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웡의 세계
원제 : The World of Suzie Wong
1960년 미국영화
감독 : 리처드 콰인
원작 : 리처드 메이슨
출연 : 윌리암 홀덴, 낸시 콴, 실비아 심즈
마이클 와일딩, 재클린 챈, 로렌스 네이스미스
할리우드 대스타 중에서 아마 윌리암 홀덴 만큼 아시아와 관련이 깊은 배우도 드물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콰이강의 다리'는 태국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고, 그 외에도 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영화에 몇 편 출연했습니다. '원한의 도곡리 철교'를 비롯해서 '모정' '원산만의 서브마린' 등. 1960년 작품 '수지 웡의 세계'는 아예 그가 중국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건축가였던 미국인 로버트(윌리암 홀덴)는 화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버리지 못하여 딱 1년치 생활할 돈이 있는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러 홍콩으로 옵니다. 배 안에서 그는 영어가 유창한 젊은 중국여자를 만나는데 그녀는 로버트가 자신의 지갑을 훔쳤다고 잠시 오해하여 가벼운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오해가 풀린 후 그녀는 자신을 미 링 이라고 소개하고 아버지는 집이 4채 있는 부자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로버트,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외국인과 어울리는 걸 싫어한다며 배에서 내린 후 사라집니다.
돈을 절약해야 하는 로버트는 홍콩의 값싼 호텔에 방을 구합니다. 호텔 1층에 입주해있는 바에 한 잔 하러 갔다가 로버트는 미 링을 다시 만나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수지 웡(낸시 콴) 이라 부릅니다. 알고보니 그녀는 그 바에서 꽤 인기가 있는 여급이었고 머리속의 동화같은 상상속 자신을 실제처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수지 웡은 로버트에게 매우 호감을 보이고 그가 자신을 콜 하기를 바라지만 로버트는 그럴만한 형편이 못 된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대신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지 웡은 아주 약간의 보수를 받고 로버트의 모델이 됩니다.
중년을 바라보는 가난한 화가와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중국 난민 출신으로 여겨지는 젊은 바 여급과의 만남. 더구나 동서양의 인종차이. 하지만 의외로 수지 웡 에게는 소녀같은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로버트에게 순진한 소녀처럼 매달리기도 하고 질투를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천박함 속에 존재하는 순수함이랄까요? 선량한 로버트는 수지 웡을 술집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우해주면서 그녀에게 조금씩 감정이 생겨납니다. 이런 와중에 로버트는 도움을 주는 지역 은행가인 오닐을 만나고 오닐의 딸 케이(실비아 심즈)는 로버트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케이는 로버트의 그림을 팔아주려고 애쓰는 와중에 수지 웡의 존재를 알게 되고 로버트는 그녀를 모델이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수지 웡의 엉뚱한 행동으로 로버트는 케이에게 민망한 상황을 몇 번 만듭니다.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자 같은 백인, 글도 모르는 천박한 술집여자인 동양인 수지 웡,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 여자는 상대가 안되는 큰 차이가 있고 당연히 어지간한 남자라면 은행가의 딸을 선택하겠죠. 더구나 노력을 안해도 제 발로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는 여자인데. 하지만 '영화'에선 다르죠. 이 가난하여 돈이 절박한 화가는 제발로 굴러들어온 복이라고 할 수 있는 은행가의 딸 대신, 너무 딱한 처지의 수지 웡을 선택합니다. 그것도 동정 때문이 아닌(사실 로버트가 누굴 동정할 처지도 아니고) 진심으로. 케이는 자신이 중국 매춘부와 경쟁해야 한다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죠.
'수지 웡의 세계'는 일종의 중국판 '귀여운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다른 점은 남자가 부자가 아니라는거죠. 가난한 백인과 더 가난한 동양 여인의 로맨스입니다. 그것도 신분이 미천한. 먹고 살기 위해서 바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몸을 던지는 여자, 그럼에도 이런 유형의 우리나라 70-80년대 호스티스 영화와는 달리 어둡지 않고 꽤 경쾌하게 전개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수지 웡을 연기한 낸시 콴의 분위기가 순수하면서도 재미난 캐릭터입니다. 그녀를 꽤 정중하게 대하는 선량한 신사같은 윌리암 홀덴의 모습도 재미있고.
그럼에도 오히려 저는 그렇게 영화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 때문에 보는 내내 여주인공 수지 웡이 참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술집에서 외국 선원들에게 몸을 던지는 여자지만 영혼은 맑고 순수하며 의외로 로버트에게 순정적인. 이런 순수한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에 수지 웡의 처지가 더 없이 가엾고 마음이 아프게 느껴지지요. 오히려 우리나라 신파극처럼 흘러간다면 그냥 그랬을텐데. 더구나 수지 웡 에게는 로버트에게 말 못할 다른 비밀도 있었지요.
어둡고 처량한 이야기를 밝고 유쾌하게 이끌어간 영화입니다. 수지 웡 뿐만 아니라 은행장의 딸이면서 평생 처음 사랑한 남자에게 수지 웡으로 인하여 사실상 딱지를 맞는 케이라는 캐릭터도 안됐지요. 영화는 후반부에 큰 비극이 일어나지만 외면적으로는 로맨스가 결실을 맺는 해피엔딩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상 비현실적인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할리우드의 톱 스타인 윌리암 홀덴은 군인역할이나 서부극 등에도 잘 어울렸던 배우지만 50년대의 대표적인 로맨스 가이 답게 이런 로맨스 영화에서도 빛나는 활약을 했습니다. 단조로운 표정을 가진 배우임에도 제법 장르의 폭이 넓은 배우입니다. 수지 웡 역의 낸시 콴은 이 영화가 데뷔작인데 아시아권 여성으로서 윌리암 홀덴 같은 메이저 스타가 나오는 영화에 당당히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준수한 미모를 가진 아담한 여배우인데 이후에도 미국영화에 주연으로 계속 출연하면서 팻 분, 글렌 포드 등 쟁쟁한 스타들과 공연하는 행운이 이어지지만 데뷔작인 '수지 웡의 세계' 만한 평가를 받는 영화를 이어가지 못하여 별다른 대표작을 남기지 못합니다. 연기나 마스크를 감안하면 안타까운 배우지요. 차라리 60년대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활약했다면 리칭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수지 웡의 처지를 생각하면 시종일관 안타깝게 바라봐야 하는 영화지만 꽤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로맨스 입니다. '사랑의 비약'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 '뜨거운 포옹' 등 로맨스 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리처드 콰인이 연출했습니다. 그다지 대단한 평가를 받는 감독은 아니지요. 그가 연출한 '뜨거운 포옹'이라는 영화는 오드리 헵번 출연작 중에서 가장 인기없는 영화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제법 재미있게 영화들을 만든 감독입니다. 국내에 개봉한 작품이고 윌리암 홀덴은 꽤 많은 개봉작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배우입니다. 홍콩 현지촬영을 했고 네온사인 가득한 화려한 밤거리의 발전한 홍콩과 척박하고 가난한 난민들의 마을이 공존하는 이면을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어느 곳이나 화려하고 호화스런 불빛 뒤에는 그런 곳에서 생계를 위해서 몸을 던지는 힘겨운 여인들이 존재하듯이.
평점 : ★★★ (4개 만점)
ps1 : 낸시 콴은 이 작품으로 골든 글로브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21세에 불과한 갓 데뷔한 아시아계 배우로서 파격적인 결과였죠.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그것도 대타로 캐스팅되어 얻은 성과입니다.
ps2 : 원래 '남태평양'에서 하와이의 아름다운 원주민으로 출연한 프랑스 누엔에 맡았던 역할인데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낸시 콴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낸시 콴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거죠. 프랑스 누엔은 이후 찰톤 헤스톤 주연의 '다이아몬드 헤드'에 출연합니다. 그 영화도 언젠가 소개해 볼 생각입니다.
[출처] 수지 웡의 세계 (The World of Suzie Wong, 60년)|작성자 이규웅
첫댓글 '스지웡의 세계'를 본 건 10대, 그러니까 60년대초다.
미군부대에 다니는 이웃 사촌이 부대에 날 데려갔고
그날 막사에선 '스지웡의 세계'를 상영했다.
이 필름은 한국 개봉 전이라 알지도 못한 필름이었는데
걍 재미있게 보았다. 막사 안의 극장이라 벌판에 흰천막치고 필름을 돌렸는데
자막이야 없고 걍 영어대사를 보며 아하, 홀든과 낸시 콴이 주연이구나 하며 설렘을 안고---
세월이 흐르고 신문에 '수지웡의 세계' 광고가 나와 내가 본 영회인데 하며 놀랐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