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 입는 방탄조끼<일요칼럼>
해마다 이맘때면 다시 꺼내 입는 옷이 한 벌 있다. 가지런히 선반 위에 개어 두었던 여기저기 파편 자국이 낭자한 옷을 탈탈 털어서 어깨 위에 걸치고 단추를 채운다. 한 해를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관계가 만들어 놓은 상흔들을 치유 받고 싶은 까닭이다.
그러니까 5년도 넘은 이야기다. 서울 어느 교회에서 이맘때에 늦은 집회를 하고 있었다. 해외 생활을 오래 하고 있던 분이 다가와서 상담을 신청했다.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무슨 기쁜 일이 있어 이야기를 좀 하자 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기의 속상한 일이나 맘 아픈 일 좀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은 무슨 상처가 있어서 자기 담임목사도 아닌 내게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것일까?”하는 엉뚱한 기대로 그분과 마주 앉았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결국 이야기의 중심 주제어는 “상처”였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 기대하고 존경했던 목사에게서 받은 상처, 가족들에게서 받은 상처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당했던 오발탄이 만들어 낸 상처까지 그분의 이야기를 모두 듣자면 밤을 꼬빡 새도 모자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내가 그분에게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생생하고 잊히지 않는 이야기는 여운이 긴 그분의 마지막 말이었다.
“목사님, 그래도 저는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모든 공격과 인생의 오발탄에서 저 자신을 지키는 영혼의 방탄조끼가 한 벌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내게 상처를 주어도 죽을 만큼은 힘들지 않습니다.”
굳이 그분이 그 방탄조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랬다. 방탄조끼가 어찌 그분에게만 필요하겠는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이 방탄조끼 아닌가? 우리의 인생은 치열한 전쟁터와 마찬가지다. 자칫 한눈팔다가는 언제 총알이 날아와 우리 이마에 박힐지 모른다. 꼭 내가 맞아야 할 총알도 아닌데 누군가 막 난사한 묻지 마 산탄에 맞을 경우는 더 억울하고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전쟁터고 삶이 버거운 각축장인 것을….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여기서 “애매히”라는 말은 헬라어 “아이디코(ἀδίκως)”로 “부당하게 혹은 불의하게”란 뜻이다. 합당한 고난이면 억울할 게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부당한 고난을 받으면 많이 속이 상하고 억울하며 때론 갚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억울함을 다 아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혼의 방탄조끼를 입은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웃어넘길 수 있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걸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장점이 무엇이겠는가?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성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일부분이다. 괴로운 경험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까닭이다. 시련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을 아는 것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계신다.”(행적, 524)
애매한 고난은 우리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런 일을 믿음으로 대처할 줄 아는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의 주님을 할 걸음 한 걸음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팟캐스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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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2)---
http://file.ssenhosting.com/data1/chunsd/221218.mp3