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빙하곡(氷河谷)의 기우(奇遇)
흑란은 멍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는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는 바, 거울 속에는 여인이 보
더라도 반해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이 머물러 있었다.
풀잎처럼 보드러워 보이는 입술에는 이슬 같은 물기가 촉촉이 머금어져
있다.
초생달이 가라앉은 듯한 눈썹,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함축하고 있는 심해
(深海)의 흑진주(黑眞珠)와 같이 검은 눈망울.
흑란의 몸에는 두 명의 침모(針母)가 입혀 준 붉은 궁장이 걸치어져 있었
다.
그것은 신부의 복장이다. 빨간 예복을 걸치고 있는 흑란의 모습은 막 피
어나는 장미 봉오리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멍할 뿐이다.
어디를 바라보지는 모를 눈빛, 초점을 상실해 버린 눈망울에는 나이답지
않은 인생의 허무가 짙게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금연(金輦)을 타야만 한다.
금연은 그녀를 몽고왕부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녀는 이제 몽고왕 묵탑의 열다섯 번째 첩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어 버리고 싶다.'
흑란의 눈에서 말간 이슬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상당히 긴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다.
이슬은 또르르 굴러 떨어져서 엷게 화장을 한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악마의 첩이 되어야 하다니… 아아, 사부님이시며 왕야이신 그분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어야 하다니…
….'
흑란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지키는 시녀만 없었더라면 그녀는 또다시 자결을 단행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어디로 가신 것일까?'
흑란은 천천히 손을 펴 보았다. 이틀 동안 그녀의 정신상태를 지탱해 준
물건이 거기 쥐어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늘 팔에 끼워 차고 다녔던 팔찌였다.
팔찌는 난주에서 분실하였던 것으로, 꿈 속에서 그녀에게 되돌아온 것이
다.
그녀는 한 청년의 영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묘하게 일그러진 입매.
그의 눈빛에는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할 우수와 고독이 담기어 있지 않
았던가?
'아아, 어이해 무정히 떠나 버리셨습니까?'
그녀는 딸깃빛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잘강 깨물었다.
그녀는 어느 틈엔가 백무영의 영상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게 된 것이
다.
그녀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백무영의 우울하고도 인간적인 눈빛이 던졌
던 아름다움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사랑이라는 정서는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정서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가슴 가득히 백무영의 영상이 아로새기어 졌다는 것
이다.
그 얼굴은 그녀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육체가 썩어 문드러지는 그 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안녕, 아마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우아하던
얼굴과 따뜻하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하나의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백치처럼 살아나가
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고결한 육체는 악마에게 더럽혀질 것이다.
그렇다고 자결할 수도 없다. 자결을 한다면, 사밀왕부의 안녕에 지장이
올 것이다.
사밀여후는 그녀에게 양모이다. 그녀는 사밀왕부의 복안을 이해하고 있기
에, 감히 자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날, 모란원(牡丹園) 일대는 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황사풍에 휘어 감
기고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가 누런 먼지바람에 휘어 감기고 있다.
어디를 봐도 누런 모래바람이 보일 뿐이다.
낙타를 몰고 가는 대상(隊商)들은 모래가 코와 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일대가 대사막의 초입 부분이며,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이 모래바람이
강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대사막의 거주민들은 사막의 거친 바람 속에서 기질을 단련하기 때문에
기백이 거칠기 마련이다.
거친 기질이 없다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대막지방에는 자고로 용맹스러운 무인들이 대거 배출이 되곤
하였다.
모란원으로 무수한 용자들이 모여든 시각은, 신월이 모래바람에 감추어진
저녁 무렵이었다.
도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펄럭거리는 소맷자락에 그려진 한 마리 늑대.
하늘을 우러러 포효(咆哮)하는 늑대 그림은 핏빛이다.
그러하기에, 상당히 섬칫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수천 명의 무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붉은 늑대의 문장(紋章)을 소맷자락에 새겨 놓고 있는 것
이다.
혈랑(血狼), 그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핏빛 이리의 문장을 소맷자락에 새기어 놓고 있는 자들은 최근 들어 대
막과 초원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한 한 명의 기린아(麒麟兒)를 정신적인 지
도자로 추앙한다는 증표인 것이다.
무사들은 기형병장기를 등에 지거나 가슴에 안고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며, 무리를 지어 떠돌아
다니는 낭인(浪人)들이다.
이들은 실로 오랫동안 대막과 초원지역을 떠돌아다녔다.
이들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십여 년 세월을 부평초처럼 방황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는 주루의 창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검은 빛깔의 가죽 전포(戰袍).
전포의 가슴 부위에는 거대한 핏빛 이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는 무수한 무사들이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잔 술
을 비우고 있었다.
독하디독한 술이나, 그에게는 달게만 느끼어졌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의 눈에서 은은한 혈기(血氣)가 흘러 나왔다.
그는 큰 잔 가득하던 술을 단숨에 비웠으며, 곁에 머물러 있는 자가 재빨
리 술병을 기울여 잔 가득히 호박색 술을 채워 주었다.
"술맛이 좋아."
그는 몽고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해골처럼 깡마른 자이다.
나이는 서른 남짓, 그의 얼굴에는 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사람만
이 갖고 있는 고난의 잔재가 머물러 있었다.
"후후… 나를 기다려 온 대막의 형제들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오늘 밤,
몽고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리라."
그는 또 한 잔의 술을 마셨다. 오늘 밤을 기하여 열다섯 군데에서 엄청난
혈겁이 단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근 삼천 리를 지배하는 패왕으로 발돋음할 것이다.
'모든 준비는 철저하다. 남은 것은 출군(出軍)의 명령에 불과하다.'
그는 한 병 술을 깡그리 마셨다.
그가 술을 마시는 사이, 모여드는 숫자가 일만 명 넘게 늘어났다.
도처에서 낙타 발굽 소리,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온다.
그리고 누군가를 부르는 부르짖음 소리가 끝없이 들려 왔다.
"몽고태자(蒙古太子)시여!"
"우우, 선풍태자(旋風太子)시여! 어서 저희들에게 파천지명(破天之命)을!"
"우우, 존명!"
"이제 대막은 새로운 지배자를 모셔야 할 때다. 저분이 바로 우리들의 지
배자시다. 반역자 묵탑과 사밀여후를 척살(刺殺)하자!"
군중 사이에 끼여 있는 선동자들이 소리치는 가운데, 일만 무사의 숨결이
확확 달아올랐다.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달아오르는 분위기.
그러한 가운데 모래바람이 사그러들며 푸르스름한 청광을 흘리는 사막의
초생달이 나타났다.
사막의 하늘에서 보는 달은 신비하기 짝이 없다.
철목선풍(鐵木旋風).
그는 일만 무사가 백여 번 넘게 자신의 이름을 되풀이해 외친 후에야 술
잔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망루(望樓)로 나아갔으며, 일만 무사는 그의 모습을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낡디낡은 전포를 걸치고 있는 깡마른 사내.
그는 강철로 만든 듯 단단해 보였으며, 그의 눈빛은 어떠한 감정도 배어
들지 않는 회색의 사안(死眼)이었다.
그는 일만 무사들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쳐들었으며, 순간 그의 입술 사이
에는 인근 이십 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장소(長嘯)가 터져 나왔다.
"우우……!"
끝없이 이어지는 장소.
일만 무사는 그의 포효에 따라서 거검하여 포효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야공(夜空)을 무너뜨릴 듯한 장소성.
일만 무사는 일제히 검을 쳐들었으며, 강철음이 요란한 가운데 일만 줄기
의 예기(銳氣)가 밤하늘을 무수히 난도질했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하나로 합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악마적이며,
또한 아름다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제 하늘은 날 저주하고 말리라. 녠녠, 난 이 날을 위하여 너무나도 오
랫동안 천하를 군림할 것이다. 난 환우천하( 宇天下)를 지배하는 절대자
로 군림할 것이다. 우선 몽고와 사밀이 무너질 것이며, 항차 중원(中原)이
네게 무릎 끓으리라. 내머리 위에는 그 어떠한 존재도 머물러 있지 않게
될 것이다. 푸핫핫핫……!"
그는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등에 걸고 있던 고검(古劍)을 힘차게 끌어올렸
다.
스르르릉-!
용의 울부짖는소리와 함께 현란한 금광이 충천(沖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뚱이는 금빛 광채와 더불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어기충소(馭氣沖 )의 경공을 발휘해 오십여 장 높이 떠올랐으며, 또다시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우……!"
피에 굶주린 이리의 울부짖음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자는 저도 모르게 마
성을 폭발시킬 수밖에 없다.
일컬어 마음신후(魔吟神吼).
마음신후의 울부짖음 소리는 가뜩이나 흥분한 대막무사들을 더욱 흥분시
켰다.
검을 쳐들어올린 채 포효를 터뜨리는 자,
검무(劍舞)를 추어 대는 자,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제 육체에 검을 대어 피를 흘리는 자…….
밤의 악마적인 광기에 휘어 감기고 있었으며, 달빛은 인간의 막마성을 물
들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 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밤은 대막(大漠) 이천팔백 리의 역사가 달라지는 밤이며, 항차 천하무
림에 혈풍을 야기시키는 첫번째 악마의 밤이기에…….
그 누구도 이 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절대로…….
대체 어디일까?
어디를 보아도 흰빛이다. 흰빛은 성결한 빛이되, 그 도가 지나치면 엄청
난 공포심을 야기시킨다. 며칠 내내 흰빛만 대하게 된다면 미쳐 버리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빙하지곡(氷河之谷).
모든 생물체가 말살되어 버린 죽음의 대지이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회
색의 이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살을 한 조각 한 조각씩 도려 내는 듯
한 눈보라.
한 치 앞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러하기에, 이 곳
은 수백 년 간 전인미답의 금지로 머물러 있게 된 것이다.
보라! 도처에 뒹굴고 있는 인간의 육체를.
수백 구의 시체가 눈구덩이 속에 파묻혀 있는 바,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죽어 있는 사람들의 시신은 어떤 것이든 간에 거의 훼손이 되지 않았다.
혹독스러운 냉기가 육체를 꽁꽁 얼려 버렸기에, 장구한 세월이 지나도록
시신이 썩어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죽어 육체가 썩어 버린다는 게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이
이 곳에서 증명된다고 할까?
시체 무더기 속, 묘한 물체가 머물러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하나의 생명체가 시체 무더기 속에서 우두커니 머물러 있
었다.
키가 상당히 큰 청년, 그의 머리카락은 봉두난발로 헝클어졌다.
그는 가끔가다가 손바닥으로 머릿결을 쓸어 넘기는 바, 그것이야말로 그
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는 육신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작
만을 골라서 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숨을 쉬고 생각을 한다는 가장 기
초적인 동작이었다.
'움직여선 안 돼.'
그는 한 마리 야수와 비슷했다.
야수에게는 인간이 지니고 있지 못한 생존의 본능이 있다.
그러하기에, 야수는 교육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극한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본능의 생존력에 의하여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남게 되는 것이
다.
'일단은 힘을 되찾아야 한다.'
그의 입가에 메마른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게 가히 기적이었다.
설마, 백무영…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일까?
'너무나도 강하게 단련되었기에, 천 장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났다.
후후, 벼랑 아래에서 위쪽으로 치솟아 오르는 역풍이 추락하는 힘을 상쇄
시켜 주었기에 살아난 것이다.'
그렇다. 백무영은 죽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빙하지곡으로 추락하는 가운데 회오리 바람에 휘말렸으며, 그 덕에
빙하계곡에 떨어지는 충격을 겨우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의식을 회복한 지 세 시진째였다.
그는 차분히 머물러 육체의 감각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는 여섯 명의 사부에게 번갈아 무공을 배우며 극한상황을 이겨 나가는
생존방법을 훈련받은 바 있다.
그는 극지에 머물러 있으되, 고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건 어찌 여길 경우, 자유로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 곳에만은 자신의 얼굴을 위장하고 이름을 감추며 살아나갈 필
요는 없지 않은가?
'이 곳은… 대단한 곳이다.'
백무영은 수백 구의 시신을 바라봤다.
대부분의 시체는 수백 년 전의 복장을 걸치고 있었고, 그 중에는 당조(唐
朝)의 의복을 걸친 자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물은 변황인의 복장
이 아니라, 중화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속인이 태반이기는 하되, 승려도 끼여 있고 도사도 끼여 있다.
심지어 거지 차림의 시체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문병기가 함께 놓여
져 있기에, 그들이 살아 생전 무림계를 풍미했던 일세호걸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병장기는 모두 명품이다.'
백무영의 시선이 이 장 오른쪽에 뒹굴고 있는 보도(寶刀)에 닿고 있었다.
금광을 흘려 대는 보도의 길이는 이 척(二尺) 칠 촌(七寸).
얼핏 보아도 그것은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의 신병이기였다.
당금 강호계의 일급고수라 하더라도 그처럼 보배로운 병장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일컬어 병채금도(兵彩金刀).
병채금도는 특이한 사연을 지닌 병장기이다.
그것은 무림에서 몰락해 버린 금봉문(金鳳門)의 장문신표이며, 무림천병
(武林千兵) 가운데 끼이는 신병이기이다.
병채금도와 더불어 실종이 되어 버린 금봉조사는 생존할 당시, 강호의 십
대기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한데, 이 황량한 변황의 오지에 금봉문의 신표인 병채금도가 뒹굴고 있다
니?
그렇다면 얼음을 뒤집어쓰고 있는 늙은이의 시신이 이백사십 년 전에 사
라져 버린 금봉조사란 말인가?
어디 금봉조사 뿐이랴?
살아 생존할 당시, 금봉조사보다도 훨씬 큰 명망을 누리던 인물의 유품이
지천으로 널리어 있다.
풍운방을 세우고 패도무림계를 질타했던 단천패황(斷天覇皇) 옥무외(玉無
畏)의 신표인 풍운혈번(風雲血幡),
창해존궁(蒼海尊宮)이라는 비밀단체를 이끌고 녹림하오도(綠林下五道)를
칠십 년 간 장악했던 무영도수(無影盜帥)의 장문영부인 마린혈갑(魔麟血
甲)…….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병장기는 하나같이 일세기를 풍미한 무림거두들의
애병(愛兵)이었다.
'상고시대의 명인들이 이름 없는 골짜기 속에서 죽어 간 이유가 무엇일
까?'
백무영은 빙하지곡에 어떠한 신비가 머물러 있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저주받은 냉기(冷氣)만이 감도는 빙하지곡.
대체 이 안에 어떠한 신비가 감춰져 있길래, 무림기인들을 떼주검으로 몰
아넣었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 이 곳까지 와서 죽었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 생
전 얼마나 가공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는가 증명하는 사실이 될 것이다.
내공이 이 갑자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극한지기를 이기며 이
곳까지 올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 생전 적어도 이 갑자 수
위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안력이 점점 회복이 된다.
백무영은 이제까지 보지 못하였던 지흔(指痕)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었
다.
시체 가운데 십여 구는 손가락을 석벽에 꽂아 둔 채 죽었는데, 석벽에는
무수한 글들이 흡사 거미줄처럼 패여 있었다.
'죽기 전, 내공으로 금강지공(金剛指功)을 가해 글씨를 새긴 것이다.'
백무영은 안력을 돋구어 글씨를 살피기 시작했다.
뿌옇게만 보이던 주위가 점차적으로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신체는 가공한 진기의 힘이 머물러 있다.
그것은 창궁법사가 죽기 전에 물려 준 불가금단공력(佛家金丹功力).
그것은 어떠한 마기(魔氣)라도 이기어 내는 순양선천진기(純陽先天眞氣)
이다.
백무영이 빙하지곡에 떨어지고도 죽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는 시신이 남긴 글씨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금봉조사로 여겨지는 노인의 시체 곁에 적힌 글이 우선 눈에 띄인다.
<변황의 마지막 전설에 끌리어 여기에 왔다가 불귀객(不歸客)이 되고 만
다.
중원천하의 태두로 오만히 살다가 이 곳에서 불귀객이 됨은, 지극히 부끄
러운 일.
하나, 후회는 없다. 이 곳은 무림의 절세고수가 생애를 걸고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신화의 대지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전설상의 빙하왕국(氷河王國)이 머물러 있는 곳.
빙하왕국으로 접어드는 자,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부상하다는 전설
이 천 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죽는 것은 서운한 일이 아니되, 그 비밀을 벗기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빙하왕국.
당세의 인물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빙하왕국은 수백 년 전부터 역사에서 지워진 전설상의 신국(神國)이다.
백무영은 그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만박이 준 산해기서(山海奇書) 안에 빙하왕국의 신비가 기록되어 있지 않
았던가?
<새북(塞北)의 하늘 밖에 또 하나의 하늘이 있도다. 그 곳은 일컬어 빙하
왕국이라 한다.
빙하왕부에는 무적신병(無敵神兵)이 있으며, 천년기보(千年奇寶)가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고금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가…….>
천외천(天外天), 가히 하늘 밖의 하늘이다.
빙하왕국은 몽고왕부 이전에 세워진 전설상의 왕국(王國)이며, 그 뿌리는
천 년 이상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이 곳이 빙하왕국의 입구란 말인가?'
백무영의 볼이 가볍게 상기되었다.
그는 또 하나의 글귀를 볼 수 있었다.
글을 남긴 자는 개방의 태상호법(太上護法) 지위에 있던 불취신개(不醉神
凱).
그가 개방태상호법이라는 것은 구절죽장(九節竹杖)이 증명한다. 그는 구
절죽장을 빙벽에 꽂아 두고 있는 바, 빙벽 가득히 글이 적혀 있었다.
<빙하의 마혼(魔魂)이 깨어날 경우, 중원천하의 무림계가 붕괴한다고 여
기고 왔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기진이보 때문이 아니며, 빙하왕국의 신병이기가
사마외도의 손에 들어가 무림계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
함.
하되, 빙하왕부의 호위진세조차 뚫지 못하고 죽어 가게 되었도다. 개방의
풍운만상공(風雲萬象功)으로 칠 일 넘게 버티었으되, 이제는 길이 없다.
노개가 여기서 죽으며 개방의 비전절학이 상실되어 버림이 애석하도다.
노개 개방의 비학이 실전됨을 우려하여 여기에 열다섯 가지 초식을 남기
노니, 이 글을 보고 살아나가는 자는 열다섯 가지 절기를 개방 방주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열다섯 가지 절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며, 일세(一世)에 한해 개방의 태상호법 지위를 누리며 개방도들을 마
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
그는 실로 긴 글을 남겼다.
그는 극한의 냉기를 내공으로 물리쳐 가면서 석벽에 글을 가득 파 둔 것
이다.
그가 기록한 절기는 만상십오절(萬象十五節)이라는 절기로, 개방이 삼 갑
자 동안 실전시키고 있는 개방 최고의 절학이었다.
만상십오절이 있던 시절의 개방은 소림사와 무당파에 비해 뒤지지 않던
거대문파였다.
만상십오절은 백무영도 알지 못하는 무공이다.
그것은 장권검지(掌拳劍指).
어떠한 형태로든 시전해 낼 수 있는 무공이며, 기기묘묘한 초식 변화로
인해 상대가 감히 방어를 하지 못하는 수법이었다.
백무영은 또 하나의 글을 찾아 냈다.
글을 남긴 사람은 그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신분을 지닌 사람
이었다.
<노도, 곤륜(崑崙)의 운룡상인(雲龍上人)이도다.>
운룡상인이라고 밝힌 인물은 흰 수염을 세 자나 기르고 있었으며, 죽어
있는 모습도 지극히 단정했다.
그의 손에는 불진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포칠(布漆)을 한 태극준(太極
樽)이 허리띠에 매달려 있었다.
'운룡상인이라면 곤륜파 제칠대 장문인.'
백무영은 운룡상인이라는 외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운룡상인.
그는 가장 강성했던 곤륜을 이끌었던 인물로,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을
창안한 인물이기도 했다.
운룡대구식은 허공에서의 방향 전환이 자유로운 무공이 아니던가?
운룡대구식은 곤륜파를 타파와 비교시키는 곤륜 최고의 절학이기도 한
것이다.
운룡상인은 시신을 남기지 않고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고 알려진 바, 그
의 시신은 곤륜산에서 수만 리 떨어진 빙하지곡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다.
그의 글이 이어진다.
<노도는 무당의 태청신군(太淸神君), 청조각(靑潮閣)의 자패신니(紫貝神
尼)와 더불어 빙하왕국으로 왔도다.
태청신군과 자패신니는 속가 시절부터의 벗들.
그들과 더불어 여기에 온 이유는, 빙하왕국의 기진이보를 탐내기 때문이
아니며… 빙하왕부의 가공한 힘이 외부로 흘러 나와 중원무림을 패망시
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곳에 와서 헤매기 삼십삼 야(夜).
이제 안다.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빙하왕부의 창시자가 전설을 이용하여
중원천하의 기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중원의 기인들은 모두 속은 것이다.
빙하왕부의 창시자는 빙하대제(氷河大帝) 몽환(夢幻)!
그는 절대검존(絶代劍尊)과 더불어 대륙무림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인물로, 절대검존과 더불어 양패구상한 바 있다.
그는 죽은 후에도 중원에 복수심을 잊지 않고 중원천하의 지도자들을 유
인하여 죽이고자 전설을 조작해 낸 것이다.
천하 칠대방파의 수로(首老)들이 여기 와 죽게 되면 칠대문파의 힘은 위
축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훗날 마도세력이 준동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와서 이 글을 보는 자라면, 칠대방파를 올바로 이끌 책임을 지게
된다.
이제 그대를 칠대방파를 수호하는 공동호법(共同護法)으로 삼고자 한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 우리들과 더불어 실전되는 칠대방파의 진전을
백도에 돌려주어야 하기에.
변황이 중원을 정복하고자 하는 천 년의 음모를 괴멸하여야 하기에…
….>
운룡상인의 논조는 비분강개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칠대문파는 현재의 칠대문파와 다르다.
무산(巫山)이 끼여 있고, 청조각(靑潮閣)과 태극검파(太極劍派)가 끼여 있
다.
당시의 무림계는 백도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칠대문파 사이의 세력 다툼은 있어도, 마도세력이 감히 백도의 야성을 넘
보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판에 칠대방파의 수로들이 빙하왕국의 전설에 유혹되어 수천 리
변황으로 와서 불귀지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 저분들이 실종된 이후, 백도의 절학이 무수히 실전되며 백도가
마도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운룡상인은 백무영과 연관이 있다면 있는 인물이다.
백무영의 아버지는 곤륜파의 후예가 아니던가?
운룡상인은 백무영에게도 연관이 있는 인물인 것이다.
<머지않아 절정마세(絶頂魔勢)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황하(黃河)가 피에 젖고, 장강(長江)에 시체가
메워질지도…….
인연자여! 부디 살아남아 우리들의 한을 중원천하에 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들이 갖고 온 칠 파의 절학을 칠 파의 현임 수로들이게 되돌
려주기를.
그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면, 항마(降魔)를 위해 힘을 뭉치게끔 하여야 하
며…….>
운룡상인은 죽어 가면서도 천하무림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죽어 가며 걱정한 일은 다름 아닌 백도의 붕괴였다.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당금 강호계의 혈겁은 수백 년 전부터 예고된 혈겁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석벽은 얼음에 뒤덮여 있다.
얼음 속으로 글씨가 들여다보인다.
백도가 잃어버린 칠 파의 초절정 무공기예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백무영은 일곱 개의 무공 초식을 익히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듣지 못하던 백도의 진정한 절예였다.
무산파(巫山派)의 난화무영수(蘭花無影手)가 그러하며, 곤륜 최고의 절기
인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의 진본이 그러하다.
태극검파의 호천태극검결(昊天太極劍訣)이 눈에 보이며, 모산파(茅山派)의
비검파천황식(飛劍破天荒式)도 눈에 띄었다.
"아아, 백도의 절기가 이 정도라니……."
백무영은 사마외도의 절기를 백도의 절기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나,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백도의 절기는 사마외도의 절기에 비해 위력
에서 전혀 뒤지는 바 없다.
백도의 절기는 웅휘(雄揮)하거나 정교하기 마련.
그러하기에, 익히기는 어렵되 한 번 익히면 사마외도의 마공괴초(魔功怪
招)와 격돌하여 뒤지지 않는다.
또한 그 위력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증진되며 현오한 이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의 초식을 완벽히 익히기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백무영은 끊어질 듯 호흡 소리를 흘리면서 여러 가지 초식을 하나하나
암기했다.
그는 천부적인 기억력을 간직하고 있는지라, 세 번 정도 입 안으로 되풀
이해 암송하는 가운데 절기를 모조리 암기할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암울한 가운데, 기묘한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겁자가 아니다. 그는 사선 위에서 웃음을 흘릴
줄 아는 철심장부(鐵心丈夫)이다. 하나, 이대로 죽어 가는 건 너무나도 무
가치한 일이다.
"악의 무리들을 응징하기 전까지는 죽을 자격이 없다!"
그는 애써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자 했다.
쓸데없는 흥분은 혈기만 자극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혈기가 아니
라, 냉철한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냉정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이야말로 백무영의 탁월
한 점이었다.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으되, 그는 십 수 년에 걸쳐 가장 완벽한 무사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에게 투자된 세월과 노력을 황금으로 환산하자면, 가히 천만금(千萬金)
에 달한다.
그는 이제까지 여섯 명의 사부가 자신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것을 기대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고독한 호랑이에 불과하다.
그는 악마의 피를 그리워하는 굶주린 야수인 것이다.
백무영은 뿌연 안개를 뚫고 걸음을 내딛었다.
삭풍이 뼛속으로 저미어 든다.
철골지체(鐵骨之體)라고는 하나, 극한의 냉기를 참기 힘들 지경이다.
전신이 꽁꽁 얼어붙다 못해 조각조각 바수어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확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 곳은 거대한 진도이다. 무후(武后)의 팔진도(八陳圖)를 역으로 포진한
데에다가, 구궁(九宮)의 변화를 더한 은둔미리환진(隱遁迷離幻陣)이다.'
그는 특이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도 사도의 모든 진법을 알고 있
었으나 이 곳에 설치된 진세를 알아 내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
렸다.
어찌 되었든 그는 생문(生門)을 찾아 정확히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엄청난 힘이 느끼어졌다.
"우우, 사지백해(四肢百骸)가 녹아 버리는 것 같다."
어지간한 고통으로는 찡그러지지 않는 석고 조각 같은 얼굴이 무참히 일
그러졌다.
숨이 막히며 폐부가 조여진다. 내장이 입 밖으로 게워질 것 같다.
'저 곳이다.'
그는 한 곳을 노려봤다.
뿌연 안개 속에서 마영이 나타나고 있었다.
목을 잃은 귀신, 머리카락을 풀어뜨린 야차들, 막 무덤을 쪼개고 뛰어나
온 듯한 수라들이 백무영을 중심으로 하여 춤사위를 추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다.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시체 썩는 내음이 구역질과 공포감을 야기시킨다.
"악마들! 물러나라!"
백무영은 걷잡지 못할 살기에 휘어 감기며 손과 발을 미친 듯이 휘둘러
댔다.
그는 색혈일검(索血一劍)에서부터 시작하여 악마십팔무(惡魔十八舞)의 변
화를 쉬지 않고 시전해 냈다.
내공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하되, 꽤나 위력적인 공격이다.
손과 발이 미친 듯 휘둘러지는 가운데, 그의 얼굴이 썩은 돼지간처럼 시
뻘겋게 물들었다.
거의 반시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자신이 심마(心魔)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군. 보이는 것은 모두 허상(虛像)이며, 들려 오는 비명 소리는 모두
환각의 소리이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청량한 냉기에 사로잡혔다.
그 기운은 천령개(天靈蓋)에서부터 흘러내려 발바닥 용천지혈(勇泉之穴)
까지를 관통하면서 일신을 휘어 감았던 악념을 태워 버렸다.
그 기운은 번뇌승으로 머물러 살던 소림사 창궁법사가 전한 전원금단공
이었다.
문득 깨닫는 가운데, 모든 환각이 사라졌다.
보이는 건 뿌연 안개 속에 세워진 하나의 대(臺)였으며, 대 위에 놓인 것
은 녹이 슨 철비파(鐵琵琶) 하나와 한 장의 마귀도였다.
"아아, 저 따위 마물에 홀리다니……."
백무영은 참담한 기분에 휘어 감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수호해 준 창궁법사의 진원수호 공력에 대해 무
상의 감사를 느꼈다.
내공이 마비되어 버린 판에 진원수호 공력이 없었더라면, 진력이 깡그리
탈진되어 버릴 때까지 날뛰다가 피를 비처럼 뿌리면서 죽어 버렸으리라.
"혼돈마라진(混沌魔羅陣)이다. 아아, 극상의 마혼진세가 모두 포진되어 있
다."
백무영은 바짝 긴장하여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보보마다 죽음의 덫이 도사리고 있다.
자칫 잘못 발을 디디다가는 몸이 으스러지고 만다.
그는 이제까지 배우고 익힌 모든 지식을 발휘하여 수십 개의 수호관문을
피해 나갈 수 있었다.
자욱한 안개가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허공은 미광(微光)에 뒤덮이며 밝
아지고 있었다.
궁전(宮殿)이다.
백무영 앞으로 우람하게 모습을 드러낸 백색의 축조물은 환상적인 형태
를 갖춘 거대한 궁전이었다.
허공으로 작살처럼 떨어져 내리는 찬란한 여명의 광채 속에서 거대한 백
색의 궁전은 꿈 속의 궁전처럼 신비롭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백무영이 본 모든 광경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정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시냇물이 흐르고, 사슴이 뛰어다닌다. 아름다운 울음소리가 숲 속에서 들
려 오며 오색 깃털을 가진 괴조가 도처에서 떠오른다.
가히 세외선경(世外仙景).
'설마, 이 곳이……?'
그는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빙하왕국의 중심지역으로 접어드는데 십오 일을 소모했다.
그는 폐허의 마경(魔境)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왔는데, 그를 마중하는 것
은 이 세상의 축조물로 여겨지지 않는 극미(極美)의 궁전과 궁정(宮庭)이
었다.
"이 곳이 빙하왕국이란 말인가?"
그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잔디밭에 발을 내디딜 때였다.
갑자기 하이얀 그림자가 눈앞으로 날아 내리며 차가운 기운이 가슴으로
휘몰아쳤다.
"어떤 자가 금지로 접어드느냐?"
콰콰쾅-!
벼락치는 소라와 함께, 백무영의 몸뚱이가 일곱 걸음 뒤쪽으로 뒤뚱뒤뚱
물러났다.
그는 걷잡지 못하는 가운데 칠 보 밀려나며 한 모금 피를 가슴에 게워
냈다.
"손이… 맵군!"
그는 겨우 몸의 자세를 바로잡으며 자신의 가슴에 빙극수혼수(氷極搜魂
手)를 발휘한 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얼굴빛이 어처구니없다는 기광에 휘어 감겼다.
자신의 가슴을 후려갈긴 자가 뜻밖에도 나이 어린 미소녀가 아닌가?
소녀의 살결은 이 세상의 어떤 비단보다도 희고 매끄러웠다.
너무나도 고운 살결이 차라리 공포스러울 정도이다.
계란처럼 갸름한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궁둥이 위로 늘어져 삼
단처럼 검은 머리카락…….
키는 오 척 팔 촌 정도이며, 몸매가 대단히 아름답다.
가장 경이로운 건, 미소녀가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미소녀의 손에 하나의 옥홀(玉笏)이 쥐어져 있을 뿐이며, 옥홀에서
뿌어지는 자광(慈光)이 풍만하게 발달한 가슴을 신비롭게 채색시키고 있
었다.
움푹 들어간 배꼽, 그 아래 울창하게 펼쳐진 원시의 숲, 미끄럽게 느끼어
지는 허벅지의 팽만한 선…….
손으로 살그머니 거머쥐기만 하더라도 녹아 버릴 것 같이 희고 깨끗한
종아리.
더욱이 소년는 맨발이었다.
솔직히 중국 여인들은 신체 가운데 발을 가장 큰 치부(恥部)로 여기며 남
자에게 발을 보일 경우에는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만 할 정도로 발에
대한 금기가 대단한데, 미소녀는 전족(纏足)한 흔적이 없는 맨발을 고스
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넌 누구지?"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박사박 다가섰다.
백무영은 천천히 앞으로 거꾸러지고 있었다.
미소녀가 후려친 일 장은 그가 맞아 본 어떠한 장풍보다도 위력적이었으
며, 그는 몹시 지친 상태이기에 시뻘건 피로 가슴을 적시면서 고목이 쓰
러지듯이 쓰러지는 것이다.
미소녀는 백무영이 피거품을 뿜으며 나뒹굴자, 고개를 다시 갸웃거렸다.
"넌… 예쁘게 생기지 못했다. 난 예쁜 것만 사랑한다. 예쁘지 않은 건 좋
아하지 않아."
미소녀의 목소리는 치기를 품고 있었다.
백무영은 그녀의 늘씬한 허벅지가 마로 앞으로 다가서는 걸 물끄러미 바
라봤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풍만한 몸뚱이를 가진 미소녀의 신비지처가 바로 위쪽으로 다가선 것이
다.
미소녀는 알몸뚱이를 남자에게 보이는 게 수치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예쁜 것도 같군. 한데, 왜 넌 나와 다르게 생겼지? 내 가슴은
이렇게 크고 풍만한데, 왜 너의 가슴은 납작하냔 말이야?"
"으으… 으으……!"
백무영은 소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스르르 의식을 잃어
갔다. 꿈결처럼 목소리가 덮쳐 든다.
"설마… 네가 책에서 본 남자(男子)?"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