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김재수
경북 최초(慶北 最初)의 장로교인(長老敎人)
- 상주(尙州)사람 김재수(金在洙)
1. 들어가는 말
무릇 모든 역사는 세월이 지나면 잊혀 지거나 의미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함에도 우리는 기록하는 일부터 보관하고 다음세대로 이어가는 일연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소홀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홀함은 결국 어떤 시점에 이르러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밝히는 일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상주문화원에서 편찬 중인『尙州史』 집필자로 선정되어『상주교회사』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한 인물을 발견했다.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상주사람 김재수(金在洙)’
이름 앞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우연히 내 이름과 똑 같기도 하거니와 더구나 상주 출신이라는 점과 경북 최초의 장로 교인이라는 데 호기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지역 교회사를 조망하면서 기록으로 전해진 내용이 부족하여 대부분 교회의 설립에 대한 내용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상주지역만 하더라도 상주에 교회가 설립된 기록상 최초의 해는 1908년이다.
상주군 모서면 석산교회, 화서면 사산교회, 사벌면 금흔교회, 낙동면 화산교회, 오리원교회, 공성면 오광교회가 먼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당시 선교사들이 개척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공식적으로 기록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각 지역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경로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들에 의해 초기 교회 형태의 모임이 가정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상주 지역 모 교회라 할 수 있는 서정교회(상주교회, 상주시민교회 전신)는 1910년 선교사 부해리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상주교회나 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10년 전인 1900년 5월 1일 ‘정씨부인에 의하여 상주읍 서성동 소재의 초가 4칸을 구입하여 전도사(성명미상)가 교회개척하다.’ 로 기록되어 있으며 오광교회 역시 ‘1904년 1월 상주군 공성면 금계리에 건평 10평을 건립하고, 김필구씨의 주동으로 약 40여명의 결신자를 얻어 1904년 3월 31일 창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이 교회들은 이미 100주년 행사를 마쳤다.
‘경북 최초’라는 수식어 앞에 장황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김재수 이 외에도 어쩌면 먼저 기독교인이 된 분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문헌에 나타난 이름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은 까닭이다.
김재수란 이름에 대해 좀 더 구체적 사료를 찾고자 그의 고향인 낙동면 화산이나 화산교회에 문의했지만 올해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는 화산교회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초기 대구․경북지역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사람이 어떻게 상주에는 이토록 알려지지 않고 어느 한 곳에도 기록이 없는 이유가 궁금하지만(혹 그 내용이 있을 수도 있음) 이 분이 초기 기독교인이 된 후 당시 상황으로 보면 기독교인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집안이나 지역민에 의한 박해로 고향에 돌아와 선교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까닭도 있을 것 같고, 또 하나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않는다.’는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고장이 이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이라도 이 글 이후에 이 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더 밝혀졌으면 하는 바램과『대구장로교회사연구』라는 책과 『경북기독교회사』, 그리고 대구․경북지역의 몇몇 교회사 속에 화석처럼 숨어있는 이 인물을 조심스럽게 향토 상주의 인물로 드러내는 일 또한 보람일 것 같아 기록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찾아보기로 했다.
2. 출생과 행적
가. 대구장로교회사의 기록
『대구장로교회사연구』라는 책을 낸 이재원은 그의 책에 김재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애덤스 목사와 같이 대구에 온 어학선생 金在洙는 부해리 목사의 증언으로는 상주 출신이다. 그는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여 8세에 상주군 화산리 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조승장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선산 구미 상모동 출신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이것은 그가 선산 구미 상모교회를 담임한 사실에서 비롯된 말인 것 같다.
김재수는 젊은 시절 가슴에 심한 종창을 앓던 중 부산선교부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891년에 걸어서 부산 선교부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하디 의사(하리영, Dr. R. A. Hardie)를 만났으나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큰 실의에 빠졌다. 하디 의사는 카나다대학 선교부의 후원으로 1890년부터 부산에서 의료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하디 의사는 실망한 김재수 에게 예수를 믿도록 전도하여 세례를 받도록 만들었다. 그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부산 선교회의 손안로 목사(Rev. Andrew Adamson)로 알려져 있다. 제일교회에 접수된 이 명증서에는 그에게 세례를 준 목사는 ‘빅토리아 장로교 손목사’라고 적혀 있다. 세례교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김재수는 문중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고 있던 중 1894년에 베어드 목사가 상주에 들렀을 때 그는 베어드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음 해(1895年) 5月에 그는 그곳에서 애덤스 목사(안의와, Rev. James E. Adams)를 만나게 된다. 애덤스는 한국에서 선교하기 위해 그의 누나가 이미 와있는 부산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때 김재수는 베어드의 소개로 애덤스의 어학선생(language teacher)이 된다. 애덤스 목사가 1897年 가을 대구 스테이션의 선교사로 부임할 때 그는 애덤스의 어학선생 신분으로 동행했다. 그는 남문안 선교기지 안에서 같이 살면서 전도서적을 팔고 같이 순회전도를 다니는 동안 자연스럽게 애덤스의 조사(助事helper)가 되었다. ‘90년사’는 그가 대구에 올 때의 신분을 통역자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영어실력이 통역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훗날 이름을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했다. 그 시기는 언제인지 미상이다.
1897년 겨울에 존슨 의사가 와서 애덤스 가족과 함께 남문 안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을 때(남문 안 예배당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 예배에 참석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조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그는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교인 또는 가장 먼저 믿은 장로교인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훗날 장로가 되고, 경북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경성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한국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에 경상소회 장로 총대로서 애덤스 목사와 같이 참석했고, 1906년 9월 12일 경성 연동교회에서 열린 공의회에 역시 애덤스 목사와 같이 경상소회 장로 총대로 참석했다.
1908년 9월 6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열린 제2회 대한노회에 대구읍교회 김성호 장로와 같이 선산 부지동교회 장로 총대로 참석했다. 김기원 장로는 1913년 6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 1914년 1월 14일 경상노회 제7회 임시노회에서 경남 창원 웅천교회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1915년에 경북노회로 移名하여 경산 사월교회(사돌) 목사, 1925年에 대구중앙교회 목사, 그 후 구미 상모교회(모릅실)에서 시무, 1931년에서 1936년 기간에는 대구제일교회 최재화 목사 재임 중 동사목사로서 교회를 섬겼다. 노령과 질병으로 은퇴하신 후 궁핍한 말년을 보내시다가 1941년 1월 23일 별세하셨다.
부해리 목사는 “김기원 목사는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해서 주일학교를 많이 도우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구미 상모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김성현 장로는 “김기원 목사는 성경 말씀을 많이 아시고 또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해 주심으로 작은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회상했다. 일제 말기 김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남산동, 한 울타리 안에서 사셨던 전 대구신학교장 정규선 목사는 “김기원 목사님은 주야로 성경을 읽으시고 묵상하시며 눈물겨운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언제나 웃음일 잃지 않으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셨다”고 회상했다.
그의 무덤은 성서 시립공원 묘지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헐려서 근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노회록에는 김기원 목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것마저 찾을 길 없다. 제일교회 당회실에는 김기원 목사가 기증한 손때 묻은 대한노회록이 몇 권 남아 있을 뿐이다. 후손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 경북교회사 각주의 기록
한편 김재수의 행적에 대해 경북 교회사 각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김재수는 부산선교회 소속 손안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1893년 4월 28일 선교사 베어드가 경북지방을 전도여행 할 때 상주에서 영접하여 친척들에게 소개하고 음식을 대접했다. 1894년 베어드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 1895년 5월 그곳에서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 그의 어학선생 겸 조사가 되었다. 그는 이어 1897년 아담스 선교사 가족이 대구선교지부에 부임할 때 아담스와 함께 동행하여 대구 남문 안에서 첫 예배에 참석한 유일한 조선인이 되었다.
이어 장로회보에는 그를 “명치 27년 안의와 선교사를 상봉하여 전도를 받고 결신하시매 경북에 초신교인(初信敎人)이요, 그 후에 첫 전도사요, 첫 장로요, 첫 목사로 피임되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13년 평양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였고, 경상노회 제7회 임시회(1914. 1.16 경남 웅천읍교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그 해 경남 웅천지방에서 시무하였으며, 1920년에는 경남 진영에서 시무하였다. 1934년에는 경북 서남지방에서 전도 목사로 시무하였고, 1925년에는 대구 중앙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다가 1932년 목사를 사면하였으며 1941년 1월 23일 오전 9시에 향년 84세로 생을 마쳤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내용으로 보면 김재수는 1891년에 부산에 내려가 세례를 받고 다시 고향으로 귀향한 것 같다. 그러나 그 귀향은 3년에 불과하다. 그는 1894년에 베어드를 따라 부산으로 갔으니. 그의 고향에 대한 기록은 이 것 뿐이니 그를 아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다. 송천교회 100년사 기록
한편 김천에 있는 송천교회(松泉敎會)에도 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송천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기원(金基源, ?~1941. 1.23)이다. 그는 김재수(金在洙)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김기원으로 개명했다. 그는 우리 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부해리 선교사의 경북 서편 지방 선교 활동에 함께 참여하여 1901년 송천교회 창립 이후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조사(助事)로서 교회를 섬겼다. 그후 대구 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장립을 했으며, 1913년 장로로서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14년 1월 경남 창원 웅천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아 경북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 경북 노회로 移名하여 경산 사돌[沙月] 교회, 1920년대에는 대구 중앙교회, 구미 상모교회에서 시무했고, 1931년부터 최재화 목사와 함께 대구제일교회 동사목사(同事牧師)로 교회를 섬겼다. 그후 노령과 질병으로 은퇴하여 궁핍한 말년을 보내다가 1941년 1월 23일 소천하였다.”
그의 무덤은 대구의 성서 시립공원묘지에 있었다고 하지만, 도시 계획으로 헐려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또한 묘지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은 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후손들의 존재 유무조차도 알 수 없음은 오늘의 역사를 잇고 있는 우리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한다.
라. 대구제일교회 70년사와 90년사의 기록
1898년 12월 18일 모였던 대구제일교회 제1회 당회록에 ‘기도로 본회를 개최하였다. 안의와 목사와 김재수 조사가 참석하였다.
1) 남문 안 예배당의 시작 –창립교인 7명의 명단- 남문 안 예배당은 대구제일교회의 처음 이름 중 하나이다.
“대구제일교회70년사”(이하 70년사)는 “안 목사는 그의 통역자이며 조수였던 김재수(기원)氏와 함께 내구하여 선교 사업에 힘썼으며, 익년 1898년 의사 장인차씨의 내구를 맞이하여 안목사 댁에서 교회를 조직하였으니, 선교사 ①안의와 ②의사 장인차 ③조사 김재수 ④학습교인 서자명 ⑤정완식씨 등 교인은 7명이었다. 실로 이것이 제일교회의 창립인 동시에 慶北 최초의 교회였던 것이다.
2) 한편 “대구제일교회90년사”(이하 90년사)는 “드디어 1897년 봄에 안의와 선교사는 배위량 선교사를 대신하여 그의 조수 김재수 씨와 같이 대구에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선교 사업에 착수하였다. 다음 해인 1898年 의사 장인차 씨의 내구를 맞이하여 안의와 목사는 교회를 조직했다. 교인은 안의와 선교사, 장인차 의사, 김재수 조사 및 학습교인 서자명, 정완식씨 등 7명이었다. 이것이 창립 당시의 제일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마. 대구 최초의 주일학교와 야외소풍에서의 흔적
1900년경 주일 아침 예배를 보고 난 다음 몇 명의 소년들이 모였다. 이 모임을 선교사들은 대구 주일학교라고 불렀다. 애덤스 부인은 1898년 봄과 가을에 이 모임을 지도했다. 이때는 주로 노래와 성경 구절을 가르쳤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장소를 옮길 필요가 생겼다. 어떤 때는 남아있는 학생들이 없을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도망간 원수를 찾는다고 윗옷을 벗고 우리 교실에 들어와 우리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그 때 우리를 놀라게 한 그 사람이 지금은 우리 교회의 성가대원이 되어있다.
우리들은 장소를 바꾸어 존슨 부인의 사랑에서 만났다. 출석부를 만들고, 출결상황을 기록했다. 성경구절이 적힌 카드를 줄 때 아이들은 좋아했다. 매 주일 한 구절의 성경을 외우는 것은 일부 학생들에게는 너무 쉬웠다. 우리는 각 성경책에서 다섯 구절에서 한 장 정도를 외울 수 있는 학생들에게는 신약성경 한 권을 상품으로 주었다. 벌써 4명이 상으로 신약성경을 받았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갈라디아서까지 외울 수 있다. 8살 먹은 꼬마 소년은 일주일 만에 마태복음 2장을 다 암송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년을 『마태복음 2장 소년』이라고 부른다. 우리 학생들 중에는 6개월 간 3일만 빠지고 다 출석한 학생들도 있다.
우리들의 프로그램은 노래, 혼자서 성경구절 암송, 합창으로 십계명 암송, 그리고 김재수 조사의 성경 이야기 듣는 것 등등이었다. 그리고 학습공부를 위해서 아이들이 기도하는 법도 가르쳤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브루언 목사와 야외에서 야구하는 놀이였고, 다른 하나는 야외에 소풍가는 것이었다. 소풍을 갈 때 내가 비용 청구서를 만지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나의 어학선생님께 맡겼다. 나는 단지 예산이 적절하게 배분되었는지, 예산은 풍부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다.
소풍가는 날. 내가 소년들과 같이 가는 것이 어색한 것 같아서 음식을 짊어진 두 사람의 일꾼을 부처 아이들을 먼저 앞세워 보냈다. 조금 후에 나의 선생님이 따라오고, 그 뒤에는 성경 이야기 들려주는 김재수 조사가 따라왔다. 어떤 교인은 마지막으로 처진 두 소년을 데리고 따라왔다. 소풍 장소는 교회에서 약 6마일 떨어진 산속의 시냇가였다. 우리들의 목적이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우리들이 목적지에 가까이 도달했을 때 벌써 몇 명의 아이들은 멱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후다닥 뛰어나와 옷을 주어 입었다. 좀 더 들어가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햇볕을 막기 위해 포장을 치고 샤워를 하기 위해 개울물을 막았다. 세발 탁상을 펴놓고 그 위에 아이들의 아침밥을 내 놓았다. 지금 시간은 11시이다. 아이들은 모두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했다. 나는 여러분들의 아이들이 시냇가의 발을 담그고 앉아 있거나, 물속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음식을 놓고 먹는 장면이나, 근처 바위 위에 앉아서 조선 참외를 우둑우둑 씹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연달아 부르는 찬송 소리는 저녁 하늘에 메아리쳤다. 우리들이 남문을 지나 예배당에 이르기까지는 씩씩한 군가를 힘차게 불렀다. 오늘의 마지막은 우리들의 『마태복음 2장 소년』이 큰 형들의 등에 업혀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꾸준히 가르쳐 온 남을 도와주는 정신,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노라』하신 주님의 정신을 입증한 것이 되었다.
3. 김재수의 신앙경력과 사역 현황
위의 내용을 참고로 그의 신앙경력과 사역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1년에 부산선교회의 손안로 목사(Rev. Andrew Adamson)로부터 세례 받음
1895년 5월 애덤스 목사(안의와, Rev. James E. Adams) 어학선생(language teacher)
1897년 대구남문안교회 창립예배참석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조선 사람
1898년 봄부터 대구 주일학교 교사로 활약
1905년 9월 11일 경성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한국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에 경상소회 장로 총대로서 애덤스 목사와 같이 참석
1906년 9월 12일 경성 연동교회에서 열린 공의회에 역시 애덤스 목사와 같이 경상소회 長老 총대로 참석
1908년 9월 6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열린 제2회 대한노회에 대구읍교회 김성호 장로와 같이 선산 부지동교회 장로 총대로 참석
1913년 평양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
1914. 1.16 경상노회 제7회 임시회(경남 웅천읍교회)에서 목사로 장립. 경남 웅천지방에서 목사로 시무
1915년 경북노회로 이명. 경산 사월교회(사돌) 목사
그 후 구미 상모교회(모릅실) 시무
1920년 경남 진영에서 시무
1925년에는 대구 중앙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
1931년에서 1936년 기간에는 대구제일교회 최재화 목사 재임 중 동사목사.
노령과 질병으로 은퇴
1932년 목사를 사면
1934년에는 경북 서남지방에서 전도 목사로 시무
1941년 1月 23일 소천
한편 경북교회사 에 나타난 김재수 목사의 1900년-1919년간 경북 일원의 사역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00년 영천군 대창면 鳥谷교회가 설립 조사 김기원이 시무
1901년에 조곡교회 조사를 사면
1902년 김천군 松川교회에 방명원을 대신하여 김기원이 시무, 선산 고아면 槐平교회에 김 기원이 조사로 임명
1903년 구미면 上毛洞교회(현 상모교회)설립과 함께 김기원이 조사로 임명
1904년 칠곡군 인동면 眞坪교회가 설립되고 김기원이 조사로 임명
1905년 大邱南城町교회 조사 김기원이 사면
1906년 칠곡군 약목면 竹田동교회(현 죽전교회)가 설립되고 조사 김기원이 김천 月明교회 와 겸임
1907년 칠곡군 黃鶴교회에 조사 김기원이 김영채를 대신하여 시무
1908년 月明교회 조사 김기원 사면 칠곡 崇烏교회 조사로 시무
1909년 선산군 장천면 上林교회가 설립. 김기원이 조사로 임명, 칠곡 竹田교회 조사 사면
1911년 선산군 月湖교회에 조사로 김기원이 시무. 본교회와 군위군 鳳凰 달성군 砧山 3교 회를 겸임
1912년 칠곡 邑內교회 조사 김기원이 사면, 달성군 租岩교회 김기원 조사를 임명
1913년 달성 新榶교회에 조사 김기원 사면
1915년 달성군 침산교회는 조사 김기원 사면
1916년 영천군 平泉교회에 현동선, 김기원이 영수로 시무하면서 조곡, 성내, 명주, 동도, 의 성군 양지 6교회를 김기원으로 교체
1917년 영천군 平泉교회는 영수 현동선, 김기원을 다른 이로 대신하고 경산군 東湖교회 목 사 김병농을 대신하여 김기원이 시무하고 啓南학교를 계남私塾으로 인가
1918년 경산군 東湖교회 김기원 목사 사임. 서성오 교체하고 沙月교회에 목사 서성오 대신 김기원 교체
1919년 경산군 沙月교회 조사 김기원을 대신 변선욱이 金谷교회와 겸임
4. 마무리하며
이상과 같이 『대구장로교회사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그 외 각종 자료에 나타난 ‘경북 최초의 기독교인임과 목회자’인 상주 사람 김재수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신앙인으로 초창기 화산시절 몇 년을 제외하면 상주에서 활동한 흔적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이 지역 복음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구체적 사항은 아직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둔다.’라는 진리를 따라 비록 그의 행적으로 나타난 구체적 사실은 발견할 수 없다 하더라도 초대 교회 첫 교인이요, 목회자로서 그의 영향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대구․ 경북 지역은 물론 상주지역 복음화에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확신하며 이 글 이후 이 사람에 대한 또 다른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끝>
필자 : 김재수(金在洙)
상주사 집필위원, 현 남산중학교 교감
<수상>
창주아동문학상 받음(동시, 제비집)
기독교 아동문학상(동화 가작, 하얀 털장갑)
한정동 아동문학상 받음(동시, 겨울 일기장)
방송대학 문학상(동화, 꽃들의 연주회)
상주시 문화상(예술부문)
M.B.C 창작동화 입선(동화, 철조망이 피운 꽃)
해강아동문학상 받음(동시, 농부와 풀꽃)
<개인 작품집>
낙서가 있는 골목(동시집), 겨울 일기장(동시집), 농부와 풀꽃(동시집)
사랑이 꽃피는 언덕(동화집)
하느님의 나들이(동화집)
<주요경력>
한국예총상주지부 부지부장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지회장 역임
상주아동문학회장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