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제 1 장 지옥(地獄)의 유희(遊戱)
제 2 장 악마(惡魔)
제 3 장 속는 자와 속이는 자
제 4 장 운명(運命)의 소용돌이
제 5 장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
제 6 장 생존(生存)의 법칙
제 7 장 생존(生存)의 법칙
제 8 장 위대한 탄생(誕生)
제 1 장 지옥(地獄)의 유희(遊戱)
(1)
휘날리는 바람과 함께 두 필의 쾌마(快馬)가 질풍같이 내달렸다.
천일기와 고독검, 그들의 옷은 금방 격전을 치르고 온 듯 여러 군데 구멍이 뻥뻥 뚫리고 찢어져 있다.
고독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계속 투덜거렸다.
"내 원 같잖아서! 무림맹주 서문화가 무림맹의 밥벌레들을 시켜 우릴 잡으려고 혈안이 된 거야 그렇다 치고……그 밥벌레들 중 가장 설치고 있는 게 서문화와 친분이 있는 뇌화곡이라는군요. 그래서 그놈들이 우리가 가는 길목마다 숨어 있는 것이고……."
그러나 천일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속 묵묵부답이다.
고독검은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형님이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또 딸 연명을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그들은 성지(聖地)를 찾는 순례자(巡禮者)처럼 중원 곳곳의 기루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들이 찾는 천연명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고독검은 과묵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떠벌이는 것이다.
"아예 뇌화곡으로 쳐들어가서 쑥대밭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히히히! 그놈들이 기겁을 하고 꼬리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
그때 천일기가 결론을 내듯 말했다.
"뇌화곡 따위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우린 연명만 찾으면 중원을 떠난다. 이 따위 냄새나는 중원엔 티끌만치의 미련도 없어."
고독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의 말이 맞다. 음모와 모략이 난무하는 이 중원이 지겹도록 싫었다.
천일기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언덕 위에서 고개를 들어 북쪽의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북녘의 산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듯 겨우내 쌓인 눈이 채 녹지 않아 희끗희끗한 백발을 한 채 고고히 서 있었다.
볕은 점점 기울어 산 위로는 고요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천일기가 의기(義氣)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드넓은 관외(關外)의 대초원(大草原)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야!"
고독검은 크게 웃으며 주먹을 들어 불끈 쥐어 보였다.
"핫핫핫! 대형, 듣기만 해도 몸속의 피가 끓는 느낌입니다!"
가슴 속의 기상이 한껏 돋궈져 천일기는 낭랑한 소리로 시 한 수를 읊었다.
黃雲萬里動風色,
白波六道流雪山!
황운은 만리를 뒤덮어 바람에 나부끼고,
백파는 여섯 갈래로 설산을 휘돌아라!
그의 시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북쪽 대초원에 가 닿기를 바라는 듯한……
고독검이 맞장구를 쳤다.
"핫핫핫! 우리 형제들의 기상은 장차 대초원을 뒤덮을 것입니다!"
"녀석!"
천일기는 피식 웃었다.
천기랑 고독검이라면 강북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고수이지만 천일기의 눈 속에 보이는 고독검은 열다섯 살, 의형제를 맺을 때처럼 항상 귀엽고 붙임성 있는 아우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미소를 짓고 난 다음 천일기의 얼굴에는 다시 어두운 한 줄기 그림자가 스쳐갔다.
'언제나 연명을 찾아 꿈을 이룰 수 있을는지…….'
휴우!
그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떡해야 하나?'
마치 암흑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루 하루 날이 갈수록,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고독검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우들도 흩어져 조카를 찾고 있으니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천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시진쯤 달렸을까?
평원에는 땅거미가 지고 땅 속에서 솟아오른 어둠이 한 뼘씩 자라 하늘을 드리우는데, 어느 쪽을 살펴봐도 인가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거 오늘밤은 천상 노숙(露宿)을 하는 수밖에……."
하다가 고독검은 멀리 어둠 속 언덕 끝에 걸린 지붕을 보았다.
"이럇!"
고독검은 말 고삐를 당기고 박차를 가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산기슭에 서 있는 그것은 작은 사당(祠堂)이었다.
고독검은 고개를 휙 돌려 천일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대형! 사당이 있습니다. 오늘은 저곳에서 쉬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좋도록 하자꾸나."
두 사람은 말을 사당 옆에 매어두고 천천히 사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너무 낡아 손만 대도 떨어질 것 같은 사당문은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
고독검은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 선객(先客)이 있었던 모양인데……."
사당 안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것이다.
타닥! 탁!
피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생나무 가지들에 불이 옮겨 붙으며 나무 튀는 소리가 났다.
천일기는 모닥불 옆에 다가서며 말했다.
"있었던 게 아니라 있는 거야."
"예?"
고독검이 물었을 때, 삐이걱!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냉혹한 살기를 풀풀 날리는 사내, 귀검수 왕소우가 어깨에 노루 한 마리를 들쳐 메고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고독검은 험험,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주인이 없어 잠시 실례를 했소. 곁불이라도 좀 쐬고 갔으면……."
왕소우는 아무 대답 없이 그 앞을 스쳐지나갔다.
고독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무례한……!'
주먹을 쳐들다가 천일기의 얼굴을 보고는 힘없이 내려뜨렸다.
쿵!
왕소우의 어깨에 올려져있던 노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바닥에 쌓여있던 켜켜 묵은 먼지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고독검은 손을 훼훼 저어 먼지를 물리치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젠장, 얼음장 같은 놈이야. 나보다 더 해! 죽어도 사교적인 인물은 못될 것 같군.'
왕소우는 품속에서 길이 한 자(尺) 가량의 비수를 꺼냈다.
"아!"
고독검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칼 쓰는 솜씨는 정녕 사람 같지 않았다.
스스스……!
부드럽게 칼을 움직이는데 마치 애초부터 그렇게 떨어져 있게 돼있던 것처럼 힘도 들이지 않고 노루의 가죽을 훌렁 벗겨내는 것이다.
본래 그가 서경 최고 육방의 주인이었던 것을 알 턱이 없는 고독검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정 귀신같은 솜씨였다. 칼을 이리저리 비집고 틀어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데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었다.
'뭐, 뭐야? 불과 한 호흡도 하기 전에 노루 한 마리를 해체해버려?'
왕소우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마른 헝겊을 꺼내 비수를 닦아낸 다음 품속에 다시 갈무리했다.
감탄을 연발하던 고독검의 눈빛이 의심의 눈빛으로 변했다.
'이자는 대체 누굴까? 풍기는 냄새로 봐선 범상치 않은 놈인 것은 분명한데…… 혹시 무림맹의……?'
왕소우는 고기 두 덩어리를 집어 천일기와 고독검 앞에 툭 던졌다.
"혼자 먹기엔 너무 많소."
두 사람은 왕소우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고기 속에 독이 들어있을지도……?'
고독검은 눈을 빛내며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데 천일기가 덥석 고기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고맙네, 친구."
"대형……."
고독검은 말리고 싶었으나 천일기는 주저 없이 나뭇가지 하나를 분질러 고기를 꿰었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 올려놓는 것을 고독검은 냉큼 뺏어들었다.
"대형, 제가 굽겠습니다."
두 개의 나뭇가지에 꽂힌 고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구웠다.
천일기는 왕소우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이렇듯 한적한 곳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도 인연일 터…… 우리 인사나 나누는 게 어떻겠나? 난 회량 출신으로 천일기라고 하네만……."
고독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추혼검객 천일기라는 이름은 결코 남들 앞에서 함부로 떠벌릴 이름이 아니다.
무림맹 천뇌옥에서 탈출한 죄인일 뿐더러 살명부의 첫 번째에 올라있는 이름인 것이다.
허나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왕소우의 행동이다.
왕소우는 천일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고독검은 자신의 고기를 휙 던져버렸다.
"젠장, 이 고기는 아무래도 맛이 없을 것 같군. 차라리 버리는 게 낫겠어."
왕소우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눈 속에는 차디찬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뱀눈과 같은 차가움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아나?"
"……."
"내가 모르는 타인이 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거야."
고독검은 자기도 모르게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2)
바로 코앞도 분간할 수 없도록 짙은 어둠 속……
발밑에서 습기 찬 안개가 피어올랐다.
왕소우는 모든 것이 낯익은 곳에 서 있었다.
그곳은 자신의 집이며 자신의 침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자신은 천서군을 죽이고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손때 묻은 탁자와 책상, 그리고 의자들……
모든 것이 친숙한 도구들이었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사람은 자신의 아내 금아였다.
"여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허나 왕소우는 곧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그것을 부인했다.
'이, 이건 현실이 아니야.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인은 맑고 따뜻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당신 언제 돌아오셨어요? 발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자신의 귀에 닿는 목소리는 너무나 생생했다.
"여…… 여보……."
그는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젠 당신을 오해하지 않아.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다니 내가 미쳤던 거였어.
그러나 그의 입술은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왜 그렇게 서 있어요. 남의 집에 온 사람처럼……."
왕소우의 가슴 앞에 이마를 갖다 대었고, 고개를 살짝 들어 정겨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은 입맞춤 안 해주실 거예요?"
왕소우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아내를 안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겠노라 외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입술도,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당신…… 절 안아주지도 않고…… 이젠 절 사랑하지 않는군요."
아내는 갑자기 어깨를 아래 위로 움직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허나 그 소리는 왕소우의 가슴 속에서만 메아리 칠 뿐이다.
금아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머리카락이 양 볼 옆으로 흘러내리고 낯빛이 창백해지면서 입술 끝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아니라 방금 무덤 속에서 뛰쳐나온 귀신이었다.
왕소우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날 두고 어디 가려는 거죠? 어서 이리 와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야 해요!"
금아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쭉 내밀었다.
푹!
왕소우의 가슴 속에 박히는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손.
왕소우는 아픔도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히히히히!"
금아는 귀기어린 웃음을 흘렸다.
"이제 됐어! 당신도 나와 함께 이 차가운 땅 속에서 매일 죽는 고통을 맛봐야 할거야! 카카카카……!"
"허어억!"
왕소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악몽(惡夢)을 꾼 것이다.
꿈은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왕소우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더듬어 보기까지 했다.
'금아…… 억울하겠지? 그래. 내 꿈속에라도 날 죽여 네 원(怨)이 풀릴 수만 있다면…….'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잠이 들 때와 마찬가지였다.
모닥불을 빙 둘러 자신이 맨 오른쪽에, 그리고 천일기와 독고검이 차례로 누워 있는……
"악몽을 꾼 게로군."
자는 줄 알았던 천일기가 던진 말이었다.
"술 한 모금 하겠나?"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품속에서 작은 술병 하나를 왕소우에게 던져 주었다.
왕소우는 마개를 열고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일기는 옆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좀 뜻밖이로군. 자네 같은 사람도 악몽을 꾸다니 말일세."
그는 고개를 돌려 희미해져 가는 모닥불 빛을 바라봤다.
왕소우의 몸에서 강렬하게 뿜어내는 고독과 슬픔에 자신도 취하고 있었다. 비슷한 과거와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동질감 같은 것이었다.
"휴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사 나 또한 비슷한 처지라네. 악몽은 밤마다 찾아들고…… 그때마다 내 전신 구석구석엔 공포와 절망의 기운만이…… 후후! 잠들기가 무서울 지경이라네."
천일기는 쓰디쓰게 웃었다.
왕소우는 술병을 휙 던졌다.
천일기는 그 술병을 받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면서 말을 이었다.
"이십 년을 그렇게 꼬박 악몽에 시달렸지."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손등으로 입가를 쓰윽 닦았다.
"후후……! 내게 있어 세월의 흐름은 저주 그 자체였네.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겼어…… 마누라는 겁탈당해 입에 칼날을 물었고…… 어린 딸은 기루로 팔려간 채 지금도 행방불명이라네.……."
천일기는 가슴이 쓰라린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 사이 난 이십여 년 간을 감옥에 갇혀있었고……."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왕소우가 불쑥 천일기의 말을 잘랐다.
천일기는 감았던 눈을 반쯤 뜨고 왕소우를 지그시 쳐다봤다. 한참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군. 모를 일이야. 왜 내가 떠올리기조차 싫은 과거를 자네에게 말했을까? 정말 모르겠어.……."
왕소우는 무릎을 으드득 펴고 일어섰다.
천일기는 그의 무례가 무례로 여겨지지 않았다.
"왜 내 얘기가 지루했나?"
그는 정을 담은 목소리로 물어 왔지만 왕소우는 여전히 차가운 소리로 말을 받았다.
"쉴 만큼 쉬었으니 떠나겠소!"
짧게 대답하는 그에게서 천일기는 가슴을 꽁꽁 묶어두고 절대 열지 않는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천일기는 그의 이런 행동에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잘 가게. 멀리 배웅하진 않겠네."
저벅저벅……!
왕소우는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갑자기 멈칫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천일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나? 무슨……."
그가 말을 끝맺기 전에 왕소우는 뭔가에 퉁겨나기라도 하듯 발을 차고 뒤로 몸을 던졌다.
파파파파……!
나무 문을 숭숭 뚫고 열 가닥의 기류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천일기는 고독검의 팔을 움켜잡는데 그는 벌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독검 역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 피하세요."
하지만 대충 피해서 될 일이 아니다.
기류는 벽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고, 마치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위로!"
천일기가 외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을 차고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콰쾅!
천장을 뚫고 나왔다.
그들의 발아래서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콰지직!
강한 기류에 의해 몇 군데 벽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사당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고독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촌각만 늦었어도 황천길로 갈 뻔했군!"
천일기는 바닥에 내려서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 삭막했던 젊은이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이다.
'밖으로 빠져나오지는 못했을 텐데…….'
사방으로 기왓장과 흙이 분분이 날리는 가운데 희끄무레한 인영이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말할 것도 없이 귀검수 왕소우였다.
어깨 위에 낙진들이 투두둑 떨어졌을 뿐 어느 한 군데 다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천일기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외에는 일면식도 없는 이 젊은이에게 왜 이리 정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정이 많은 사람도 아닌데……
정은커녕 한이 많다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그는 왕소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천일기는 그에게서 긴 말이 나오길 기대하지 않았지만,
"사신(死神)이 나타났소."
이번에도 왕소우는 짧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천일기와 고독검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신(死神)이라니……?'
왕소우는 등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생명을 보존하고 싶다면 떠나는 게 좋을 거요."
천일기가 누구라는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대체 어떤 상대이기에…….'
천일기와 고독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강한 상대인가?"
왕소우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늦었소! 이젠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소."
마치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사방에서 자욱한 안개가 소리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3)
스스스……
안개는 점점 밀도가 짙어지며 뿌우옇게 시야를 가렸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안개였다.
안개 속으로 전해지는 음습함과 섬뜩한 살기가 그 증거이리라.
숨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일각이 한 시진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
사박 사박……
앞에서 풀잎을 밟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어 안개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흰 옷을 입은 그녀의 몸 주위에는 은은한 광채가 발산되는 것 같았다.
여인은 전혀 급하지 않은 듯 천천히 다가왔다.
싸늘하게 느껴지는 긴장감……
고독검의 목에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세 사람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고독검은 땀이 맺혀 미끈미끈한 오른손을 허리춤에 쓰윽 문질러 닦아내고는 칼자루를 가만히 말아 쥐었다.
언제든지 칼을 뽑아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왕소우는 검 끝이 지면을 향하도록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눈은 어디를 쳐다보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천일기는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허리를 살짝 숙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여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안력(眼力)만으로도 웬만한 두께의 판자는 뚫어버릴 것 같았다.
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여인이 접근했다.
왕소우의 검 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 금아……!"
고독검은 이 순간 두 번 놀랐다.
하나는 나타난 여인의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땅이 갈라진다 해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왕소우의 얼굴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점이다.
왕소우가 놀랄 만도 한 것이 여인은 놀랍게도 자신의 아내 금아였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그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저 여자가 금아의 모습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 오늘로 꼭 열흘 째…… 더 이상 내가 현혹당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물러설 법도 하건만…….'
챙!
고독검이 왼쪽 팔목에 차고 있던 길이가 짧고 면이 넓은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안 돼! 다가가면 위험해!"
왕소우가 제지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더욱 빠르게 몸을 날렸다.
고독검은 허여멀쑥한 여인의 얼굴만 보고 은근히 상대를 깔보고 있었다.
'흥! 그렇게 잘난 척하고 무게를 잡더니 이깟 여자 하나를 어쩌지 못한단 말이냐!'
파파파파……!
고독검의 칼은 정확히 여인의 목을 향했다.
여인은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독검은 씨익 웃었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그가 칼을 먼저 내민 것은 원하는 방향으로 여인을 움직이기 위한 허초에 불과했다. 그의 손은 정확히 여인의 목을 꽈악 움켜쥐었다.
고독검은 자신의 뜻대로 되긴 했지만 너무 싱겁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쩌엉!
여인의 눈에서 번쩍 빛이 발해졌고,
텅……!
고독검은 두 손이 짓이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기이한 반탄력에 의해 뒤로 퉁겨났다.
"커억!"
입에서 피보라를 뿜으며 그의 신형이 뒤로 십여 장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미처 천일기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독검!"
천일기가 달려가려고 했을 때, 고독검은 괜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왕소우가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열흘째인가? 정말 집요하군. 허나 그런다고 내가 널 금아로 믿을 것 같나? 금아는 이미…… 삼 년 전에 죽었어."
여인은 말이 없었다.
아름답지만 섬뜩한 모습으로 천천히 왕소우 앞으로 다가왔다.
왕소우는 여인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열흘 동안 넌 밤마다 그 모습으로 내게 나타났다. 대체 목적이 뭐냐?"
여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치 지옥 끝에서 들려오는 듯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왕소우……! 네가 날 죽였으니…… 이젠 내가 널 죽일 차례야……."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천일기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왕소우라면……? 귀검수 왕소우? 풍기는 기도가 범상치는 않다고 여겼지만…….'
왕소우는 땅으로 내렸던 검 끝을 끌어올려 얼굴 앞에서 일직선으로 세웠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모르나…… 그따위 치졸한 수작에 흔들릴 내가 아니야.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피하지도 않는다."
검에 진기를 주입하자 파르스름한 빛이 쨍하고 빛났다.
"오늘은 널 베겠다!"
크게 외치며 왕소우는 검을 잡은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몸을 날렸다.
슈와아아……!
여인은 이번에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살벌한 표정을 싹 변화시켜 슬픈 미소를 그려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얼굴에서 어떻게 완전히 상반된 표정이 나올 수 있는지……
너무나 슬픈 미소를 짓는 입술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인을 쳐다보는 왕소우의 눈자위가 바르르 떨렸다.
"그, 금아!"
꿈 속에서 보았던 금아의 모습과 똑같았다.
한 치만 더 나아가면 여인의 가슴은 그의 검에 꿰일 것이다.
'한 번도 모자라…… 또다시 날 죽이실 건가요? 제가 죽길 원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의 눈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아냐! 내가 죽을지언정 다시 당신을 죽이지 않아!'
왕소우는 손목을 비틀어 검을 위로 쳐올렸다.
"키익!"
여인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사악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퍼엉!
강맹한 일장이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여인은 빠르게 쌍장을 연속으로 내뻗었다.
퍼퍼퍼퍼……펑!
가슴에 작열하는 쌍장.
"으윽!"
왕소우는 신음을 토하며 연거푸 뒷걸음질을 쳤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그녀에게 맞아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냈다.
"키키키킥! 넌 이제 끝났어!"
여인은 쌍장을 가슴 앞으로 모아 오른손 뒤에 왼손을 맞대고 최후의 일장을 펼쳐내려고 했다.
그 찰나,
피슝……!
공기를 찢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섬전 같은 빛살이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요사한 계집! 물러서라!"
천일기가 더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들며 화광지(火光脂)를 날린 것이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그 즉시 온몸의 혈액이 타들어가 죽고마는 희대의 살인무학(殺人武學), 천뇌옥에서 연마한 절기가 펼쳐진 것이다.
여인은 황급히 허리를 비틀어 가까스로 피해냈다.
피슈슝!
천일기는 손가락을 연속으로 튀겼고, 여러 줄기의 화광지가 요혈(要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여인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공중제비를 넘으며 피해냈다. 그녀가 땅 위에 내려섰을 땐 이미 왕소우에게서 십여 장이나 멀어진 다음이었다. 놈의 숨을 끊을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왕소우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갈비뼈 몇 대가 으스러져나간 것 같은 지독한 아픔을 감내하느라 그의 얼굴에는 비질비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인은 왕소우를 쳐다봤다가 천일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감히 네가!"
그녀의 눈에서 표독스러운 기운이 뻗어 나왔다.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게야!"
천일기는 자신이 상대하겠다는 듯 당당하게 마주 섰다.
그는 양손 끝을 수평으로 세운 다음 오른손은 이마를, 왼손은 단전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모은 손끝에서 희고 투명한 광채가 희미하게 서렸다.
"현…… 현마기공(玄摩氣功)?"
여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놀랍군. 이런 곳에서 실전(失傳)된 지 오래된 전설의 무공을 보게 되다니 말야!"
(4)
"키키키키……!"
여인은 갑자기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처럼 주위에 자욱했던 안개가 그녀의 몸 주위로 몰려들어 소용돌이처럼 회전을 일으켰다.
주위의 공기가 음산하게 변했다.
안개 속에서 한 명의 중년미부(中年美婦)가 나타났다.
천일기는 깜짝 놀랐다.
"여……여보!"
그녀는 바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여러 남자에게 윤간(輪姦)을 당한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칼을 거꾸로 물고 죽은 아내였다.
그 아내가 지금 원망어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하시는군요. 당신……."
"여, 여보……!"
죄책감에 그의 가슴은 오그라들었다.
중년미부는 몹시 심기가 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천천히 저었다.
"당신 때문에 제가 죽고 딸아이는 기루로 팔려갔어요…… 벌써 그걸 잊은 건 아니겠죠?"
천일기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난……난 어쩔 수가 없었소! 그때 일은……."
중년미부는 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세요. 이쪽으로……."
천일기는 마치 몽유병(夢遊病)을 앓듯 넋을 잃고 앞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때 고독검이 그 앞을 막아섰다.
"대형! 이 여자는 형수님이 아닙니다. 형님과 제가 직접 형수님을 묻어드린 것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천일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냐! 저렇게 살아 있잖아! 난…… 난 용서를 빌어야 해……."
"대형!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갑자기 고독검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놈! 당장 비키지 못할까!"
고독검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대형은 뭔가에 홀렸어. 원흉은 저 계집!'
그는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여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 사악한 요물(妖物)! 내 칼을 받아라!"
"네 능력으로 어딜……!"
여인은 차갑게 웃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쫙 뿌려졌다.
고독검은 순간 눈앞이 환해지며 자신의 몸으로 실과 같이 가느다란 수백 가닥의 빛줄기가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 본 이승의 모습이었다.
파파파팟!
전신에 촘촘히 수백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으로 피분수를 내뿜으며 고독검은 쓰러져갔다.
"도, 독검!"
그 소란으로 천일기는 미혹(迷惑)에서 깨어났다.
결국 고독검은 죽음으로써 대형을 살려낸 것이다.
천일기는 고독검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자신의 몸을 덮쳐오는 살기를 느꼈다.
여인은 고독검의 몸에 구멍을 뚫은 머리카락이 다시 돌아온 즉시 바로 천일기를 공격했다.
쉐쉐쉑……!
수백 줄기의 빛살들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뻗어 나와, 고독검을 칠 때와는 달리 하나로 뭉쳐 소용돌이치며 천일기를 향해 맹렬하게 짓쳐들었다.
"이야압!"
노여움과 슬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천일기는 뒤늦게 기합을 내지르며 그 빛살을 향해 쌍장을 후려쳤다.
손바닥과 빛살이 마주치는 순간 천일기는 빛살의 정체가 바로 요녀의 머리카락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진기를 주입해 쇠처럼 단단했고 창처럼 날카로웠다.
꽈과광!
천일기는 쿠쿵! 서너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입으로 커억, 하고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반면 여인은 고작 한 발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놀란 듯 눈을 치떴다. 눈빛이 독랄하게 이글거렸다.
"호오! 이것 봐라? 대단한 놈이었어……."
천일기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이 여인의 무공이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음을……
무림맹 천뇌옥에서 현마기공을 익힌 후, 자신을 당할 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그릇되었던가를……
'허어! 정말 난 헛 살았군.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존재한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는구나.'
천일기는 새롭게 각오를 다져야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다는……
가슴을 곧추세우고 앞으로 나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턱 잡아왔다.
천일기는 고개를 돌렸다.
피가 흐르는 입으로 쓰디쓴 미소를 짓고 있는 왕소우였다.
"내가…… 잊을 뻔했군. 내가 싫어하는 또 한 가지가 바로 남의 상대를 가로채는 것이오."
"하지만 자네는……."
천일기는 부상이 심하잖은가, 라는 말을 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지금의 자신 역시 왕소우 못지않게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왕소우는 천일기의 어깨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여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천일기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운기조식으로 체력을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극심한 부상을 당한 지 일각도 되지 않았다.
왕소우의 걸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태산과 같은 기세로 여인 앞에 우뚝 섰다.
"이제 네가 누군지 알았어…… 백 년 전 현현교엔 독심술과 장안술의 정수인 환천무(幻天霧)라는 환술(幻術)로 천하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마녀가 있었지. 이름이 무몽(霧夢)이라고 했던가?"
"깔깔깔깔……!"
여인은 간드러진 교소를 터뜨렸다.
"맞아. 바로 내가 무몽이야!"
왕소우가 물었다.
"날 노리는 이유는?"
무몽의 날카로운 시선이 왕소우의 얼굴에 꽂혔다.
"잊었느냐? 보름 전 네가 죽인 천서군은 바로 내 남편…… 우린 현현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백 년을 숨어 살았어. 헌데 바로 네놈이 삼좌존의 명을 받고…… 그 사람을 죽인 거야!"
'삼좌존이라니……?'
왕소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삼좌존의 명을 받았다고 했나?"
무몽은 흥! 코웃음을 쳤다.
"간교한 놈! 시치미를 뗄 셈이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몽은 몸을 날렸다. 아니 몸은 그대로 있었고 머리카락만 움직였다.
쉐엑……!
수백 수천 가닥의 머리카락이 한 군데로 모아졌다가 다시 나눠지기도 하고 모아지기도 하면서 쏜살같이 다가왔다.
마치 하늘을 덮으려는 듯 공중으로 굽이쳐 올라갔고, 아래로 내려오며 파도처럼 너울대며 흔들리는 그 모습은 아름답기조차 했다.
왕소우는 아직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무몽은 금아의 모습을 하고 속삭였다.
"당신이 내게 이럴 순 없어요. 어떻게 내게 검을 겨눌 수 있죠?"
하늘을 덮었던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채찍처럼 나뉘어져 그의 몸을 갈겼다.
쒜엑!
쩌억! 쩍……!
머리카락이 휘감길 때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허나 왕소우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혀를 깨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격랑이 점차 가라앉았다. 일체의 오감(五感)을 차단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일어나는 요란한 소음과 자신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금아의 가녀린 목소리가 가물가물 멀어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왕소우는 검을 움직였다.
"아합!"
검이 빙글 원을 그리며 무몽의 머리카락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사자와 같이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팟!
챠챠챠챠챵!
거짓말처럼 머리카락이 동강이 났다.
바람에 나부끼는 가랑잎처럼 잘려진 머리카락들이 흩날렸다.
왕소우는 안으로 파고들며 점점 빠르게 검을 회전시켰다.
"무상화허(無上化虛) 제십검(第十劍) 극령(極靈)!"
무몽의 얼굴이 일변했다.
"당신 내게…… 내게 이럴 수 없어요."
뾰족하게 외쳤지만 그 어떤 것도 왕소우에게 더 이상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금아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단(斷)!"
왕소우는 머리카락 속을 완전히 통과하며 검을 일직선으로 내리 그었다.
손바닥에 묵직하게 느껴져 오는 감촉에서 무몽을 베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몽의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길게 한 줄기 선이 그어졌고 피가 확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금아에서 중년미부로, 그리고 다시 요염한 미녀로 변했다. 무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 지독한 놈…… 내 환천무를 깨뜨리다니!"
왕소우는 그녀의 목을 향해 검 끝을 똑바로 세웠다.
"그게 너의 본모습인가? 묻겠다. 너는 어찌하여 나 왕소우가 현현교 삼좌존의 명령을 받는다고 생각했느냐?"
무몽은 원한맺힌 눈초리로 왕소우를 올려다봤다.
"가증스러운 놈…… 애초 무림맹주 서문화가 만든 이백오십육인 척살명단이 우릴 노린 것임을 부인할 셈이냐? 이미 무림맹의 주축인 구파일방(九派一幇) 육문오가(六門五家)의 상당수가 현현교의 역도들인 삼좌존과 함께 황실에 결탁했음이 밝혀졌어."
'이게 무슨 소린가?'
왕소우는 처음 듣는 말에 흠칫, 얼굴이 굳어졌다.
무몽은 입가에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넌 내 남편 천서군을 죽이고 날 죽이겠지만…… 앞으로 나타날 우리의 동료들을 모두 제거하기는 불가능해…… 백 년의 세월에서 깨어날 그들에게 넌 피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카카카카……! 미친 듯 웃어젖혔다.
'뭔가…… 뭔가 잘못되고 있어…….'
왕소우는 음울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천일기가 무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요물! 그 전에 내 아우의 혈채를 먼저 받아내야겠다!"
그의 검이 무몽의 가슴에 닿기 전, 갑자기 위에서 쉬잇! 바람소리가 들렸다.
천일기는 힘을 주었으나 검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놀랍게도 약지와 중지 사이에 검 끝을 끼워 막아낸 것이다.
'뭐, 뭐야?'
천일기는 두 눈을 부릅떴다.
"웬 놈이냐?"
그의 검을 막은 것은 이제 약관이 갓 넘은 젊은 남자……
옥과 같은 용모에 깨끗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일찌기 선녀를 찾아 헤매던 설고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던 그 사내였다.
"검을 달라는 건가? 후후! 놓아주지."
사내가 손가락을 슬며시 놓자 천일기는 으윽, 신음을 토하며 검을 놓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의식을 잃은 듯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놈!"
왕소우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사내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손바닥만 앞으로 쭉 밀었다.
"허억!"
왕소우는 무형(無形)의 벽에 막힌 듯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안색이 변했다.
'가……강하다!'
사내는 서늘한 시선으로 왕소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이미 중상을 입었어! 그 몸으론 내 상대가 될 수 없지!"
왕소우는 검을 비스듬히 꼬아 잡으며 놈을 쏘아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사내는 피식 웃었다.
"금황독존(金皇獨尊)이라고 들어봤나?"
왕소우는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깜짝 놀랐다.
금황독존!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출신(出身)도, 무공배경도……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금황독존이 강하다는 것과 성미가 포악하여 마음에 맞지 않으면 상대여하를 막론하고 제거한다는 사실뿐이다.
금황독존은 땅바닥에 쓰러진 무몽을 내려다보았다.
"어때? 내 예측대로가 아닌가 말야. 당신들이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 해도 세상은 당신들을 절대 놔두지 않아."
무몽은 이를 악문 채 금황독존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는 증오가 서려 있었지만 금황독존은 무덤덤하게 받아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젠 나의 뜻에 따르는 게 어떤가? 날 제외하곤 누구도 삼좌존을 막지 못해."
무몽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좋아.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왕소우의 얼굴에 꽂혔다.
"저놈과 삼좌존을 함께 죽여준다고 약속하면 동료들을 끌어들이는 데 협조하겠어."
"껄껄껄!"
금황독존은 호탕하게 웃었다.
"결국 동맹이 맺어졌군 그래!"
허리를 숙여 무몽의 허리를 안아 덥썩 안아 들었다. 그리고 왕소우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허나 말이야…… 중상을 입은 상대를 죽이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아."
무몽은 그의 가슴에 안긴 채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게 무슨……?"
"염려 말라구. 때가 무르익으면 저놈을 가장 화끈한 방법으로 죽여주겠어!"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걸음을 옮길 힘조차 없는 왕소우는 검을 든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멀어져가는 금황독존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일기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무릎을 꿇고 앉아 천일기의 상처를 살폈다. 가슴의 상처를 더듬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맙소사! 이 수법은 혈……혈음신장(血陰神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