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장 천문육십사로화절진(天門六十四路花絶陣)
-1
①
군웅전(群雄殿).
삼백여 명의 정사군웅들은 모두 수라궁과의 최후결전에 대비해 바
짝 긴장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팽천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이제 시간이 되었소. 모두 일어섭시다."
그 말에 전 군웅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무영종을 응시했다.
무영종은 이미 군웅들의 마음이 자기 한 몸에 와 있음을 느끼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모두 준비합시다."
그의 담담하면서도 힘찬 음성이 터진 순간 군웅들은 일제히 자리
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영종은 군웅들을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까 소생이 한 말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수라궁
의 마두들은 분명히 차륜전(車輪戰)을 벌여 우리의 진을 모두 빼
놓으려 할 것 입니다. 절대로 그 술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팽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협, 염려마시오. 아까 무대협이 말한 것은 한 자도 잊지 않
았소이다."
그는 약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말을 외워보라면 이 팽모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읊어 보리다."
군웅들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로 인해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나마 느슨해졌다.
무영종은 담담한 미소를 띈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러분 나갑시다."
삼백여 명의 군웅들은 모두 자신의 무기를 힘껏 쥐어보고는 질서
정연하게 군웅전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해
가 떨어지기 전에 자신의 목숨이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는 것을.......
수라궁이라는 가공할 이름이 그들의 뇌리 깊속한 곳까지 억눌렀지
만 그들은 조금도 두려운 빛을 띄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수천 년 중원의 맥을 이어온 무림인들의 불타는 투
혼(鬪魂), 바로 그것이었다.
둥! 둥! 둥---!
둔중한 북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군웅전 밖, 수천 평에 이르는 화원(花園)이 군웅전의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교향(蓮翹香), 잔설화(殘雪花), 벽매하(碧梅荷), 홍연란(紅然
蘭)등 수많은 꽃들이 제각기 그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고 따스한
봄바람에 실려 그윽한 화향이 군웅들의 코를 찔렀다. 그러나 누구
도 한가하게 꽃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둥! 둥---!
섬칫한 북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무형의 살기가 북소리
를 타고 전해졌다. 군웅들은 모두 긴장된 눈으로 드넓은 화원을
응시했다.
호불범이 무영종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대협, 저 화원에서 어떤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저 화원은 예사 화원이 아니오. 과거 사백 년 전, 꽃 속에 묻혀
살던 화중성(花中聖)이라는 기인이 창조해낸 천문육십사로화절진
(天門六十四路花絶陣)이 저 화원 안에 내포되어 있소."
무영종의 말에 옆에 있던 조천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대협, 우리가 얼마 전 저 화원을 통해 군웅전을 들어설 때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않소?"
호불범이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라궁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음......."
둥! 둥! 둥!
북소리는 더욱 가까이서 들려왔고 흑고가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대체 저 북소리는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군. 공연히
남의 이목만 어지럽게 만드니......."
'남의 이목!'
무영종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그의 안색은 홱 변했
다.
'그렇구나! 이제 보니 이것은.......'
그는 즉시 군웅들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여러분, 즉시 대형을 연환구절진(蓮環九絶陣)으로 변환시키시
오."
그의 말에 군웅들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러나 무영종은 이
미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들은 일
언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즉시 대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환구절진(蓮環九絶陣).
이 진법은 무영종이 천기대사에게서 전수받은 천고의 절진 중 하
나로 이 연환구절진은 전문적인 수비형태의 진이었다. 말 그대로
전체 군웅의 형태를 아홉 개의 환(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홉 개의 환진 중 전방의 세 개는 가장 강한 고수로 구성되어 적
의 포위망을 부수고 출로(出路)를 뚫는다. 또한 후방의 삼환진(三
環陣)은 적의 추격을 차단시키고 전방의 고수들을 보호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중방의 삼환진(三環陣)은 전후의 사태를 재빨리 파
악해 부상당한 고수와 교체하거나 죽은
고수의 자리를 바꾸는 것
으로, 이 연환구절진은 무영종이 군웅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
이기 위해서 군웅전 안에서 가르쳐준 것이었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갑자기 급박해지자 무영종이 크게 외쳤다.
"저 북소리를 유의하시오. 수라궁은 저 북소리를 타고 천문육십사
로화절진을 통과하고 있소이다."
군웅들의 시선이 찢어질듯 휩떠지며 화원의 구석구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과연 드넓은 화원의 사방에서 꽃들이 파랑(波浪)처럼
약간씩 물결치고 있었고 그 물결은 북소리에 맞추어 차츰차츰 군
웅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영종의 현기서린 눈에서 신광이 흘렀다.
'저것은.......'
옆에 있던 호불범이 나직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십절(十絶)의 방위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움직임을 추측해 보건
대 舅煊 삼십육 명의 고수가 뭉쳐 있습니다."
현광대사의 백미가 파르르 떨렀다.
"그... 그렇다면 모두 삼백육십 명......."
무영종이 함께 부르짖었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天 三百六十銀殺無影隊)!"
군웅들의 안색이 모두 대변했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이 얼마나 공포스런 이름인가? 구주진천
도 조천명이 안면을 씰룩거리며 음산하게 외쳤다.
"광혈마제 적표! 그 놈이 기어코 저 죽음의 살수대를 만들었군."
현광대사가 탄식했다.
"아미타불... 정혜가 알아본 것이 사실이었구나......."
며칠 전 정혜는 현광의 밀명을 받고 은밀하게 광마혈제 적표의 주
위를 감시한 적이 있었고, 그때 적표와 몇몇 인물 간의 대화를 통
해 천강은살무영대에 관하여 들은 것이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갑자기 완만해지더니 어느 순간 천지가 조용해지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죽음의 파랑만이 악마의 손처럼 군웅
들을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군웅들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적막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
끼고 있었다.
적막은 어쩌면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사(死)의 적막(寂寞)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적막을 깨고 무영종이 웅혼한 불문의 사자후(獅子吼)를 터
뜨렸다.
"우우우---!"
이 사자후는 군웅들의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일순간에 앗아가 버
렸다. 이어 팽천후가 버럭 외쳤다.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놈들은 일부러 우리에게 공포의식
을 심어주고 있다. 일섬(一閃)에 쓸어버려라!"
조천명도 부르짖었다.
"놈들도 삼백, 우리도 삼백이다! 우리 중 한 명이 죽으면 놈들 열
명이 죽고 우리가 열 명이 죽으면 놈들은 깡그리 죽는다."
흑고 통천마군이 흉맹한 음성으로 그 뒤를 이었다.
"광마혈제 적표, 그 늙은 놈은 나이 값도 못하는 놈이다. 이따위
소꿉장난으로 노부를 놀리려 하다니! 흐흐흐......."
그러나 어디선가 가공스런 광소(狂笑)가 이들을 향해 터져나왔다.
"크하하하...! 수라궁에 대항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적표가
똑똑히 보여주마. 얘들아, 쳐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원 속에서 천지가 무너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와---- 와!"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을 뚫고 수많은 은의무사(銀依武士)들이 드디
어 모습을 드러냈다.
백건(白巾)을 이마에 두르고 양 손에는 은빛 방패(防牌)와 은월도
(銀月刀)를 들고 있는 무사들로, 그들은 하나같이 태양혈이 툭 튀
어 나오고 두 눈에서는 번갯불같은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무영종은 은의무사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저들은 모두가 일류급 고수들이다. 수라궁, 이 얼마나 무서운 곳
인가? 저 많은 고수를 언제 다 키워냈단 말인가.......'
사도유가 무영종을 향해 말했다.
"무형, 저들은 바로 내가 수라궁에 들어오기 위해 이 관을 뚫을
때 그곳에 있던 아홉 명의 무사들과 같은 차림이오. 만약 저 놈들
이 모두 그들 아홉 명과 실력이 비슷하다면 실로 무서운 일이오."
무영종의 짙은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는 즉시 군웅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소생이 명을 내리기 전에는 절대로 섣불리 움직이지 마
시오."
그 말에 따라 군웅들은 일체 대형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
신의 손에 쥐어진 병기(兵器)를 꽉 움켜쥔 채 은의무사들을 노려
보기만 할 뿐이었다.
②
무영종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은의무사들을 노려보았
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는 어느새 군웅들의 주위를 포위하고
는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정제동(以靜制動), 이유제강(以柔制强)이다. 절대로 적의 술수
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이들은 강중
강(强中强)이다. 여기에 강으로 부딪치면 설사 이긴다 한들 그 피
해가 엄청날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방법은 단 하나뿐.......'
또다시 어디선가 음흉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크흐흐... 왜 덤비지 않느냐? 겁이 나느냐? 으하하... 이제보니
중원의 고수라는 놈들은 모두 겁쟁이에 불과했구나!"
조천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표! 이 놈이......."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 재빨리 만류했다.
"조맹주, 안 됩니다. 지금 움직이면 놈들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이
오."
"으윽! 빌어먹을......."
조천명은 손에 든 진천마도로 땅을 내리찍으며 억지로 분기를 참
았고 다시 적표의 음성이 들려왔다.
"좋다, 제법이구나. 그러나 네 놈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가 공
격하겠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와---- 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군웅들의 주위를 돌고 있던 은의무사들이 일
제히 공격을 개시했으니 실로 산천이 떨고 초목조차 울릴 엄청난
대공세였다.
드디어 무림역사상 전무후무한 죽음과 피를 부르는 대혈전의 서막
이 열린 것이었다. 은월도의 도강이 하늘을 찔렀고, 서리서리 뻗
치는 살기가 땅을 갈랐다.
무영종은 크게 외쳤다.
"전 삼환(前三環)은 세 번째 생문(生門)을 열고 다섯 개의 사문을
닫으시오! 그리고 중 삼환과 후 삼환은 십팔 개의 휴문(休門)을
모조리 생문(生門)으로 변화시키시오!"
연환구절진(蓮環九絶陣)의 대형이 크게 움직였다.
"대형의 십보(十步)를 벗어나지 말고 적의 공격에 대항하시오!"
마침내 불꽃 튀는 대격전이 벌어졌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그들의 개인적인 무공은 모두 일류급 고
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군웅들의 상대
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강무원대진을 형성하여 절묘한 진법을 바탕으로
공격을 펼치기 때문에 군웅들 개개인의 패도적인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가 있었다.
차차--- 창! 위--- 잉! 펑! 펑.......
천지가 온통 요란한 금속성과 장풍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대접전이었다.
곳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군웅들이 형성한 연환구절진의 전 삼환진에서는 끔찍한 대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 삼환을 맡고 있는 군웅들은 모두가
개세적인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쉬이이--- 익! 퍼...... 펑!
"크--- 아---- 악!"
전 삼환에 부딪친 은살무영대 일 진(一陳)의 삼십여 명은 순식간
에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방패를 적절히 이용하는 한편 자신의 생명도 돌보
지 않고 아귀처럼 덤벼 들었다. 또한 본신의 생명을 돌보지않고
덤비니 그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펑!
"윽!"
한 은의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의 장력
을 방패를 막아내고는 뒤로 주르르 밀려나고 있었다.
"은살무영대는 놈들의 중위(中位)와 후위(後位)를 공격해라! 그곳
이 약점이다!"
음침한 외침이 어디선가에서 들려왔고 무영종은 대뜸 그 음성의
임자를 알아냈다.
'적표, 드디어 나에게 걸려 들었구나!'
그는 곧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중 삼환, 후 삼환의 군웅들은 십팔개생문(十八個生門)을 모두 사
문(死門)으로 변화시키시오! 일단 들어온 적은 한 사람도 놓쳐서
는 안 되오!"
중 삼환, 후 삼환 군웅들의 대형이 쾌속하게 변화를 일으켰고 은
살무영대의 백여 명 은의무사가 공격하자 그들은 기러기 날개 같
이 대열을 펼치며 순식간에 은살무영대를 포위했다.
"걸렸소! 혈의삼십육궁은 연환마궁을 발사하시오!"
무영종의 외침이 터진 순간, 후 삼환에 속해 있던 혈의삼십육궁은
일제히 궁을 발사했다.
슈슈슈슉---!
창졸지간 빗발치듯 쏟아지는 연환마궁에 이십여 명의 은살무영대
사가 쓰러졌다.
그러나 그 외의 대부분은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고 있었고 이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웅후한 파공음이 울렸다.
위---- 잉!
거대한 화살이 연달아 날았다. 바로 사해신군 구양경의 철마궁이
가공할 철마전을 쏜 것이었다.
철마전 한 개에 은살무영대는 방패까지 꿰뚫리며 한꺼번에 세 명
이 통째로 날아갔고 연이어 쏘아진 철마전은 은살무영대를 계속
쓰러뜨렸다.
중 삼환의 군웅들 역시 가차 없이 포위망 안에 든 은살무영대를
주살시키고 있었고 무영종이 다시금 우렁차게 외쳤다.
"적대(敵隊)는 무너지기 시작했소! 후 삼환은 적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시오!"
그러자 후 삼환의 백여 명 군웅들은 일제히 은살무영대의 퇴로를
막았고 중 삼환의 군웅들이 재차 그들을 도륙했다.
처절한 비명과 난무하는 인육혈(人肉血).......
은살무영대는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했으며 광마혈제 적표의 당
황한 음성이 터졌다.
"천강무원진(天 武元陣)을 풀어라! 모두 각개로 놈들을 격파하
라!"
그러자 은살무영대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함성을 지르며 군웅들을
사방에서 한꺼번에 공격했다.
차차차... 창! 펑! 퍼펑!
군웅들도 이제는 쓰러져 갔다. 은살무영대의 머리통을 날리는 순
간 등이 쪼개지는가 하면 은살무영대의 허리를 끊는 순간 두 팔이
날아갔다. 또한 상대의 가슴에 검을 박은 순간 자신의 가슴과 등
을 꿰뚫렸다.
처절한 사투(死鬪)! 장내는 아수라지옥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 속에서 군웅들을 영도해 앞으로 나가던 무영종은 한 명의 은의
무사가 벼락같이 덮치는 것을 보고 신형을 번뜩였다.
그러자 은의무사의 은월도가 어느 사이 그의 손으로 넘어오는가
싶더니 눈부신 은광이 부채살처럼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으아--- 악!"
한꺼번에 다섯 명의 은의무사가 목이 날아갔다.
그것은 바로 불영구검(佛影九劍)으로 무영종은 처음으로 불영검법
을 사용한 것이었다. 우박같은 피가 그의 몸으로 쏟아졌으나 한
방울도 그의 옷자락에 묻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살인(殺人).......'
무영종의 가슴에 격랑이 일었다. 소림에서 실수로 현우(玄羽)를
죽인 이래 강호에서 그의 살인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오
명(五名)의 목을 날리자 무영종은 마음이 크게 진탕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러분! 연환구절진을 대라금강항마진(大羅金剛降魔陣)으로 변화
하여 가차 없이 적을 주살하시오!"
무영종의 입에서 터진 말은 처절하리 만큼 냉혹했으며 그것은 수
라궁의 잔악함이 그의 심중에 커다란 분노와 살심을 일으킨 때문
이었다.
"와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군웅들의 진법이 돌변했다. 전 삼환, 중 삼
환, 후 삼환의 군웅들은 그의 말에 따라 즉각 한 곳으로 뭉쳐졌
다.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무영종의 존재는 완전한 영도자로 깊은 신
뢰를 심고 있었다.
"죽어랏!"
구주진천도 조천명의 진천마도가 가공할 혈우(血雨)를 뿌렸다.
"크... 악!
그의 진천마도가 번뜩일 때마다 한꺼번에 두세 명의 은의무사들의
허리가 동강나 날아갔다.
꽈르릉---- 펑!
또한 통천마군 흑고의 장력이 닥치는 대로 은의무사들을 격살시켰
으며 팽천후의 도법(刀法) 역시 실로 끔찍한 위력을 발휘했다.
우우--- 웅! 쐐---- 액!
자전십팔풍의 소용돌이에 방패와 은월도는 물론 은의무사들의 몸
뚱이가 무수하게 토막났다.
"흐흐흐흐... 당가(唐家) 암기의 맛을 보여주마!"
슈슈슈슉......!
"커억!"
천수겁천 당환성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가 일거수 일투족을 움직
일 때마다 은의무사들은 목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져 시커멓게 변
색되어 죽어갔다.
소림의 십팔나한들 또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그들의 염주와
선장(禪杖), 계도(戒刀)가 번뜩일 때마다 은살무영대는 썰물처럼
갈라졌다.
그러나 군웅들의 피해도 적지 아니 참담한 것이었다. 벌써 오십
명 이상이 희생되고 있었다.
싸움은 아수라장으로 화해 피아를 구분치 못할 정도로 얽혀졌으나
어느 쪽이 크게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았다.
애초 은살무영대는 모두 일류고수인데다 방패를 가진 장점이 있었
고, 게다가 죽음을 불사하는 공격성 때문에 군웅들의 피해도 점차
커갔다.
무영종은 계속 은월도로 적들을 잡초 베듯 치며 상황을 가늠했다.
그러나 이미 싸움의 상황은 극에 이르러 더이상 진세를 바꿀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귓전으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무대협, 군웅들을 화원 좌측 백 장 밖의 가산으로 이동시키시
오!)
무영종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음성은...... 위전풍, 위형이다.'
③
전음의 임자는 바로 선풍마서생 위전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
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다시 전음만이 들려왔다.
(화원 속에 설치된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은 이미 붕괴시켰소. 아무
런 저지도 받지 않을 것이니 어서 군웅들을 가산 쪽으로 이동시키
시오, 급하오!)
무영종은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곧 결단을 내린 듯 그는 군웅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러분! 대라금강항마진을 그대로 지속시키며 대열을 좌측 가산
으로 이동시키시오!"
그의 갑작스런 지시에 혈전에 여념이 없던 군웅들은 모두 의아했
고 호불범이 외쳐 물었다.
"무대협! 그곳에는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런데 어째서 그곳으로 대열을......."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러나 군웅들의 이동은 이미 개시되었고 그들은 무영종의 지시대
로 화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휘--- 익!
이때 전권 밖에 한 혈의인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광마혈제 적표
였다. 적표는 군웅들이 화원 안으로 들어가자 만면에 득의의 괴소
를 흘렸다.
"흐흐흐흐... 어리석은 놈들, 죽음의 절진(絶陣) 안으로 들어서다
니......."
그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흐흐흐... 그 화원 속에는 십만 근(十萬斤)의 화약(火藥)이 묻혀
있다. 천문육십사로화절진으로 안 되면 그때는 흐흐... 모든 것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이다."
적표는 음침한 눈으로 화원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 군웅들을 노려
보았다. 그런데 곧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군웅들이 화원
깊숙이 들어가도 아무 것도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없지 않은가?
적표는 안색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분노성을 터뜨렸다.
"어떤 놈이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을 무너뜨렸구나!"
그는 화원 밖에 포진하고 있던 은살무영대를 향해 외쳤다.
"어서 놈들을 추격해라!"
한편 군웅들은 무영종의 영도 하에 화원의 중심부를 지나 좌측의
가산을 향해 신속히 이동했다. 무영종은 군웅들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자 다소 마음을 놓았다.
휘익! 휙!
그들의 앞에 일곱 명의 인영이 떨어졌다. 그들은 바로 한 명의 흑
의문사와 흑의미부, 그리고 각기 옷색이 다른 다섯 명의 청년이었
다.
군웅들 중 천군맹의 맹주인 조천명이 반색을 했다.
"아니, 이게 누구요? 흑룡단의 위단주가 아니오?"
흑룡단이라는 이름에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과연 나타난
사람은 흑룡단의 단주인 선풍마서생 위전풍과 그의 수하인 오상공
자(五霜公子), 위전풍의 아내인 빙혈미인(氷血美人) 고설한이었던
것이었다.
위전풍은 군웅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여러분! 자세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소이다. 지금 빨리 가산으
로 이동해야만 하오."
그는 오상공자에게 말했다.
"아우들! 어서 계획한 대로 놈들을 막게."
"넷! 형님!"
오상공자는 모두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자, 여러분 갑시다!"
위전풍은 군웅들을 재촉했으나 기이하게도 군웅들은 그의 말을 따
르지 않고 일제히 무영종을 응시했다.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말했다.
"여러분. 위단주의 뒤를 따르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비로소 군웅들은 몸을 움직였고 위전풍은 이
상황에 크게 놀랐다.
'매교랑에게 이 자에 대한 말은 들었지만 모든 군웅들이 이 자를
신임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더우기 천군맹의 맹주
인 조천명과 오만무례한 흑고까지 따르다니 도시 믿기조차 어렵
군.'
위전풍은 무영종이라는 인물에 대해 불가사의함을 느꼈으나 지체
하지 않고 앞장 서 가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군웅들은
마침내 화원을 벗어나 가산에 당도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위전풍은 가산의 지리를 훤히 아는 듯 군웅들을 안내했다. 군웅들
은 모두 그를 따랐고 곧이어 그들은 가산의 후미진 곳에 있는 커
다란 암벽 앞에 당도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단지 평범한 암벽이었으나 위전풍이 어느 한 부
분을 연속 누르자 변화가 일어났다.
쿠르르르... 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암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시커먼 동굴의 통로
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 이곳에 통로가 있다니......."
군웅들은 모두 탄성을 발했다. 그 순간 화원의 중심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꽝--- 꽈르르르릉----!
실로 엄청난 폭발음으로 지축이 온통 흔들리며 가산 전체가 진동
에 의해 흔들흔들 했다. 연이어 하늘을 찌를 듯이 엄청난 불길이
화원 전체에서 터져 올랐다.
꽝-- 꽈르르-- 꽈르르르--- 릉----!
천번지복의 대폭발, 그 폭발음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군웅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 아연실색 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을 뒤덮은 화염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위전풍
이 약간 흥분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하늘이 도왔소! 원래 저 화원 안에는 십만 근의 화약이 매설되어
있었소이다. 그것을 역(逆)으로 이용한 것이오."
"아! 그런 엄청난 함정이......."
군웅들은 다시 한 번 입을 딱 벌렸다. 화원 전체를 뒤덮은 화염은
가산에까지 그 화력(火力)이 뻗어와 군웅들은 살이 타는 뜨거움을
느꼈다.
조천명이 괴소를 흘리며 말했다.
"크흐흐... 적표 그 늙은 놈도 저 불꽃과 함께 타죽겠군!"
휙! 휙!
충천하는 화염 속에서 몇 줄기 인영이 뛰쳐 나왔다. 그들은 바로
오상공자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들은 세 명밖에 없었다. 그것도
옷이 모두 타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아우들! 둘째, 네째는?"
위전풍이 격동하여 묻자 오상공자의 첫째인 흑풍공자 적무성이 처
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둘째와 네째는... 죽었습니다!"
"아!"
위전풍의 놀란 눈에 금새 눈물이 차 올랐다. 그것을 보자 군웅들
도 모두 눈시울이 시큰함을 느꼈다. 결국 오상공자는 군웅들을 위
해 희생을 치른 것이었다.
그러나 위전풍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수고... 했소, 아우들......!"
그는 신색을 다시 회복하며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자, 여러분. 어서 들어갑시다. 이곳은 수라궁의 확보하지 못한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요."
군웅들은 모두 빠른 속도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휙! 휘익!
동굴 밖에 문득 세 명의 인물이 내려섰다.
앞장 선 인물은 금포노인으로 얼굴에 면사를 쓴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바로 수라궁의 궁주인 수라혈신(修羅血神)이었다. 그리고 그
의 좌우로 오독비마(五毒飛魔) 구우령과 백골사마(白骨死魔)가 서
있었다.
수라혈신은 동굴을 바라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위전풍, 그 놈 때문에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의 대부분이 전멸
하고 혈마전주까지 처참한 중상을 입었다."
면사 속으로 보이는 그의 두 눈이 무서운 살기를 발산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전풍! 네 놈은 착각을 했다. 이 동굴이 호보하 밖으로
통하기는 하나, 흐흐흐... 너희들은 절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상상도 못할 무서운 것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다. 크흐흐흐......."
수라혈신의 괴소는 섬뜩하게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멈
추었다. 그는 오독비마에게 묻고 있었다.
"독혈당주. 오독절마진(五毒絶魔陣)은 이미 전개했는가?"
오독비마 구우령은 음흉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궁주님. 속하의 오독(五毒)은 비록 공간의 구애를
받아 아무 곳에나 펼칠 수는 없지만 이 동굴 속에서야... 흐흐
흐... 십분 위력을 발산할 것입니다."
그는 이어 음침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이 통로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백골사마도 음침하게 덧붙였다.
"또 설사 오독절마진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속하의 백팔구유강시녀
(百八九幽彊屍女)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라혈신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 수라궁이 어떤 곳
인지 똑똑히 보여 주리라."
수라혈신은 싸늘한 눈으로 동굴을 응시하더니 몸을 휙 날렸으며
뒤이어 오독비마와 백골사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첫댓글 항상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