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삼부경 해설
'나무아미타불'이나 '극락세계'는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질 만큼 보편화된 용어다. 그러나 보편화된 사실과는 달리 그에 대한 정확만 개념이나 사상은 적잖은 오해 속에 묻혀 있다. 극락세계[淨土]를 주제로 하고 있는 정토경전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선 정토사상의 성립과 정토경전의 중심사상이 무엇인가를 알아 두어야 할 것 같다.
1. 정토사상(淨土思想)의 성립
인도에서 정토사상이 이루어진 것은 대승불교가 일어난 시대인데, 그것은 정토에 대한 경전의 결집(結集)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정토사상 또는 경토경전이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극락세계에 대한 사상이나 경전을 가리킨 것이다. 물론 정토란 부처님이 계시는 세계를 뜻한 말이지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전부터 다른 부처님의 정토에 비해서 유달리 신앙의 대상으로 널리 익혀 왔던 것이다.
이러한 정토 광전으로서는《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셋을 들게 된다. 이것을 흔히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부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와같은 경전이 인도에서 당초부터 일관적인 체계를 가지고, 한꺼번에 결집된 것은 아니었다. 이 세 가지 경전 가운데서 먼저 《무량수경》과 《아미타경》이 결집되고, 《관무량수경》은 이 두 경전보다 훨씬 뒤늦게 이루어졌을 거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또한 이 밖에 대승 경론(經論)을 보면 정토사상이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이 용수(용수, 150∼250쯤)의 저술이라고 한다면 정토사상은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꽤 발달 된 형태로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경과 논을 바탕으로 우리들은 인도의 초기 정토사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사상이 다른 사상의 영향을 받음 없이 순전히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극락세계의 원형이 인도 최고의 성전인 《리그베다》에 나오는 야마천국에 있다고 하는 학설도 없지 않다. 야마천국에는 상주부단(常住不斷)한 빛이 있고 그것은 불사와 불멸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정토사상의 바탕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어쨌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보다 영원한 생명과 원만한 세계를 바라는 것은 소박한 희망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소박하고 도 본질적인 욕구에서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지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출현됐을 법하다. 그 누구의 말을 빌 것도 없이, 종교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보다 절실한 과제임을 생각할 때, 정토사상은 중생들에게 충분히 구원의 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45년간의 부처님의 설법이 오로지 인간의 자각과 해탈을 위한 방편설이라고 볼 때 정토사상의 존재의미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다.
그러한 정토사상이 인도의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인가. 이런 의문은 결코 간단히 해명될 수 없겠지만, 경전의 내용과 거기에 쓰인 용어, 그리고 그 형식을 통해서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토사상은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때에 서북인도 지방에서 성립, 중앙아시아쪽으로부터 유통되고, 초기 대승불교의 지지자들과 같은 성격을 띤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불타의 교법(敎法)에 근거를 두고 형성됐을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2. 정토경전의 중심사상
아미타불
정토사상이 무엇인가를 한말로 한다면,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일을 말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아미타불이란 어떠한 부처님인가. 경전에 의하면 이 부처님은 현재 서방 극락세계에 계시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님이다.
아미타(아미타)라는 이 부처님의 이름은 원래 인도에서는 아미타유스(Amitayus 한량없는 수명을 가진 것, 無量壽)와 아미타바(Amitabha 한량없는 광명을 가진 것, 無量光)라는 두 가지 말로 표현되었다. 그것이 증국에 건너와 똑같이 아미타(阿彌陀)로 음역된 것이다. 더러는 무량수(無量壽)로 의역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글자의 뜻대로 하면 아미타유스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미타바의 번역된 말[無量光]로도 쓰였던 것이다.
초기불교나 부파(部派)의 불타관(佛陀觀)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는 현재불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미타불은 지금 서방 정토에서 법을 설하고 계시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인 보살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의 보살사상이란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이타(利他)의 정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대승보살[求道者]은 이 정신에 의해 각기 이타 구제의 청정한 원(願)을 세우고 그 완성을 향해 실천한다. 이 실천을 완성하는 일은 보살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양면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뜻하므로, 그것은 깨달음[菩提]에 도달한 것이고[到彼岸] 부처님이 된 것을 말한다. 이런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현재 많은 보살들이 함께 깨달음을 향해 실천하고 있고, 따라서 많은 부처님이 다른 세계에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미타불은 그 사상적 기반이 그와 같은 보살사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보살이었는데,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을 거듭하여 마침내 그 원을 성취, 지금 으로부터 십겁(十劫) 이전에 부처님이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아미타불은 대승보살도를 완성하여 타방세계(他方世界)에 출현한 부처님이다.
본원(本願)
본원이란, 아미타불이 부처되기 이전 법상보살 시절에 세운 원(願)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있는데, 아미타불의 이와같은 본원은 정토사상의 전개에 커다란 구실을 하게 된다.
이 본원의 내용을 보면 크게 나누어 다음의 넷으로 요약된다. 첫째, 아미타불에 대한 것. 둘째, 아미타불의 국토에 대한 것. 셋째, 그 불국토에 태어난 이에 대한 것. 넷째, 앞으로 불국토에 왕생하려는 이에 대한 것 등이다(무량수경 48願 참조).
이 가운데도 광명무량(光明無量)의 원과 수명무량(壽命無量)의 원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본원은 아미타불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광명은 지혜를 상징한 말이고, 수명은 자비를 상징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에 귀의하는 것은, 십만억 국토 저쪽에 있는 부처님에게 의지만 것 같지만, 사실은 지혜와 자비로 이루어진 본래적인 자신에게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극락정토(極樂淨土)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되어 이루어진 세계를 극락정토라고 한다. 그러면 이와같은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까.
극락(極樂)이란 말을 중국에서는 안락(安樂)이라든가 안양(安養)으로도 표현했지만, 범어로는 '즐거움에 있는 곳'(sukhavati)이란 뜻이다. 그 즐거움에 대해서 정토경전은 너무도 야단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이지만, 대승불교가 일어난 그 당시의 불교도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이상적인 세계로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칠보로 장식된 나무와 금모래가 깔린 연못이며, 서늘한 바람이불 때마다 천상의 음악이 들려오고, 음식은 생각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부르다는 등, 마치 동화(童話)의 세계같기만 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극락세계가 이상적인 세계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대승불교의 정토에 대한 사상을 구상적(具象的)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토(淨土)란 '정화된 국토' 라는 뜻인데, 그것은 '국토를 정화'하여 이룬 세계다. 국토를 정화한다는 것은 국토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맑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을 청정하고 완전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승보살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성불하도록 원을 세워 실천하려는 목표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불과(佛果)를 목표로 한 것이고 거기에 실현된 정토란 정각(正覺)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극락세계는 이와같은 의미의 정토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미타불이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운 본원에 보답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락정토를 설명하는 화려한 묘사는 모두가 깨달은 경지의 완전한 청정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본래 형상이 없는 세계를 형상이 있는 세계로 묘사한 것이다. 극락정토가 공간적으로 서쪽에 실재하는 세계처럼 말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서쪽에 있어도, 여기에서 십만억 국토를 지난 무한한 저쪽에 있는 것이다. 본래 공간(空間)을 초월한 세계인 것을 일부러 공간적으로 한정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깨달음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고 종교적 실천의 대상으로서 다가서게 될 것이다. '즐거움이 있는 곳' 이라고 한 것은 종교적이고 절대적인 깨달음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그것이 현세적이고 상대적인 세속의 즐거움에 견주어 상징적으로 보인 것인데, 이 점에서 극락정토의 모양은 대승불교에 있어서 정토관의 전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왕생(往生)과 염불(念佛)
이상과 같은 극락정토의 왕생을 말한 것이 정토경전의 주제다. 왕생이란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는 뜻인데, 그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극락정토가 본래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표현한 말임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에는 이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써 설해져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미타불의 본원 가운데는, 극락세계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열반에 도달한다는 원[必至滅度願], 이 생을 마치고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원[必至補處願], 부처님과 똑같이 삼십이상을 갖춘다는 원[三十二相願] 등이 있는데, 이것은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이 보살도를 완성하여 반드시 불과(佛果)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경전의 표현을 빌면, 극락 왕생을 원하는 것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켜[發菩提心]' 태어나려는 원이고,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위없는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得不退轉]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의미를 갖는 정토 왕생은 내세에서 실현된다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극락정토는 본래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세계인데, 공간적으로 서쪽에 있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시간적으로는 내세로 미룬다. 물론 본래는 현세라든가 내세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세계이지만, 그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사후에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극락정토에 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다.
그런데 이 때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이 태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스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화생(化生)은 이것을 말한다. 왕생에 대한 이와같은 관념은, 일찍이 초기불교에서 죽은 뒤 책상에 태어난다고 했던 것처럼 정토경전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정토 왕생의 사상은 초기불교의 생천(生天)을 매개로 해탈을 내세에 기대하는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정토 왕생은 무엇에 의해 가능한가 하면 그것은 염불(念佛)이라고 했다. 염불을 극락왕생의 대표적인 실천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도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도록 한 것이다. 아미타불을 명하는 사람이나 여러 가지 선근공덕을 쌓은 이가 죽을 때에는 아미타불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와서 그 사람을 극락정토에 맞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종래영(臨終來迎)에 의해 정토왕생 사상은 강만 설득력을 가지고 전개된 것이다.
3. 번역에 대해서
번역은 반역이란 말도 있지만, 어쨌든 번역을 하다보면 정독(精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작업도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이전까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토경전을 정독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힘이 달린 역자로서는 정독하는 기쁨보다는 정토 장엄에 대한 장황한 그 묘사 때문에 줄곧 고역을 치르기도 했었다. 이런 끈덕진 묘사를 과연 몇 사람이나 버티면서 읽어낼 것인가를 생각할 때 하는 일이 피곤해지려고했다.
읽히지 않는 글이란 무의미하다. 의사를 전달하는 말과 글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 목적은 뜻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 할지라도 전달 수단이 시원치 않을 때 그 진리는 묻히고 만다.
이런 입장에서 역자는 지묵(紙墨)으로 된 경전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절대시하고 싶지도 않다. 뜻을 전달하는 데에 필요하다면 더러는 지나치게 지루한 표현을 줄일 수도 있고, 원문에 없는 몇 마디 말을 보탬으로써 끊어진 뜻을 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구실은 또한 번역의 의무이기도 하다.'뜻에 의지할 것이지 말에 팔리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역의 이러한 태도를 명시할 말씀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옮긴 《무량수경》은 강승개(康僧鎧)의 한역본(漢譯本)을 토대로 범어(산스크리트) 원전에서 번역한 이와나이 문고(岩波文庫) 《정토삼부경》을 참고하였다. 범어 원전에 실린 《무량수경》의 이름은 '극락의 장엄(莊嚴)'(Sukhavativyuha)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번역된 것으로는 모두 다섯 가지인데 강승개의 역본(譯本)은 그 중 세 번째로 번역된 것. 이 경은 너무 장황한 표현으로 그 뜻마저 전달되지 않을까 염려, 긴요하지 않은 몇 군데를 생략하면서 의역(意譯)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그리고 게송(偈頌)은 운허(耘虛)스님의 번역에 약간의 손을 댄 것이다.
《관무량수경》은 범어 원전이 남아 있지 않을뿐 아니라, 한역도 강량야사(畺良耶舍, 383∼442)의 번역본 외에 다른 번역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한역만을 가지고 번역했다.
《아미타광》은 《무량수경》에 비하면 아주 짧은 경전인데, 지금 범어 원전으로 전해진 것은 《무량수경》의 원전과 같은 이름이다. 한역은 두 가지. 우리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구마라습(350∼409)의 번역본이다. 이 역본을 대본으로 역시 이와나이 문고본에서 도움을 입었다.
1971년에 자운(慈雲) 큰스님의 원력으로 1차 출간되었던 것을 그대로 개간했다. 재간본에서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책 후미에 간단한 역주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