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히말라야 등반자에게 훈장을 수여하려 하였지만 “등산은 평가의 대상이 될수 없으며 더더욱 순위를 매기는 스포츠는 아니다”라는 이유로 거부 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나 역시 “산악인과 거지의 차이가 이즘 즉 산악인은 생각하는 거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산을 다녔다.
참으로 진부해 보이는 이 말들이 요즘에도 가끔씩 통용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이 말을 이해하는 후배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세상의 변화 만큼이나 화려하고 빠르게 변해버린 등반 행위를 한가지로 규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 하다.
그만큼 세상이 다양해 졌고, 그 다양함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잡을 것 하나 없는 암벽을 거미처럼 오르며, 반도의 마루금들을 삿삿이 걷고, 눈사태가 일어나는 북벽들에 매달려 뾰족한 침봉의 정상을 꿈꾸며 신들의 영역에 발자취를 남기려 가픈 숨을 몰아 쉰다.
하지만 나에겐 금정산의 작은 능선을 걷고, 불쑥 솟은 암릉을 오르는 것도 등산이며
별이 빛나던 막영터에서 한잔 술을 마시며 부르던 가슴 아린 산노래와 한구절의 싯귀도 등산이다.
남포동 뒷골목 고갈비 집에서 산친구와 한잔술로 넘고 올랐던 설악의 준봉들과 부채암 번개길의 작은 크랙들도 등산이다.
눈 덮힌 히말라야의 신새벽. 무미 건조한 음식들을 억지로 씹어 넘기며 푸르스럼한 설벽을 겁에 질려 쳐다 보는 것도 등산이고, 무사히 돌아와 준 동료를 안고 펑펑 우는 것도 등산이다.
작년 가셔브룸을 등반하면서 등산(구체적으로 등반,Climbing)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 들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등산의 목적이나 이념 보다는 행위 즉 수단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이었다. 푹푹 빠지는 설사면을 스키로 오르고 몇시간 걸려 내려온 길을 1~2십분 만에 활강해 내려 오는 사람들, 가볍고 고기능의 장비들로 빠른 시간 안에 등반을 해버리는 클라이머들....
혹자는 그런 등반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이야기 할 수 도 있다. 나 역시 터부시 해왔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오름짓이 고통과 위험(대상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을 수반 한다면 등산가는 그 고통과 위험을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끔 등반가들은 자기 기준에서 대상지를 오르기 위한 고통과 위험을 평가한다.
자신의 고통이기에 과대 평가 되기 쉽고 남의 성과를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고통과 위험을 줄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에 안주한다.
개개인의 등산에 대한 가치가 다를 수 있고 지금 내가 오르는 산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낄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합판이라 부르던 인공 암벽에서 좀더 땀흘리고, 집주위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만 더 돈다면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등반 대상지가 훨신 더 늘어날 것이고 지난번의 위험이 자신감과 희열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암릉의 꼭대기나 눈덮힌 정상에서 내 형제와도 같은 선후배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뒷골목 고갈비집 안줏거리도 천화대와 번개길 보다는 더 푸짐해 질 것이다.
내 선후배가 땀흘리고 있을때 동참하여 같이 땀을 흘려 준다면 그 선후배는 동지가 될 것이며 즐거움과 푸짐함은 배가될 것입니다. 바라만 보지 말고 같이 하시죠
저 부터 그 푸짐함을 위해 땀을 흘려야 겠습니다.
첫댓글 요 근래 매주 산행을 했다.. 운동도 좀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자리.. 헉.ㅜㅜ (오늘도 내일을 위해 땀흘리로 가야겠다.)
열심히 해라 나도 열심히 땡기고 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