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九章 捨命因愛
“……?”
철군악은 아주 이상한 기분에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휘익!
누군가 빠르게 그의 앞으로 뛰어들며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순간, 철군악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고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송 소저, 위험……”
하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맹군 등이 내뿜은 무시무시한 경력(勁力)은 이미 송난령의 전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꽈꽝!
폭음이 터지며 송난령의 몸뚱어리가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아악!”
송난령은 총망중에 검법을 펼치느라 내공을 거의 끌어올리지 못한 탓에 상대의 장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녀는 너무도 커다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입에서 폭포 같은 피를 흘리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나 맹군 등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휘둘렀다.
“이제 마지막이다!”
쒸이이잉!
파파파파팟!
엄청난 위력의 장력이 송난령과 철군악을 향해 마치 우박 떨어져 내리듯 휘몰아쳐 왔다. 바로 그 순간,
“……!”
멍하니 상대의 공세를 쳐다보고 있던 철군악은 가슴 한복판에서 알 수 없는 열기(熱氣)가 꿈틀거리며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내 폭풍노도가 되어 온몸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순간, 철군악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갑자기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그어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그의 검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검기의 폭풍이 마구 휘몰아쳐 나오며 맹군 등이 펼친 장력을 간단히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광해삼검의 노도광란(怒濤狂亂)이었다.
“엇?”
맹군 등은 너무도 놀라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나 그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손을 떨쳐 냈다.
“이놈!”
“네놈이 검을 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콰콰콰콰……
파아아아……
실로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장력과 권경(拳勁)이 뿜어져 나와 철군악의 검세(劒勢)에 맞서 갔다.
하나 철군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맹군 등의 공세를 쳐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검을 들고 기괴하게 그어댔다. 순간,
피윳!
돌연 그의 검으로부터 희끄무레한 우윳빛 검기가 쏘아져 나와 맹군 등이 펼친 공세를 무참히 와해시키는 것이 아닌가.
“어엇?”
“헉!”
맹군 등은 너무도 놀라 허겁지겁 몸을 빼냈지만, 우윳빛 검기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파앗!
서걱!
뭔가 잘려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참한 비명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으윽!”
“으……”
맹군은 넋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 사대권법(四大拳法)의 하나인 이십팔로소천권(二十八路掃天拳)을 대성해 이미 오래 전부터 무적의 고수로 추앙받던 비천창룡(飛天蒼龍)은 머리가 비스듬히 잘린 채 비참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잘려진 한 쪽 팔을 부여잡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옥면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다 맹군 자신 또한 어깨에 제법 깊은 검상을 입어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을 것처럼 보이던 철군악의 일검(一劒)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맹군은 너무 어이가 없어 일시지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멍청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쉬이익……
철군악이 두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맹군과 옥면가람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허옇게 탈색되었다.
“이 악마 같은 놈……!”
그들은 이를 뿌드득 갈며 양손을 세차게 떨쳐 냈다.
슈우우욱……
쾌애애액……
고금십대장력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다는 조화팔법과 옥면가람이 천하에 자랑하는 환영신장(幻影神掌)이 눈을 어지럽히며 빠른 속도로 철군악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 철군악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앞으로 전진하며 무극칠절(無極七絶)의 수유단혼(須臾斷魂)을 펼쳤다. 순간,
파아……
그의 검에서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것이 튀어나와 엄청난 속도로 맹군과 옥면가람을 향해 쏘아져 갔다.
“헉!”
그 위력이며 속도가 어찌나 무시무시하던지 맹군과 옥면가람은 미처 어찌하지도 못하고 검기가 다가오는 것을 멍청히 바라봐야만 했다.
서걱!
파앗!
핏물이 사방으로 튀며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으아아……”
맹군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채 삼 장(丈)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가슴이 쩌억 갈라진 옥면가람의 시신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고, 그 조금 뒤에서는 철군악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맹군은 애써 눈에 힘을 주고 철군악을 노려보았다.
“저, 정말 무서운 검법이로구나…… 문주(門主)의 무량검도(無量劒道)에 피, 필적…… 하나 결국은 너도 죽게 될 것……”
그는 할 말이 더 있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철군악은 싸늘하게 식은 맹군의 시신을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난령이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데 막 송난령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철군악의 안색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땅바닥에 비스듬히 엎어져 있는 그녀의 목에 시퍼런 검날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철군악의 시선은 자연스레 검을 따라 올라갔다.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매에 선한 인상의 미청년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철군악은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심한 갈등을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궁(南宮) 형(兄)…… 검을 치우시오.”
검의 주인, 남궁욱이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철군악은 묵묵히 남궁욱을 쳐다보았다.
그는 하마터면 남궁욱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송난령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이 아닌가!
아무리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도 당연히 화가 날 상황이지만, 묵묵히 남궁욱을 쳐다보는 철군악의 얼굴 어디에서도 화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것이오?”
“왜 이러느냐고? 으하하하하!”
남궁욱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그것은 결코 웃음이 아니었다.
절규(絶叫).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마침내 자신마저도 포기한 채 토해 내는 피의 절규인 것이다.
남궁욱은 한참을 그렇게 웃어대다가 느닷없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았다.
“당신만…… 당신만 아니었다면 송 소저는 나를 좋아할 수도 있었소. 하나…… 이제는 모든 게 틀어졌소.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녀 없이는 도저히 살아 갈 자신이 없소……”
남궁욱은 잠시 말을 끊고는 기이한 표정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이미 모종의 결심을 한 듯 그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소. 아마 철(鐵) 형(兄)도 나를 이해할 거요……”
남궁욱은 말을 끝내자마자 돌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스윽!
그의 검은 이내 송난령의 목에 가느다란 혈흔(血痕)을 내기 시작했다.
너무도 돌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철군악이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송난령은 목숨을 잃게 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여태껏 정신을 잃은 것으로 알았던 송난령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기이한 눈으로 남궁욱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으음!’
남궁욱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길을 외면했다.
괜히 낯이 뜨거워지고 주체할 수 없는 모멸감이 엄습해들었다.
남궁욱은 내심 제 손으로 송난령을 죽인 후 자신도 자결하려고 굳게 결심했지만,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지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뿐, 다른 것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남궁욱이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있자 송난령이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창백하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남궁 공자! 저는 당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 같은 여자 때문에 하나뿐인 목숨을 버린다면……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짓 아닌가요?”
“나, 나는……”
남궁욱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모한 행동이 더없이 부끄럽기도 했다.
남궁욱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뭔가 생각하더니 이내 얼굴을 들고 송난령과 철군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송 소저와 철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오…… 나는 두 분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소.”
남궁욱은 말을 마치고는 빛나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찬연한 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접한 순간, 철군악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남궁 형……”
하나 그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궁욱은 칠공(七孔)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어 내며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남궁 공자님!”
송난령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른 그를 부축했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스스로 심맥(心脈)을 끊은 것이다.
송난령이 그를 쳐다보며 탄식했다.
“남궁 공자!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남궁욱은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소, 송 소저…… 그 동안 정말 즐거웠소.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일생 최고의 행복…… 부디 내 죄를 용서……”
그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송난령은 그의 입 가까이 귀를 대고서야 겨우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세(來世)에서나마 다, 당신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
그 말을 끝으로 남궁욱은 고개를 떨구었다.
“남궁 공자님!”
송난령이 커다랗게 외치며 그의 몸을 흔들어댔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리는 없었다.
흔들흔들!
싸늘하게 식은 남궁욱의 시신만 그저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그만 하시오!”
보다 못한 철군악이 뜯어말리고 나서야 송난령은 정신을 차렸다.
“철 공자님……”
그녀는 복받치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철군악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철군악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실컷 우시오……”
그 말이 감정을 더욱 자극했음인가?
송난령은 더욱더 서럽게 울어댔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 이어지는 울음소리가 그렇게 슬프게 들릴 수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송난령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속이 조금 시원해졌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살며시 철군악의 품을 빠져 나왔다.
“괜찮소?”
철군악의 물음에 송난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도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욱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 같았다.
철군악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저와 같은 마음의 상처는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옆에서 위로한답시고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 봐야 당사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군악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철군악은 가만히 송난령을 부축하고 걸음을 옮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죽었어야 할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그였지만,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서 고통스러운 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철군악은 송난령을 안다시피 한 채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싸늘하게 식은 남궁욱의 시신이 차가운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 * *
“욱아(旭兒)……”
남궁룡(南宮龍)은 짐승 같은 신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엎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참으려 애를 써 봐도 치솟아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남궁룡은 고개를 들고 횃불처럼 타오르는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았다.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던 손자, 남궁욱이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나무관[木棺] 안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이미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었고 입가에는 거무튀튀한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남궁룡은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천천히 관을 쓰다듬으며 비통한 얼굴로 남궁욱의 시신을 쳐다보았다.
“욱아야, 어서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이 할아비에게 장난이었다고 말하렴…… 그러면 내 모든 걸 용서해 주마…… 어서!”
그의 어조가 어찌나 처절하고 슬프게 들리던지 주위에 주욱 늘어서 있던 남궁가(南宮家)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금치 못했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친절하기만 하던 남궁욱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기에,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시신(屍身)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슬픈 눈으로 남궁욱의 시신을 응시하고 있던 남궁룡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철군악, 이놈!”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이를 뿌드득 갈더니 느닷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철군악! 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놈을 산 채로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그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으흐아하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지만 지금 남궁룡의 기색은 오히려 그런 속담이 무색할 정도였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악귀(惡鬼)처럼 잔뜩 일그러진 안색이 마치 지옥의 사신(死神)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없이 광소(狂笑)를 토해 내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섬뜩해 보일 수 없었다.
“크하하하하……”
남궁룡의 처절한 웃음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 * *
철군악은 앞에 놓여 있는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쪼로록!
호박색(琥珀色) 액체가 상큼한 소리를 내며 술잔으로 떨어져 내렸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술잔을 쳐다보다가 쭈욱 들이켰다.
“크으!”
싸한 향기를 동반한 독주(毒酒)가 목을 타고 내려와 위장을 짜르르하게 울렸다.
‘좋군!’
맛도 별로 없는 독주였지만, 철군악은 요 근래 좋지 않았던 일들로 깊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훨씬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철군악은 코를 간질이는 주향(酒香)을 음미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같기도 하고 자주색 같기도 한 노을이 어둠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철군악은 묵묵히 그 광경을 감상했다.
사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한가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그리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유유자적하며 술을 마시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철군악은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상념에 빠졌다.
일전에 있었던 싸움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던 몸은 이제 거의 다 나아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아직까지 송난령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데 비하면 철군악은 실로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다.
철군악은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키며 얼마 전에 제갈추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삼성은 철군악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은 이후로 이제는 아예 드러내 놓고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문파(門派)를 찾아다니며 싸움을 건다고 했다.
그로 인해 이미 수십 개의 군소방파(群小幇派)가 그들의 마수(魔手)를 견디지 못하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는 소문이 강호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삼성이 비록 철군악에게 많은 고수를 잃어 그 힘이 약화됐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들에게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철군악은 본능적으로 마지막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죽든 아니면 삼성이 없어지든, 그것도 아니면 양쪽이 공멸(共滅)하든지 간에 점점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길고도 험난했던 여로(旅路)가 드디어 그 끝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철군악은 술병을 잡고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랐다.
쪼로록!
호박색의 액체가 술잔을 가득 채우며 찰랑거렸다.
한데 그가 막 술잔을 잡으려는 찰나,
“철 형이 아닙니까?”
어디선가 아주 조용하고도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 와 그의 고막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철군악의 눈에 순간적으로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얼굴 가득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
바로 학초명이 아니던가.
그는 철군악이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정말 철 형이군요. 반갑습니다.”
철군악도 마주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소.”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에 말투였지만, 사실 철군악은 학초명이 꽤나 반가웠다.
철군악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정의롭고 군자(君子)다운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철군악의 마음을 알아서인가?
학초명이 그답지 않게 제법 사교성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철 형만 괜찮다면 합석을 하고 싶은데……”
철군악이 마다할 리 만무했다.
“좋소.”
“하하! 고맙습니다.”
철군악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학초명은 이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철군악은 점소이를 불러 술과 몇 가지 안주를 더 시킨 후 학초명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그들은 이내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철군악은 학초명을 겨우 두 번 봤을 뿐인데도 마치 오랜 시간을 사귄 친구처럼 행동이며 말투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학초명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모두 그리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주당이 부럽지 않을 만큼 많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뭔가가 필요해서 자리를 함께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사내들끼리 우연히 만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잘난 척을 할 필요도,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아무런 가식이나 부담 없이 편하게 이 순간을 즐기면 그뿐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탁자 위에 쌓인 술병도 점점 늘어나 이제는 얼핏 보더라도 그 수가 열을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리 술을 잘하지 못하는 두 사람은 제법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
한데 술기운 탓인가?
여태껏 잠자코 술만 마시던 학초명이 돌연 몽롱한 눈으로 철군악을 쳐다보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거나하게 취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잔뜩 꼬부라져 있었다.
“처, 철 형…… 당신은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난데없는 물음에 철군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학초명을 쳐다보았다.
술에 취해 벌겋게 상기된 얼굴 한구석에 진하디 진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철군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순간, 학초명이 잔뜩 놀란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하하…… 철 형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사랑이란 것을 모를 줄 알았는데, 소제(小弟)가 잘못 생각했군요.……”
웃고는 있지만, 표정이나 말투가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 없었다.
철군악은 너무도 이상한 느낌에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까칠까칠한 피부에 야윈 얼굴, 그리고 꿈꾸는 듯한 눈동자……
철군악은 직감적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소?”
학초명은 말없이 몽롱한 눈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듯 초점 없는 눈빛이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소…… 그녀는 선녀보다도 아름다웠고 또한 천사보다도 착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소.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죽는 날까지 함께하기로 맹세했소. 한데……”
학초명은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강은연을 처음 알게 된 것부터 시작해 서로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온 비극에 대해서까지 그는 하나도 빠짐없이 철군악에게 말해 주었다.
철군악은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한 사람은 말하기만 했고 한 사람은 듣기만 했다.
너무도 일방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수십 년을 함께 지낸 사람보다 더욱더 깊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얘기가 끝나자 학초명은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크으!”
그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아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후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취한 눈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비록 우리는 서로 모르는 곳에 떠, 떨어져 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오……
끅! 철 형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소?”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학초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소…… 그 동안 누군가에게 꼭 이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철 형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오.”
철군악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선비처럼 곧은 기상을 풍기는 얼굴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학초명은 다시 한 잔의 술을 쭈욱 들이키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소……”
학초명이 몸을 일으키자 철군악도 아무 말 없이 따라 일어났다.
철군악은 얼른 계산을 하고는 학초명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주점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흐읍!”
철군악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답답한 실내에 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니 일시에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는 슬쩍 옆으로 눈을 돌려 학초명을 바라보았다.
말라 비틀어져 죽을 때만 기다리는 고목(古木)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없었다.
철군악은 문득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어디로 갈 작정이오?”
학초명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글쎄요…… 그녀를 찾을 때까지는 강호를 떠돌아다니겠지요.……”
그는 말을 끊고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철군악은 그의 두 눈에 담겨 있는 염원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겁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대부분 상대방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치지요. 그러다가 상대방과 헤어지면 그때서야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그래 봐야 이미 때는 늦은 겁니다. 철 형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은 부드럽게 대해 주십시오…… 소제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철군악을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취했는지 걸음걸이가 매우 불안정하게 보였지만, 철군악은 그를 부축해 주지 못했다.
그저 그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이기를 묵묵히 기원할 뿐이었다.
‘학 형도 사랑하는 사람을 꼭 찾기 바라오……’
철군악은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 * *
실로 믿기지 않는 소문이 강호에 나돌기 시작했다.
소문.
그것은 바로 무당(武當)에 관한 것이었다.
─`무당이 멸문(滅門)했다!
실로 청천 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였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떤 놈이 지껄인 헛소리인지는 모르지만 무당이 무슨 판잣집인 줄 아나?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사람들은 처음에는 눈에 불을 켜고 반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자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급기야 하나둘 무당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문의 진위(眞僞)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들이 무당산에 도착했을 때,
─`이럴 수가……!
사람들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검지(解劒池)를 표시하는 비석이 박살나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태화궁(太和宮), 우진궁(遇眞宮) 등 모든 전각들이 시커멓게 탄 채 무너져 있었다.
더군다나 수많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모습은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를 보는 것처럼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많은 참배객(參拜客)들로 항상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던 도가(道家)의 성지(聖地)가 하루아침에 피비린내 나는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소문이 사실임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년무당(千年武當)이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지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은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의논해 보았지만,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흉수(凶手)가 누구인지도 밝혀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이견(異見)이 많아 힘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던 탓이다.
비록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당의 멸망이 삼성(三聖)과 관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조차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피[血].
바야흐로 세상을 온통 공포에 떨게 만들 피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사부니임……”
정인도장(庭人道長)은 관초상인(貫初上人)의 위패(位牌)를 보며 숨죽여 오열했다.
그를 낳아 준 부모가 죽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랑했던 여인이 죽은 것도 아니었지만, 정인도장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더없이 크고 깊었다.
이십 년 이상 자신을 길러 주고 가르쳐 준 사부(師父)가 죽었는데도, 임종(臨終)을 지켜보는 것은 고사하고 유체(遺體)조차 수습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불경(不敬)도 이런 불경이 없었다.
거기다가 수백 명에 이르는 문파의 제자들은 모두 도륙(屠戮)당했고 그들이 살던 터전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정인도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슬픔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정와도장(庭蛙道長)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의외로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사형!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정와도장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사제……”
“아무 말 마십시오! 저는 사형이 뭐라 해도 기필코 돌아가신 사부님과 대사형(大師兄)의 원수를 갚고 말겠습니다.”
정와도장은 물끄러미 정인도장을 쳐다보다가 깊이 탄식했다.
그의 얼굴 가득 떠올라 있는 견고한 의지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슬프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사문의 복수(復讐)도 복수지만 그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사부는 물론이요, 원통하게 죽은 문인(門人)들에 대한 장례와 무당(武當)의 재건이 더욱 큰일인 것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하나 아직 혈기 왕성한 정인은 그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런 세속적인 일보다는 복수가 먼저였다.
무당이라는 문파의 대가 완전히 끊기는 일이 있더라도 우선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와도장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탄에 젖은 얼굴로 묵묵히 사부의 위패를 쳐다보고 있는 정풍(庭楓)과 정석(庭石), 정목(庭木)의 모습이 보였다.
비교적 나이가 많고 사려 깊은 정풍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정석이나 정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정인과 마찬가지로 복수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후유……’
정와도장은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동안 사부와 대사형이 무당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충을 겪었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것 같았다.
겨우 다섯도 안 되는 사람을 통솔하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수백 명의 문인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했던 사부나 대사형은 실로 대단한 역량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다.
정와도장은 갑자기 사부와 사형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제자들은 속세(俗世)의 인연이나 인간의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지만, 그들도 역시 사람이었다.
수십 년 이상 정들었던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와도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량수불(無量壽佛)…… 사제들이 굳이 복수를 하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네. 하나 우선은 사부님과 문도(門徒)들에 대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급선무네. 복수는 그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그의 말에 정석도장이 반론을 제기했다.
“사형! 그러다가 그들의 종적을 놓칠까 우려됩니다.”
“무량수불! 그건 걱정할 것 없네.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이미 제마궁주(帝魔宮主)인 사공기와 불화(不和)가 심해져 오직 한 군데밖에 갈 곳이 없다고 하네.”
정풍도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곳이 어딥니까?”
“바로 종남산(終南山)일세.”
“종남산?”
정풍도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그들이 갈 곳이 종남산밖에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하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중 성미 급한 정목도장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종남산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정와도장의 얼굴에 심각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량수불…… 나도 얼마 전에 들은 말인데, 그곳에 바로 마교(魔敎)의 원로원(元老院)이 있다고 하네.”
순간, 정와도장을 제외한 무당오자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인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 중에서도 정풍도장이 제일 놀랐는지 그의 얼굴은 아예 허옇게 탈색되었다.
“그, 그렇다면 아직도 마교가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정와도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세. 자네들도 알다시피 마교는 이미 오래 전에 완전히 멸망했네. 내가 원로원이라는 곳을 마교와 연관지어 말한 것은 그들이 바로 마교의 마지막 교주(敎主)였던 청월마존(靑月魔尊)의 사제들이기 때문이네.”
순간, 무당오자의 얼굴 가득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심사를 대변하듯 정풍도장이 한숨 섞인 소리로 말을 꺼냈다.
“후유…… 정말 다행이군요! 마교가 존재한다고 하셨으면, 모르긴 몰라도 저희들은 모두 심장 마비로 죽고 말았을 겁니다. 무량수불……”
언뜻 들으면 정풍도장이 한 말은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강호에 명망이 자자한 무당의 장로(長老)가 어찌 저리도 겁이 많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정와도장은 조금도 그를 질책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반응이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 그다지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마교라는 단체는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만약 그들이 내부 분열로 멸망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금 강호에서처럼 무림을 전복하려는 음모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정풍도장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서 있자 이번에는 정석도장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한데 사형! 청월마존의 사제라면 도대체 나이가 몇이나 되었을까요?”
“글쎄……”
정와도장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이네만…… 사공기의 나이가 이미 백 살에 가깝다고 하니 아무리 적게 쳐도 그보다 이삼십 년은 더 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정풍도장을 비롯한 무당오자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육십만 넘어도 장수(長壽)를 했다고 잔치를 벌이는 판에, 무려 배가 넘는 세월을 살았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무인(武人)이 범인(凡人)보다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백 살을 넘기기가 힘든 실정이었다.
한데 백 년 하고도 무려 이삼십 년을 더 살았다니, 신선(神仙)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리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정석도장이 답답한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량수불…… 그렇다면 그들의 무공 또한 이미 인간의 경지를 훨씬 넘어섰겠군요?”
정와도장 등은 모두 침중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을 뿐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그들은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당이 그처럼 허망하게 멸망할 수 있었겠는가?
“무량수불……”
말은 않고 있었지만, 무당오자는 모두 답답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상대해야 할 자들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스레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모두 무참히 실패하고 말 것이다.
힘으로 안 되면 머리를 써서라도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할 형편이지만, 무당오자는 쉽사리 묘책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별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하나 그들도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정인도장.
그들의 막내 사제인 정인도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번뜩이고 있음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그의 두 눈이 아주 기괴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기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