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주의보
권이화
손바닥이 기울어진 채 기차를 타고 팔랑팔랑 바다로 갈래
바다의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은 것들에 닿으려는 표정으로
고백하는 노을을 흩어놓을 때, 손은 꿈을 멈추지 않는다
멸치 떼 같은 명랑의 군무가 물보라를 일으키네
어떤 꿈이 바다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보며
창밖으로 팔랑팔랑 넘어가는 명랑한 이름들
오늘의 바다는 풍랑주의보, 검은 바다의 안쪽이 위태롭네
여기서부터 섬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러니까 팔랑팔랑 우리의 명랑주의보는 쾌속정의 일
명랑에서 명랑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들며 쾌속정은 달리지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멀어지는, 여기는 꿈 명랑이야
바다를 밀면 죽은 물고기 떼가 가득 찬 바다의 내부
파도를 타고 수많은 계단이 있는 푸른 당신에게 도착한다
내 손은 여전히 섬에 도착하는 일, 속도를 줄이지 않는 명랑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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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화 / 1961년 경북 안동 출생. 2014년 《미네르바》등단.
흉몽
⸺정육점으로 간 소
이설야
소가 벽에 걸려 있었다
단추를 푼 옷처럼 너덜너덜한, 머리 잘린 소
축축한 내장과 선지가 빨간 대야 속으로 떨어져 깊이 잠들었다
상처의 속을 다 헤집어 꺼내놓고 소라고 부르는
소라고 해서 소라고 부르고 있는 입들
천장 위에 매달린 붉은 등이 흔들린다
하얀 비계를 떼어내고 뼈에서 살을 분리하며
소가 되어가는 일
자꾸 되살아나는 망집을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으며
버리고 또 버리는 일
죽은 자 앞에서 염을 하듯 노련한 여자
얼굴 반쪽을 덮고,
목을 조르며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넝쿨식물 같은
푸른 멍을 보았다
자신의 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자
붉은 등이 벽에서 벽으로 번져가고
도마 위에서 모두가 고요해진 순간
드디어 여자는
소의 그림자까지 자를 수 있었다
피 묻은 입과
떨리는 손으로
아주
잠깐
⸻월간 《현대시》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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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 / 1968년 인천 출생. 인하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정원의 세계
김예강
정원을 걸어 나온다
오전의 장례미사는 슬퍼졌다가 슬프지 않았다
반쯤 햇살이 내려앉고
반쯤 그늘진 곳에서
마지막 골목을 걸어 나온다
햇살과 그늘이 시간의 반을 가지는 곳에서
지나간 시간에게 지금의 시간을 내준다
망각을 만나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뻗어보는 식물들
나뭇가지 사이 나뭇가지
그늘진 곳으로 어느새 어디선가
검고 긴 머리칼을 내리는 당신의 손들
아직 피어있구나
난 늘 그래
기억은 그래
맨 마지막까지 피어있는 꽃이라고 너는 그랬다
우리는 식물이 될 거라고 말한다
⸺계간 《시와 사상》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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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강 / 1961년 경남 창원 출생. 2005년 《시와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고양이의 잠』.
이물감
이해존
원숭이가 털을 고르듯
쭈그려 앉아 바닥에 놓인 신문을 읽듯
쌀알을 휘저어 돌을 골라낸 적이 있다
고르는 것과 골라낸 것을 갈라놓고
같은 색깔이 될 때까지
쌀알이 나를 집중할 때까지
촉감이 파고든다
모래사장에 깔아놓은 은박지
앉은 자리를 향해 오므라드는 바닥
흘러 들어온 모래 몇 알이
모래사장보다 따갑다
옷에 달라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내다
고양이 털로 짠 스웨터를 생각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이가 핏기를 잃어가는 순간
나를 본뜬 차가운 손을 만질 때
낟알 껍질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몸속에 돋아나는 촉감
밥을 먹다 돌을 깨문다
무방비 상태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것
온통 나를 골라내는 순간
남겨지는 것
식탁에 앉아 잠시 선명해진다
⸺ 월간 《시인동네》 201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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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존 / 1970년 충남 공주 출생.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승진
채길우 야생완두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길들여지면서 열매가 다 익은 후에도 자발적으로 깍지가 열려 씨앗을 퍼뜨리는 능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었으므로 식용작물이 되었다. 꼬투리를 잡은 누군가의 손이 비틀린 멱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때까지 입 꽉 다물어 속을 비치지 않았기에 사랑받았고 함부로 옷이 벗겨져 다섯 알 중 네 개를 잃고도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다는 산술로 계약을 따냈다. 완두는 좀처럼 터지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 초록의 순종으로서 같은 껍질 속 똑같이 생긴 얼굴로 가지런히 줄 서 기다리며 선별과 배제는 우연이거나 더 높은 곳의 뜻임을 순순하게 다짐하는 겸손한 위치에서조차 간택되기 위해 무거워진 목을 늘어뜨린 비산도 탈출도 하지 않는 어여쁜 두상들 ⸺《웹진문장》 2019년 4월호 ------------ 채길우 /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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