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을 갖추었으되 동풍(東風)이 없구나
이튿날 술에서 깨어난 조조도
유복을 죽인 일을 후회하여 마지않았다.
유복의 아들 유희가
부친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자 울며 말했다.
"내가 어제 그만 술에 취해 죄 없는 너의 아버님을 죽였다.
실로 뉘우쳐도 어찌할 길이 없구나.
다만 장례라도 삼공의 예로 후하게 치르려 하니
부디 내 정성을 물리치지 말아다오."
그리고는 군사를 뽑아 운구에 호위로 붙여 주며
그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그날로 유희를 돌려보냈다.
유복의 죽음으로 침울해진 군중의 분위기가
그 유자에 대한 조조의 뉘우침 가득한 사죄와 이례적일 만큼
후한 장례로 좀 가라앉은 다음날이었다.
☆☆☆
수군 도독인 모개와 우금이 조조의 장막을 찾아 말했다.
"크고 작은 배들에 실을 것은 다 갖춰 실었고,
또 쇠고리로 연결하여 그 위에 널빤지를 까는 일도 마쳤습니다.
깃발이며 싸움에 쓰이는 기구들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채비를 해두었으니
바라건대 승상께서 한 번 살펴보시고 곧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말하자면 싸움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해보자는 뜻이었다.
조조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날로 진병을 앞둔 조련을 해보기로 했다.
조조는 수군 한가운데 자리잡은 큰 배 위에 올라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영을 내렸다.
"물에서 싸우는 군사와 뭍에서 싸우는 군사는
각기 다섯 가지 색을 가진 깃발로 표시를 삼는다.
수군의 가운데 부대는
누른 기를 쓰며 모개와 우금이 이끈다.
수군 전군은 붉은 기를 쓰며
장합이 이끌고 후군은 검은 기를 달아 여건이 이끈다.
좌군은 푸른 기를 달아 문빙이 이끌며
우군은 흰 기를 달아 여통이 이끈다.
또 마보군의 앞장은 붉은 기를 쓰며
서황이 이끌도록 하고 뒤는 검은 기를 쓰며 이전이 이끈다.
왼쪽은 푸른 기를 쓰며 악진이 맡고,
오른쪽은 흰 기를 쓰며 하후연이 맡는다.
물과 뭍 양길의 변화를 맡아 적응하는 일은 하후돈과 조홍이 맡고
군진을 오가며 싸움을 감독하는 일은 허저와 장료가 맡도록 하라!"
이어 조조는 나머지 장수들에게도
각기 군사를 나누어주며 그들이 있을 곳을 정해 주었다.
조련에서뿐만 아니라 정말로 싸울 때의 배치이기도 했다.
이윽고 조조의 군령이 끝나자
대군은 그 동안 머물렀던 진채를 떠나 조련으로 들어갔다.
수채에 북소리 세 번이 크게 울리며
크고 작은 싸움배가 길을 나누어 진문을 빠져나가는데
조조가 보기에도 자못 법도가 있었다.
거기다가 조조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방통이 일러준 연환계의 효험이었다.
마침 서북풍이 심하게 불었으나 몇십 척씩 쇠사슬로 묶어 둔 조조의 배들은
돛을 있는 대로 다 올려도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게 마치 평지를 달리듯 했다.
배 멀미에 시달리지 않게 되자
군사들도 원래의 용맹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뛰고 내달으며
창을 내지러 보기도 하고 칼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앞 뒤 좌우 기치들도 그 날 따라 더욱 정연해 보였다.
쇠사슬로 엮지 않은 50여 척의 작은 배는
그런 조조군의 선단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때로는 그 지나치게 나아감을 말리고 때로는 뒤 처짐을 몰아댔다.
장대 위에 높이 앉아 그 모든 조련 광경을 보고 있던 조조는 매우 흡족했다.
그대로 간다면 싸움은 이겨 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속으로 기뻐하며 조련을 그치게 했다.
"모든 배들은 돛을 내리고 수채로 돌아가도록 하라!"
그러자 배들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차례에 맞추어 수채로 되돌아갔다.
☆☆☆
배를 내려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간 조조는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지 못해 여럿을 둘러보며 감탄의 말을 했다.
"만약 하늘이 돕는 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봉추의 묘한 계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쇠사슬로 배를 엮어 놓으니 과연 험한 강을 건너는 게 평지를 지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대들은 어찌 보았는가?"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모두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오직 정욱이 나서 걱정하는 소리를 했다.
"배들을 모두 얽어 놓아 흔들림이 없어진 것은 실로 좋은 일이나,
저쪽에서 화공을 쓴다면 피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대한 방비를 해두셔야 할 것입니다."
"공의 헤아림이 비록 멀리까지 미쳐 있기는 하나,
그래도 아직 미치지 못한 곳이 있는 듯하오."
조조가 껄껄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
그 자리에 있던 순유가
영문 몰라하는 눈길로 조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중덕이 매우 옳은 말을 하고 있는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웃으십니까?"
순유도 실은 마음속으로 정욱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조조는 한 번 더 껄껄거리더니
타이르듯 까닭을 일러주었다.
"무릇 화공이란 반드시 바람의 힘을 빌려야 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은 한 겨울이라 오직 서북풍이 있을 뿐 동풍이나 남풍이 있을 리 없소.
나는 서북쪽에 있고 적군은 남쪽 언덕에 있으니
설령 적이 불을 쓴다 해도 자기 군사들만 태워 죽일 뿐이란 말이오.
그러니 그 같은 화공을 내가 왜 두려워하겠소?
만약 지금이 시월이거나 초봄만 같아도 나는 벌써 거기에 대비했을 것이오."
정욱과 순유는 물론
속으로 은근히 걱정했던 다른 장수들도 그 말을 듣고는 모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일제히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승상의 높은 안목은 실로 저희가 따를 수 없습니다."
조조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한 번 더 방통의 계책을 추켜세웠다.
"나는 청주병은 물론 서주에서 온 군사나 연, 대에서 온 군사들은
모두 배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번에 연환계를 얻지 못했던들
무슨 수로 이 대강의 거칠고 험함을 이겨내어 건너겠느냐?"
그러자 문득 두 장수가 반열에서 뛰쳐나오며 소리쳐 대꾸했다.
"저희들은 비록 유주와 연 땅에서 왔으나 배를 잘 몰 줄 압니다.
바라건대 저희들에게 순선 스무 척만 내려주십시오.
바로 북강구로 짓쳐 들어가
적군의 북과 기치를 빼앗아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편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북군도 배를 잘 부린다는 것을 보여주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한편은 놀라고 한편은 기특해 그들을 바로 보니
다름 아닌 초촉과 장남이었다.
원래 원소 밑에 있다가 항복해온 장수들로
이 기회에 한 번 공을 세워 보고자 나선 것이었다.
조조가 그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북방에서 자란 사람들이라
방금 한 말과 같이 배를 잘 부릴 수 있을지 걱정된다.
강남의 군사들은 물위를 오가며 오래 조련을 받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수전(水戰)에 날래다.
귀한 목숨을 아이들 장난하듯 가볍게 내걸지 말라."
"만약 저희들이 이기지 못한다면
군법에 따라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조조의 말에 더욱 오기가 솟는지
초촉과 장남이 고함치듯 한꺼번에 대답했다.
"싸움배는 이미 모두 쇠사슬로 얽어 놓았고,
오직 작은 배가 몇 척 남아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기껏해야 군사 20명을 태울 수 있을 뿐인데
그런 배 몇 척으로 어찌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못 미더운지 조조가
한 번 더 초촉과 장남을 말렸다.
이번에는 초촉이 홀로 나서서 부득부득 졸랐다.
"만약 큰배를 이끌고 가서 이긴다면 그게 무슨 별난 일이 되겠습니까?
부디 작은 배 스무남은 척만 저희들에게 빌려주십시오.
저와 장남이 반씩 나누어 이끌고 오늘로 강남의 수채를 들이쳐
적장의 목을 베고 그 기치를 빼앗아 돌아오겠습니다."
그제야 조조도 한 번 해볼 만하다 생각이 들었던지 그들의 원을 들어주었다.
"좋다. 그대들에게 배 스무 척과 날랜 군사 5백을 내주겠다.
모두 긴창과 강한 쇠뇌를 지닌 군사들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떠나는 것은 내일 날이 밝은 뒤라야 한다.
수채에 있는 큰배들이 강으로 나가 멀리서 뒤를 받칠 뿐만 아니라
문빙에게도 따로 배 서른 척을 주어 그대들이 돌아오는 걸 맞아들이게 하리라."
조조의 허락이 떨어지자
초촉과 장남은 기쁜 얼굴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