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은 원래 궁전으로 지은 건물이다. 한때는 기차역으로 사용하였던 곳인데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1986년에 개관하였다.
세느강을 중심으로 한편에는 루부르 박물관이, 건너 편에는 오르세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술관은 소장하고 있는 그림 이외에도 내부의 실내 장식이나 조각품들도 눈길을 끌고 있다.
예술과 문화의 도시답게 파리에는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르네상스 및 로코코 시대의 작품들이, 퐁피두 센터의 현대미술관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작품들이,
오르세 미술관에는 1848년 2월 혁명부터 1914년 사이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파들의 유명한 작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모두 3개 층에 회화와 조각품 그리고 공예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는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비롯한 여러 조각품들, 2층에는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와 아르누보 작품들인 로댕, 부르델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3층에는 에두아르 마네를 비롯한 오퀴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세잔느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기차역이었던 오르세 미술관 외관
그러나 원래 궁전이었던 옛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
시계인지 예술품인지 모를 정도로 정교한 조각장식이 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그림들(1)
조르주 쇠라의 '서커스(1891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상주의 작가인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다.
쇠라는 인상주의를 혁신하려는 방법으로 점묘화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화폭에 순색의 점을 계속 찍어나가는 기법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수평과 수직의 정적인 구도였는데,
이 작품에서는 원과 타원 나선 등 곡선의 형태를 많이 보이고 있다.
쇠라는 이 작품을 출품한 전시회 기간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오르세에 갔을 때 인상깊게 보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방’(1889)
파리생활에 실증을 느낀 고흐는 1888년 남프랑스 아를로 이사를 한 후 자신이 사용하던 방을 그렸다.
1년 후 그는 두개의 그림을 더 그리는데, 이 작품은 세 번째로 그린 것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동생 테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흐는 들뜬 마음에 방을 정리하면서 ‘고흐의 방’을 그렸는데,
이때 고흐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고흐는 고갱과 심한 논쟁을 벌이다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까지 이어지고 이들은 결별하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고흐는 자유로운 표현을 선보였으며, 그의 예술은 불안한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 그림에서의 극단적인 필치와 색채는 당시의 고흐의 심리상태가 반영된 것이다.
그는 4년간 650여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가 강렬함이 돋보이는 걸작들이었다.
1890년 7월 27일 반 고흐는 평소처럼 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쐈고
이틀후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
1890년 봄 동생 테오는 잦은 신경발작으로 고생하던 고흐에게 도움을 줄 사람으로
오베르 쉬르우아즈에 있는 폴 가셰라는 의사를 소개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그 의사는 미술품 수집가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였다.
고흐는 처음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생각이 점차 바귀었고,
이 초상화의 내용처럼 고흐는 그에 개하여 신뢰를 갖게되었다.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도 가셰를 진정한 친구, 새로운 형제, 아버지 등으로 불렀다.
이 그림에서 표현한 것은 고흐가 고갱에게서 바랐지만 얻지 못한 완벽한 친구의 이미지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 쉬르우아즈 성당’
정신병으로 고생하던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권유로 가셰 박사를 만나러 오베르 쉬르우아즈로 가서
1890년 5월 21일부터 7월 27일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60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 중 18세기의 건물 쉬르우아즈 성당을 그린 것은 이 작품 하나 뿐이다.
이 그림에서도 고흐는 빽빽한 필치로 소용돌이치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직관에 따라 색채를 선택하고 배합했지만 언제나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완벽하다.
빈센트 반 고흐 '이탈리아 여인(The Italian Woman. 1887)'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27세 때였다. 1886년 2월 하순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그 자신의 것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그는 이때까지 인상파 미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인상파 화가들과 고갱 등 동료들이 가르쳐 주자 매우 빠르게 이에 빠져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1888)'
‘어느날 밤 나는 산책을 나갔지.’ 고흐는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깊고 푸른 하늘은, 원래의 짙은 코발트 색 보다 더 깊고 파란 구름들과,
우유빛 길처럼 밝은 구름들이 섞여 무뉘를 이루고 있었다.
별들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맑고 초록빛과 노랑, 하얀빛의
그리고 옅은 핑크 빛을 띄며 다이아몬드 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나체의 여성과 정장을 한 두 남자를 그린
이색적인 주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다.
마네는 자연광을 생동감 있게 살리기 위해 점심시간인 12시 45분부터 1시 30분 사이에 만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올림피아(1863)
풀밭위의 점심식사로 논란을 일으킨 마네는 또 하나의 인상깊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그보다 더한 비난과 물의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모델이 된 여인은 풀밭위의 점심식사의 모델이었던 빅토린 메랑이었는데,
편안한 자세와 당당한 시선, 적나라한 나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체로 누워 있는 올랭피아와 그녀에게 배달된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여성,
그리고 침대 모퉁이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흑백의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밝고 어두운 색을 적절히 배치하고, 색채를 배합하는 그의 세련미가 돋보인다.
에두아르 마네의 'Berthe Morisot with Bunch of Violets(1872)'
에두아르 마네의 발코니(1869)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사람은 모두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고 표정도 다르다.
꽃장식을 한 머리에 양산을 들고 있는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은 부인의 친구이며 화가인 베르뜨 모리조,
남자는 화가인 기르메이며 어둠속에 서있는 소년은 아들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모나리자'가 있듯이, 오르세가 자랑하는 유명한 밀레의 그림 두점도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밀레가 바르비종에 살면서 농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만종'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얼마 안되는 이삭을(그것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줍고 있는
농촌의 세 여인의 소박한 삶을 잘 표현한 그림이다.
배경에는 추수를 마치고 마차위와 그 옆에 가득 쌓아 올린 곡식단과
여인들의 초라한 모습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 종’(1857~59)
19세기 프랑스 회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저녁 노을에 물든 들판에서
가난한 농부가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평화로운 농촌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밀레는 저녁 종이 울리자
문득 들판에서 저녁기도를 올리는 순박한 농부들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1916-1919)'
빛의 화가라 불리는 클로드 모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하나의 커다란 색채로 보고 사물이 갖는 고유의 색채가 아닌,
빛에 따라 변하는색채, 눈에 보이는 색채를 표현하였다.
모네는 팔레트에서 색을 혼합하지 않고 캔버스 위에 필요한 색을 겹쳐 점찍듯 그리는 기법을 사용했다.
클로드 모네의 ‘개양귀비 꽃(1873)’
인상파라는 이름이 붙게된 모네의 초기 작품으로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붉은 양귀비 꽃이 만발해 있는 넓은 벌판을 한 모자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자는 모네의 부인 까미유(Camille)와 그의 여섯 살 짜리 아들 장(Jea)인데,
붉은 양귀비 꽃밭으로 산책나온 부인과 아들을 그린 것이다.
모네와 까미유는 1865년 화가와 모델이 인연이 되어 연인이 되었다.
그들은 결혼 후 행복하게 살았는데 1879년 까미유는 병으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클로드 모네의 소풍 The Picnic(1865)
폴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1891)'
1891년 4월 폴 고갱은 문명사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하여
원시문명을 간직한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의 여인들이라는 이 그림에서는 해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그렸는데, 고갱은 다양한 색상의 의복을 입은채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묘사했다.
폴 고갱 Meal or 바나나(1891)
폴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89-90)'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가난과 무관심이었기 때문에
고갱은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를 등지고 원시문명을 간직한 타이티로 떠난다.
그는 이 그림에서 십자가를 메고 있는 그리스도와 고통받는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첫댓글 멋진 고흐의 작품감상 잘 ㅆ쑤이~~~
짧은 세월을 살다 가면서도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간 고흐를 생각할 때마다 불우했던 그의 생이 안되 보이더라.
밀레의 만종은 참으로 역광의 표현을 생동감 있게 나타낸 것이 뛰어나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많은 작품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역시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는 여인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서민들의 초라하면서도 소박함이 담겨있는 그림이지.
난 여기서 MOMA 미술관에 있는 고흐,고갱 작품이 다른 화가들 틈에 몇개 걸려있는 것을 보면서도 감격을 했는데 용환이는 ...한국 화가들도 가난하게 살아도 부란서를 떠나고 싶지 않은것이 그 유명화가들의 발자취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영감을 얻기 위한것이 아닌가,수 많은 화가들 사이에서 그 푸짐한 느낌으로 영혼이 배부를 수 있으니까...
종구 말이 맞겠구나. 프랑스에는 미술관들이 여기저기 많아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는 곳이니까.
난 좀 다른 생각인데,,, 고호나 고갱은 다른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화풍을 지녔었다. 그러나 한국화가들이 불란서에 있으면서 그 수많은 옛과 지금의 화가들의 작품속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면 마음도 조급해지고 결국 모방을 하게 된다. 차라리 산 속에 들어 가서 자기만의 철학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Straight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거의 한 화가의 작품이다. 오래 전에 구입을, 뉴욕에서 전시회를 할 때 마다 한 점씩 구입을 했는데 오랜세월 접해도 늘 그 그림들이 좋다. 그 화가와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영감이 필요한 작업이죠?' ' 그림이 잘 안 그려지면, 전 고흐가 힘들어하며 작품을 했던 곳에 가서 서성거려요..얼마나 위로를 받는지 몰라요..그림을 그릴 때가 곧 참 나를 찿는 기분이구요.''그리고 싶은 걸 그려요, 그냥..' 난 그녀의 '해바라기 '를 좋아하는데 푸짐하게 햇빛을 받은 생생한 것 보다 축 늘어져 다신 고개를 못들것 같은 반쯤 핀 햇빛에 가린 그 해바라기가 눈이 간다..늘..
그림에도 역시 화가의 정성과 혼이 들어가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