽골과 원나라 군대가 두 차례 일본 원정 과정에서 실패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몽고는 그 일부, 즉 외몽고만으로 몽고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를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몽고가 중국에 병합되어 내몽고자치구로 편입되어 있다.

 

한국과 베트남, 아주 비슷한 길 걸어와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와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위상 등의 면에서 한국과 가장 비슷한 나라는 월남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월남(이하 베트남)과의 비교사적 이해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상 한국의 위상과 한국의 역사공동체적 정체성의 보전이라는 문제에 가장 유효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이 역사의 서장에 고조선을 설정한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인은 그 역사의 첫 장으로 남월(南越)을 기억해왔다. 고조선이 한국과 중국 사이에 있는 요동에 위치하였듯이, 남월도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있는 강남(江南)과 영남(嶺南)에 위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시대의 한국인들은 조선(朝鮮)이란 국명을 다시 사용하였다. 월남인들도 ‘남월(南越)’이란 국명 사용을 만주 청나라가 반대하자 그 글자를 바꾸어 ‘월남(越南)’이란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양국은 역사의식에서 독특한 공통점을 보인 것이다. 특히 고조선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남월(南越)은 건국 시기와 멸망 시기, 중국과의 관계, 국가적 성장과 발전 과정, 국가의 구조적 특성 등에서 매우 흡사하다.

 

양국은 중국 한(漢)의 건국과 거의 동시에 중국인 유이민(流移民) 집단에 의해 건국하여, 한과 ‘외신(外臣)’의 조약을 맺고 철기(鐵器)를 공급받아 강력한 영토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무제 시기에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그 나라의 영토는 모두 한의 군현(郡縣)으로 병합됐다.

 

조선의 옛 지역에 설치된 군현은 4백여 년간 존속하였다. 남월의 고지에 설치된 군현은 1000여 년간 유지되었다. 이후 한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삼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다가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 등 통일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국과 베트남이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점유한 위상과 수행한 역할 등을 비교사적인 면에 보면 양국이 현재까지 오랜 기간 독립된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1차적 원인은 두 역사공동체가 시종일관 선택한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종번관계, 주종관계 아닌 공생 전략

 

종번관계란 국제사회의 중심과 주변, 즉 종주국(宗主國)과 번속국(藩屬國)이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의 예(禮)를 서로 교환하여 상대의 국제적 위상을 인정, 혹은 승인함으로써 국제사회를 함께 구성, 유지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를 통해 양자 모두 집단방위 체제에 참여하여 국가 안보의 실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 공물(貢物)과 회사품(回賜品)의 교환으로 사실상 국제 무역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으며, 물자의 교역에 편승하여 양측의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부수적 이익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번속국의 입장에서는 종주국의 명분을 상대에게 제공하는 대가로 집단적 안보의 방벽장치와 국내의 정치적 안정, 필요한 물자의 수입, 고급한 문화의 수용 등 상당히 매력적인 실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대(漢代) 이후 중국인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추구하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실력과 명분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체제가 바로 책봉-조공 체제였다. 책봉-조공 체제를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참여하는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집단 안보와 정치적 안정, 고급 물자와 문화의 수입 등 다양한 실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은 베트남과 함께 종주국의 명분을 중국에 제공하는 대가로 이러한 실익을 확보함으로써 오랜 기간 역사공동체의 정체성과 독립 국가의 운영을 보장받은 대표적인 나라의 하나였다.

 

이처럼 한국은 월남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종번 관계를 맺고 책봉과 조공의 예를 교환함으로써, 국가 안보와 정치적 안정, 경제적 교역, 문화적 교류 등의 국익을 확보하여 역사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종번관계 거부한 나라들 다 사라져

 

이와는 달리 중국과의 종번관계를 거부하고 독자적 국제사회를 구축하여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대표적 사례를 고구려와 신라의 상반된 선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신라는 중국의 수(隋), 당(唐)과 종번관계를 맺고 책봉과 조공의 예를 충실하게 교환함으로써 국가를 존속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었다.

 

고구려는 수, 당과의 종번관계를 거부하고 요동 방면의 국제사회에서 중심 역할을 자처하며 수, 당이 주도한 국제질서를 위협함으로써 수 차례의 대규모 침공을 불러들여 마침내 국가가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역사에서도 마찬 가지다. 중국과 종번관계를 거부하거나 책봉-조공 관계를 훼손시켰을 때는 중국의 ‘징벌적’ 침공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종번관계를 수용하고 책봉-조공 관계를 복원하였을 때는 안보와 정치, 경제, 문화상의 실익을 만족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1979년의 중월(中越) 전쟁조차 ‘징벌’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이 독립된 나라로 생존할 수 있었던 직접적 원인이 정치적으로 책봉-조공 체제를 적극 활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문화적으로 동아시아 문화를 적극 수용, 소화하는 역량을 한국이 갖추고 있었던 것도 한국이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강력한 군사적 물리력을 갖추고 중국을 위협했던 장성 이북의 유목민 사회와 요동의 역사공동체들이 한결같이 중국의 변강으로 편입되어 그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 세계에서 문화 지향적인 성향과 문화적 소화력을 가장 높게 갖춘 한국과 월남이 가장 오래 동안 역사공동체적 정체성과 국가적 독립성을 유지하였음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다.

 

 

 

 

고구려 역사는 독립국가의 역사

 

역사란 과거에 일어나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진실을 밝히는 학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역사가에게 있어 가정은 금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배논리다.

 

그러나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지워버리고 이미 일어난 사실은 주어진 객관적 역사적 조건 속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대안적인 방법을 찾는 일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동북공정을 앞세워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귀속시키려는 의도를 보면 더욱 그렇다.

 

“나누는 인문학, 통하는 인문학”을 모토로 인문학의 확산과 대중화를 위해 한국연구재단이 마련한 석학인문강좌가 19일 서울 서초구 구민회관에서 열렸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김한규 서강대학 교수 ⓒ ScienceTimes

 

 

김한규 서강대학 교수의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 강좌를 마무리하는 4번째 강의다. 이날 강의는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권만우 경성대학 교수의 사회로 임지현 한양대 교수, 이삼성 한림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섰으며 청중들도 참석했다. 다음은 이날 종합토론을 요약한 내용이다.

 

 

▲임지현 교수 질문: 만약 만주국이 중국과 한국 사이의 요동지역에 독립국가로 남아있다면, 그리고 중국의 정통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무너지지 않아 현대 중국의 지배엘리트를 구성하고 있다면 한중의 역사관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도 아니고 한국의 역사도 아닌 만주국의 역사로 잡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김한규 교수: 역사적 가정은 때로 필요하다. 지난 역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일이 하나 생각난다. 1994년 중국 상하이에 있는 푸단대학(復旦大學)에 열린 세미나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중국인들이 현재의 상황을 기준으로 역사의 귀속을 판단하려 한다면, 언젠가 동북 3성을 상실할 경우 요동의 역사는 중국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랬더니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던 적이 있다. 중국인은 과거 요동에 진출하였다가 요동 토착세력에 밀려 퇴각한 역사적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

 

 

▲임지현 교수 질문: 10년 전인 2004년 한양대학교 부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창립 기념으로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당시 학술대회의 목적은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고구려역사는 중국역사이면서 한국역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닌 변경사가 대안이라는 점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김한규 교수: 고구려는 국가 개념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 등 역사공동체 개념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구려는 요동의 일부 역사공동체들과 한국의 일부를 아울러서 지배한 통합국가였다.

 

또한 역사공동체의 귀속 문제와 역사의 귀속 문제 역시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구려라는 국가의 영토와 인구, 문화 등은 현재 한국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는 당연히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국가의 영토와 인구, 문화 등의 상당 부분이 현재 중국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고구려 역사는 요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재 요동이라는 역사공동체가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요동사는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어 해방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사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아시아사학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동아시아 세계’란 말은 예외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일종의 이론적 용어에 불과하다. 장건(張騫)의 서역사행(西域使行, 서역탐사) 이후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인들도 동아시아 밖의 세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제한된 수준으로나마 접촉과 내왕, 교역과 교류 등이 있었다.

 

때문에 ‘동아시아 세계의 완결성’이란 일종의 과장된 말임이 분명하지만,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이론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삼성 교수 질문: 서양학계에서는 중국 역사와 관련 내륙아시아(Inner Asia)라는 말을 쓴다.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변강(邊疆)’으로 지칭하는 지역들을 가리키는 대안적 개념의 하나로 서양학계에서 일반화된 ‘내륙아시아’라는 개념을 김한규 교수는 전적으로 배제하고, 그 대신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내륙아시아 개념에서는 만주와 몽골을 분리해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김한규 교수: 서두에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나는 항상 이 말을 즐겨 쓴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역사에 대해 100인에게는 100가지 각기 다른 이해가 있다. 다만 얼마나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해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할 때는 이들의 공통점, 일반성보다 오히려 차이점, 특수성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막북(漠北, 사막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고비 사막 이북인 현재의 외몽골 지방을 이르는 말) 초원지대의 유목사회와 요동 역사공동체들은 자연환경과 생활 조건, 문화 양식, 역사 전개, 중국과의 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몽골과 요동의 관계에 관한 의견의 차이는 ‘몽골(蒙古)’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가 지적한 ‘몽골’은 막북, 막남 초원지대와 중앙아시아의 일부까지 모두 포괄하는 현재의 몽골 개념이다. 내가 말하는 ‘몽고’는 요동 동호계에 포함된 한 역사공동체의 명칭이다.

 

 

▲이삼성 교수 질문: 흔히 우리가 부르는 ‘요동’이라는 개념에 관한 질문이다. 김 교수는 우리가 만주로 이해하는 영역 전체를 요동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즉 광의의 요동 개념을 취하고 있다.

김 교수는 ‘요동’이란 개념은 “시대적 상황과 사용자의 의식에 따라 그 공간적 범주가 신축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만주에 대한 개념 역시 알고 싶다.

 

 

한림대학 이삼성 교수 ⓒ ScienceTimes

 

 

▲김한규 교수: 어떤 면에서 본다면 역사공동체라는 말과 마찬 가지로 요동(遼東)이라는 말도 실재하지 않은 상상의 말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요동사 연구의 대부로 통하는 1940년대 김육불(金毓?)은 그 유명한 ‘동북통사(東北通史)’ 총론에서 “東北의 땅은 예전에는 遼東이라 칭했는데,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다. 요동지(遼東志)에서 이르기를 ‘멀리 九州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遼東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遼東이란 말은 지금의 東北 전부의 땅을 포괄하였다”고 썼다.

 

만주(滿洲)라는 말은 현대의 지리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요동이라는 말은 선진시대(先秦 時代, 춘추전국시대) 이래로 2천 년 이상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 시대 역사의 지리적 범주를 표현할 때는 요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이 문제는 아마도 현재를 기준으로 역사를 이해할 것인지, 사실이 발생한 당 시대를 기준으로 역사를 이해할 것인지 하는 역사 이해의 가장 기본적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육불은 “오늘날 극히 의미가 없고 극히 근거가 없는 것은 동북을 만주로 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주가 이름을 얻은 기원을 살펴보면 두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

 

하나는 불교에서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이름을 중국식 발음에 기초해 생긴 만주(曼殊)이다. 다시 말해서 문수보살의 문수(文殊)가 만주로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여진족 추장의 존칭이다. 그러나 불교의 문수보살의 중국식 발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통하고 있다.

 

따라서 만주(滿洲)의 음은 만주(曼殊)에서 유래되었고 만주의 뜻은 추장을 가리키니 이미 부족의 이름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국호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태조인 누르하치가 건국하여 본래는 후금(後金)이라 하며 숭덕(崇德)으로 개원(改元)하고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었다. 이런 차원이라면 만주가 여진족의 추장의 존칭어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 용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불가피하게 부적절한 말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엄연히 역사적 용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 말의 사용을 기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학도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작업은 역사적 용어에 내포된 개념을 분석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다.

 

 

▲청중 질문: 중국의 세력권 내에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나라가 한국, 월남뿐이라고 했다.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월남과 접하고 있는 태국, 라오스, 미얀마 등은 처음부터 중국 세력권 내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김한규 교수: 중국 세력권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태국과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웃한 월남과 달리 전통시대에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저는 중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국제관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일원적 세계질서를 구축함으로써 동질적 문화를 함께 창조하고 향유하였다는 측면에서 전통시대에 중국과 한국, 일본, 월남, 몽고 등 5개 나라의 범주 안에 존립하고 있었던 수다한 역사공동체들을 ‘동아시아 세계’의 성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청중 질문: 황하유역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 인정 받고 있다. 그런데 양자강 유역은 왜 그렇게 되질 못했는가? 양자가 문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김한규 교수: 원래 신석기 시대 이래로 양자강 하류지역에 하모도(河姆渡)문화와 양저(良渚)문화 등과 같이 황하 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용산(龍山)문화 등과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선진시대에는 양자강 유역에 이른바 ‘초문화(楚文化)’라고도 불린 만월(蠻越)문화가 전개되어 중원의 ‘中國’ 문화와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秦)에 의해 전국(戰國) 7국이 통일되어 만월 등 여러 역사공동체가 중국과 통합되었다. 진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漢)에 의해 이러한 상황이 장기화되었고 ‘화이(華夷)’ 융합이 이뤄짐에 따라 양자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은 약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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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1.04 20:25

    첫댓글 잘 읽었읍니다.
    손놓고 바라만봐야할 사안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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