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나가 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에 나가 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나가 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 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작가소개: 송수권(宋秀權, 1940년 3월 15일 ~ 2016년 4월 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호는 평전(平田). 1975년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남도의 서정(抒情)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종래의 서정시가 생(生)의 에너지를 상실하게 하고, 자기 탐닉의 울음으로 떨어지는 한을 민족적·역사적 힘으로 부활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송수권 시인은, 문공부예술상을 비롯해 금호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전라남도문화상, 김달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님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1998. 시와시학사), 제10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다.
그 밖에 시선집으로는 『지리산 뻐꾹새』『들꽃세상』『별 아래 잠든 시인』『여승』『한국 대표시인 101인 선집-송수권』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다시 산문(山門)에 기대어』『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남도역사기행』『아내의 맨발』등과, 비평집으로 『송수권 시 깊이 읽기』『사랑의 몸시학』『그대, 그리운 날의 시』등, 그리고 장편동화집으로『옹달샘 꽃누름』 등이 있다.
작품감상: 나팔꽃은 어렸을 적, 집 울타리나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흔한 꽃입니다. 아침마다 방긋 웃는 아기처럼 연보라빛 미소를 머금고 있는 꽃을 보면 하루가 청명하고 밝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 꽃을 시인은 ‘두세 개의 종’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바지랑대가 없어도 그 한계를 스스로 긋지 않는 나팔꽃의 생명력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더군다나 송수권 시인이 저와 동향이시고, 저의 어머니쪽 친척이라는 말씀도 들었었는데 만나 뵌 적이 없어서 아쉬웠었습니다. 오늘 작품을 올리면서 2016년에 타계하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삼가 시인의 명복을 빌면서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소개해 올립니다.
첫댓글 아침에 종처럼 피어나는 나팔꽃과 덩굴손. 덩굴손이 기대어 올라가는 바지랑대. 고향 앞마당이 떠으르게 합니다. 바지랑대를 타고 올라가는 덩굴손과 보라색 나팔꽃이 눈에 선 합니다. 나팔꽃의 생명력과 우리의 삶을 생각하시면서 쓰신 것 같습니다.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친척이기에 더 가깝게 다가온 송수권 시인이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 많이 본 나팔꽃입니다. 나팔꽃이 줄기 타고 허공을 올라갑니다. 거기가 끝인 줄 알았더니 두 뺨은 또 자라서 꼬여 있습니다. 나팔꽃을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진분홍, 연보라 나팔꽃을 떠 올려 봅니다. 나팔에서, 종에서 동요가 들립니다. 옛 기억이 떠 오르고 그 시절로 돌아가는 좋은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네! 선생님들도 나팔꽃에 대한 추억이 많으시군요!
여리여리한 꽃이지만 우리들에게 주는 정서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