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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문화원 문화유산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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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스크랩 미수 허목
舞我 추천 0 조회 35 08.02.19 22: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수허목

1595(선조28)년~1682(숙종8)년,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양천(陽天), 자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 미수(眉?), 시호 문정(文正), 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이원익(李元翼)의 손녀 사위이다.

 

본관

 양천(陽天)

 미수

활동분야  학자
주요저서

『동사(東事)』, 『미수기언』

주요작품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묵죽도(墨竹圖)>


미수허목

1595(선조28)년~1682(숙종8)년,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양천(陽天), 자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 미수(眉?), 시호 문정(文正), 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이원익(李元翼)의 손녀 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나이 50이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로 초야에 묻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대해 연구하다가 다시 예학(禮學)에 몰두하여 이 방면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학문의 고명함을 인정받아 조정에 나온 것은 효종 8(1657)년 그의 나이 만 62세 때 였다.자신의 호(號) 대로 눈썹이 긴(眉) 늙은이(?)일 때 조정에 나온 것이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으며, 그곳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읍지를 편찬하였다.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온건론자인 허적(許積)이 이끄는 탁남(濁南)에 대비되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에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직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직이 회복되고 경기도 마전에 있는 미강서원(湄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四書)나 주희(朱熹)의 저술보다는 시, 서, 역, 춘추, 예의 오경(五經)속에 담겨 있는 원시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한 사상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고 당시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개척을 의미하였다. 저서에 편집한 문집 《기언(記言)》, 역사서인 《동사(東史)》를 비롯하여 예서(禮書)인 《경례유찬(經禮類簒)》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정체전중설(正體傳重設)》 삼척 읍지인 《척주지(陟州誌)》등이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의 일화

조선 숙종조 때, 노론과 남인간의 당파 싸움의 최대 정적이었던 두 사람의 일화이다. 남인의 영수는 미수 허목(許穆) 이고 노론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이였다. 하루는 우암 송시열이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아들을 불렀다. “지금 곧 미수대감께 가서 내 병세를 소상히 말씀드리고 화제(약방문)를 좀 얻어 오너라.”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아니, 장안에 허다한 의원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미수대감에게 화제를 부탁하십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분부이십니다. 만일 화제에 독약이라도 넣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가족들은 한결같이 펄펄 뛰었다. 그러나 우암은 큰아들에게 채근하였다.
“어서 가서 미수대감을 뵙고 오너라.” 아들은 하는 수 없이 미수를 찾아가 우암의 병세를 이야기하고 화제를 지어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미수가 적어준 화제를 보니 약재 중에 독약인 비상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했던 일인데 실제로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본 가족들은 대경실색하였다.
“보십시오. 당초에 저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아무리 남이지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이 미수를 성토하는 것을 크게 꾸짖고, 곧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게 하였다. 가족들이 나서서 우암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우암은 끝내 독약이 든 약을 마시고야 말았다. 우암은 가족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오히려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우암은 미수가 의술에 밝고 공명정대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미수는 또한 우암의 덕망과 도량을 믿었기에 화제를 물리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유림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전하고 있다.
17세기 남인과 노론의 영수들이 비록 당파는 다르지만 서로의 인품을 인정하고 존중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다.

제 7장 : 45 (무극) “...허미수(許眉?)가 증수한 성천 강선루의 1만2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 1만2천 봉은 겁살이 끼어 있으니 이제 그 겁살을 벗겨야 하리라....”

제 4장 : 22 (무극) 사명의 처가 황망하여 죽은 아이를 안고 동곡에 당도하니, 상제님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이 안 되려니 송장을 안고 오는 자가 있도다."하시니라. 사명의 처가 성옥을 눕혀 놓고 살려 주시기를 애걸하니, 상제님께서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시고 배를 만져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큰 소리로 "미수(眉瘦)시켜 우암(尤庵)부르라."외치시고 침을 죽은 아이의 입에 넣으시니, 문득 항문으로 피고름을 쏟으며 큰 울음소리와 함께 살아나니라. 이에 미음을 먹이시고 걸어서 돌아가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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