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야, 그 현란함이여
그때 조조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는 틀림없이 채중과 채화로부터
황개가 주유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조조가 그것을 기뻐하는 걸 보니
내 항복도 참인 양 믿겠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조조가 좀 전보다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롭지만 선생께서 다시 강동으로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소.
가서 황개가 기일을 정하고 먼저 강 건너로 알려주시면 그날 내가 군사를 내어 맞아들이리다."
떠보는 듯한 기색은 거의 없었지만
감택은 짐짓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강동을 떠났으니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따로 사람을 뽑아 몰래 보내시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갔다가 잘못 되면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게 될 것이오.
아무래도 강동을 잘 아는 선생께서 가 주셔야 겠소."
감택이 돌아가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더욱 그를 믿게 된 조조가 두 번 세 번 감택에게 권했다.
감택은 거듭 마다하다가 오랜 뒤에야 겨우 응낙했다.
"제가 가더라도 그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른 다녀오지요."
이에 조조는 많은 금과 베를 상으로 내렸으나
감택은 받지 않고 조조의 진채를 떠나 다시 조각배에 올랐다.
다시 강동으로 돌아온 감택은
황개를 만나보고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렸다.
"공의 빼어난 말솜씨가 아니었더라면 이 황개는 공연히 고생만 했을 뻔했소."
황개가 기뻐하며 그렇게 치하했다.
그러나 감택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크게 조조를 낭패시킬 궁리를 내놓았다.
"저는 이제 감녕의 영채로 가서 거기 있는 채중과 채화를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잘 하면 한 번 더 조조를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황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로 감택의 뜻에 찬동했다.
☆☆☆
감택이 감녕의 영채에 이르자 감녕이 반갑게 그를 맞아들였다.
감택은 자기가 한 일은 한 마디도 밝히지 않고 능청스레 말했다.
"장군께서는 어제 황공복을 구하려다가
주유에게 욕을 당하셨는데 아무렇지도 않소? 나는 그게 몹시 못마땅하오."
감택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감녕은
그 엉뚱한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다 주유로 부터 느낀 이상한 낌새도 있어 잊고 있는데
감택이 평소답지 않게 거친 말투로 그 일을 끄집어낸 까닭이었다.
감녕은 그가 진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려니 여겨
그저 웃기만 하고 대꾸는 않았다.
그런데도 감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주유의 욕을 퍼부어 댔다.
감녕도 드디어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번 감택의 표정을 살필 무렵 채중과 채화가 들어왔다.
☆☆☆
그들을 본 감택이 문득 감녕에게 눈짓을 보냈다.
감녕도 그제야 감택의 뜻을 알아차리고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주유는 제 재주만 믿고 우리 따위는 사람 대접을 않는구려.
이제 그런 주유에게 욕을 당하고 보니 무엇보다도 강 건너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까 두렵소.
아무리 적병이지만 그들까지 그걸 알면 내 무슨 낯으로 싸움에 앞서겠소!"
그리고는 부드득 이를 갈며 앞에 있는 탁자를 내리쳤다.
뿐만 아니라 남이 듣는 것도 꺼리지 않고
주유를 큰소리로 욕해 대는 것이 정말로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 같았다.
감택이 놀란 듯 그런 감녕의 입을 막고 무언가를 수군댔다.
감녕도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남은 응어리가 있는지 몇 번이고 길게 탄식했다.
누가 보아도 주유에게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좋지 못한 음모를 꾸미는 듯한 광경이었다.
무슨 엿들을 만한 게 없나 싶어 그곳으로 들어왔던 채중과 채화는
그 걸 보자 감녕과 감택 두 사람에게 동오를 저버릴 뜻이 있는 것으로 짐작했다.
"장군께서는 무슨 일로 이토록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또 선생께서는 무슨 불평이 있으십니까?"
둘은 감녕과 감택을 떠보듯 그렇게 물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괴로움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으며,
안다 한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감택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채화는 그런 감택의 말을 듣자
자기들이 옳게 보았다 믿고 불쑥 간 큰 소리를 했다.
"혹시 두 분께서는 동오를 저버리고
조조에게로 투항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감택은 짐짓 크게 놀란 듯 안색까지 바꾸었고,
감녕은 느닷없이 칼을 빼들었다.
"우리 일을 너희가 이미 몰래 엿보았으니 할 수 없이 죽여 입을 다물게 해야겠다.
너무 우리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칼을 겨누는 감녕은
정말로 둘을 한칼에 베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
채화가 놀라 두 손을 휘저으며 급한 소리를 냈다.
"두 분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또한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일랑 말고 어서 말해라."
감녕이 여전히 칼을 겨눈 채 둘을 다그쳤다.
채화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저희들은 조승상께서 시켜 거짓으로 항복을 한 자들입니다.
두 분께서 만약 조상상께로 귀순할 뜻이 있다면
저희들이 마땅히 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감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길로 물었다.
채화와 채중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장군을 속이겠습니까?"
그제야 칼을 거둔 감녕은
거짓으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감격에 찬 소리를 냈다.
"일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이는 바로 하늘이 우리를 편케 하려는 뜻이로구나!"
"황개며 장군께서 주유에게 욕을 당한 일은 이미 승상께 전해 두었습니다."
완전히 감택과 감녕에게 속은 두 채가가 그 일까지 뽐내며 알렸다.
☆☆☆
그걸 보고 감택은
감녕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을 털어놓듯 말했다.
"나는 이미 황공복을 위해 승상께 항복하는 글을 전하였소.
이번에는 특히 홍패를 보고 황공복과 함께 항복할 것을 권하러 왔소.
날을 정해 함께 조승상에게로 가도록 합시다."
감녕도 그새 마음을 정한 듯 흔연히 대답했다.
"대장부가 밝은 주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겠소?
함께 투항하도록 하리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술 한 잔이 없을 수 없었다.
네 사람은 술을 내와 늦도록 함께 마시며 있는 말없는 말로 마음속을 털어놓았다.
채화와 채중은 곧 감녕도 황개와 함께 내응하게 된 것을 적어
조조에게 몰래 보냈다.
감택은 또 감택대로 딴 사람을 시켜 조조에게 글을 보냈다.
<황개는 승상께로 가고 싶은 마음에 하루가 천 년 같으나
알맞은 때와 배편을 마련 못해 눌러앉아 있습니다.
다만 뚜렷한 날짜는 아직 정하지 못한 대로
갈 때의 신호는 약조가 되었기로 그것만이라도 전하고자 합니다.
뱃머리에 푸른 깃발을 꽂고 오는 배가 있으면
그게 바로 황개의 배이오니 승상께서는 유념하여 주십시오.>
☆☆☆
한편 조조는 연달아 두 통의 글을 받자 다시 의심이 일었다.
일이 너무도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자 본능적인 경계심이 든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조조는
곧 여러 모사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동오의 감녕이 주유에게 욕을 본 데 앙심을 먹고
안에서 우리에게 호응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또 며칠 전에는 황개가
주유에게 벌받는 데 한을 품고 감택이란 자를 보내 항복을 해왔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둘 다 깊이 믿지 못할 구석이 많다.
누가 직접 주유의 진채로 들어가 그들 두 사람의 항복이
참으로 믿을 만한지 알아올 사람이 없는가?"
☆☆☆
그러자 장간이 나와 말했다.
"제가 저번에 강동에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승상께 해로움만 끼쳐드려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한번 저를 보내주십시오.
목숨을 버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일을 잘 살핀 뒤 승상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못 비장한 결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조조는 지난번에 맛본 쓰라림도 잊고 기뻐하며 허락했다.
실은 조조 아래서 그나마 주유에게로 오갈 수 있는 이는 장간뿐이기도 했다.
이번에 말로 지난번의 실수를 메울 만한 공을 세우리라는 결심으로
장간은 다시 배에 올랐다.
배는 빠른 물살을 타고 곧 강남 진채에 이르렀다.
장간은 곧 사람을 보내 자기가 온 것을 주유에게 알리게 했다.
주유는 장간이 다시 자기를 보러 왔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내가 이번에 공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오직 이 사람에게 달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침 함께 있던 노숙에게 가만히 시켰다.
"바라건대 방사원에게 가서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이르시오.
내가 시킨 대로만 해준다면 우리는 이미 조조에게 이겨 놓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오."
그런 다음 방사원이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방사원은 양양의 방통으로
수경선생 사마휘가 봉추라고 부르던 주유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그는 어찌 된 셈인지 주유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주유가 먼저 노숙을 보내 방통에게 묻게 했다.
"조조를 쳐부수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 되겠습니까?"
"조조의 군사를 깨뜨리는 데는 불로써 공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
하지만 넓은 강 위에서 요행 한 척의 배에 불을 지른다 해도
나머지 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소.
따라서 먼저 연환계를 베푼 뒤에 화공을 써야 할 것이오."
방통이 가만히 일러주었다.
☆☆☆
노숙이 물었다.
"연환계(連環計)란 무엇입니까?"
"배와 배를 쇠고리로 연결하게 만드는 계책이오.
조조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달랠 수 있어야 하오."
노숙은 그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들은 대로 주유에게 돌아가 전했다.
주유는 그 말을 전해 듣자
방통의 식견에 몹시 감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를 위해 그 연환계를 베풀어 줄 사람은 방사원이 아니고는 없으리라."
"조조의 간사한 꾀는 천하가 다 아는 터인데
방사원이 어떻게 그로 하여금 제 죽을 짓을 하도록 꾈 수 있겠습니까?"
듣고 있던 노숙이 답답한 듯 물었다.
그러자 주유도 그것까지는 생각해 둔 게 없는지
문득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방통을 위해 알맞은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생각하는 중인데
때맞추어 장간이 나타난 것이었다.
주유가 장간이 다시 온 것을 그토록 기뻐한 것은
바로 그를 이용해 방통을 조조에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노숙에게 계책을 주어 방통에게 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군막에 높이 앉아 장간을 불러들이게 했다.
☆☆☆
장간은 주유가 나와 맞아들이지 않고
군막에 앉아서 불러들이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전에 한 짓 때문에 주유가 아직 성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이에 장간은 몸을 빼칠 때에 힘들지 않게
자신이 타고 온 배를 구석지고 조용한 강 언덕에 매어 두게 해놓고
주유가 있는 군막으로 갔다.
"자익은 무슨 까닭으로 나를 그토록 심하게 속였는가?"
과연 주유는 들어서는 장간을 보고 얼굴빛이 변하도록 성이나 꾸짖었다.
장간이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나는 자네와 내가 지난날 형제처럼 지낸 정을 생각하고 마음속의 일을 털어놓고자 왔는데,
자네는 어찌 내가 자네를 속였다 말하는가?"
"자네는 나를 달래 조조에게 항복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바닷물이 다 마르고 차돌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다음에야 될 일이 아니네.
그래도 전 번에는 옛정을 생각해서
한번 흠뻑 마시고 잠자리에까지 함께 들었는데
자네는 내 사사로운 문서를 훔친 뒤
작별도 않고 조조에게로 돌아가 그걸 바치지 않았는가?
그 바람에 우리편이 되기로 했던 채모와 장윤이 죽고 일은 그릇되어 버렸네.
이제 다시 온 것도 틀림없이 좋은 뜻에서는 아닐 테지!"
주유의 목소리는 차고도 매서웠다.
그리고는 장간이 미처 무어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자르듯 말했다.
"옛정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는 자네를 한칼에 베어야 마땅하지만 이번만은 지난 일로 돌리겠네.
그러나 전처럼 자네를 우리 군중에 둘 수 없으니 그리 알게.
이제 하루 이틀이면 조조 그 역적 놈을 깨뜨리게 될 터인데
자네를 여기 그대로 두었다가 또 무슨 기밀을 빼내 갈지 어찌 아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유는 그 자리에서 좌우를 보고 호령했다.
"어서 자익을 서산에 있는 암자로 보내 쉬게 하라.
내가 조조를 깨뜨린 뒤에 강을 건너 돌아가도 늦지 않으리라."
그래도 장간은 다시 무어라고 변명해 보려 했으나
주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장막 뒤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