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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백제 곤지왕(왜왕(興),일본 웅락천황)이 부른 노래(만엽가1번)
문배샘 추천 0 조회 67 10.08.09 00: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엽가 웅략(유락쿠)천황 어제가 -만엽가1권1번

 

일본의 향가 격인 만엽가는 약 4600수가 남아있다. 그 노래를 엮어서 만든 노래집이 만엽집(만요슈)이다. 필자는 평생 그 해독에 매달려 있고, 그 일부 결과물을 지상에 책으로 내어 놓았다. 하지만 아직 미 발표작이 수백수에 이르고 있다. 이 지면에서 만엽가 제 1권 중에서 1번에 해당하는 노래를 싣기로 한다.

 

이 노래의 주인공이 일본서기 속의 제21대 大泊瀨幼武(큰 뼈대 넣어 갖춘 젊은이) 1 천황의 휘를 가진 雄略(유락쿠)천황의 어제가이다.어제가란 천황의 노래란 말이다. 웅략천황의 정체에 관해서 이 어제가를 해독함이 매우 중요한 까닭이 될 수 있다. 일본학자들은 웅략천황을 왜5왕 중에서 武왕을 웅략으로 보고 있다. 이유중 하나는 그의 시호(휘)"  大泊瀨幼武" 중에 武란 글자가 포함되어있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휘의 해독은 향찰식표기로 한글로 되어있다. 현재 일본서기 속 천황의 휘(시호)의 이름을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모르고 오직 일본식 독음으로만 읽고 있을 따름이다.

 

 

일본서기 천체 천황시호(휘)  40인들의 정체 한글로 해독한 책이 "신들의 이름/오늘/2009년3월/김문배,김인배" 출간되어 천황들의 정체를 밝히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왜5왕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국 학자로는 소진철교수(원광대)와 김영덕교수(서강대)의 논문이 있다.

소진철교수의 경우, 왜왕 武는 무령왕이라고 하였고, 김영덕교수의 경우는 왜왕 興이 개로왕의 아우로서 왜로 보낸 '곤지"라 하였다. 그리고 '곤지'가 웅략(유라쿠)천황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아무튼 일본학자들과 차별하여 한국학자들에게도 한.일관계사에 대해서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다는 자체가 정말 고무적이다.  웅략천황의 御製歌은 만엽집 제 1권 1 번의 노래이며, 만엽집을 편집 우두머리 격인 '카기모토히토마로'가 웅략천황(백제계)의 위상에 대한 배려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웅략천황이 '곤지"라면 이 때부터 백제계통의 세력이 일본 천황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고 연구자들은 여기고 있다.

어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왜왕 무를 웅략천황(일본학자들 통설)보고 또한 '곤지왕'을 보고 있는 동양대 김운회 교수의 연재 기사를 싣고자 한다.  왜왕 武가 웅략천황이라는 일본 통설에는 필자는 동의하지않지만 김영덕 교수 설인 곤지왕=웅략이라는 같은 학설을 견지하고 있는 김운회교수의 설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아래 글 중에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지면상 일일이 지적하지 않기로 하겠다. 오직 웅략이란 인물과 곤지란 인물에 대한 자료를 참고 하시기 바란다.(글돋선생)

 

  

왜왕 무(武) = 유라쿠 천황 = 곤지왕 (김운회 교수 설) , 왜왕(興)=유라쿠천황=곤지왕(서강대 김영덕교수설/필자동조설)

현재 일본에서는 왜왕 무(武)가 제 21대 유락쿠(雄略) 천황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에도시대 중기의 국학자였던 마쯔시다겐린(松下見林)이 왜왕 무(武)가 유라쿠 천황이라고 말한 이래 이설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이 되는데 역사적 사실에 문제가 되는 것은 곤지왕이 개로왕의 동생인지 아들인지 하는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국서의 내용과 왜왕 무를 곤지왕으로 본다면, 곤지왕은 개로왕의 아드님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일단 왜왕 무라고 인식되고 있는 유라쿠 천황에 대해 알아봐야겠군요.

▲ 유라쿠 천황과 천황능[高鷲丸山古墳(雄略天皇陵古墳)]
[大阪府羽曳野市 소재 : 원분(円墳) - 지름75m 높이9m]


이제부터는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유라쿠 천황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봅시다. 즉 일단 '곤지왕 = 유라쿠 천황'이라는 가정을 보류하고, 유라쿠의 일대기를 보면서 곤지왕과의 공통점을 찾아서 이중으로 검증을 하도록 합시다.

첫째, 유라쿠 천황의 성격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유라쿠 천황은 매우 포악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유라쿠 천황이 신하의 아내가 더 없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죽이고 그 아내를 후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건은 마치 『삼국사기』열전에 나타난 개루왕(또는 개로왕)의 '도미설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일본서기』유라쿠 천황조를 보면, 유라쿠 천황이 등극한 후 6년에야 비로소 정치적인 사건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라쿠 천황의 행적이 주로 사냥·엽색·전쟁 또는 살인 등으로만 묘사되어있을 정도입니다.

유라쿠 천황이 난폭하다는 문제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유라쿠 천황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유라쿠 천황은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등극하였기 때문에 매우 난폭한 인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은 자신의 형들을 포함하여 경쟁자들을 살해하고 즉위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이 엄청난 정치적 격변은 반대세력의 일시적 소탕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야마토 지역에 머물렀던 사람이 바로 곤지왕입니다. 곤지왕은 주로 군사적인 업무를 담당한 군벌 세력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군군(軍君)으로 묘사된 것 같습니다. 한족식(漢族式)으로 말하면 무제(武帝)와 같이 그 묘호(廟號)에 무(武)가 들어가는 식입니다. 어떤가요? 이제 왜왕 무(武)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사정이 어떠하든 유라쿠 천황과 같이 강고한 인물이 곤지왕이 아니라면, 야마토 지역에 이 두 사람이 15년 이상 아무 탈없이 공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둘째, 유라쿠 천황이 백제왕을 임명하여 반도로 보낸 문제입니다.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은 곤지왕의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인 마다(末多)를 백제에 보내 동성왕(479~501)이 되게 합니다. 이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반도 사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을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유라쿠 천황이 반도부여(백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기록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만약 유라쿠 천황이 부여계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면 이 기록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 됩니다. 당시 백제는 멸망하고 개로왕도 잡혀서 죽고 문주왕 - 삼근왕이 4~5년 사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백제왕을 지명할 사람은 역사 기록상으로는 곤지왕이 유일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라쿠 천황이 백제왕을 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인물은 동일인이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두 인물이 동일인이 아니면, 야마토의 왕이 백제에 무슨 권한이 있어 왕을 지명합니까? 백제가 일본의 조공국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후에 보겠지만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이 시기까지 중국으로부터 백제가 일본열도보다도 서열이 낮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곤지왕은 자기의 장성한 아들을 백제(반도부여)로 보내어 다스리게 한 것이죠.

『일본서기』유라쿠 천황 21년 즉 476년에 "천황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파멸되었다고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 : 熊川 또는 공주)를 문주왕에게 주고 그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라고 합니다. 이 기록은 다소 과장된 것일 수도 있긴 합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문주왕(475~477)이 곤지왕의 형님으로 나타나는데, 한성백제가 멸망한 상황이니 일본의 곤지왕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강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개로왕 사후 반도부여(백제)의 권력 변동(문주왕의 등극)을 왕위계승 서열 2인자인 곤지왕이 이를 인정했다는 의미로 봐야할 대목입니다. 그리고 문주왕이 477년경 서거합니다. 그런데 478년경에 나타난 왜왕 무의 국서에서는 "아버지와 형님의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타나 모든 사건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죠.

당시의 정황이나 기록으로 보더라도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부흥시킬만한 실질적인 세력은 곤지왕밖에 없죠.

따라서 곤지왕 = 유라쿠 천황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유라쿠 천황과 곤지왕이 동일인이 아니면 『일본서기』의 기록이나, 『삼국사기』, 『송서』,『위서』등의 기록이 모두 뒤틀려 오리무중에 빠지게됩니다. 그러나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이 되면 이 기록들은 고도의 정합성(일치성)을 가지게 됩니다.

▲ 초기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서울 천호대교 옆)
(붉은 선은 토성의 성벽)


유라쿠 천황은 열도 쥬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 일본의 역사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 유라쿠 천황 시대에 궁정조직이 크게 정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보다 세련된 정치 조직들이나 체계가 제대로 이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왕권을 구성하는 씨족이 바뀌어 중소 부족의 족장들이 권력의 중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여성 최고 사제는 폐지되었으며, 원초적인 신료집단(臣僚集團)이 형성되었고, 형벌 관련 전문 행정조직인 물부집단(物部集團 : モノノトモ)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5세기 후반의 유라쿠 천황이야말로 일본 최초의 궁정군주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라쿠 시대에 이 같이 급격한 정치조직의 변화가 나타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개로왕의 도미설화와 유사한 형태의 설화가 『일본서기』유라쿠 천황 부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곤지왕이 열도로 갈 당시에는 담로제도에 기반한 부여계 통치조직의 수장은 개로왕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러니까 『일본서기』유라쿠 천황의 초기 비공식적인 기록은 개로왕의 기록이라고 봐야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곤지왕이 야마토 지역에서 정권을 장악하여 그 곳에 머물면서 왜왕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 탈바꿈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백제가 멸망하면서 이제 열도를 중심으로 부여계의 정권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전에는 야마토가 백제(반도부여) 행정구역의 일부이었겠지만 곤지왕이 백제왕의 전권을 위임받아가면서 야마토 지역은 백제왕으로부터 좀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왕의 아들(또는 동생)이 왕의 자식과 왕비를 데리고 간 것은 강력한 자율 정치의 시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즉 개로왕이 곤지왕에게 임신한 아내를 하사하여 열도로 보낸 것은 '부여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즉 백제의 멸망을 예견한 개로왕은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담로의 하나인) 비교적 안전한 열도로 보내면서 자신의 사후에도 부여의 국체를 유지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개로왕이 자신을 대신하여 곤지왕이 나라를 세우고 부여의 국체를 이어가라는 하나의 소명이자 유언(遺言)이었습니다. 다만 그 시작은 개로왕 자신이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백제에서 곤지는 왕자이거나 좌평이었고, 열도에서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열도에 있어서의 정치적 자율성이 백제가 멸망(475)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결과물이 바로 유라쿠 시대의 정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극단으로 향하던 부여 위기의 시대가 다시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탈바꿈하게된 중심에는 곤지왕이 있었던 것이죠.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교수는 "연대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그대로의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의 유라쿠 천황기(4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여기저기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유라쿠 천황부터 제대로 된 야마토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히라노 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야마토에 의한 일본 열도의 통일은 5세기 후반이며, 왕권이 강화되고 발전된 것도 5세기 말 왜왕 무(武) 즉 유라쿠 천황부터라고 주장하면서 "왜왕 무의 상표문은 간토(關東) 규슈(九州)를 평정하고 가라(加羅)의 군사적 정복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히라노쿠니오교수는 이 유라쿠 천황의 시기에 국토의 통합이 획기적으로 진척된 것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즉 유라쿠 천황의 시기에 일본 열도는 야마토 왕권을 중심으로 통일작업이 매우 크게 진척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요약하자면, 유라쿠 천황 이후 일본의 변화는 일본에서 부여계 고유의 담로제가 약화되면서 새로운 왕조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임신한 왕의 부인을 보낸 것도 이제는 이해할 수가 있겠군요.

그러니까 곤지왕 이전에는 열도부여의 왕 즉 왜왕은 반도부여의 왕이었다면 이후에는 열도부여의 제왕은 왜왕 또는 천황으로서 나타나게되는 것이죠. 따라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등의 왜5왕 가운데 찬(讚), 진(珍), 제(濟), 흥(興)은 모두 백제왕이었다는 얘기죠.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본다면 곤지왕은 일본의 유라쿠 천황이며 그는 한편으로는 멸망한 반도부여를 중흥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도부여를 고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한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운회:동양대교수) 

 

 

萬葉歌 1券1番

                                                                                                                                       (글:庭光散人 글돋先生) 

 

雄略 天皇의 御製歌                                                                           

 

泊瀨朝倉宮御宇天皇代(泊瀨朝倉宮:나라현 櫻井市黑崎小字의 森부근에 있음>)

 

 

본문:籠毛與美籠母乳布思毛與美夫君志持此岳爾菜採須兒家吉閑名告沙根虛見津

山跡乃國者押奈戶手吾許曾居師吉名倍手吾己曾座我許曾者告目家呼毛名雄母


해석

籠(대걸로2">)毛(모)與(여)

<대궐로(宮)모여>

 

美(맛날)籠(대걸로)母(오메)

<만날 대궐(宮)로 옴에(來也)>


乳(젖)布(버리)3思(닷)毛(모)與(여)

<젖버리(젖벌) 듯 모여/(꽃의 젖을 빠는 벌처럼 모여)> 


美(맛날)夫(지아비)君(님금)志(뜻)持(가지)此(차)岳(메키4)爾(니)

<만날 夫君(선대천황) 뜻까지 차 막히니(선대 천황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

 


菜(나믈)採(따라)須(수염)

<남을 따라써염>


兒(아해)家(짓5)吉(길)閑(마구간6)

<아예 지길 마구간(아예 자기길 마구간>


名(이름)告(알외)沙(몰애)根(불휘)虛(허)見(드러내)

<이름 아래 모래뿌리어 드러내>


津(나루)山(메)跡(자최)乃(내)

<나루,산 자취(흔적)내>


國(나라)者(사람)押(눌리)奈(어찌)

 <나라 사람들 눌리었지(통치했었지)>

 

戶(집)手(손)吾(나)許(허),曾(거듭)居(살아)師(스승)吉(길)

<집 손 놓아, 거듭 살아  섬길 >


名(이름)倍(갑뎔)手(손)吾(나),己(몸)曾(거듭)座(벼슬자리)我(내)許(허)

<이름값들 손 놓아, 몸 거듭 벼슬자리 내허 >


曾(거듭)者(사람)告(알외), 目(눈)家(짓)呼(부르)毛(모),名(이름)雄(세와들)7母(오메)

<거듭 사람아래 ,눈 찌부리며,웅략이름 세워 들옴에>

 

노래의 배경

 

일본서기 <웅략기>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천황의 즉위전기에서 볼 수 있듯, 그가 무력에 의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위에 오르는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지녔던 군주이다.

 인덕천황의 사후부터 조정에서는 순탄한 황위계승이 이뤄지지 않고, 대개 황자들 간의 내분에 따라 군신의 동요와 권력쟁탈의 소요를 겪고서야 비로소 승자가 황위에 오르는 형국이 답습되고 있다.

 

자연히 조정의 내홍과 격심한 정변에 따라 권력 상층부의 부침도 뚜렷한데, 주로 백제계와 신라계의 파쟁에 따라 역대의 기득권 층에 심한 변동이 일어나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간다.

 

 웅략천황은 그러한 와중에 황위에 오르는 주인공 가운데서도 가장 과단성 있는 행동과 재빠른 판단력에 따라 주위를 압도하는 용맹성을 갖춘 자였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 일본의 역사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즉 유라쿠 천황 시대에 궁정조직이 크게 정비되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보다 세련된 정치 조직들이나 체계가 제대로 이식되었음을 느끼게하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왕권을 구성하는 씨족이 바뀌어 중소 부족의 족장들이 권력의 중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여성 최고 사제는 폐지되었으며, 원초적인 신료집단(臣僚集團)이 형성되었고, 형벌 관련 전문 행정조직인 물부집단(物部集團 : モノノトモ)이 조직되었다. 이 5세기 후반의 유라쿠 천황이야말로 일본 최초의 궁정군주라 보여진다.

 

노래의 해설 

 

대궐로 정치 조직의 세력들이 모여 어지러워진 천황가이다. 권력자들의 쟁탈전 속에서 선대 천황이 무능하여 뜻을 펴지 못하자. 아예 잘 못 간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서, 잘못된 일을 끊고 정체를 드러내고 쿠데타를 치룬 웅략천왕이다. 첫 부분에 정권을 잡고, 대궐에 모인 신하들에게 전 천황의 전철을 밟지않고 자기 통치스타일 대로 진행하였고, 마치 모래를 뿌려서 나루와 산들의 자취를 확실하게 드러나게하듯,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집일과 몸과 마음을 곱으로(倍)바쳐서 기다 싶이 복종하며,벼슬자리 만들어, 자기 세력을 심어서 강력한 권력자로서 궁정군주가 된다.문무백관 가득 사람을 거느리고 눈 찌뿌려 근엄하게 이름 높히고  박뢰조창宮에서 새로운 군주로 왕좌에 앉았다.

 

 기록:2010년6월23일~ 6.24일밤 9시20분 8.4일 12시40분 노래말 수정

 

 

 .

 

 기록:2010년6월23일~ 6.24일밤 9시20분 

 

각주 1

신들의 이름/김인배,김문배 저서) 웅략천황의 시호 한국식 해독/2009,오늘/

각주 2

대걸오/대걸로/(대그릇의 고어,<대궐로

각주 3

버리=벌리다(고어) 동음,버리=벌(蜂)고어

각주 4

大山=메키(큰)

각주 5

짓(집)의 고어 家=짓

각주 6

마굿간(말의 처소)

각주 7

세와들다/굳세다=고어

  1. 신들의 이름/김인배,김문배 저서) 웅략천황의 시호 한국식 해독/2009,오늘/ [본문으로]
  2. 대걸오/대걸로/(대그릇의 고어,<대궐로 [본문으로]
  3. 버리=벌리다(고어) 동음,버리=벌(蜂)고어 [본문으로]
  4. 大山=메키(큰) [본문으로]
  5. 짓(집)의 고어 家=짓 [본문으로]
  6. 마굿간(말의 처소) [본문으로]
  7. 세와들다/굳세다=고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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