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자아 인식과 생명의 상보성 그 진실 --최흥규 시집 『 』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전 부이사장) ‘나의 숨결’과 시와의 소통을 위한 정의 현대시의 흐름이나 경향은 대체로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 자기를 성찰하면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이미지를 재생하고 거기에서 소재나 주제를 창출하는 시법을 간과(看過)할 수 없는데 이는 한 인생이 살아온 삶의 궤적(軌跡)에서 추억하는 불망(不忘)의 사연들이 창조적으로 생성되어 한 편의 시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우리 인간들이 간직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칠정(七情)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정서나 사유(思惟)를 확대하여 시적 진실을 탐구하는 상황을 설정하거나 전개하는 방법을 선호(選好)하는 경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여기 최흥규 제3시집 『 』을 일별해 보면 그가 천착하는 시 정신은 ‘나’를 좀더 확인하는 자아의 성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다양한 현실과의 화해나 융합을 시도하는 시법에 우리들의 안목(眼目)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는 이미 ‘자서’에서 ‘시는 나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허무를 연습하는 탄생이고 신비와 창조를 번갈아가는 천사이기도 하고 나를 괴롭히는 악마이기도 하다.’거나 ‘나만의 자각과 반성의 표시로 시는 반성하며 쓰는 울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를 쓴다는 것은, 나의 숨결이고 나의 자전의 노래이기도 하다. 잠든 나를 깨우고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 시를 쓰는 목적이’라고 천명(闡明)하고 있어서 그의 내면 풍경에 각인된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발가벗고 세상에 나와서 천사가 되고 악마도 된다 잠든 나를 깨워 붉은 얼굴을 보이게 하는 시간이고 삶 자체가 시가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윤회이다 작은 쪽배로 떠 있는 외로운 사형수가 된 느낌이여 못난 나를 다시 깨우고 침 발라 꾹 눌러 시를 쓴다 내 영혼만이 볼 수 있는 소통의 많은 언어 소리가 나의 숨결 나의 자전으로 세상을 향해서 노래한다 허무를 반복하고 연습하는 혈관이 다른 이로 전달되는 점에서 태어난 생명이 신비롭게 갈고 닦은 자연이다. --「나의 졸시는」 전문 최흥규 시인은 ‘나를 깨’우고 ‘나의 숨결 나의 자전’ 그리고 ‘내 영혼’이 ‘소통의 많은 언어’로 ‘세상을 향해서 노래’하는 ‘삶 자체가 시가’ 된다는 그의 시 창작의 소회(素懷)를 자상하게 밝히고 있어서 우리들을 공감하게 한다. 그는 결론으로 적시한 ‘허무를 반복하고 연습하는 혈관이 다른 이로 전달되는 // 점에서 태어난 생명이 신비롭게 갈고 닦은 자연이다.’라는 인생성찰의 어조(tone)가 그가 지향하는 시의 행방을 조감(鳥瞰)할 수 있는 시법으로 이해하게 된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지 않듯이 세상 속 모든 것들은 지나간다 모든 생명체는 비와 흙을 비벼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또 지나간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것 이것이 삶속의 참된 진리이다 일몰의 아름다움은 찰나의 모닥불이듯 한밤중까지 계속 이어지질 않듯이 지나간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전문 그렇다. 최흥규 시인은 이처럼 ‘생명’이 곧 ‘삶속의 참된 진리’라는 심중(心中)의 깊은 의지가 진실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명체’도 일출이나 일몰과 같이 ‘찰나의 모닥불’ 같은 시간성과 동행하면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어조로 성찰과 참회의 인생론을 적시하고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비평가 R. 롤랑은 ‘생명만이 신성하다. 생명에의 사랑이 가장 첫째 가는 미덕이다.’라는 말로 생명에 대한 예찬으로 평화보다도 생명을 중시한 바와 같이 최흥규 시인도 ‘또 지나간다’는 생명의 소멸에 대한 긍정으로 수용하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흙과의 윤회를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최흥규 시인은 이 생명(‘나의 숨결’)과 시와의 상관성을 그의 내면에 확고한 주제로 승화함으로써 시와의 소통을 통해서 인간의 진실(혹은 시적 진실)을 탐색하는 그의 시관(詩觀)이나 시 정신을 공감하게 하고 있다. 2. 삶과 동행하는 애환과 기원의 의식 최흥규 시인은 다시 삶의 문제에 많은 시적 탐구를 할애하고 있다. 그가 설정하는 시적 정황(situation)은 삶에서 절감(節減)하는 다변적인 현실상황들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발현된다는 점이 심리적인 마력(魔力)으로 분사(噴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체험한 인생의 단면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서 살아가는 아픈 노을은 / 가난한 자를 닮아서 뜨겁고 아름답다(「가난의 힘」 중에서)’라거나 ‘무섭게 퍼붓는 소낙비 / 세찬 바람에도 / 출렁이는 빗줄기 안으로 보듬으며 / 햇빛 속으로 / 타들어가는 갈증에도 / 환한 웃음 꽃등을 켜고 살래요(「잡초의 삶」 중에서)’라는 등의 어조와 같이 삶과 동행하는 애환을 진솔한 정감으로 발현되고 있다. 나는 보았네, 그가 심한 고열로 흘렸을 수많은 눈물과 어둠을 삼키며 보냈을 진한 어둠의 날들을 삶은 환한 불을 켜고 열광할 때 가장 위태로운 것 탓하지 말고 한층한층 더 튼튼하게 쌓아 올리자 어둠이 깊다고 날이 새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 꽃이 지는 것은 열매를 위한 것 곡선을 준비하자 절망의 눈물은 문 밖으로 밀어내고 따뜻한 햇살 불러들여 링거 줄에 흐르는 가족의 피를 생각하자 지금 손에 쥔 것들은 날아갈 한 줄기 바람일 뿐이고 덜 여문 곡절 눈물이 보석을 만들어짐을 잊지말자. --「패자에게 박수를」 전문 최흥규 시인이 인식한 삶에서의 ‘패자’에게는 ‘눈물과 어둠’이 상존하고 있지만 그것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어서 이채롭다. 그 ‘어둠의 날들’과 ‘절망의 눈물’을 ‘나는 보았네’라는 화해의 손짓으로 위무(慰撫)를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지향하는 삶의 범주(範疇)에는 ‘어둠이 깊다고 날이 새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라는 새로운 각오의 심경을 이해하게 된다. 이 ‘어둠’에 관한 시편들은 그의 절망적인 심리상태의 발현인데 ‘어둠은 세상의 뒷길로 빠르게 나서는 시간이다(「새벽 단상」 중에서)’, ‘어둠을 벗기는 돋은 아침 햇살들이 머리채 푼 볕을 / 옹글게 꿈꾸며 이곳에서 30년을 펄펄 끓이고 있다(「사무실에 들어오면」 중에서)’ 그리고 ‘각질 벗겨진 오래된 좁은 시장 앞에 / 졸고 있던 간판들이 어둠을 끌고 온다(「골목시장」 중에서)’라는 행간과 같이 그에게서 이 ‘어둠’은 삶의 한 단면으로써 생(혹은 삶)의 지표로 깊이 새겨두는 경구(警句)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론으로 제시한 마지막 연에서 ‘지금 손에 쥔 것들은 날아갈 한 줄기 바람일 뿐이고 / 덜 여문 곡절 눈물이 보석을 만들어짐을 잊지말자.’는 어조는 지금까지 지친 삶에 대한 극복의 의지가 발현되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흥규 시인의 슬픔의 현장은 침묵이나 기다림으로 일관하고 있다. ‘목마른 사각 논배미의 기다림은—중략--숨죽인 도랑물의 눈빛은 슬픔으로 / 댓돌로 향하며 창궐하는 침묵이다.(「도랑물」 중에서)’라는 어조는 ‘어둠의 벽’을 허물고 ‘고된 삶’과 ‘갈색빛 삶(이상 「시간 위에서」 중에서)’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도래(到來)할 미래를 향한 인내의 정감이 현현되고 있다 숲을 빠져나와 푸른 바다를 목에 걸고서 고단한 세상의 삶을 허리 속에 동여매고 바람도 섶을 열어 앞서가는 희망 문으로 휘어져 후려치며 꺾이고 차이는 아픔들이 내 몸은 이미 조개껍데기 곧추세운 삶이여 무너지지 않는 당당함으로 직립하고 싶다 칼바람에 멍이 들어서 허물어진 눈시울은 평탄한 바다와 금간 내 생 언저리 곁으로 다가오는 파도를 보듬고 희망을 걸어본다. --「벼랑」 전문 한편 이러한 ‘벼랑’의 삶에서도 한 줄기의 희망을 탐색하고 있다. 그는 삶의 애환에서 생성한 기원의 의지를 표면화하고 있는데 ‘휘어져 후려치며 꺾이고 차이는 아픔들이 / 내 몸은 이미 조개껍데기 곧추세운 삶이여 / 무너지지 않는 당당함으로 직립하고 싶다’는 의지로 ‘고단한 세상의 삶’에 대한 기원으로 승화하고 있어서 그에게는 ‘희망’이라는 인내로 심경의 변화로 전환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벼랑’이라는 낭떠러지의 아주 위험한 언덕으로 삶을 비유한 것은 평탄하지 못한 인생행로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나 그 아슬아슬한 위험에서 탈피하고픈 그의 여망이 잘 현현되고 있어서 작품의 효과를 흡인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는 다시 작품 「종이컵」에서도 ‘삶은 저마다 다 행복할 수 없는 것 / 서로가 소통하고 인연으로 부드럽고 매끈한 / 창호지 살결이 되고 싶었다’는 어조로 ‘싶었다’는 과거형 보조형용사가 그의 심중에 잠재해 있어서 그가 기원하고자 하는 다채로운 삶의 행방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흥규 시인의 기원 의식은 ‘너와 내가 소통하고 싶었다’거나 ‘사멸하는 여정을 떠나고 싶었다.’는 등의 간절한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삶에 대한 원대한 의미가 바로 생명성과 직결하는 인생의 가치관 설정과 전개에서 소망하는 하나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그리움’의 원류는 ‘공허한 세월’이다 최흥규 시인은 삶에서 동행하는 또 하나의 골깊은 사유가 작품 속에 침잠(沈潛)해 있다. 그것은 바로 어쩔 수 없이 감내(堪耐)해야 하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의 생성원인이나 경로는 개개의 환경이나 사유의 방식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지만 대체로 인간의 심리작용에서 생성하는 순정적 영혼이 깃든 생명수이거나 반대로 우수(憂愁)의 허탈이 동반하는 생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삶을 이끄는 또 다른 길을 찾아서 / 그리움들이 널조각으로 걸쳐간 듯이 // 네 그리움이 징검다리 놓아둔 듯한 / 희미한 그 무엇이 거기에 서 있다.(「건널목」 중에서)’라는 어조와 같이 이것이 삶을 형상화하는 ‘징검다리’의 사물적 이미지와 같은 상관성을 갖게 한다. 아득한 듯 공허한 세월이 나를 재촉하고 나는 세월을 애절하게 부러뜨린다 가지 마라 손 내밀면 저만치 있고 만족 못 한 고적함은 눈가로 내려온다 뜨거움은 다 식어 바람처럼 스치고 다 된 듯 아쉬움은 한숨으로 밀려온다 자상하게 들려주던 핏물 밴 알곡들은 빼곡하게 한숨 짙어 주름살이 거뭇하고 꿈과 청춘이 술잔에 맴돌아 되뇐 추억들이 차오르는 외로움은 건반처럼 깊어간다. --「중년이 되어」 전문 여기에서 그는 ‘공허한 세월’을 이미지로 등장시킨다. ‘아득한 듯 공허한 세월이 나를 재촉하고 / 나는 세월을 애절하게 부러뜨린다’는 그의 외적인 형상은 ‘중년’이라는 세월의 변화와 동시에 엄습하는 ‘뜨거움 다 식어버린 바람’이며 ‘한숨 짙은 주름살’이 바로 ‘고적함’과 ‘아쉬움’과 ‘외로움’으로 전이(轉移)하고 있어서 그가 현재 사유하는 시적 상상력 중심에는 인생의 그리움이 잔존(殘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는 다시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몸이 있다는 것들을 / 깨달은 삶은 엉겅퀴 피는 그리운 달빛이고 // 캄캄한 그리움은 대낮으로 마음을 닦으며 / 밤 낮으로 불빛으로 몸을 닦으며 살아간다(「내 고향 김제」 중에서)’라는 어조에서도 ‘그리움’의 진원지가 어디이며 원류가 무엇인가를 짐작케 하는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긴 기다림 끝에 목타는 저 욕망은 한정된 시간을 던져놓은 초가을에 흰 얼굴로 함초롬히 홀로 앉아서 햇살을 짚고 초벌 화장 한창이다 완성을 위한 그리움의 큰 꿈들은 이리도 애타게 절박한 그리움일까 시린 임을 위한 욕망의 심장들은 애잔케 핀 미끼 같은 작은 꽃이여. --「바람꽃」 전문 최흥규 시인은 ‘바람꽃’이라는 사물에서도 ‘긴 기다림’과 ‘한정된 시간’이라는 대칭적 어조는 ‘완성을 위한 그리움의 큰 꿈들은 / 이리도 애타게 절박한 그리움일까’라는 의문형의 어법(語法)으로 ‘절박한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는 애잔하게 핀 작은 꽃이 적시하는 이미지는 우리 인간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그리움의 한 대목임을 명민(明敏)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언젠가는 우리 만나지는데 비길 데 없이 / 슬프고 아리고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중략--효도를 못한 불효의 한이 도랑물로 흐릅니다.(「어머니」 중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불효의 그리움의 애타는 모정(母情)이 넘치는 시구(詩句)는 우리 독자들의 정감을 이입(移入)시키는 촉매제로 현현하고 있다. 또한 ‘높은 산 깊은 계곡 기척 없는 형제 우애는 / 씀박이 보다 더 쓴 그리운 달빛을 우려내며 / 무한으로 찢기지 않는 박음질한 넝쿨이여.(「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중에서)’라는 형제애에서 나타나는 ‘그리운 달빛’이나 ‘하늘 땅 기를 모아 천수를 소망하며 / 세월의 큰 힘에도 강녕하시길 소망한다.(「아버지의 팔순케익」 중에서)’라는 어조나 시적 상황들은 최흥규 시인이 그의 심중 내면에서 생성하는 애잔한 그리움의 원류가 되고 있으며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아버지, 할머니 등 부모들에 대한 효심(孝心)의 그리움도 분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작품 「감나무」에서 ‘둥글게 익는, 붉은 기별을 더듬은 행복한 미각 / 도드라진 둥근 감 싸목싸목 익어가는 그리움.’, 「호박꽃」에서 ‘숫기 없이 땅에 꽃을 피워 포근하게 잘 익은 / 늙은 호박은 엄마 품을 베고 싶은 그리움이다.’, 「비둘기낭 폭포 」에서 ‘소나무 송진향 베어나는 되알진 그늘 숲길 아래 / 그리움을 갈아서 눕혀 서럽게 미어지는 오장육부’ 그리고 「용오름」에서도 ‘못 말려 뭉쳐진 님의 생각은 울부짖어 직립하는 // 저 위의 그리움을 치솟아 그대에게 달려간다.’라는 상황 전개와 같이 최흥규 시인의 그리움은 외적인 사물과 내적인 관념에서 풍성한 이미지를 발산함으로써 시 읽기의 맛을 가중시키고 있다. 4. 서정적 자연관과 ‘무소유’의 정심(淨心) 우리 시인들은 친자연적인 성향을 모두 가졌다는 말도 지나친 것은 아니리라. 우선 우리가 외적으로 대할 수 있는 사물이 만유(萬有)의 자연에서 착목(着目)하기 때문에 우선 시각, 청각, 촉각 등 우리의 오관(五官)을 통해서 재생하는 이미지가 시적인 소재와 주제로 창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대자연에서 이미지를 재생하거나 창출하려면 계절의 변화와 민감한 상보성을 갖게 되는데 이는 자연의 섭리(攝理)에 순응하면서 동행하는 인간들의 습성이다. 이렇게 매일 대할 수 있는 자연 사물에 대해서 우산 미적(美的)인 부분만 부각하는 이미지 외에 무엇을 주제로 투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그 시인의 체험으로 그 해법을 찾게 된다. 최흥규 시인은 우선 ‘지독한 가뭄을 거부하는 저 손사래를 / 숲속에 들어온 자만이 볼 수 있는 장관이다—중략--싸여진 묵은 먼지 날짐승 발바닥이 털어내고 / 꿈틀거리는 생명 산야에 손짓으로 두들긴다(「숲이 춤을 춘다」 중에서)’는 ‘숲’에 대한 응시(凝視)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과 상관된 이미지를 끝없이 탐구하고 있다. 다져놓은 외길을 뒷짐지고 수런대는 산에 다가선다 오솔길 위 햇살은 흘러 내려와서 풀빛으로 고이더니 좁은 길 구비로 자라난 푸른 소망하나 가지를 뻗고 옥동자 청자를 구워내는 장인의 이마에 땀이 흐르듯 하늘길 잃은 먼지와 벗이 되려 소롯이 손을 내밀면 한 자락씩 자란 숲속 나무들이 물고기처럼 풀고 있다 산바람을 동여맨 청솔가지 아래로 내려놓은 몸으로 무소유 마음에 다시 한 뼘씩 자란 소망을 잘 키워서 나를 낮추도록 빽빽이 다가선 그늘 아래로 밀어낸다. --「산에 다가가면」 전문 최흥규 시인은 이처럼 산에 가서 ‘오솔길’에서 만나는 ‘숲속 나무들’과 ‘햇살’과 ‘산바람’ 그리고 ‘청솔가지’ 등등의 사물과 교감하게 되는데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주제는 마지막 연에서 명징하게 적시한 ‘산바람을 동여맨 청솔가지 아래로 내려놓은 몸으로 / 무소유 마음에 다시 한 뼘씩 자란 소망을 잘 키워서 / 나를 낮추도록 빽빽이 다가선 그늘 아래로 밀어낸다.’는 ‘무소유’의 ‘소망’이 ‘나를 낮추도록’ 심성의 변화를 구현하려는 시심(詩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 서정은 사계절과 무관하게 이미지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순진하게 더위를 꾸짖으며 찾아온 바람결은 / 촉촉한 초록을 발효시킨 능수버들 황금물결이 / 소리 없이 커다란 눈물샘을 감아서 일렁인다(「가을」 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가을‘ 계절의 시간성(세월)이 서정으로 지향하는 길과 동시에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거친 비탈길을 베고 누운 고향의 골목길 옆에 다 달아빠져 꺾어져서 낫이 하늘을 베고 있다 척박한 초가집 저녁은 또다시 잠들지 못하고 문고리 흔드는 냉기는 가슴팍이 저려 온다 까만 추억은 중앙 위 쪽에 타투가 되어 있고 달빛 아래 누운 배 허기진 맨발의 보릿고개에 거칠고 늙은 머릿결 흩어진 발자국 자리에 하늘 위에서 새우등이 초승달로 걸려 있다. --「초승달」 전문 이와 같이 초승, 보름, 그믐으로 대별되는 시간이 자연과 어우러질 때 거기에서 생성하는 이미지는 최흥규 시인에게서 불망의 동심이 어른거리는 ‘거친 비탈길을 베고 누운 고향의 골목길’과 ‘초가집 저녁의’의 ‘문고리 흔드는 냉기’ 등이 추억으로 재생하지만 ‘달빛 아래 누운 배 허기진 맨발의 보릿고개’나 ‘거칠고 늙은 머릿결 흩어진 발자국 자리에’서 이 ‘새우등의 초승달’은 그가 고달팠던 삶의 흔적에서 탐색하는 그리움이 서정성으로 재탄생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계절적인 서정성은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망라하고 그의 시선이 멈추거나 심도 있게 응시한 산야(山野)와 자연 현상의 동정(動靜)에서 투영된 삶의 의미와 사유의 행방을 예비하는 그의 서정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최흥규 시인은 작품 「꽃이 지고나면」에서 ‘햇살이 깃든 벙그는 꽃밭에 밝은 빛이 찾아와 비추더니 // 등 따가운 뜨거움을 다독이며 하늘로 가는 저 꽃망울들 // 하늘 위로 광활한 푸른 하늘 틈으로 명지바람 품에 안고 // 열정을 세워 더 뜨거움으로 사랑에 꽃망울을 노래한다’는 어조로 봄을 노래하는 하면 또한 작품 「첫눈」 전문에서도 ‘지난 여름빛에 베인 화폭 중심에서 아카시아꽃 // 이팝나무 꽃 목화 꽃들이 하얀 뭉게구름을 타고서 // 남루한 세상일을 보듬고 하늘로 먼저 날아가더니 // 칼끝에서 낙화하는 눈부신 하얀 깃발 꽃으로 날아 // 때 묻지 않는 엄숙한 하느님 경전 설경의 꽃으로 // 낮고 굵은 성량으로 곳간에 가득 들어오고 있다.’는 겨울의 이미지를 서정화(抒情化)하고 이는 것이다. 우리의 김남조 시인도 그의 글 「생명의 시원에서」 중에서 ‘모든 계절은 하나의 출발, 가을이 새로 열리는 곳에 씻은 마음의 청과(靑果)를 담아내리라. 한 계절은 가고 또 하나는 오건만 빛과 열락(悅樂)을 금하는 계절은 없다. 삶의 욕구와 즈믄 소망을 못갖게 하는 계절은 결코 없다.’는 언지로 계절과 생명에 대한 상보의 의미를 피력하고 있어서 사계절 이미지의 창출에 도움이 될 듯도 하다. 5. 시조풍의 시법과 첩어의 사용 최흥규 시인의 시집 읽기를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대하게 되는데 그 첫 째가 작품 전체의 작법이나 시법이 시조풍이라는 표현법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는 3444조의 정통 시조작법의 정형시를 약간 변형시킨 특이한 시법이었으나 현대시 못지않게 상황 설정과 전개 그리고 주제의 투영 등이 잘 구성되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율격(律格)에 신경을 맞추다보면 현대시가 갖는 자유로운 표현법이 제한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제약을 감수(甘受)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살펴본 바는 우리의 언어체계상의 첩어(疊語)를 많이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 첩어는 동일하거나 또는 비슷한 음(音)으로 이루어진 형태소를 반복해서 만들어진 복합어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인용해보면 모락모락, 주렁주렁, 똘망똘망, 짱알짱알, 벙글벙글, 쪼록쪼록, 수군수군, 뚜벅뚜벅, 꼬불꼬불, 도란도란, 가만가만, 대롱대롱, 아슬아슬, 흘끔흘끔, 토닥토닥, 아작아작, 동글동글, 듬뿍듬뿍, 흥얼흥얼 등등으로 수없이 등장시켜서 표현 단어 전후에 다른 수식 단어를 연결해서 행간의 의미를 배가시키는 훌륭한 화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를 반복적으로 복합하는 문장법은 그 문장의 의미뿐만 아니라, 표현의 묘미(妙味)를 더욱 상승시키는 효과까지 갖게 되는 수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함축된 시 문장에서는 행간의 강조법이나 이미지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첩어나 준첩어 사용은 바람직한 시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흥규 시인은 ‘뚜벅뚜벅 발걸음 고난의 생을 깊이 그려본다(「바람의 길」 중에서)’, ‘돌아앉아 수군수군 뿔뿔이 갈길 가는 뒷모습(「놀부 삽화」 중에서)’, ‘(꼬불꼬불 햇빛 뒤로 숨은 증오의 뿌리(「제2땅굴」 중에서)’ 등 첩어의 사용은 시 읽기에 흥미 유발은 물론 행간의 소통을 위한 색다른 시법(또는 화법)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또한 최흥규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서산마루 숲 사이로 아쉬운 노을빛은 / 어떻게 살아야 저렇게 곱게 늙는 걸까.(「홍시」 중에서)’라는 인생론에서 참회나 성찰의 단계에서 관조(觀照)의 가치관을 창조하는 주제를 구현하려는 시 정신을 이해하게 되어서 그의 시적 열정을 상찬(賞讚)하게 된다.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