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참나무
그해 첫눈이 내리던 날 설순은 자신이 멧돼지를 잡기 위해 설치한 덫에 물려 발목 뼈가 부서졌다. 아침 일찍 덫을 확인하며 가다가 전날 갑자기 쏟아진 낙엽에 은폐된 걸 발견하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예상했지만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병원에서 정강이뼈 골절 진단을 받고 부목을 댄 설순은 마루에 앉아 창해같은 하늘을 반쯤 가린 흰 구름을 쏴봤다. 그리고 마당 한 구석에 치워놓은 멧돼지 덫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단지 쇳덩어리에 불과한 그에게 쏟아부은 저주가 쓸데없지만 화가 올라오는 것은 어찌하지 못했으며 바로 그것이 설순의 참된 본성이었다. 멧돼지 발목을 움켜쥐어야 할 덫 날이 자신의 뼈를 으스러트렸다. 부목을 댄 발목에서 일어난 통증이 왼쪽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 혹독한 통증이 왔다.
"발목은 어찌된 겁니까?"
어느날 설순은 중이 있는 암자를 찾아갔다. 중은 암자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설순은 중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어려웠으며 마땅히 할 대답도 없었다. 중의 질문에 설순은 바로 전까지만 해도 왜 중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던 분명한 이유가 돌발적으로 생겨난 미묘한 감정이 자신의 의지와 다투면서 흐릿해졌다. 설순이 침묵한 채 서 있는 모습에 중은 다시 풀을 뽑았다. 중의 손은 뿌리가 돌을 껴앉고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늙은 소나무 껍질과 같았다. 스스로 깎았는지 머리카락은 들쑥날쑥, 마치 절뚝바리가 비료를 뿌린 보리밭과 같았다. 중은 속세에 엄청난 관심을 가진 사람처럼 다소 흥분한 표정이었지만 사실은 설순이 자신의 감정상태를 마음에 그린 후 그걸 바라봤을 뿐이었다.
"내가 줬던 뱀은 자셨소?"
이번에는 중이 대답하지 않았다. 암자는 매우 낡고 거추장스러웠다. 으름덩쿨이 지붕을 껴안을듯 늘어져 있었다. 설순이 서 있는 맞은편에는 큰 밤나무와 돌배나무, 그 좌우로 층층나무와 뚝버들이 서 있었다. 축축한 습기가 마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나무 밑에는 이끼와 검버섯이 들러붙은 바위가 제각각 앉아 있었으며 몇 마리의 다람쥐가 그 사이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고사한 뚝버들 가지에는 마른 느타리버섯이 시체처럼 매달려 있었다. 중간 키의 복자기 단풍이 붉은 잎을 매달고 있는데 그나마 그 빛으로 우울한 암자의 분위기를 살려놨다. 중은 매우 느리지만 간결한 동작으로 풀을 뽑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싸리비로 뽑아놓은 풀을 쓸었다. 풀과 흙이 꼬챙이처럼 단단한 싸릿가지에 밀리고 파이고 찔려 처참하게 한쪽으로 쳐박혔다. 그것은 영고성쇠의 반영이고 무질서의 최대치였으며 명암과 사생의 존재안에 그려지는 시간에 대한 순간 변화율이었다. 어떤 물리법칙으로 인간의 자의에 의해 뽑히고 파이며 흩어지는 물질들의 최종 위치를 구하려는 편미분 방정식 해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흩어져 정지하는 곳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러나 설순은 그것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몰려가고 그곳에서 마침내 정지함을 봤다. 그것은 명료한 해였다. 마당은 깨끗해졌다. 어둡고 우울한 마음이 잠깐 시원해졌다. 중이 풀을 뽑고 비질을 한 결과였다.
"먹었소."
중은 들고 있던 싸리비를 내려놓고 설순을 바라봤다. 순간 설순은 중의 얼굴이 뱀처럼 보였다. 고귀한 삼보의 빛이 흐려지는 걸 목격했다. 중의 눈은 뱀처럼 차갑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뱀의 혀처럼 예리하고 끈적거렸다. 몸에 걸친 옷은 뱀의 뱃가죽처럼 어둡고 건조했다. 설순은 자기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잔잔한 바람에 한 무리의 낙엽이 쓸어놓은 마당으로 몰려왔다. 소리는 기묘했으며 중간에 낀 정적은 가을의 고독함과 쓸쓸함을 함께 품고 있었다. 중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계속 설순을 쳐다봤다. 마치 설순의 가슴에 들어있는걸 꺼내려는것 같았다. 아니 이미 들어내 읽은 뒤였다. 그것을 알자 설순은 두려웠다. 자신의 의중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목이 무거워지고 아픈 다리가 낳은것 같았다.
"난 중들은 살아있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렇소?"
중은 다시 싸리비를 들더니 몰려온 낙엽을 쓸었다. 싸리비가 마당을 긁는 소리는 아까보다는 명랑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숲이 크게 움직이며 센 바람이 불었다. 근처의 낙엽들이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낙엽이 뛰어가는 모습은 마치 달리기 능력이 조금씩 틀린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달리는 것 같았다. 중은 침착하게 비질을 했다. 설순은 중에게 빨리 끝맺음을 하고 왔던 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의도한 것이 전혀 행동과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다. 중은 쓸기를 멈추고 비를 든 채 문 입구 낮은 섬돌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싸리비를 내려놨다. 중이 수행자인지 아니면 뱀의 화신인지 구별할 수 없으나 인간의 형상으로 설순 앞에 있는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