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이 낮아질 것이며 굽은 길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평해지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갖고 먹을 것도 그와 같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누군가에게 회개는 듣기 싫은 책망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회개는 실제적인 평화와 평등을 요구했기 때문이지요. 세례(침례)는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입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지요.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합니다.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높아진 것은 낮아지고 낮은 곳은 높아져 평균케되며, 두 개 가진 이는 없는 이와 나누어 먹습니다. 출애굽 만나훈련과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구원(메시야)은 그렇게 평탄하고 곧아진 길로 옵니다. 혹자는 이것이 기계적 평등 혹은 권위적 공산경제라고 오해할 지도 모르겠지만, 세례는 원함이 있는 자들에게만 베푸는 의식이었습니다. 또한 원한다고 해서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꾸짖어 내쫒는 모습을 보면 세례를 아무나 받지 못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각 생명의 주체적 결단과 공동체의 확인 속에서 세례는 베풀어졌습니다. 예수제자의 길은 힘에 의해 강제될 수 없으며 홀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곧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
당시 백성들은 메시야를 무척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세리, 군인 등 권력에 빌붙어 안위를 유지하던 사람들부터 가난한 민중들까지… 그들은 오실 메시야가 세례요한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요한은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표현합니다. “내가 바로 그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자신을 낮추며 민중들에게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도록 안내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보면, 특히 한몸살이라는 조금 남다른 형태의 삶을 살다보면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장로였던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는 <제자의 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교회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우리가 바로 그런 교회냐고 누군가 물으면 ‘아니요, 우리는 교회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에게 임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도는 말해질 수 없고 ‘그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2계명에 자신의 이름과 형상을 함부로 만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교회는 교권화되며 종교는 잔혹한 폭력의 도구가 됩니다.
[생활나눔]
# 심심풀이 예술 견학
민들레학교 겨울학기 수업으로 연극과 미술을 결합한 예술수업을 하고 있어요. 지난 흙날(17일)에는 아이들에게 전시와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서울로 나들이 다녀왔어요. 심심풀이 예술 수업의 목표 중 하나는 '심심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술을 발견하자'였어요. 함께 보았던 전시 <덩어리>는 침목, 폐자재, 고철 등 목적을 다하고 버려진 재료들을 깊이 관찰하고 새로운 의미와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다루고 있고, 연극 <아하! 강아지똥>은 권정생 선생님의 그림책을 바탕으로 만든 국악가족극으로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도 무엇엔가 꼭 귀하게 쓰일 거야"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었어요. 민들레 아이들과 함께 전시와 공연 보고 이야기 나누며… '똥이 씨앗과 만나 민들레가 되듯' 우리의 일상 속에 하찮게 혹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어떻게 하나되어 새 생명 피워내는지 배우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